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0)
39영웅의 위기
검을 얻기 위해.
나는 그를 버렸고.
그럼으로써 인간임을 버림받았다.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모두 잃은 채.
그저 고독한 고통을 끝없이 헤매 왔다.
하지만 그를 찾음으로써 나는 구원받아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평화롭고도 행복한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만약 또다시 그를 잃게 된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돼 버릴까…?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10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왔던 그날의 꿈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쥔다.
어차피 지나간 과거.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나는, 뭘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불안감을 떨치고 아리스와 아침을 준비한 나는, 식사 도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동안 다녀올 곳이 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필요한 게 있다.”
단지, 그뿐일까?
이곳이 무척 외진 시골이기는 하다.
그래도 가끔 들르는 상단이 있기에 웬만한 물건은 구할 수 있는데 굳이 나가서 구해야 하는 물건, 혹은 일이란 무엇일까?
모르는 것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내게 있어 그가 하는 일이란 것은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니까.
“동행은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다.”
그것은 당연한 대답, 동행이 필요로 할 그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것을 묻고 아련한 실망을 느끼는 이유는 그를 따라가고 싶던 나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이유 모를 불안감 때문일까?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빨래를 준비하던 도중.
나는 그의 방문을 받았다.
“잠시 할 얘기가 있다.”
무엇 때문일까.
곧바로 출발하려는 듯 칠흑과 같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가벼운 배낭을 짊어진 채 방에 들어온 그는, 무뚝뚝하게 용건을 꺼냈다.
“네 검을, 잠시 빌리고 싶다.”
“알겠습니다.”
검…인가?
검사에게 검이란 생명 그 이상.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 받은 검이었고, 이미 검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에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꺼냈고, 내게 검을 받아 허리에 찬 그로부터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은 평범한 여행자의 것.
하지만 내게, 그것은 10년 만에 본…. 검사로서 그의 모습이었다.
보고 싶다.
저 검을 뽑아 든 그의 모습을.
저 검으로 펼쳐지는 그의 검술을.
눈으로가 아니라 검과 몸을 통해 직접 느껴 보고 싶다.
그것은 검사라면 벗어날 수 없는 욕망, 그러나 나는 그 숙명을 흘려 넘겼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검경을 깨우친 지금의 나는, ‘검’의 ‘욕망’에 빠진 ‘자신’의 ‘세상’을 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내가 원해도….
그 욕망을 충족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리스를 부탁하겠다.”
“…예.”
나는 가까스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을 듣는 순간.
찰나나마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한없이 차가운 눈에 무표정한 얼굴까지.
자상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였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다름을 알면서도, 어째서 나는 동요해 버린 걸까.
마치 그 걱정의 대상이, 내가 아닌 아리스인 것을 섭섭해하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눈에 들어온 것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보는 소녀.
그런 아리스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나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같이, 배웅해 드리겠어요?”
“…응.”
아직은 솔직하지 못한 소녀.
하지만 본심은 그를 따라가고 싶었음을 맞잡은 손의 온기가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리스와 손을 맞잡은 채, 나는 마을의 입구까지 그를 배웅 나갔다.
솔직히 더 멀리까지….
혹은 아예 끝까지 그를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투정임을 알기에, 나는 작별을 고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다릴게…요.”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멀어져 갔을 뿐.
무정하고 냉혹하게만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등이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흥.”
낮은 코웃음 소리를 흘린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실망을 숨긴 소녀.
…그래, 아리스는 아직 모르겠지.
나 또한 그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진실을 모른 채, 그를 냉혹하다 믿고 있었을 테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 원래 무정한 분은 아니니까요.”
“그런 거, 나랑 상관없잖아?”
냉담한 대답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헛된 자존심과 겉모습에 얽매여 본질을 놓치는 소녀의 모습이 10년 전의 나와 같았기에.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짊어진 업이 너무나 크고도 깊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군요.”
“…아냐.”
예상 못 한 사과에 당황한 걸까?
살며시 고개를 돌리는 아리스.
자존심 세지만, 결코 못되질 수는 없을, 그 순수한 모습에 나는 미소 지었다.
분명, 이 아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아리스는 10년 전의 내가 아니니까.
굳이 그날과 같은 일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자연히 그것을 알게 될 테니까.
“세레나는…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게 됐어?”
