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 도플갱어(2)
회색으로 물든 여명이 벨제뷔트를 겨눈다.
“감히!”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고성. 부릅뜬 눈과 감정의 폭발.
어쩌면 벨제뷔트 자신조차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느닷없는 분노.
“감히..라.”
그런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어쩐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명검을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기야 나나 벨제뷔트나 연기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놈들이다.
감정이 내비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절로 쓴웃음이 나오는 순간이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아르나드 남매에 대한 미련이라.. 참 복잡하게도 사는구나. 나라는 놈은.’
아무래도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을 미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단지 그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만으로, 복수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으로 검을 휘둘렀던 건지도 모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겠지만.
“데이브 클락!”
“그래, 나 맞으니까 그만 좀 불러!”
회색의 검강이 벨제뷔트를 향해 떨어진다.
그에 맞서는 벨제뷔트의 대검. 녀석의 검이 내 회심의 일격을 박살 낸다.
허망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의 결말이다.
“하..!”
하기야 상대는 무려 삼천 년의 시간을 버텨온 마왕이다.
반면, 나는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한들 마기 없이는 반쪽짜리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마왕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다.
“데이브!”
위기의 순간, 날아든 서리의 창이 벨제뷔트의 몸을 두드린다.
조금 전과는 달리 단 하나의 마법에 마력을 응축시킨 것 같은 모습이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지.’
하기야 제아무리 벨제뷔트라 한들 이런 상황에서까지 마법을 뺏을 수는 없을 거다.
특히나 저렇게 잘 정련된 마법이라면 더더욱.
“같잖은 짓을..!”
문제가 있다면 굳이 빼앗지 않아도 부수는 건 가능하다는 것.
얼음의 창이 벨제뷔트의 대검에 박살 난다.
화륵!
이어지는 것은 엘리아의 화살이다. 바람과 불꽃으로 소용돌이치는 화살.
나는 그 화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나는 엘리아가 화살을 쏘는 즉시 벨제뷔트의 검 끝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필시 저 화살 채로 나를 베어버리려는 거겠지.
그에게는 당연한 판단이었을 거다.
사실상 벨제뷔트에게 있어 엘리아의 화살은 그냥 걸리적거리는 장애물 수준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장애물도 이용하기 나름이지.’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일 엘리아의 일격.
그러나 나는 그것에서부터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었다.
‘내 눈으로 벨제뷔트의 검속을 쫓기는 힘들어. 하지만 화살의 궤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나는 엘리아의 화살을 기준으로 삼았다.
기준점이 있다면 적의 검을 간파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그랜드 크로스.”
즉, 조금 전과는 달리 반격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투웅!
벨제뷔트의 마기에 오러를 뒤섞어 되돌린다.
물론, 온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서로 간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쿨럭.”
그러나 중요한 건, 내가 벨제뷔트의 몸에 유의미한 상처를 입혔다는 점이다.
나는 가슴에 난 구멍을 감싸며 물러섰다.
튕겨냈는데도 이 정도라니 정말 징그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래, 인정하마. 네 힘은 지난 수백 년간 싸웠던 그 어떤 용사들보다도 강하다.”
심지어 내가 벨제뷔트에게 입힌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하기야 팔이 잘려도 바로 재생하는 놈이니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나저나 수백 년이라. 조금 언짢아지는 기준이다.
“수백 년은 조금 애매한데. 혹시 거기에 무형검 예이츠도 포함되어 있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대답해 줄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그럼 뭐 하는 수 없지.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네가 지금 속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너한테 말이냐?”
“아니, 연금술사를 말하는 거다.”
아마 처음부터 이 말을 꺼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거다.
벨제뷔트의 용사 혐오는 나 역시도 잘 아는 바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족이라는 족속은 결국 힘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니까.
“내 말을 믿기 힘든 건 알아. 하지만 의심 정도는 얼마든지 해볼 수 있잖아?”
“쓸데없는 충고다. 나는 원래 그놈들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그놈들의 물건을 아주 잘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반문에 입을 다무는 벨제뷔트.
표정을 보아하니 더 빈정거렸다간 사달이 나게 생겼다.
그냥 여기서 모든 진실을 말하는 게 좋을까?
“파라켈수스를 기억하나?”
“파라켈수스?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군.”
“그렇겠지. 클라리스 아르나드와 관련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들어주지도 않을 테니까.
벨제뷔트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마족 이외의 종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조르디네스가 전부였다.
사실상,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는 거다.
“그 누구도 믿지 마라. 연금술사도, 나도. 그리고 널 이곳으로 보낸 그 마족도.”
나는 벨제뷔트에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고 조언했다.
그와 동시에 딱딱하게 굳는 표정.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널 붙잡아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난 것 같군.”
보아하니 내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에 대해선 우선 보류해 두기로 한 것 같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일단 나를 잡고 나서 판단하겠다는 거겠지.
하기야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하다.
“반항하지 마라. 죽으면 네 영혼에게 물어야 할 테니.”
벨제뷔트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다시 한번 세계를 뒤덮는 어둠.
여명의 불빛은 이미 꺼져버렸다.
