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8)
77마왕의 심정
“며칠 동안은 여기서 머문다.”
신기한 일이다. 그가 준 약을 달여 먹고, 하루 만에 몸이 완쾌된 것만이 아니다. 짐승조차 오지 않을 이 외딴 산속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게 신기한 것이다.
목재도 아닌 석재로 된 2층 높이의 주거지에, 측면에 작게나마 마련돼 있는 대장간까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듯, 노후된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이곳이 깊은 산속임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말끔한 편이었다. 누가 이런 깊은 산속에 이런 건물을 지은 걸까? 게다가 그는 어떻게 이런 장소를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여러 의문을 품고 대장간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무뚝뚝한 말을 듣고 눈을 깜박였다.
“세레나. ‘바위나무 장작’이 필요하다.”
바위나무 장작이라고?
바위나무는 의외로 찾아보기 쉽다. 그러나 너무 단단해서 가공하기 힘든 데다가, 어지간해서는 불에 타지도 않는다는 특성 탓에 거의 무용지물인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무용함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왜 바위나무 장작이 필요하다는 걸까?
“알겠습니다.”
무심코 꽈악 쥐어지는 주먹, 의문에 잠겨 있던 나와는 달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아름다운 음성이 내게 지독한 패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인정했잖아. 벌써 납득했잖아. 그냥 포기했잖아, 그러니까…. 추하게 몸부림치지는 말자. 헛될망정, 왕이었던 스스로의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아리스. 뒤뜰에 가서 ‘검은 벌레 풀’과 ‘눈물 흘리는 꽃잎’을 찾아와라.”
“알았어요.”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대장간을 나섰다.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됐기 때문인지, 집 뒤쪽의 오솔길은 온갖 풀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잡초 때문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세레나 R. 라바일.
고귀한 핏줄과 절세의 외모를 타고난 미인, 젊은 나이에 검에 경지에 이른 천재 검사, 용기와 상냥함을 두루 갖춘 영웅 중 영웅, 그리고… 나보다 많은 시간을 그와 보냈으며, 나보다 훨씬 더 그와 잘 어울리고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여인.
그와 세레나 사이에 내가 끼어들 자리 따위는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는 세레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욕심쟁이구나, 나는.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다 일순 밝아진 시야를 느끼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산중에서 보기 드물게 넓고 평평한 땅, 보호받듯이 울창한 나무들에 싸여 있는 그곳에 환상처럼 펼쳐져 있는 꽃밭이, 나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아름답다.
순식간에 마음을 채워 드는 감정의 갈래 속에, 나는 서서히 꽃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검은색,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하얀색…. 모든 색을 모아 놓은 듯한 꽃의 무도회장.
꽃밭이라면 얼마든지 봐 왔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휘우웅―
산턱에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꽃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이 허공에 휘날린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향기에 취해 나는 꽃밭에 몸을 뉘였다.
무겁던 기분도, 복잡하던 심정도 머릿속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평안한 마음으로 꽃밭의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으며, 평온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꽃밭에서 누워 본 게 얼마 만일까? 그와 마을에서 생활할 때? 로드 오브 킹덤에서 머물 때?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
‘38녹수를 흘리는 자’를 죽이고 도망쳤을 때? 아니면 그보다 전이었을까? 이미 십수 년, 수십 년은 지난 듯한 까마득한 느낌.
아지랑이처럼 아련한 추억 속을 헤매던 나는 문뜩 눈을 떴다.
“누구야?”
꽃밭 저편의 수풀. 그 너머의 기척이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코드는 아니다. 세레나도 아니다.
이런 깊은 산속에 다른 인간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러니까 이 기척의 주인은 아마도….
뀌익, 뀌이익―!
역시, 예상이 적중했지만,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수풀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분명 짐승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크고, 무겁고, 사나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필이면 붉은 어금니 멧돼지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호랑이나 곰보다 위험한 야수, 특히 그 돌진력은 바위조차 깨부순다고 한다.
뀌이익!
두두두두두―!
울음소리를 토하던 멧돼지가 달려든 순간,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려 돌진을 피한다.
분명 빠르고 강한 움직이기는 하지만, 여태까지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온 내게 이런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공격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꽃밭을 벗어나 나무가 많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런 멧돼지쯤이야, 눈 감고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나는, 그 모든 계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더없이 아름답던 꽃밭 그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참혹한 흔적과 갈가리 찢어진 채 흩날리는 꽃의 잔해가, 내게 평안을 선사했던 꽃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잠든 분노를 이끌어 낸다.
한낱 짐승 따위가 감히―!!
“폭풍의 세이너스여. 나 그대의 이름을 부르니, 그대의 절망 여기에 실현될지어다!”
퍼엉!!
뀌이이익―!
다시 달려들려던 멧돼지의 몸에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바람의 탄환이 틀어박힌다. 비록 하찮은 약대급 마법이라도 멧돼지 따위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위력, 비명을 토하며 꽃밭 밖까지 튕긴 멧돼지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뀌익, 뀌이익―
쓰러진 채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멧돼지, 최소한 골절 이상의 타격을 입었음은 분명하지만, 나는 멧돼지를 이 정도로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강대한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나 그대의 힘을 원하는 자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의 분노, 영원불멸토록 꺼지지 않을 지옥의 겁화를 일으켜 내 적의 육신을 불태우고 영혼을 녹여 내리라!”
땅에 쓰러진 멧돼지를 향해 다가가며 오른팔에 타오르는 폭염의 사슬을 일으킨다. 이것은 대상을 완전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꽃, 멧돼지 따위에게는 과분한 중대급 마법이지만, 이 정도가 아니고서는 내 분이 풀리지 않는다.
