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1)
40악당의 위기
아아, 참으로 상쾌한 아침이로다.
오랜만에 좋은 기분으로 일어나, 나는 침대 밑의 짐을 점검했다.
모포, 의복, 건량, 기타 등등….
마지막으로 품 안의 상자를 꺼내 두 보물단지까지 확인한 나는 흐뭇한 심정으로 방을 나섰다.
“며칠 동안 다녀올 곳이 있다.”
즐거운 아침 식사 도중.
내가 말에 시선을 돌리는 계집과 녀석.
흐흐, 뜻밖이냐? 내가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필요한 게 있다.”
뭐가 필요하냐고?
네 녀석을 골로 보내 버릴 독약, 거기에 108가지 함정&암살 세트지.
악당이 영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법!
내가 지닌 숙련된 악당으로서의 기술.
그것을 활용할 도구들만 모두 갖춘다면, 아무리 이 녀석처럼 위험한 영웅이라도 충분히 저승으로 보낼 수 있다. 암, 그렇고말고.
문제는 하나, 이 녀석이 눈치채면 망한다는 것!
영웅의 눈치를 속이는 건 쉽지 않다.
그걸 위해 내 이틀 밤을 새워 가며, 213종의 ‘영웅 완전 공략 문답’을 준비해 놨지.
자아, 뭐든 물어봐라.
무엇이든 답해 주마.
완벽한 거짓말로 말이야, 큭큭.
내 예상대로, 녀석은 곧바로 질문을 이었다.
“동행은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다.”
켁. 내가 미쳤냐? 너 같은 걸 달고 암시장에 가게! 암시장을 통째로 쓸어버릴 것도 아니고!
그런 헛소리 말고, 좀 고난도의 유도신문을 해 보란 말이야.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녀석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수프와 빵을 다 먹고, 샐러드와 호박 절임을 비우고, 데모니레인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녀석은 그렇게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 50시간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겨우 2시간 동안 쪽잠만 자면서 감기는 눈에 후춧가루를 뿌리고, 암기장을 10장이나 씹어 삼키며 목숨 걸고 암기한 213종의 문답.
그중 대체 몇 개를 사용했는지 곱씹어 본 나는, 방에 들어와 또 한 병의 데모니레인을 원샷했다.
크윽, 이 원수 같은 놈, 끝까지 날 괴롭히는구나!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상황에도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법!
일단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다.
과정이야 어쨌든… 말이지. 빠드득!
절로 갈리는 치아를 애써 보존하고, 나는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원래 서두를 생각은 없었지만 속에서 열불이 나서 못 참겠다.
무엇보다 녀석은 신의 가호를 받은 영웅!
괜히 미적거리다가 천재지변으로 계획이 들통나기라도 했다가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일이 틀어지면 바로 튈 수 있게 등에 짐을 짊어진 채, 녀석을 찾아갔다.
“잠시 할 얘기가 있다.”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는 녀석.
준비한 용건을 꺼내기 위해, 나는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 하자. 가는 거다!
“네 검을, 잠시 빌리고 싶다.”
“알겠습니다.”
검사에게 검을 빌려주라니.
목숨을 달라는 것 이상의 말.
그 때문에 칼부림조차 각오했건만,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검을 빌려줬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짓이다. 대책을 준비해 뒀어도, 정말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무모한 짓이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계획의 일부니까.
아무리 완벽한 함정을 준비해도 놈은 기적을 일으키는 일류 영웅.
녀석을 잡으려면 검을 놓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검에 약간의 조작을 가해서 절체절명의 순간, 검이 분질러지게 하는 게 낫지.
그럼 자연히 빈틈이 드러나는 건 기본, 정신적 타격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으하하, 어떠냐. 이 완벽한 계획이!
“아리스를 부탁하겠다.”
“…예.”
예상보다 쉽게 녀석의 검을 빼앗아 만세라도 하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계집애의 얘기로 신경을 분산시켜서 나는 재빨리 집을 나섰다.
이로써 탈출 성공!
…근데, 이것들은 왜 따라오는 건데!?
당장 떼 버리고 여기서 도망치고 싶지만, 일을 서둘러 의심이라도 살 수는 없다.
보지 말자, 보지 말자.
만약 녀석이나 계집애와 눈이 마주치면?
통계상 76%의 확률로 변수가 발생, 재앙 덩어리가 따라붙게 된다!
숙련된 악당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1년이든 10년이든 참아 낼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그 끈질긴 인내심을 발휘해 앞만 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다릴게…요.”
무시하자, 무시.
혹시 녀석이 날 불러 세우지 않을까.
또는 무조건 따라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 하며 걷길 한 시간.
녀석을 떨어트린 것을 확신한 순간,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환희에 잠겼다.