“글쎄요.”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자연히 떠오르는 것은 한 사내의 모습.
한없이 냉정하고 엄하게 대하면서도, 정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뚝뚝하며 죽음조차 넘어선 강함을 지니고 있던 감히 넘볼 엄두조차 나지 않던, 검사.
그러나 그 검사는 이미 10년 전에 사라졌음을 알기에, 나는 조금 아련히 웃었다.
“그저 우연이었지요. 하지만 그분에게는 필연 중 하나였을 뿐이고, 제게는 운명이었지요.”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선택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는, 단 하나의 구원이었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그때 이미 죽었을 테니까.
“…그래?”
내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리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10년 전의 일은 그와도 연관된 과거.
피비린내가 섞인 그때의 이야기를 어린 소녀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으니까.
조금은 삐친 듯한 아리스와 함께 집에 온 나는 평온하게 하루를 보냈다.
달라진 건 식사를 2인분만 준비한 것뿐.
나머지는 모든 것이 평소와 같은 나날.
그런데도 왠지 느껴지는 허전함에 나는 씁쓸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며칠이다.
며칠만 지나면 그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 따위를 느낄 이유는 없다.
갈수록 커지는 허전함과 이유 모를 불안감을 다스리며, 나는 그렇게 일상을 유지했다.
이 일상이야말로 10년간의 방황 끝에, 그에게 받은 나의 행복이었으니까.
그래, 그랬다.
적어도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이걸 어쩐다….”
“왜 그러시나요, 벤 씨?”
“아, 세레나 양.”
식료품을 살 겸 마을에 들렀을 때, 뭔가를 놓고 고심하는 벤을 만나 나는 살짝 의문을 느꼈다.
호탕하다고 할지.
단순하다고 할지.
어쨌든 시원한 면이 있는 벤은, 고심 같은 것과는 꽤 거리가 있는 이였다.
그런 그가 고민하는 문제란 무엇일까?
“하하, 그게… 요즘 도적이 극성이지 않습니까.”
“예, 정말 걱정이에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R. 라바일로서의 과거. 시골 처녀 세레나인 지금의 나는, 도적단을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더구나 마을 주변에 좀 수상한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서, 마침 마을에 들른 상인에게 검을 좀 샀습니다.”
“그러셨군요.”
…과연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타고난 체격은 우람하지만, 단지 그뿐.
벤의 몸에 단련의 흔적은 없었다.
미숙한 도적 한두 명 정도라면 모를까.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이상은 무리일 것이다.
“마침 남는 게 있어 헐값에 구하긴 했는데, 제가 검을 볼 줄 몰라서 너무 싸구려를 바가지 쓴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검을 좀 봐도 될까요?”
“세레나 양께서 말입니까?”
“예. 집안 사정으로, 검이라면 약간 보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 정도는 시골 처녀로서도 가능하다.
같은 마을의 주민인 이상, 약간의 도움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하. 세레나 양께서 봐주신다면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호탕하게 웃으며 검을 내미는 벤.
하지만 정작 그 검을 받아 들고도,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해 주지 못했다.
지식이나 안목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득히 어릴 때 모두 배웠고 적어도 검에 대한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확신하니까.
바로 그 뛰어난 안목이 나의 말문을 막고 있었다.
…이 검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별다른 특징 없는 평범한 철검.
그 자체는 분명 평범하다.
하지만 아직 어리던 풋내기가 어떤 검사의 유품으로 물려받은 후.
어둠의 산을 지배하던 요마 쿠르타를 베고, 남부 밀림의 공포인 12식인귀를 꺾고,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와 겨루며 10년간 사용해 온 검은 한 자루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이것이 여기에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검, 어디서 났다고 하셨죠?”
“마을에 들른 상인한테 구했습니다. 듣기로는 피가 묻은 채 수풀 속에 떨어져 있었다던데, 그게 찜찜해서 싸게 파는 거라고 했습니다.”
“피…라고요?”
“네. 사방에 도적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하더군요. 도적들의 시체는 수십 구가 넘는데, 다른 시체는 없었던 거로 봐서는 도적들끼리의 내분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도적, 이라고?
그래, 분명 그런 상황이라면 도적끼리 죽고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의 가정은 보통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만약 일반을 벗어난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일류를 넘어 검경을 깨달은 일당백의 검사의 흔적이라면 어떨까?
