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 조별 과제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3)
심장이 아프다. 도대체 얼마를 달린 걸까.
“라나는 무사한 거겠지?”
엘레나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등을 기댄다.
다급히 짜내보는 피투성이의 로브.
아마 얼마 못 가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버리긴 할 거다.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이 이상한 세계에는 피 웅덩이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피를 짜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옷이 젖어서 너무 무거워..’
엘레나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간다.
전신을 훑어내리는 기묘한 한기.
고개를 들어보면 거대한 석상을 닮은 괴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활짝 펼쳐진 날개. 그리고 악마를 떠오르게 하는 얼굴.
“..가고일.”
참기 힘든 공포가 그녀를 덮쳐든다.
석상의 모습을 한 마수 가고일.
그 이름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던 건 언제였던가.
아마도 그녀의 짓궂은 유모가 저택 내의 석상에 대한 전설을 읊어 내렸던 이후겠지.
‘이 세계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어.’
아무리 학생이라도 마법사는 마법사인 모양이다. 순식간에 세계의 비밀을 꿰뚫은 그녀.
엘레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후..”
그런데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해서 없던 해결책이 나오겠는가.
심지어 가고일은 상급으로 분류된 마중에서도 골치가 아프기로 소문난 마수다.
고작해야 3서클에 불과한 그녀의 마법으로는 도저히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봐도 보통 가고일은 아닌 것 같은데.”
심지어 저 가고일은 엘레나의 상상력이 가미된 마수.
진짜 가고일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게 틀림없었다.
“서클 오브 워터!”
물의 고리가 가고일을 향해 날아간다.
공격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발을 묶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극적인 대처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일까.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서둘러 도망치려던 엘레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흘낏 뒤를 돌아보면 점점 더 거대하게 변해가는 가고일의 모습.
아무래도 엘레나의 마음속에 깃든 공포를 집어삼키며 크기를 부풀리고 있는 것 같다.
쿵!
구속이 풀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의 고리를 단숨에 부수고 엘레나의 앞에 내려선 가고일.
“아..”
그 모습은 더 이상 가고일이라 부를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머리와 붉게 물든 눈동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엘레나를 향해 일렁인다.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다가오는 죽음에 대비했다.
“개벽.”
그 순간, 엘레나를 구한 것은 한 줄기의 섬광이었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눈 부신 빛.
빛의 궤적이 가고일의 몸을 일도양단한다.
“라나!”
검을 든 소녀가 뒤돌아선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녀의 모습.
마음속에 가득했던 공포가 맑게 개는 것이 느껴진다.
라나가 먼지가 된 가고일을 짓밟으며 달려온다.
“다친 곳은 없어?”
“없어! 라나 너는?”
“괜찮아. 그보다는 내 손을 잡아. 이제 곧 무너질 거야.”
“무너지다니?”
무심코 질문한 엘레나였지만 사실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의 모습.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균열은 이내 세상 모든 곳을 향해 번져가고 있었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라나의 손을 붙잡았다.
바닥이 무너져 내린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꽉 잡아!”
“말 안 해도 그러고 있어!”
붉은 파도가 두 사람을 휩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계의 모습.
회전이 멈췄을 때. 두 사람은 대양 위에 서 있었다.
“여기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온 모양이야.”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을 바다라 부를 수는 없을 거다.
감히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웅덩이.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며, 석양으로 물든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떠다니는. 피의 바다.
“깊은 곳?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이 검이 알려주고 있어.”
엘레나의 질문에 라나가 성검을 들어 보였다.
성검 던 브레이커. 여신 아리벨이 꿈을 매개 삼아 구현한 가상의 성검이다.
“나는 지금부터 이 세계의 최심부로 갈 거야. 그곳에 아버지가 있거든.”
“..네 아버지가 이 일의 원흉이라는 건 아닐 테고, 왜 거기에 계신 건데?”
“그 원흉과 싸우다 봉인되셨어. 상대도 멀쩡하진 않은 것 같지만..문제가 커지기 전에 아버지를 구출해야 해.”
“구출하면 어떻게 되는데? 또 봉인되면 의미가 없는 거잖아.”
아마도 엘레나는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겠지.
그러나 마냥 부정하기엔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기도 했다.
물론 라나야 데이브를 믿고 있다지만 세상일에 절대라는 게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가야 해. 아버지 외에는 그 누구도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을 테니까.”
침묵 끝에 나온 대답. 잠시 라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믿을게. 사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도 하고.”
“가능하면 널 안전한 곳에 두고 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나도 알아. 솔직히 여기에 안전한 곳이 어디에 있겠어?”
라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짓다가 별안간 표정을 굳혔다.
시야 끝자락에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서다.
“아무래도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거 같아.”
“뭐가 오는 거야?”
“..우리 조원.”
라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거대한 크라켄에게 쫓기고 있는 네 명의 조원들이 보인다.
“..꼭 구해줘야 하는 거야? 솔직히 그러기 싫은데.”
“동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라나가 검 끝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며 흘러드는 마력. 그것을 본 엘레나의 눈에 경악이 스친다.
“라나 너 4서클이라고 했잖아?”
“그때는 그랬지.”
짧게 대답한 라나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흘러 나가는 것은 체인 라이트닝.
6서클의 마법이었다.