크윽,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던가? 눈물 날 정도로 기쁘구나.
마음 같아서야 이대로 날라 버리고 싶다.
은퇴 자금은 이 상자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녀석을 뿌리칠 방법은 없다.
그토록 완벽하게 도피했건만, 10년 만에 날 찾아낸 녀석이니까.
결국 녀석을 떨쳐 낼 방법은 단 하나, 죽음뿐이란 거다.
내가 죽든 녀석이 죽든 말이다.
물론 죽는 건 녀석이 되겠지만.
좋아, 힘내자, 힘!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야 말 테다!
남은 편안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의욕을 바탕으로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일류 영웅 제거를 위한 숙련된 악당의 108 콤보 함정’을 점검, 수정, 보완했다.
끄응, 그나저나 이거 몸이 이래서야….
며칠 동안 걸음을 재촉한 덕분인지.
엉망으로 들쑤신 허리를 풀어 줄 겸, 나는 길옆에 흐르던 강가에 앉았다.
그리고 저무는 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역시 나이는 무시할 게 못 되는군.
몸 관리에 소홀했음을 반성하며, 나는 일단 저녁을 때우기 위해, 짐을 뒤적여 건량을 꺼냈다.
제기랄, 맛도 더럽게 없네.
숙련된 악당은 자고로 먹을 걸 가리지 않는 법.
하지만 그것도 젊은 시절의 이야기.
무쇠도 씹어 먹던 당시라면 모를까, 이 나이에 매끼를 건량으로 때우다니.
몸 상하기 딱 좋은 짓이었다.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하여튼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다!
내가 녀석에 대한 적개심을 활활 불태우며, 건량을 질근질근 씹을 때였다.
수면에 비치던 달이 흐려진 것은.
동시에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얼음물에 빠진 듯이 오싹한 감각.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깨닫기도 전.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촤악!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며, 흩뿌려진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부상.
그래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나는 재빨리 검을 뽑았다.
그리고 나를 기습한 놈을 확인했다.
밤처럼 검은 옷에 칠흑의 망토를 걸치고, 은은히 빛나는 두 자루의 장검을 쥔 채,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중년의 검객을 확인한 나는 침을 삼켰다.
…이런 맙소사!
“살아 있었나, 코드 렐 스핀?”
“물론. 네놈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으니까. 크렉 R. 스완.”
젠장, 이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기습 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코드 렐 스핀.
프리 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자 일류 중에서도 일류 수준에 도달했던, 검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진짜배기 검사.
심지어 기습당해 부상까지 입은 이상.
내 승산은 극히 낮다.
“어떻게 날 찾아냈지?”
“네놈이 내 이름을 마음껏 도용해 준 덕분에, 죽을 고비 서너 번을 넘기고 나니 자연스럽게 네놈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게 되더군.”
…망할.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시체를 쫓는 추적자는 없는 법.
그래서 나는 놈의 이름을 썼다.
흔적을 혼란시키기 딱 좋았으니까.
비록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었다고 한들, 놈을 쫓던 것은 바로 그 프리 나이츠.
십여 명이 넘는 일류 검사였다.
때문에 죽었다고 확신했던 놈인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아서 나를 추적해 올 줄이야….
“용케 살아남았군.”
“큭큭큭, 그야 당연하지. 내 평생을 바친 조직을 날려 버린 네놈에게 복수도 하기 전에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런 미친놈!
물론 내가 조금 일을 벌이기는 했다.
노후 자금 삼아서 공금을 빼돌리다가 그걸 자유파에 들키는 바람에, 놈에게 덮어씌워 내분을 일으켰으니까.
나중에 그게 발각되는 걸 피하려고 기사파를 홀랑 팔아먹기도 했으니.
놈의 입장에서는 날 찢어 죽이고 싶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목숨을 건졌으면 숨어 살아야지, 나 하나 죽이려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문제는 그 탓에 내가 죽게 됐다는 거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생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깨에 부상까지 입은 이상, 맞붙어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렇다면 무조건 튀는 게 상책.
문제는 어떻게 튀느냐 하는 건데….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어리석은 자. 자신의 그릇된 아집으로 조직을 잃고도 아직 반성하지 못했는가?”
“뭐…라고?”
멍하니 되묻는 놈을 향해 나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눈빛.
명색이 한 조직의 수장이었던 놈이다.
과연 이런 눈빛을 받고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네놈, 죽여 버리겠다!”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드는 놈.
그 기세는 그야말로 살기등등.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이 극도의 흥분 상태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절호의 빈틈!
퍼엉―!
“연막? 이런 비겁한…!”
행, 웃기시네.
