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32
◈ 청염 (5)
“만천화우! 암기를 출수하지 마라!”
“소란 없이 처단해야…… 아악!”
연회장에서 때아닌 신음과 비명이 울린다.
되돌아간 날붙이들이 태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커다란 방이 무지막지한 경파에 휩싸였다.
터지는 핏물들 속에서 제 무공을 발휘할 만한 자가 없었다.
만천화우를 습득한 정연신은 암기 고수들의 천적이 됐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태상가주의 상태가 압권이었다.
능법광륜기의 법력에 내부 세맥이 타버린 것마냥,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다.
정연신은 왼손을 측면으로 뻗은 채, 추악한 늙은이의 뒷덜미를 오른손으로 잡아 올리며 눈을 맞췄다.
“우리 원로원주님, 어디 계시지?”
소년은 대뜸 물었다. 간자의 정체를 확신한 순간 모종의 느낌이 상단전을 스쳤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정수리 백회혈이 점차 영험해진다.
영적인 무언가를 건네는 때는 여전히 제멋대로였지만, 연관성과 빈도가 조금씩 진보하고 있었다.
흐흐.
태상가주가 웃었다. 정연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되, 시선은 머나먼 저편에 맞춰진 듯했다.
“당문이…… 암기와 독공을 연성하는 이유를 아느냐?”
상태에 비해 명정한 목소리였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격검에 비해 희생이 적은 까닭이니라. 당문무학의 정수에는 부딪침이 없다. 눈먼 검에 가솔의 명줄이 끊어질까 염려하신 선조의 혜안이지. 본디 검공이 지닌 변수란 흔들리는 꽃잎과 같아서, 강자가 검을 쥐었다 해도 약자가 지닌 시운에 명이 다할 수 있느니.”
“다른 말로 수긍하는군. 당신이 원로원주님과 벽력탄의 일에 관여했다는 건 알겠어.”
정연신은 태상가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목 뒤로 손가락을 눌러 마혈을 짚은 참이다.
놈이 말한 독공을 경계해야 했다. 태상가주는 이제 입만 놀릴 수 있었다.
노인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식솔을 생각하는 마음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비겁한 수법을 연성한다는 궤변으로 손가락질 받는 일을 능히 감수하는 온정이지. 백도정파에 대한 명예욕을 버리고, 자손의 온전함과 복락을 바란 선조의 뜻이 곧 당문무학이 되었느니라.”
목적의 성취에 있어 방도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둘러 얘기한다.
정연신이 익히 겪어 온 세가의 종자들이다.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도가 텄다.
“수치를 모르는군. 법력이 사마외도의 공력을 태웠어. 내 진기의 공능은 언제라도 증명할 수 있으니, 당신이 택해야 할 일은 둘 중 하나뿐이야.”
소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구태여 뒷말을 이을 필요는 없었다.
자결 혹은 자백이다. 흉계를 꾸민 정도무문의 무인이 고를 만한 최후는 그뿐이었다.
태상가주의 주름진 입매가 올라갔다. 마침내 정연신과 눈길이 마주쳤다.
“우둔한 아해로 보이지 않는데, 마음이 급한 모양이구나. 네 눈에 여유가 없다. 무엇에 쫓기는 게냐? 너는 흉수를 잡았고, 내 아들은 가문의 평판보다 신의를 택할 훌륭한 후레자식이거늘.”
“…….”
“아…… 그렇지. 천고에 다시 없을 아이야. 네게는 시간이 없구나. 하늘도 공평하지.”
비꼬는 말이 아니다. 세월에 무뎌진 노강호의 독백으로 다가왔다.
만천화우가 당문으로 되돌아간 시점에서, 태상가주 당태독은 삶의 원동력을 잃었다.
지극한 목표가 성취되었기에 오히려 탈력이 생겼다.
필생의 숙원이 연고도 없던 가문 바깥의 소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마저도 단호하게 내쳤던 아들에게 전해진 비전이다.
심정이 어떨까. 허나 정연신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운 사실을 깨쳤을 뿐이다.
노인이 알고 있다. 이 몸뚱이의 체질을.
당태독의 주름 가득한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소년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혈염교가 맞았어.’
본성의 원로원주는 자색의 절세검객이다.
구파 장문인에 버금가는 노고수라 했다.
자의가 아니면 강호에서 행방이 묘연해질 만한 무공 수위가 아니었다.
이제는 알겠다. 혈염교주가 온전히 살아서 당태독과 손을 잡은 것이다.
상단전의 영감과 원로원주의 실종, 당태독이 연성한 사마외도의 공력, 당문에 대한 벽력탄 제조의 의혹이 한 번에 풀어 헤쳐졌다.
그 와중에 연회장의 전방위로 몰아치던 만천화우가 잦아들었다.
서 있는 자가 없다.
천적의 신공을 맞이한 당문 고수들은 저마다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채 널브러졌다.
더러 한쪽 무릎만 꿇고 있는 자도 있었지만, 쉽게 거동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중앙에 있던 무희와 악사 역시 당문 무인이었다. 자신들이 꺼냈던 암기를 그대로 맞고 쓰러져 있었다.
