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being mistaken for a soccer genius RAW novel - Chapter (138)
138. 어른 말을 잘 듣자 -4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네. 밤에 뭐한겨.”
“동영상 봤어.”
“···동영상? 밤에?”
“어.”
요가 매트 위에 다소곳이 앉아, 훈련 준비를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중.
굳이 굳이 옆자리에 매트를 펴고 앉은 로메로의 물음에 대답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메로가 이내 끄덕거린다.
“음. 그렇구나. 어쩐지 피곤해 보이더라.”
“···?”
“이해해. 근데, 너 여자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아, 동양은 문화가 달라서 그런가. 하긴 우리, 엄연히 미성년자니까.”
···뭐라는 거야.
자기만 아는 소리를 지껄이는 로메로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한창일 때지. 우리는. 나도 자주 보니까 괜찮아.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
“기쁘다. 우리, 이런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구나. 기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적당히 무시하기로 하고 스트레칭에나 집중한다.
왼 다리는 쭉 뻗고, 오른 다리는 접어 발뒤꿈치를 엉덩이 쪽에 대고.
허리가 말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늘어난 햄스트링이 아우성을 쳐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어젯밤, 잠을 잘 못잔 터라 스트레칭에 더욱 집중한다. 피곤하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다치기도 쉽다.
왜 잘 못 잤냐면, 늦게까지 경기 비디오를 돌려봤다.
초 단위로 쪼개가면서, 내 실수들을 메모해가면서. 늦은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눈 밑이 시커멓더라.
으음.
근데 사실 그것보다 오늘 유독 피곤한 원인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제저녁, 굉장히 어색한 자리에 불려 가 식사를 했었기 때문이다.
원래 갑자기 약속이 잡히면 에너지 소모가 심하게 되는 타입이라.
심지어 친한 사이도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어쨌거나, 에이전트님의 연락으로 나간 자리에서 만나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진 사람은 나폴리의 Kim이었다.
···사실 형이라 부르라고 했는데, 다음에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진 그냥 Kim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너무 친근해지면 다음에 만나서 복수할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질까 봐서.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하니까.
아무튼, 처음엔 엄청 깜짝 놀랐다.
팀 동료들을 제외하곤 이렇게 사적으로 연락해 온 선수가 처음이라, 날 보자고 한 게 맞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었다.
그랬더니 꼭 밥이라도 한 끼하고 싶다기에, 일단은 나갔다.
가면서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싶어서 메모장에 할 말들을 적어가기까지 했다.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을 게 뻔했으니까.
아예 처음 보는 사람이면 모를까, 딱 한 번 본 사이가 나는 더 어색하게 느껴지더라.
근데, 괜한 걱정이긴 했다.
물론 처음엔 되게 어색했는데, 결국 우리 둘 다 어쩔 수 없는 축구선수인지라.
축구 얘기를 하다 보니 준비해 간 메모장은 꺼내볼 새도 없었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음, 되게 많이 듣는 쪽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얘기는, 음.
중국에서의 이야기?
그 형, 아니 그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 터키에서 1년을 있었고 그 전엔 중국에 있었다고 했는데.
중국 시절 얘기를 듣다 보니 중국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국가대표에 대한 이야기도 스쳐 지나가듯 들었고.
제일 길게 나눴던 이야기는 역시 해외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땐 나도 말을 좀 많이 했는데, 아마 서로 가진 유일한 공감대여서 그랬던 것 같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하는데 좀 울컥하는 때가 꽤 있었다.
처음 해외에 나와서 적응하던 이야기를 듣는데, 옛날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다.
모든 게 무섭게만 느껴지던 그때의 나 말이다.
“···야.”
“응? 왜?”
“밥 먹을 때 말야.”
“밥?”
“포크 쓰는 거, 안 불편하냐.”
“포크가 안 불편하냐고?”
내 뜬금없는 질문에 로메로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하긴. 얘가 이해할 리가 없지.
“···아니다, 됐다.”
“뭐야, 갑자기. 포크가 불편하면 손으로 먹어. 난 가끔 그래.”