댁이 언제부터 비겁을 따졌다고?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연막 속으로, 발목에서 뽑아낸 나이프 네 개를 주르륵 쏟아 냈다.
숙련된 도적이나 가능한 환상의 비도술!
뒤이어 크게 몸을 두 바퀴 회전하고,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내 귀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채쟁!
“큭, 이딴 잔재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듯싶더냐?!”
그야 당연히 불가능하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두 개의 나이프가 튕겨 나가고, 두 개의 나이프가 빗나간 것을.
그래, 네놈도 검경을 앞둔 일류 검사.
연막과 나이프에 당할 상대는 아니지.
하지만 일류 검사 나으리.
도주하기에 일분일초도 아까운 내가, 제자리에서 두 바퀴나 회전한 이유는 대체 뭘까? 큭큭큭.
까―앙!
“컥!”
아자!
묵직한 금속음의 뒤를 잇는 놈의 신음성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쾌속한 비도를 막느라 이완된 근육.
그 상태에서 갑자기 무거운 투척물.
요컨대, 원심력으로 던진 검을 쳐 내면?
일류 검사라도 손목이 나갈 수밖에 없다.
비록 그 덕분에 비무장 상태가 돼 버리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짐이 없는 만큼 도주 속도는 더욱 빨라지는 법!
“크아악!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크렉 R. 스완!”
미안한데, 난 그런 거 모르거든?
정정당당이 좋으면 너나 하라고, 크하핫!
백전연마한 도주술을 적극 활용해 놈을 떨쳐 낸 나는 계속 도망쳤다.
그리고 새벽녘에야 도주를 멈췄다.
물론 이 늙은 몸으로 반나절 동안 질주를 했다면 심장이 멈췄겠지만, 도주와 질주는 이음동의어가 아니란 말씀.
도망치면서 흔적을 지우고.
가짜 흔적을 남겨 혼란을 일으키고.
간단한 함정으로 피로를 쌓이게 하며.
지름길을 이용함으로써 시간을 버는 등.
오직 숙련된 악당에게만 가능한 72계의 도주술을 터득한 나를 과연 누가 잡을 수 있을쏘냐! 음하핫!
나뭇가지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나는 문뜩 허기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건량도 제대로 못 먹었다.
그 상태로 밤새 도망 다녔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쩝, 물도 없이 건량을 먹어야 하나. 이러다 정말 속 버리는데… 응?
짐을 뒤적이며 건량을 찾던 나는 문뜩 손이 휑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밑부분이 날카로운 것으로 쫙 베여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배낭을.
아하, 어째 몸이 가볍다 싶더니.
기습을 당할 때 배낭이 베어졌군.
배낭이 없었으면 팔이 날아갔겠지?
천만다행이군, 천만다행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으아악!!
빈 배낭을 털털 뒤집으며 발악한 끝에, 먼지만 뒤집어쓴 나는 절망했다.
이 안에는 원래 내 유일무이한 희망이요, 행복인 두 보물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냥, 잃어버리다니―!!
머리를 잡고 지랄발광을 하다가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한 끝에,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진정하자,
어쨌든 목숨은 건졌다. 돈이 아무리 소중해도 목숨보다는…. 크윽,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끄으응, 않…으니까.
젠장, 그래도 그게 대체 어떤 물건인데!!
뿌드득뿌드득 이를 갈기를 한참.
나는 조심스럽게 길을 되짚어 갔다.
마음 같아서야 허겁지겁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라면 끈기, 인내, 노력의 삼박자를 두루 갖춰야 하는 법!
만약 그 찰거머리 새끼랑 마주치면?
본전도 못 뽑고 인생 끝장난다.
절대 그럴 수 없지.
그렇게 조심조심 이동하길 하루.
놈과 격전을 벌였던 강가에 돌아온 나는, 그 ‘격전’의 흔적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건 웬 전쟁터라냐?
강가에 널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
뜻밖의 광경에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는 시체들을 조사해 보았다.
가볍다 못해 빈약한 갑옷.
반면 무겁고 예리한 각종 병장기.
하나같이 험상궂거나 야비한 인상이라….
아무래도 어딘가의 도적 형제들 같은데, 왜 여기 이렇게 널브러져 있대?
응? 잠깐, 이건… 혹시?
한 시체에서 X 자 모양의 검상을 본 뒤, 나는 다른 시체의 상처도 살펴보았다.
이 흔적은 모두 쌍검.
같은 검술, 한 명에게 당한 상처다.
홀로 수십 명을 벨 수 있는 일류 검사.
그중에서 이 근방에서 혼자 다니며 희귀한 쌍검술을 쓰는 놈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이게 웬 횡재냐?!
상황을 이해한 나는 쾌재를 불렀다.
