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01
◈ 섬예 일맥
일행은 온전히 흩어지는 길에 올랐다.
정연신이 신검단주와 길고도 짧은 독대를 마친 지 칠주야가 흘렀다. 곧 무창이었다.
신검대와 헤어지기로 한 도시다. 입황성을 바로 앞둔 역참이 있는 까닭이었다.
“이거 너무 편하게 돌아가는데요? 한 놈도 안 오네. 남직례에 가기 전부터 습격을 대비했는데.”
연소하의 말에 여타 신검대 고수들이 제각기 입을 열었다.
“그렇기도 해. 우리 단주와 남궁가주. 비무 직후에 한쪽이 온전하지 못하리라 여길 만한데. 강호인 놈들 말이야.”
“글쎄. 편하게 돌아간다? 청야곡에서 맞닥뜨린 게 혈염교와 심무련, 여령에 무룡회까지 된다. 거대방파를 넷이나 조우했는데 어찌 그런 말이 나오나?”
“맞아. 어지간해선 그대로 부딪혔을 거야. 단주가 허장성세를 보이지 않았다면. 음흉한 여령 놈들은 그때까지 지켜만 봤을지도 모르지만.”
“단주의 기파를 대하고도 무모하게 습격할 놈들이라면, 애당초 비무가 끝난 직후를 노리지도 않을 거다. 자색에 도전할 만한 절세고수들은 대개 중원의 광활한 세력 구도에 매여 있고.”
“하여간.”
악수림이 생글거리며 끼어들었다.
“섬예 덕이지. 난리통에 용케도 단주를 운기 요상시켜 줬어. 덕분에 제법 편하게 간단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악수림의 키는 정연신보다 작았다. 손바닥을 높이 올리는 게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했다.
정연신이 슬쩍 걸음을 틀자,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은 그녀가 등만 툭툭 건드렸다.
“고양이 같은 놈이네. 섬예가 아니라 흑묘란 말이 어울리겠어.”
굳이 대답할 말은 아니었다.
‘머리에 손만 닿아도 알아차리겠지. 악 선배라면.’
소년은 생각했다.
단명할 체질과 신야현의 정가장.
신검단주에게 사정을 말하면서 마음을 썼다. 절세고수이기 이전에 자색의 대선배였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었는데, 정연신의 말을 듣는 내내 신검단주는 기색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경망스럽게 튀어나오는 언행도 그때는 없었다.
―그래서, 네가 날 밀어내겠다는 뜻이렷다?
끝에 내뱉은 말만 익살스러웠다. 신검단주의 반응은 그처럼 비범했다.
―신검단에 자색고수가 둘이라. 떠올리는 것만 해도 제법 가슴이 뛴다. 올라와 보도록 해.
그러면서 덧붙였다. 자격을 갖추면 기꺼이 겨루어 주겠노라고.
천하의 신검단주에게 들은 말이다. 그 자체로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목표였다.
정연신은 내심 구질구질한 가정사를 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한마디에 누그러지는 마음을 느끼고 새삼 놀랐다.
까마득히 낮은 후배인 자신을 진지하게 대해 준 까닭일까.
“내상도 한결 낫군. 칠주야 내내 요상만 한 보람이 있다.”
신검단주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연신과 시선이 마주친 그가 눈매를 찡긋한다. 소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무창 정문이다!”
연소하의 외침에 악수림이 호응했다.
“검문이 제법 매서워 보이는데? 흉년 탓에 민심이 좋지 않은 거야.”
“우리 부대주께서는 본성에서 게으름 부리지 말고 본대로 복귀하시오. 즉시 말이외다.”
신검단주가 짐짓 눈을 부릅뜨며 얘기했다. 강호 배분으로 따지면 악수림보다 낮은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글쎄. 오랜만에 십칠대 대주 놈들 세워놓고 기강이나 잡을까 하는데. 마광익주가 본성에 있으려나?”
정연신을 흘끗 보면서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는데,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신검대 고수들은 익숙하다는 얼굴로 자신들끼리 떠들었다.
“원로원주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왜 합류를 하지 않으시는지.”
“자색의 절세고수를 어찌 보고? 구파 장문인이나 십삼천주가 둘 이상 나서서 습격한 게 아니라면, 천하에 그분을 해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이미 무위가 절대지경에 이른 분이거늘.”
“네 가정도 터무니없다. 구파와 십삼천의 수장이라. 천하 무림에서 가장 존귀한 자들이 웬 마을의 개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닐진대.”