“···응.”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로메로에게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냥 뭐, 이런 정말 사소한 것들 말이다.
젓가락 대신 포크를 써야 되는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든가, 음식들이 죄다 느끼해서 매운 게 미친 듯이 땡긴다든가.
즐겨 듣는 노래, 즐겨 보는 티비 프로그램마저도 달라서 대화에 낄 수 없다든가.
결국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게 아닌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그 사소한 어려움들을 공유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왠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뭔가 위로라고 하면 되게 무거운 것들이 떠오르는데.
근데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내가 겪었던 걸 남도 똑같이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내가 겪은 어려움을 그 덩치 큰, 무서울 거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도 똑같이 겪었다는 게··· 내가 특별히 이상하거나 약해서 그런 걸 겪은 게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까.
그냥 그랬다.
물론 내겐 아빠도 있고, 지우도 있고. 어디 가서 맞을 일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든든한 선배들도 있고.
감독님이나 코치님처럼 배우고 따를 수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해외에 나와 생활하는 축구선수로서 같이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지금껏 없었으니까.
그냥 그랬다는 얘기였다.
“···”
···그러고 보니까 나, 한국에서 인기 되게 많다던데.
그냥 하는 소리겠지?
“···야.”
“응? 또 왜?”
“어제 본 거, 나폴리전 다시 본 거였어.”
“···어?”
“이상한 거 본 거 아니라고.”
슬슬 스트레칭을 마무리하고 일어나며, 그냥 넘어가려다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할 것 같아 로메로의 오해를 풀어준다.
그러자 로메로는 멍하니 날 올려다보더니, 이내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걸로 하자.”
“···”
그런 걸로 하긴 뭘 그런 걸로 하자는 거야.
하여튼 웃기는 녀석이 아닐 수 없다.
*
“신경 쓰지 마. 감독, 코치라고 해서 무조건 맞는 말만 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필드 위에서의 판단은 결국 선수가 하는 법이야.”
“···네.”
“나도 네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느꼈다면 불러서 얘기했겠지. 안 그러니. 해볼 만한 시도였어. 운이 좀 안 따라줬을 뿐이지.”
빈첸초 감독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매니저 룸에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이러고 있으니, 왠지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괜히 어색하다는 뜻이다.
“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한다만, 괜히 자신감 잃거나 그러지 마. 언제나 경기장에 들어서면, 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 만약 그게 틀렸다면 우리가 피드백해주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망설이거나, 의심할 필요도 없고.”
“네.”
빈첸초 감독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다.
훈련 때나 경기 땐 좀 무서워도, 평소엔 완전 다른 사람인 것처럼 온화한 분이라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도 아니시다.
그런데도 방금은 왠지 문을 노크하는데 조금 망설이게 됐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먼저 사과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 경기에서 감독님의 말씀이나, 코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내 멋대로 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감독님은 분명 상대의 템포에 말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러긴커녕 오히려 더 급하게 따라간 것.
코치님이 분명 덜 뛰면서 조절하라고 하셨는데, 무시한 채 더 뛰어버린 것.
솔직히 심한 욕을 먹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행동들이었는데, 감독님께선 오히려 내 어깨를 두드려주셔서 더 죄송했다.
“그래도, 뭔가 표정이 밝아서 좋네. 뭐 좋은 일 있어?”
“···네?”
“아니, 난 뭐 되게 의기소침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 좋아 보여서 말이야. 드디어 이어지기라도 한 거야?”
···이어지긴 뭐가 이어진다는 건지 잠시 이해를 못 했다가, 이내 이해를 하곤 입을 삐죽 내밀며 감독님에게 눈을 흘긴다.
그러자 감독님이 고개까지 젖히며 껄껄 웃으신다.
···좋은 분이라는 말, 취소할까.
“···그런 건 아니구요.”
“아쉽구만. 그럼?”
“그냥··· 조금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긴 한데, 진 경기에서 배울 게 더 많은 것 같다고 할까··· 다시 보니까 고쳐야 할 게 보여 가지고···”
“으음.”
