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9)
68???
피, 시체, 사체, 골육, 수백의 시체가 쌓여 있는 죽음의 땅.
짙은 피비린내가 허공을 맴돌고 붉은 핏물이 냇물처럼 흐르는 처참한 대지 위에 ‘그것’은 주저앉아 있었다.
그 육신은 이미 엉망진창.
넓은 날개는 찢어져 하늘을 날지 못하고 단단한 비늘은 깨져 창검을 막을 수 없으며 극심한 출혈로 심장의 박동마저 느려진 ‘그것’은 이미 빈사 상태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그것’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한가득 쌓여 있는 시체 속에서 아직 살아남아 있는 한 인간의 존재가 ‘그것’의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너의 악인가?”
“KRR….”
무뚝뚝한 목소리의 인간 사내를 ‘그것’은 똑바로 바라보았다.
넝마처럼 뜯어진 가죽 갑옷을 입은 채.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시체의 것인지 구분도 안 되는 선혈로 전신을 물들이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의 인간. 그 인간이 자신 못지않게 엉망진창의 상태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만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것’을 마주 보며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수백 명을 먹어 치우고도 만족할 수 없는….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간을 보며 ‘그것’은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설사 신이나 악마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떤 힘이나 능력도 이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 깊고도 서늘한 눈은 알려 주고 있었다.
“너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KRARARARARA―!”
그 나지막한 선언과 함께 사내의 거친 손이 움직인 순간, ‘그것’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내지른 깊은 포효가 온 천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것’은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수축하는 가운데 ‘그것’은 파충류 특유의 기묘한 눈을 움직여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30년 전에는 피로 가득 물들어 있던 대지, 하지만 이곳에 더 이상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르륵 늘어선 수백 개의 무덤만이 30년 전 이 땅에서 죽어 간 인간들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KYARR….”
30년 전의 흔적들 둘러본 끝에 ‘그것’은 깊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과거에 입은 상처를 씻어 내는 데 30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라면 몰라도.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 보면 30년이란 너무나 긴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나 늦었다 생각했을 때야말로 가장 빠른 법.
‘그것’은 천천히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아 녹색 비늘이 번뜩이는 가운데 투명할 정도로 맑은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것은, 미세하게 등을 꿈틀거렸다.
촤악―!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싶은 순간, ‘그것’의 등 뒤로 넓게 펼쳐진 그림자. 그것은 박쥐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얇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날개였다.
그렇게 30년 전 찢어졌다가 회복된 그 날개를 좌우로 넓게 펼친 채 ‘그것’은 뒷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우웅―!
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란 몸이 거센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다.
오랜만에 회복된 날개의 성능을 시험해 보듯 한차례 허공을 맴돌던 ‘그것’은 이내 싸늘한 겨울바람을 타고 서쪽 하늘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자신이 부상을 입고 휴면에 접어들었을 때 이 땅에서 살아 나간, 단 한 명의 악당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