“마가주 어른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원로원주 말이냐? 품성이 허술해 보여도 강호에서 객사할 위인은 아니다. 네깟 것들의 심려가 수치이니라.”
곧 작별을 앞둔 까닭일까. 신검대 고수들이 말이 늘어났다. 진심으로 원로원주를 걱정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자색고수의 무력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다.
“이제는 정말 갈라져야겠는데?”
“섬예, 그간 견식을 넓혔다. 아주 창의적인 독문무공이었어.”
“맞아. 권장법부터 검법까지 모두 그랬지.”
악수림마냥 정연신의 몸을 툭툭 두드리는 이들이 많다. 신검단 신검대의 고수들.
강호에서도 유별나게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이들 같지 않았다.
청기린 남궁세진과의 비무를 본 뒤 일주일간 교분을 나눈 까닭일까.
‘잘된 일이야. 언젠가 휘하에 거둬야 해.’
소년은 누구나 발칙하다고 할 법한 생각을 했다.
허나 신검대의 고수들 또한 끝내 차출을 입에 담지 않았다. 정연신은 성찰했다.
자신이 아직 그들에게 절실한 필요로 다가오는 고수가 아닌 탓이라고.
입황성 청색의 세계는 그토록 넓었다.
‘그래도, 이번에 얻은 심득을 녹여내면…….’
곧 창안할 심법에 정가동공을 엮고, 환강의 진기 운용마저 개선한다면 어찌 될까.
청명, 백미려와 더불어 청색 제일을 논하는 수준을 떠올렸다. 신검대와 재회할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리라.
“제법 즐거웠다.”
“부대주, 바로 오셔야 해요.”
“우리 마 씨 어르신은 성질 좀 죽이시고.”
덕담도 유쾌했다. 그들의 가벼워 보이는 성정을 무력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가자, 가자.”
악수림은 정연신, 마연적과 함께 잠시 복귀하기로 했다. 신검대 부대주로서 임무 보고를 마쳐야 하는 까닭이었다.
“장법도 좋은데, 검법을 너무 등한시하지 마라. 발전의 여지가 많은 검공이다.”
신검단주는 작별인사를 조언으로 갈음했다. 진기의 광검을 보여준 절세고수의 말이다.
정연신은 포권과 함께 머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무운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쾌활한 웃음이 흘렀다. 이내 한 자락 바람을 타고 시원한 대답이 들려왔다.
“내 운을 빌어주는 놈은 너 하나뿐이다.”
화아아악!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경공을 펼친 신검대 전원이 멀어져 있었다.
스물에 달하는 그림자들이 끝도 없이 드넓은 지평선의 햇볕을 가리며 나아갔다. 신검단주의 등은 보이지도 않았다.
“가자꾸나.”
마연적이 말했다. 복귀할 시간이었다.
* * *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앞두고 정연신이 출행하기 전날의 일이었다.
햇살이 밝았다.
입황성 천금무고(穿金武庫)는 본성 내에 있는 또 다른 성이었다.
새하얀 석벽으로 미려하게 솟아 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서고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입황성의 무공 비급들이 보관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무학의 총람이라 했다. 기본공을 황실에서 지원받으며 건립했다.
본성 무인들이 증여한 독문무공도 비치되어 있었다.
허나 대리석 벽면을 쓰는 무공서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 으레 품는 생각이었다.
보통 그러한 마음은 표정에서부터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때 들어온 소년의 얼굴은 몹시 담담했다.
저벅.
천금무고의 담당 문사는 그를 알고 있었다. 전례가 없던 멸마청강수의 비급을 증여받으면서 황실에도 보고해야 했다.
서면에 써 내려간 붓글씨에 그토록 마음을 쏟은 적이 몇 없었다.
“섬예 소협.”
“오(悟) 문사님.”
오 문사의 포권에 소년이 마주 답했다. 정갈한 느낌의 인사였다.
문사는 무심코 생각했다. 근래 들어 무명을 떨치고 있다는 저 소년은, 이곳의 종이 내음과도 제법 어울릴 듯하다고.
정연신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책 탓에 더욱 그리 다가오는 듯했다.
무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사는 문득 일어난 잡념을 떨치고 물었다.
“그것은?”
“본성에 증여하고자 합니다. 제 독문무공이지요. 공적 판단도 부탁드리고자 하는데.”
섬예 정연신이 말했다. 별 기대 없이 용건만 이야기하는 품행이었다.
길거리에서 당과를 파는 상인도 저렇게 호객하지는 않을 터였다.