껄껄 웃던 감독님이 이내 잔잔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잘못 했고 앞으로 다신 안 그러겠다는, 그저 잠깐 모면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진짜 깨달은 게 많았고 앞으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지고 나서 자신감이 생긴다니 말이다.
근데 진짜다.
세상일이라는 게 이렇게 뒤죽박죽이다.
“그래, 좋아.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복수해주자고. 홈에서 한 번 당했으니, 원정에서 두 배로 되갚아 줘야지.”
“네.”
“슬슬 가야지? 집에서 토끼 같은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토끼 같진 않아요.”
“토끼는 부정하고 여자친구는 부정하지 않네?”
···왜 항상 마무리는 이런 식일까.
짓궂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다른 선배들보다도 날 놀리는데 제일 진심인 게 감독님이다.
내가 곤란해하는 티를 내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하게 웃으시는데,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매니저 룸을 나서는 길.
따라 나오신 감독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씀하셨다.
“이젠 감독님 말 잘 듣겠다며.”
“···?”
“약속했지?”
“···예.”
“그럼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봐. 저기 광장 쪽 가면 꽃집이 많거든. 거기서 예쁜 백합 한 송이만 사서 툭 갖다 줘. 널 위해 준비했느니, 이런 괜한 소린 하지 말고. 그냥 툭.”
“···”
“장담할게. 티는 안 내도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 그런 거 하나가 1년은 간다.”
···난 또 무슨 진지한 조언을 해주시려나 하고 있었는데, 또 그 소리신가.
아니, 뭐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이런 코칭까지 다 따르겠다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
“그··· 축구 감독님이시잖아요.”
“응?”
“연애 감독이 아니라··· 축구 감독이요.”
축구 얘기는 들어도 그런 얘기는 필요 없다고 간곡히 돌려 말씀을 드리니, 감독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지안.”
“네?”
“너 여자친구 몇 명 사귀어 봤어.”
“···갑자기요?”
“그래. 몇 명 사귀어 봤냐고.”
“···안 사귀어 봤는데요.”
“그럼 내 말 들어. 필드 위에선 몰라도, 이쪽 세계에서 넌 아직 데뷔도 못 한 유망주야. 그에 비하면 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지. 그럼 어때. 말, 들어야겠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고 싶은데, 왠지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는 게 열 받는다.
“어른 말 들어. 어?”
“···”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든가. 아니잖아?”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매니저 룸을 나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몸을 돌려 걷는데 등 뒤로 끈질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잊지 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송이!”
어른 말 잘 듣기로 다짐한 게 불과 엊그제건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에휴, 모르겠다.
*
“···”
하, 진짜 미치겠네.
얼른 집에 가야 하는데, 왜 이리 발걸음을 망설이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못 보고 지나쳤으면 모를까.
평소엔 저기 있는 줄도 몰랐던, 존재감도 없던 작은 꽃집이 왜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거냔 말이다.
“···”
꽃을 줘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우한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하다.
왜냐면, 미친 짓이니까.
근데 사람은 가끔 그럴 때가 있나 보다.
미친 짓인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미친 짓이라 한번 해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때가.
···어른들 말 잘 듣기로 그렇게 다짐했는데 하루 만에 깰 수도 없고.
하긴, 그래.
이건 다른 문제가 아니라 내 다짐의 문제다.
그렇게 다짐해 놓고 하루 만에 말을 바꿔버리면, 앞으로도 계속 다짐을 어기게 되겠지.
말했잖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다짐을 깨는 것도 습관이 될 거란 말이다.
···뭐라고 하셨더라.
백합, 딱 한 송이라고 하셨었나.
“에이, 씨.”
괜히 머리를 벅벅 긁으며 꽃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송이는 안 될 것 같고, 두 송이 사야겠다.
그래서 아빠도 하나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 안 할 테니까 말이다.
와, 완전 좋은 생각이다.
어쩌면 난 이런 쪽에서 천재였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