벤에게 검을 사고 돌아온 뒤에도 나는 상념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제대로 검을 휘두른다면 도적 따위에게 검을 잃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과연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10년 전 그날.
그는 죽었어야 당연했다.
그런 위기를 멀쩡하게 넘길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비록 목숨은 건졌을망정 그 몸에는 큰 후유증이 남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거동에 불편함을 느껴 하루의 대부분을 흔들의자에서 보내고, 가녀린 소녀에게도 밀려 쓰러질 만큼 쇠약해진 신체와 같은 후유증이.
아무리 검경을 깨우쳤어도 검이란 몸으로 펼치는 것.
그런 의미에서, 검사로서의 그는 이미 10년 전 죽은 셈이나 다름없다.
만약 그 몸으로 수십의 도적을 벴다면….
과연 그는 괜찮을까?
“세레나, 괜찮아?”
“…네?”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나빠.”
“아…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안 좋은 꿈을 꿔서요.”
“그래?”
고민에 빠져서 걱정을 드러내다니.
나답지 않은 실수다.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리스가 나를 걱정해 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에서 왠지 그가 떠오르기 때문일까?
그렇게 마음을 풀고 있던 탓에, 나는 이어진 아리스의 말에 흠칫하고 말았다.
“그 사람 말인데.”
“그분이 뭘, 말씀인가요?”
설마, 아리스도 뭔가 알게 된 걸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로 뭘 구하러 간 건지, 알아?”
“…아뇨, 그건 저도 몰라요.”
괜히 지레짐작해서 혼자 동요하다니.
스스로의 미숙함을 자책하면서도,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런 걸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만약 어디로 가셨는지 알았다면 당장 그곳으로 향했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럼, 언제 돌아올지는?”
“그건….”
아리스의 담담한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시리라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던 내게, 그 대답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지금쯤이면 돌아오는 중이겠지?”
“…네.”
하지만 아무리 불안하다 해도 소녀에게 내 걱정을 밝힐 수는 없기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 돌아오시는 중일 거예요.”
…부디, 이 말이 사실이 되기만을 기원하며.
복잡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애써 담담하게 저녁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머리를 풀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쉬고자 하는 몸과 달리 심란한 마음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내가 한 가닥 인기척을 느낀 것은, 그렇게 늦게까지 잠을 설치던 도중이었다.
그가 온 걸까?
급히 몸을 일으켰던 것도 한순간.
그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흐트러진 두 개의 낯선 기척에 나는 실망을 느꼈다.
반대로 나의 몸은 팽팽하게 긴장했다.
이 깊은 야밤중에, 낯선 방문객이라니,
어떻게 봐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상자에서 검을 꺼내 들고 문가로 다가간 나는 귀를 기울였다.
“뭐야, 동생 쪽이었나?”
“쯧, 잘못 찍었는데. 그래도 뭐, 동생 쪽도 나름대로 괜찮은데?”
“아니야. 그보다는 언니 쪽이 정말 끝내주는 미인이라니까?”
“쳇, 그럼 뭐 해. 어차피 두목 차지인데. 아니면… 우리가 먼저 맛 좀 볼까?”
“그러다 두목한테 걸리면 손가락 하나로는 안 끝날걸?”
“젠장. 아깝게시리…. 어쨌든 잡고 보자.”
“서두르지 말라고. 일단 동생이 붙잡힌 이상, 혼자 도망치진 못하겠지.”
도적…인가?
최근 주변에서 날뛰는 도적들.
그것이 이 침입자의 정체임을 깨닫고,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다.
놈들이 집에 침입하는 것은 물론, 아리스가 잡힐 때까지 눈치 못 채다니.
평화가 내 정신을 좀먹고 있었던 걸까?
뒤늦은 후회를 억지로 삼키며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놈들이 날 인식하기 전.
아리스를 인질로 이용할 생각조차 못 할 찰나에, 모든 걸 끝내야만 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며칠 전에 이 근방에서 동지 수십 명이 몰살당한 거 몰라?”
“뭐? 무슨 토벌대라도 뜬 거야?”
“아니, 듣기로는 겨우 한 명한테 당한 거라던데.”
“하, 한 명? 무슨 검자나 신관 전사라도 뜬 거야?”