상석에서 정연신의 어깨 너머를 슬쩍 바라본 당태독의 웃음이 짙어졌다.
“천고의 자질……! 입황성의 아해야. 너는 실로 혜성과 같다.”
“실성했군.”
소년의 조용한 대꾸는 당태독의 뇌까림을 멈추지 못했다.
간자로서 정체가 드러났고, 평생의 염원이 허망하게 이루어졌다.
목적 없는 목소리가 늙수그레하게 울렸다.
“무(武)로써 빛나다가, 시간에 스러지는 게 너의 천명이니라. 이리 가까이 마주하고 보니 더욱 선명하다. 반원삼양공은 거리를 격하고 약과 독을 구별하지. 그 인체 도해가 틀렸구나. 이백 년 세월을 이십 년으로 거니는 몸이니, 공평무사한 하늘의 이치가 너를 통해 분명히 구현됨이라. 참으로 아름다운 무재로다.”
“…….”
“사교의 종자들이 너를 탐하는 이유를 알겠다. 문파를 이끄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리라. 입황성주, 산해경의 구미호 같은 여인이 너를 무척이나 감싸고 돌겠구나. 그 품이 얼마나 보드라운가?”
“스승이시다. 입에 담지 마.”
당태독이 끌끌 웃었다.
“너와 같은 아이는 바르게 자라기 힘든 게 세상의 이치인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여하간 네 말이 맞다. 본좌가 고를 만한 처세의 방도가 많지 않구나. 본가를 생각한다면 선처를 구걸해야겠지. 당문이 혈염교와 결탁했노라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큰일 아닌가?”
“말해. 어디 계시지?”
“생사 여부를 묻지 않고 소재를 이야기한다…… 네 어조가 굴강한 게, 아주 확신에 차 있구나. 신기하다, 신기해. 그 역시 상단전의 공능이겠지? 머리를 열어보고 싶구나. 혈도 공부가 절실해.”
낡은 눈동자에서 광기가 비친다. 실성을 한 게 맞다.
이쯤 되면 정연신이 감당할 영역이 아니다.
무림세가의 한복판에서 해당 가문의 태상가주를 고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 말하지 마.”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노인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능법광륜기를 직통으로 대하고 무력화된 당태독이 힘없이 끌려 나왔다.
저벅.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태상가주 휘하의 고수들을 스쳐 지나간다.
막아서는 자가 없다. 일문 정예고수들의 수장을 갈음한다는 흑색고수의 풍모였다.
정연신의 손 아래로 당태독의 황금색 옷자락이 질질 끌렸다.
마냥 안하무인으로 날뛸 계제는 아니었다.
정연신은 연회장 전각의 기둥 아래에 당태독을 비스듬히 앉혀 놓았다.
노인이 클클 웃으면서 소년을 한 번 올려다봤다.
“손속이 단호한데 처세를 아는구나. 무재만 믿는 얼간이는 아니로다.”
“조용히.”
무던하게 대꾸했다.
정연신은 입황성에 입문할 때부터 평판을 신경 썼다.
신검단주의 위계에 오르기 위해서다. 처세를 안다는 말이 맞다.
소년은 제 손으로 불리한 상황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끼이익.
혼자서 문을 열고 나섰다. 술병과 그릇을 든 시종들이 화들짝 놀라 바라본다.
경파가 휘몰아치는 격전 소리에 문밖을 서성인 듯했다.
정연신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가주님을 불러 주셔야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탓에.”
“예, 예 알겠습니다!”
감히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없다.
만천화우의 입문 기예를 전수받은 당가주가 천명했다.
입황성 섬예는 사천당문의 스승이라고.
가문의 외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은혜를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는 당문의 가훈은 곧 명정한 은원 구분을 뜻하는 바.
당문에서도 지체 높은 신분을 지니게 된 정연신은 당문 가솔들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입황성 무인이라는 특수한 신분이 무색해진 것이다.
시종 둘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스윽.
정연신은 문기둥에 등을 기댔다.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 채 반 각이 지나기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여름 볕이 땅거미에 묻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스름과 함께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번진다.
반투명한 이불마냥 정연신의 온몸을 덮으면서, 머리칼을 옅은 고동빛으로 물들였다.
높게 솟은 콧대에는 음영이 졌다.
남은 시종 셋이 공손히 선 채 소년을 훔쳐본다.
명문가 시종의 우아한 품행을 견지하면서도 용케 시선을 던져댔다.
“…….”
광륜을 몸에 담은 정연신의 기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날이 갈수록 뚜렷한 존재감을 띠었다.
이목구비도 그렇다. 성장기의 소년이다.
반악이라 불렸던 정가장주에, 그런 사내가 반했다는 어머니 마연상의 핏줄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정연신은 자신의 외모가 제법 괜찮다는 걸 안다.
별 감흥 없는 일이라 해도 사실이 그러했다.
혹여 신검단주의 좌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 얼굴 가죽을 이용할 마음도 있다.
논검으로 접대를 깨쳤듯이.