물론 여기에 놈의 시체는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이라면 모를까.
내게 루프 향까지 섞인 연막을 맞은 상태로 수십 명이나 되는 도적과 싸웠다면, 십중팔구 놈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상태로 나를 쫓아다니지는 못하겠지.
안심하고 ‘그것’을 회수할 수 있단 말씀!
나는 희희낙락해 하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나절이나 강가를 뒤졌음에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나는 절망했다.
설마, 그놈이 주워 간 건가?
안 돼! 그게 어떤 물건인데…!
머리를 싸매고 좌절하던 도중, 나는 시체 더미 사이에 넙죽 엎드렸다.
“흐아… 이거, 정말 끔찍하잖아?”
“그게 아니라 대단한 거지. 겨우 한 명이 이렇게 만든 거니까.”
“젠장, 그게 끔찍한 게 아니면 뭔데? 이런 놈들만 있으면 대체 도적질은 어떻게 해 먹냐고.”
“뭐, 그래도 아주 얻은 게 없지는 않다는데? 놈이 가지고 있던 뭔가 귀한 걸 부두목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는데, 그걸 본 두목이 정말 대단한 보물이라고 감탄했다고 하더라고.”
“그거야 위쪽 사정이고, 결국 우리 같은 말단만 죽어나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자자, 구경은 그만하고 빨리 가자고. 어차피 내일이면 수레로 치우면서 실컷 보게 될 테니까.”
“쳇, 꼭 우리가 치워야 하나. 근처에서 주민 몇 명만 잡아 와서 치우게 하면 될 것을….”
순찰이라도 돌고 있었는지 적당히 강가를 둘러보고 떠난 두 도적.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번뜩였다.
그래, 아주 귀한 보물이라 이거지?
도적단의 두목이 그걸 얻었다니 실로 속 끓는 일이다.
숙련된 악당이라면 보물이 어디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물러날 수 없는 법!
나는 시체를 뒤져 무기를 찾았다.
검 네 자루, 방패 세 개, 사슬 갑옷, 비도 열세 자루 등등.
도적단치고는 꽤 질 좋은 무기들.
그렇게 만족할 만큼의 무장을 갖춘 뒤.
나는 조심스럽게 탐색에 들어갔다.
도적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면 놈들의 본거지가 이 근처라는 뜻.
그것만 알면 본거지를 찾아내는 것쯤, 숙련된 악당인 내게는 손쉬운 일이다.
내가 지은 비밀 기지만 몇 갠데. 암, 암.
그렇게 주변을 뒤지길 반나절.
나는 마침내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냈다.
수풀과 나무를 미로처럼 사용해 잘 가려 놓긴 했지만, 이 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보초는 넷.
입구는 잠겨 있고, 안쪽에 문지기 한 명이 따로 있다.
이상이 생기면 즉시 경보가 울리겠지?
잠시 계획을 정리해 본 뒤.
나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잘나신 영웅 나리들은 정면 돌파를 하든, 위장을 하든 간단히 성공하겠지.
하지만 나 같은 악당에게는 무리다.
대신 악당에게는 악당의 방법이 있지!
잠시간의 수색 끝에 원하는 것을 찾아낸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래, 이쯤에 있을 줄 알았지.
악의 기지에 비밀 통로는 필수다.
그래야 영웅이 왔을 때 보스가 도망칠 수 있으니까.
숙련된 악당의 경험을 통해, 그 출구를 찾아낸 나는 간단히 잠입에 성공했다.
좋아, 이제야 뭔가 좀 풀려 가는군.
조심스럽게 비밀 통로를 따라가길 잠시.
벽으로 위장돼 있던 비밀 문을 열고, 어떤 방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살폈다.
보자, 여기가 두목의 방인가?
도적단의 소굴치고는 제법 잘 꾸며진 넓고 깔끔한 방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3단 자물쇠가 걸린 특수합금의 철문, 금고처럼 완벽하게 방음 처리 된 벽, 거기에 ‘검은 강 암호문’으로 작성된 비밀문서 12장이라.
시골 도적단치곤 제법이군…이 아니야!
이런 빌어먹을?
이건 한낱 도적단에 있을 방이 아니다.
과거 사라진 ‘나이트 워커’ 정도는 돼야 갖출 수 있는 시설로, 그 용도는….
철컥.
컥!! 하필이면 이때!
두꺼운 철문에 걸려 있던 3중의 자물쇠.
그것이 풀리는 것을 본 나는 기겁했다.
그리고 비밀 통로로 다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막 비밀 문을 연 순간, 나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활짝 모습을 드러낸 비밀 통로.
그곳에는 ‘나 비밀 조직의 일원이다!’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듯,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형씨 한 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