“글쎄. 죽였다든가, 생포했다든가, 도망쳤다든가… 워낙 소문이 많아서.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짜 그런 괴물이라면 부두목도 죽었겠지.”
호흡이 멈추며, 몸이 굳었다.
한 명에게 수십의 도적이 당했다.
게다가 시체 더미에 떨어져 있던 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나 이들에게는 더 알아낼 게 없다.
그렇다면… 다른 도적을 찾아가면 된다.
이들보다, 더 높은 지위의 도적을.
그리고 지금 이 문 너머에는, 도적단의 두목에게 나를 데려다줄 줄 수 있는 안내자가 있다.
생각을 정리하기를 잠시.
나는 검대를 조정해 허벅지에 둘렀다.
그리고 긴 원피스로 검을 숨긴 뒤, 조용히 문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저희 집을 방문하셨나요?”
“어?”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두 사내.
그들은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도끼와 칼을 뽑아 들었다.
“이봐, 아가씨.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그래, 조용히만 있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날 테니까 말이야.”
그것은 명백한 거짓.
욕망으로 가득한 눈만 봐도 속내를 읽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골 처녀 세레나니까.
“뭘 원하시는 거죠?”
“아, 별건 아니고… 아가씨가 잠깐 우릴 따라와 주기만 하면 돼.”
“이왕이면 순순히 따라오라고. 그래야 아가씨 동생이 다치지 않을 테니까.”
약이라도 쓴 것인지 축 늘어진 소녀의 목에 칼을 대는 도적.
비열하고, 천박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따라야 한다.
아리스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따르죠. 대신,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거나, 제 몸을 함부로 건드린다면 죽더라도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겠어요.
“…아, 그건 걱정 말라고.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가씨니까.”
“이런 덜 여문 계집애는 두목 취향이 아니거든.”
내 말에 조금 주춤하길 잠시.
두 도적은 내게 약을 먹이고 손목을 묶어 밖에 있던 말에 태웠다.
아리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도적들이 마을까지 들어왔다면, 차라리 함께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
약에 잠재워진 채, 말로 달리기를 사흘.
마침내 도적들의 본거지에 도착한 뒤.
나는 아리스와 함께 감옥에 넣어졌다.
조잡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튼튼한 철창으로 만들어진 감옥.
한낱 산적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딘가의 버려진 초소를 본거지로 삼은 거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직접 만든 것이라면….
“…어떻게, 된… 거야?”
“정신이 들었군요.”
사흘 내내 약으로 잠들어 있던 아리스.
그녀가 흐릿하게나마 의식을 차리자 나는 안도했다.
제대로 된 용법도 모르는지 도적들은 약물을 너무 과하게 썼다.
내성이 있는 나조차 부담을 느꼈을 만큼.
하물며 연약한 아리스가 버티기 힘들었던 것이 당연하다.
“…내가, 짐이 됐지?”
“아니요. 그럴 리가요.”
“…미안해.”
열로 약간 얼굴이 붉어진 아리스의 사과에 나는 고통을 느꼈다.
마음을 찔러 오는 것은 날카로운 죄책감.
그에게 아리스를 부탁받고도 이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아니,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억지웃음으로 죄책감을 가리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이 아이를 당장 구해 줄 수 있음에도 일부러 방치하다니, 그것은 자상한 시골 처녀가 할 일도 명예로운 검사가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적어도, 놈들에게 그 일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봐, 비키라고.”
“부, 부두목. 이러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엉?”
드디어 시작인가.
시끄러운 소음이 통로를 울리며 두 문지기를 제치고 나타난 거한을 보며,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자, 얼마나 예쁜 계집이기에… 꿀꺽!”
갑자기 목이 막히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는 거한에게 두 문지기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부두목.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목이 아시면….”
“시끄러!”
퍼억!
한주먹에 허공을 날아가는 문지기.
범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괴력.
거기에 약간의 기술만 받쳐 준다면, 능히 일류 검사와도 겨룰 수 있을 강골.
“모두 입 닥치고 있어. 누구 하나라도 두목한테 꼰지르면 죽는 거야. 알겠어?”
“그, 저, 저… 아, 알겠습니다.”
남은 한 명의 문지기가 뒤로 물러나자 거침없이 철창을 열고 들어온 거한에게,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호, 날 보면 웬만한 사내도 덜덜 떠는데… 여자치고는 간이 크군.”