멸마청강수 탓에 황실의 칙서까지 받아야 했던 문사는 내심 진저리를 쳤다.
강호 문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극비리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법력 무공.
보이지 않는 난리를 그렇게 쳐댔는데도, 결과적으로 저 소년에게 돌아간 공적의 크기가 크지 않았던 탓에 더욱 열이 뻗쳤더랬다.
부국강병. 명 황실의 재상을 지낸 장거정(張居正)의 기치에 부합하지 않는 무공이라고.
달리 입문할 자가 없는 난해한 무학인 탓에 그렇다고 했다. 결정한 윗선이 입황성 총관부인지 황실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은 무난히 끝나길.’
소년의 손에서 서책들을 넘겨받으며 내심 바랐다.
그때 정연신이 입술을 뗐다.
“오 문사께서는 속독에 능하시지요. 대략적인 가치를 셈하실 때까지 기다려도 될는지…… 곧 임무 출행인지라, 결과를 받아보지 못하고 떠나야 합니다.”
증여된 무공의 평가는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총관부 상급 문사들을 거쳐 흑색 대주 여럿을 비롯한 윗선에 올리기 전에, 무공의 공능과 수련법, 연성 난이도 등을 정리한다.
그리하여 보고서의 얼개를 짜는 것이 천금무고 문사의 일이었다.
당연히 무공을 익혔다. 안목만큼은 어지간한 청색고수 못지않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이 보직에 임하게 된 것이다.
“내일이 임무라……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으니, 얼른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문사는 재빨리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목이 눈에 띄었다.
時華無極拳.
시화무극권이라 휘갈겨 쓰인 표지가 단출했다. 총관부에서 양식을 구해다가 대충 엮은 티가 났다.
서책의 서툰 마감질에 내심 웃은 문사가 책장을 넘겼다.
“…….”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서서히.
몹시 천천히 침묵에 잠겼다.
시화무극권, 환익보, 시극경, 광화검류…….
네 가지 무공 비급이 차례대로 넘어간다. 적막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무공 구결이 새겨진 모든 서적을 읽을 때까지 그랬다.
“음…….”
그는 침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눈까지 충혈되어 있는데, 정연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경악이 번뜩였다.
표정만으로도 짧은 침묵을 허전하지 않게 채웠다.
문사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시다시피, 독문무공 증여는 본성의 독자적인 기준에 따라 공으로 환산합니다. 가치 평가를 본성 무인들의 보편적인 전력 증강으로 셈하지요. 특별히 초고수들의 안목에 기대지 않는데, 섬예 소협의 이번 무공을 감히 논하자면…….”
* * *
불현듯, 문사는 회상을 접었다.
“이보시오, 내 하나 묻고자 하는 게 있소만.”
초조함을 띤 목소리였다.
광활한 서고의 입구, 문방사우가 구비된 책상에서 먹을 갈던 문사는 한숨을 쉬었다.
더 듣지 않고도 상세한 용무를 짐작했다. 이런 자들이 오늘만 십수 명이었다. 문사는 미간을 좁혔다.
“섬예 무맥(武脈)은 본 무고의 상층으로 이관되었소.”
그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십수 번 내뱉은 얘기였다.
‘오늘이 장날이로군.’
입황성 총관부의 문사는 피로한 눈을 비볐다. 종일토록 따지고 드는 무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천금무고의 서기란 본래 이런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그 소협이 문제로군.”
한숨처럼 내뱉었다.
노곤함과 함께 덧없이 흩어지는 독백…….
무명옷을 입은 청년은 그의 혼잣말에 개의치 않았다. 노기를 띤 얼굴과 함께 목소리가 점차로 커졌다.
“이관? 이관이라니! 그 무슨 참담한 말씀이오?”
“총관부의 결정이외다. 이제 아무나 열람할 수가 없소. 못해도 백색의 정식 위계는 얻어야 하오. 고절한 무학은 늘 그랬지. 향상심을 고취하기 위한 대총관님의 뜻이…….”
“그 무슨……! 내가 입황성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오! 흰옷을 입지 못한 무인은 사람도 아니란 말이외까?”
“신검단 십칠대에 정식으로 배속되는 게 백색무사부터인지라. 그대도 잘 알지 않소? 뭣하면 입황시를 치는 게 어떻소?”
문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로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천금무고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섬예 무맥의 이관이 불러온 여파가 몹시 컸다. 문사는 내심 욕설을 뱉었다.
‘제기랄.’
대(對)남궁세가 비무의 승전 소식이 들려온 현재.
입황성은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