이 이상 공격을 받게 되면 나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거다.
“글쎄.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주춤거리지도 않은 채 그저 웃을 뿐이다.
“뭐라고?”
그런 내 모습에 의아해하는 벨제뷔트.
나는 말없이 그의 몸을 가리켰다.
다 타고 남은 장작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 몸을.
“네 몸이나 보고 그런 말을 해야지.”
“..젠장.”
그래, 상처가 나았건 아니건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저 분신을, 마왕의 그릇을 부수기엔 충분했으니까.
“그러게 좀 좋은 그릇을 쓰지 그랬어?”
“데이브 클락..!”
벨제뷔트가 나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린다.
사실, 조금 서운하긴 했다. 옛정을 생각해 나름대로 진심 어린 충고를 한 거였는데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어째 남 일 같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겉으로야 최강의 마왕이라 불리지만 그 속내는 남 좋을 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 또 보자. 벨제뷔트.”
물론, 나 자신에게 하는 동정만큼 서글픈 것도 없을 테지.
나는 무너져 가는 분신을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너!”
아무래도 역효과가 난 것 같지만.
* * *
니콜라스와 엘리아가 데이브의 전투에 합류한 상황.
홀로 남은 이브가 눈을 뜬다. 그녀의 옆에는 노드릭이 기절해 있다.
“한심하군.”
가진 힘을 전부 봉인 당해서일까.
일행 중 그 누구도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이미 붙잡은 포로에게 신경 쓰기엔 지나치게 긴박한 상황이다.
솔직히 이브는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생각도 들 테고.
“왔구나.”
그러나 그녀를 돕는 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검지로 입을 가린 채 그녀에게 다가가는 그림자.
그림자는 말없이 그녀의 구속을 풀어 등에 업었다.
“아저씨는 괜찮은 걸까요?”
“그래, 괜찮을 거야.”
그러던 중 니콜라스가 그들을 지나쳤으나 그중 누구도 그림자를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딱히 그들이 태만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브를 안전한 곳에 두고 오마. 전투의 여파가 미치면 위험할 테니까”
그도 그럴 게 그림자는 지금 드래곤 로드의 모습을.
조르디네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챙겼어야 하는데.”
“신경 쓸 필요 없다.”
물론, 니콜라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이브를 옮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적하기엔 조르디네스와의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았다.
솔직히 다른 일행들에게 있어 조르디네스에 대한 인식은 데이브의 지인이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일행 중 누구도 그림자가 이브를 데려가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 걸음은 이제 붙잡힌 카이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그림자를 멈춰 세우는 목소리.
소리를 따라 뒤돌아서면, 그곳에는 ‘진짜’ 조르디네스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인간 놈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째 발각된 것치고는 반응이 지나치게 태연하다.
그리고 조르디네스 역시 도망자를 보는 것치고는 무덤덤한 반응이었고.
“그런가?”
“네,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돌아서는 그림자. 그것의 얼굴은 어느새 노드릭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흡사하다는 수준을 넘어 완벽에 가까운 변신이다.
설령 그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한눈에 알아채긴 힘들겠지.
“흠.. 그렇군.”
아니나 다를까 조르디네스 역시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보진 못한 것 같았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치려는 그림자. 그런데 어째 그를 바라보는 카이란의 시선이 묘하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그 순간, 조르디네스의 부름에 뒤돌아서는 그.
그런데 어째 조르디네스의 눈이 심상치 않다.
혹시 들킨 건가?
“글쎄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잘..”
“내 눈 말이야. 신룡의 눈.”
“..네?”
“그 눈에는 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보이거든.”
젠장.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림자, ‘아담 체스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다.
그와 동시에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하는 조르디네스.
은빛의 거대한 용이 오연하게 그들을 내려본다.
쉬익.
그녀의 입가에 얼어붙은 안개가 일렁인다.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숨결.
“그런 가당치도 않은 짓으로 날 속이려 했더냐? 도플갱어!”
“미안하지만 난 도플갱어가 아니야. 드래곤 아줌마!”
노드릭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담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호기롭게 소리친 것치고는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바로 조금 전에 데이브로 인해 번개의 정령이 역소환되지 않았던가.
저항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이브. 금속의 정령을 소환할 순 없어요?”
“지금의 나는 무력하다. 안타깝지만 잡힐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젠장. 도움이 안 되네.”
심지어 믿었던 이브조차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래서야 두 사람을 구출해 내긴커녕 그까지도 붙잡혀 버릴 것 같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룡님?”
그런데 어째서일까. 조르디네스의 반응이 어딘가 묘하다.
그와 동시에 눈을 빛내는 카이란.
“아담. 지금이다. 도망쳐라.”
“카이란? 대체 뭘 한 건데요?”
“신룡과 교섭했다. 지금 도망치면 우리를 쫓을 수 없을 거야.”
신과 교섭했다고?
아담은 그 믿기 힘든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당황한 듯 멈춰선 조르디네스의 모습에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요. 카이란!”
“그런 말은 도망친 후에나 해라!”
그렇게 세 사람은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도망쳤다.
이어지는 적막.
“..신룡님?”
황망한 가운데, 조르디네스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