“죽어 버려.”
뀌이익―!
짐승의 본능으로 죽음을 직감한 걸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멧돼지를 향해 오른손을 내뻗는다. 이제 불꽃을 쏘아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손가락을 튕기기 전 나는 뜻밖의 방해를 받고야 말았다.
뀌익, 뀌이익!
멧돼지가 부딪쳤던 나무, 그 뒤의 수풀에서 튀어나온 멧돼지들의 돌격을 나는 피할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럽거나, 빨랐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튀어나오는 즉시 불태워 버릴 준비를 해 뒀으니까.
그런데도 정작 멧돼지들이 내게 부딪쳐 올 때까지 내가 불꽃을 쏘아 내지 못한 이유는 그 멧돼지들의 크기 때문이었다. 고작 내 무릎에도 닿지 않을 정도, 더구나 돌격이란 것도, 비비는 수준이다 보니 당황스러워서 불꽃을 쏘아 내지도 못한 것이다.
새끼…인가?
발치에서 나를 밀어내기 위해 끙끙대는 세 마리의 새끼 멧돼지를 멍하니 보던 나는 문득 땅에 쓰러진 멧돼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뀌익. 뀌익, 뀌이익….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멧돼지는 새끼 멧돼지들을 향해 연신 울부짖고 있었다. 비록 짐승의 말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새끼 멧돼지들을 살려 보려는 노력임을 몰라볼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뭐야 이건?
새끼 멧돼지들에게 밀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손에 맺힌 불꽃의 사슬을 끄고 머리를 붙잡는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한 거야?
혼란과 상념이 소용돌이치며 땅에 무릎을 꿇는다.
아무리 사납다 한들 기껏해야 멧돼지, 일개 짐승에게 중대급 마법을 사용하려 하다니….
만약 불꽃을 그대로 쏘아 냈다면 멧돼지와 그 새끼들은 물론이고, 이 꽃밭까지 송두리째 불타 버렸을 것이다.
중대급 마법이라면, 서열 30위 내외의 상급 마법사들이나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 적어도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분풀이로 사용할 만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걸 모르지 않는 내가, 어째서?
두근.
그래. 내가 아니야. 마력이 원하고 있어.
…악마가… 마법을 사용하길 바라는 거야.
두근!!
심장에 담긴 마력이 요동치며 몸이 싸늘하게 식어 드는 가운데,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나의 영혼을 삼켜 든다.
흑마법.
악마의 힘과 함께, 그 사념까지 받아들이는 마법사라면 절대 써서는 안 되는 금주.
나는 마왕이라 불리던 위명을 과신하고 있었다.
72개의 주문에 머무르던 상태에서 81개의 주문을 발현할 정도의 흑마법으로 대악마 아르넬의 악의와 사념을 받아들여 놓고 나라면 멀쩡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니…
코드의 성력은 그 후유증을 억눌러 주었을 뿐…
모든 부작용을 씻어 냈다고 생각한 것은, 그야말로 착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아르넬은 분노와 폭염의 악마, 그 힘의 상징은 분노의 불꽃,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어 숲과 산을 태우고, 온 세상을 뒤덮어 버릴 폭염.
그 후유증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작아도 상관없다. 일단 분노를 하게 되면, 그것은 수십 수백 배로 증폭되어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돼 버리게 되는 것이 내가 아홉 개의 주문의 대가로 받은 저주.
“이럴… 수가.”
지금껏 별 탈이 없었던 것만 해도 기적이다. 그와 세레나가 항상 곁에 있었기에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위험했던 것이다.
만약 그나 세레나가 곁에 있을 때 분노해서 감정이 폭주했다면….
그 이유나 대상 따위는 상관없이, 보이는 모든 것을 폭염으로 날려 버렸을 것이다. 멧돼지에게 화풀이를 하려다, 꽃밭까지 통째로 불태워 버리려던 지금과 같이.
예를 들어 세레나가 감정을 고백했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분노를 느꼈다면…. 나는 즉시 세레나를 불태워 죽여 버렸을 것이다.
따다닥.
이가 가늘게 부딪치며, 몸이 딱딱하게 굳어 간다. 팔로 몸을 감싸고, 다리를 웅크려도, 몸을 뒤덮은 한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의문. 그녀의 시체를 앞에 두고, 나는 과연 후회했을까? 아니면, 혹시… 진심으로, 기뻐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다리를 건너 버렸고, 만약 다시 한번 폭주하게 된다면 이번처럼 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81주문을 이룬 나의 마력은 독보적, 역대 그 어떤 마술사도 이르지 못한 경지다.
이 강대한 마력이 폭주를 통해 증폭되기까지 한다면…
그 누구도 내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천검자라 불리는 세레나도, 지상 최강의 인간인 빙설관 레닌도, 그리고 그라 할지라도….
아… 그래, 그렇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자, 분노로써 강림하는 악마의 화신, 마의 정점에 도달한 궁극의 파괴자,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있어 공통된 적, 다른 어떠한 호칭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 그런 존재에게 허용된 유일한 칭호, 그것이….
바로 ‘마왕’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 아하하하!”
울부짖듯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뭐야, 이건….’ 이제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게 내 운명이야?’ 버렸던 과거가 또 다시 찾아온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어?’ 보다 잔혹하고 훨씬 더 끔찍하게.
‘마로서 태어났으니, 마로서 죽어야 해?’ 결코 벗어 버릴 수 없는 속박처럼.
‘나는 끝까지 ‘마왕’일 수밖에 없는 거야?!’ 나의 심장을 죄고 운명을 비튼다.
“흑… 흐어엉―!”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도 고통스러운 슬픔을 나는 결국 통곡으로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한없이 깊은 절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