조금 뜻밖이라는 듯 기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길 잠시.
거한은 가슴을 크게 젖히며 팔짱을 꼈다.
“난 크루거다. 이 스네이크 도적단의 부두목이지. 간단히 말하면 이인자랄까, 크후후.”
이인자인가.
내가 기다리던 두목은 아니다.
그래도 몇 가지 묻기에는 충분한 직위.
“그렇다면, 당신은 며칠 전 이 부근에서 도적 수십 명이 한 명한테 죽은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응? 뭐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크루거는 곧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밑의 녀석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나 본데, 마침 상대를 잘 골랐어. 내가 바로 거기 있던 장본인이니까.”
운이 좋다.
어쩌면 두목이라는 자보다, 더 많은 걸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이지 운이 없었지. 겨우 한 명쯤이야… 하고 달려들었다가, 그 한 놈의 검에 무려 34명이 죽었으니까. 50명 중 태반이 그렇게 갈 줄 몰랐거든. 하지만 놈에게 불행이었던 건,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거지.”
아무리 도적이라도, 50명이라면 기사라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완전무장 한 기사 몇 명은 필요한 숫자.
그중 태반을 홀로 죽인다는 것은, 최소 검경을 바라보는 일류 검사라는 뜻.
“조금 힘들긴 했지만, 결국 내 도끼를 막아 내지는 못했지. 그래도 내게 상처까지 입히다니. 제법 대단한 놈이었어.”
풀어헤친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것은 얕지만 한없이 날카롭고 예리한 검상.
절묘한 검술에 비해 얕은 상처.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일류 검사가 남길 만한 깊이가 아니었다.
근력이 몹시 부족한 노약자이거나.
몸에 어떤 지장이 없는 한은….
“비록 놓치긴 했지만, 독에 중독된 상태로 물에 빠졌으니 살아남기 힘들겠지. 설사 어떻게 살아남더라도, 그 반쯤 잘린 어깨로는 이제 검은커녕 스푼조차 들기 힘들걸?”
부르르.
움켜쥔 손으로 손톱이 파고들며 고통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는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가, 겨우 도적들에게 죽을 리가.
이딴 자에게 한 팔을 잃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코드 렐 스핀이라고 했던가? 내가 이름까지 기억해 주는 걸, 놈은 영광으로 알아야 할 거야.”
“……!”
거한의 입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이름이 요동치던 심장을 멈추게 했다.
상의를 벗은 거한이 바짝 다가올 때까지.
그 더러운 손이 몸을 더듬을 때까지….
나는 멈춰 있었다.
숨도, 심장도, 생각도, 마음도.
모든 것이 멈춘 정적 속에서 삐걱거리는 것은 하나의 톱니바퀴.
아아, 그래.
[삐걱. 삐걱]나는, 결국, 또.
[자물쇠에 서서히 금이 간다]그를…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콰직. 깨지는 자물쇠]그리고
[그리고]이제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돌아가선 안 될 톱니가, 움직인다]“당신이 그를 죽였다고 했지요?”
가슴을 더듬던 손을 내리며 히죽 웃음을 머금는 자.
“그래, 그랬지.”
더듬던 손이 치마로 파고드는 것을 방치한 채.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흐흐, 걱정 말라고. 뭐든 그 이상으로 돌려줄 테니.”
그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는 나의… 전부였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이제부터, 이해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나는 당신의 모든 걸 빼앗겠습니다.”
“이, 이건…?!”
허벅지를 더듬던 도중, 거한이 얼굴을 굳히며 물러났다.
그러나 채 한 걸음을 옮기기도 전.
허벅지의 검대에서 뽑아 든 검으로 그 목을 꿰뚫었다.
스스로가 당한 일을 믿기 힘든 듯, 두 눈을 부릅뜬 거한의 귓가에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당신이 해친 그가 창안해 낸 ‘홍염의 불꽃’. 당신의 목숨을 빼앗고, 당신의 가족을 죽이고, 당신의 조직을 부수고, 당신의 세상을 불태울 검입니다.”
“끄…르륵.”
경악하며 뻐끔거리던 입으로 더러운 피를 토하는 거한에게 검을 뽑아 그 목을 자른 순간.
나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해방됐음을 깨달았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마침내 검사라는 껍데기를 벗고.
진정한 본성을 드러낸.
한 마리의 미친 ‘검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