‘고수가 되면 머리를 길러 보라 하셨지.’
힐끗거리는 시종들의 눈길 때문일까. 불현듯 입황성주의 말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소년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흩었다. 마음에만 담아뒀을 뿐이다. 지금은 잡스러운 상념이었다.
그때.
‘아.’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연신은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자그마한 신형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행인들을 일부러 물린 듯했다.
당가주와 용봉쌍독 남매.
이제는 제법 친근해진 모양새였다.
남매가 후계 경합을 시작한다는 말도 도는 판국이니, 가문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가 남매의 표정만 봐도 알 만했다. 오밀조밀한 얼굴들이 몹시 평온하면서도 생기를 띠고 있었다.
“은공, 용무가……?”
다소곳하게 물어오는 당려려를 흘끗 본 정연신은 당가주에게 포권을 취했다.
명경지수의 평안을 찾은 그들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형편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태상가주께서 혈염교의 간자였습니다.
전음을 보냈다. 독군 당운황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 *
태상가주 당태독은 몹시 고절한 무인이었다.
상극의 이치 없이 손바닥 한 번 마주친 걸로 무력화시키자면, 적어도 자색의 영역에서 논할 할 일이다.
상리가 그러했다.
능법광륜기의 법력.
당운황은 정연신의 장심에 직접 손을 대고 기교를 건네받았다.
광륜기의 공력에 어린 신령스러운 느낌을 안다. 눈앞에서 경파를 내보여주니 일이 더욱 명확해졌다.
“태상가주를 유폐하고…… 대죄를 참형으로 다스릴 준비를 하라.”
독군 당운황의 명령은 지엄했다.
그는 숨기지 않았다. 가문의 치부가 된 부친의 죄를 온전히 드러냈다.
전음으로 일을 알렸던 정연신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독군.
독공에 능한 군자란 의미다. 별호 그대로 대협이었다.
가주의 처신은 오히려 당가 무인들의 결집을 불러왔다.
태상가주의 권세가 무너지고, 다시 한번 당가주가 집안을 다스리게 됐다.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당문의 고수들이 가주령을 받들었다. 수십 명의 정예 무인들이 인근을 누볐다.
입황성의 원로원주를 가두고 있는 동혈을 찾기 위함이었다.
표홀한 천태구궁신법(天跆九穹身法)의 몸놀림이 도처에 펼쳐졌다.
당문비전의 안법을 연성한 고수들이다. 반원삼양공 특유의 기감마저 동원됐다.
당가주가 사건을 숨기지 않게 된 시점에서 입을 다물어버린 태상가주의 은신처는 금세 발견될 듯했다.
그동안 정연신은 시종들을 통해 여러 단약을 선사받았다. 당운황의 보은이었다.
소년은 곧장 남궁화신과 헌원창을 시켜 약들을 운반하도록 했다.
입황성 기주지부의 병상에 누워있을 선배들을 위해서였다.
“다녀올 때까지 몸 건사하시오. 십전문주는 아직 모른다 치고, 순마련주가 어찌 나올지 모를 일 아니외까? 내 얼른 진신 실력의 칠 할을 개방해 오겠소.”
잠시 작별하게 된 헌원창의 인사였다.
옳은 말이었다.
마연적의 종적이 묘연해진 지금, 정연신이 머물고 있는 당문에는 십삼천주를 감당할 고수가 없다.
순마련주와 혈염교주는 어떤 식으로든 나타난다고 봐야 했다.
이곳 당가타 역시 활기와 긴장을 함께 담아내고 있었다.
서까래를 산뜻하게 스친 햇볕마저 가솔들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더 강해져야 해.’
정연신은 그동안 광륜을 돌리면서 축기에 전념했다.
사방으로 돌계단이 뻗어있는 연무장 한복판.
흙과 나뭇잎을 띄우며 휘몰아치는 바람이 소년의 몸으로 수렴해 간다.
동공의 공능을 띤 능법광륜기의 안정성은 일반적인 심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후우웅―!
광륜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전과 비할 바 없는 기운이 모여든다.
그 사이 정연신의 뇌리는 대방파 세 곳의 무공을 낱낱이 분해했다.
혈염교, 순마련, 십전문.
이미 충분히 겪었다.
패검종 장로의 한 수에 도박을 걸고 파훼식을 성공시킨 전례가 있다.
그럼, 당초에 대비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껏 살면서 미리 태세를 취하고 무공 파훼에 전념한 적은 없다.
십삼천주 같은 절세고수들에게 얼마나 통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정연신은 최선을 다했다.
‘두 수, 세 수 위에 있는 상대를 만나도, 허를 찌르면 한 초식 가까이 따라갈 수 있어.’
놈들이 보여준 기공의 경파, 보신경의 움직임, 권장법과 검법 초식들을 하나하나 분절시켰다.
틈새를 찢어발길 발경을 새로이 정립하고, 능법광륜기의 경파를 어떤 상대에게 어떤 흐름으로 내뿜어야 할지 집대성하는 과정이었다.
머릿속 상단전이 수시로 하얗게 불타올랐다. 단기 결전을 예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