* * *
거대한 성의 외곽. 릴리스가 상처를 움켜쥔 채 걸음을 옮긴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과 충혈된 눈동자.
안 그래도 붉은 눈은 더더욱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쿨럭..”
죽은 피가 토해진다.
상처를 입은 곳이 팔과 다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 느닷없는 각혈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를 모습.
그러나 릴리스의 몸을 찌른 것이 심검임을 안다면 그 생각은 바뀔 것이다.
“..데이브 클락.”
역류하기 시작하는 피의 흐름과 마족의 권능으로도 낫지 않는 상처.
마치 육체가 의지를 품고 릴리스를 죽이려 드는 것 같다.
분명 지금의 그녀는 정신체일 텐데도 말이다.
“너는 누구지?”
본디 릴리스의 정신체를 상처 입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가 마왕 수준의 힘을 사용하거나 성검을 쓰는 용사가 아닌 이상, 본래라면 생채기 하나 입히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다.
릴리스로서는 그야말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다.
“왜 너에게서 익숙한 모습이 보이는 거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를 가장 당황하게 하는 건 이까짓 상처가 아니었다.
“마왕의 영혼을 닮았다고? 웃기는 소리..”
하기야 생각해 보면, 릴리스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부터가 안드로말리우스로부터 들었던 기묘한 말이 원인이긴 했다.
벨제뷔트와 유사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던 당대의 용사에 관한 이야기.
“..그건 유사한 정도가 아니었어.”
그러나 릴리스에게는. 마왕 벨제뷔트의 반려인 그녀에게는 조금 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더없이 분명했던 정신의 형태.
비록, 벨제고트가 죽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모습이지만..
“아무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릴리스의 몸이 미끄러져 내린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초췌하기 이를 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만큼은 유례없이 빛나고 있다.
* * *
황금빛 뇌전이 바다 위를 가로지른다.
순식간에 크라켄의 몸을 꿰뚫는 뇌전.
“체인 라이트닝이다!”
상아탑 학생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든다.
하기야 제아무리 마법 학부가 아니라고는 해도 그들 역시 상아탑의 학생.
마법을 알아볼 안목 정도는 있다는 거다.
그야 환호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교수님이 오셨나 봐!”
“살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물론 저 마법을 쓴 게 누구인지를 안다면 저렇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는 없을 거다.
하기야 지금이라고 해서 꼭 안전한 건 아니었지만.
“놈이 일어선다! 다들 꽉 잡아!”
학생들이 탄 배가 거친 풍랑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상하좌우로 수 미터에 달하는 진동.
아마 그들이 상아탑의 학생이 아니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격랑이다.
“그어어어어어!”
거대한 크라켄이 파도를 부수며 몸을 일으킨다.
분노한 눈동자가 날아드는 번개의 궤적을 쫓는다.
이윽고 멈춰선 눈동자.
“그래, 나도 만나서 반가워.”
그런데 뭐가 저렇게 빛나고 있는 거지?
크라켄의 눈이 하늘을 향해 움직인다.
“크르?”
뒤이어 가슴을 격동케 하는 것은 진한 위기감이다.
시야를 가득 물들이는 섬광.
이 거대한 바다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빛의 검.
“개벽!”
크라켄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건 그야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다리를 웅크리며 기동하는 크라켄.
그 속도는 분명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어어어어어!”
그러나 저 빛의 검을 피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순식간에 잘려 나가는 세 개의 다리.
크라켄의 다리가 어지간한 쇳덩어리보다도 단단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실로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크라켄은 바닷속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이건 뭐지? 왜 심해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거지?
“바, 바다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져 버린 바다의 모습에 학생들이 비명을 지른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미친.. 레니 슈나이더!”
학생들은 그제야 비로소 저 빛나는 검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지?’
뒤를 잇는 것은 저 바닷속에 숨어있는 크라켄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공포다.
유찬의 말만 믿고 저들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 실수였다.
레니 슈나이더. 말로만 들었을 땐 매년 두각을 드러내는 흔한 천재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저 실력에 상아탑엔 왜 들어온 거야?’
그러나 대체 누가 저 검을 보고도 그녀를 일개 학생에 불과하다 평하겠는가.
설령 유찬 교수 본인이 나선다 해도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한데!
“으아악!”
“꽈, 꽉 잡아!”
물론,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중의 일을 걱정하기 이전에 당장 저 크라켄에게서 살아남는 것부터가 일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 크라켄.
남은 다리들이 일시에 날아들며 라나의 몸을 덮친다.
아마 공중에서라면 피할 곳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실제로 예전의 라나였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상황이긴 하다.
그레고리오도 없을뿐더러 설령 마법을 익혔다 하더라도 캐스팅 없이 발판을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나 라나의 눈은 이런 순간에서조차 무섭도록 침착했다.
허공을 부유하는 몸.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검이 눈 부신 빛을 뿜어낸다.
조금 전과는 달리 푸른빛을 띠는 성검이다.
하기야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성검이라는 건 용사의 힘을 완벽하게 끌어내기 위한 그릇이니까.
“리리컬..”
그녀 안의 아르카나가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저 푸른 광채도 아르카나의 힘이다.
현실에서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곳은 꿈속의 세상.
이 순간 라나를 막을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블래스트!”
푸른 섬광이 크라켄의 몸을 관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