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25
◈ 광예결 (5)
“허……?”
기왓장에 누워있던 태염룡이 곧장 반응했다. 잠시 눈썹을 치켜뜬 직후에, 손조차 짚지 않고 일어섰다.
철판교의 묘리를 역으로 펼친 것마냥 두 발과 허리만으로 상체를 띄웠다. 찰나지간에 몸을 일으킨 것이다. 고절한 경신 공부였다.
사박.
주변에 두 줄기 흑색의 신형이 내려섰다. 환영처럼 번진 보신경이다.
새까맣게 펄럭인 옷자락들이 두 초고수의 신분을 방증했다. 입황신창 악수림과 율령대주 운소유였다.
악수림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먼발치를 향해서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지붕 아래를 내려다봤다. 신혈극마 진명조가 대연무장 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였다. 올라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넌 뭐 하니? 후배가 심득을 얻었을지도 모르는데, 제깍 호법을 서 주지는 못할망정.”
“저는 바깥을 훑어볼 심산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대주 셋이 한 방위를 맡는다? 전력을 그렇게 써서는 아니 되지요. 효용이 적습니다.”
“딴에는 옳은 말이긴 한데…….”
말끝을 흐린 악수림이 태염룡을 향해 눈짓했다.
“얘, 황보가의 아해야.”
“……말씀하십쇼.”
그가 하얀빛의 경파 줄기들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광화검류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진기 파동이다.
지금 솟아오르는 빛줄기들이 조금 더 짙었다. 전각을 군데군데 뚫고 나와서는 안개마냥 힘을 잃고 있는데, 그 광경이 굉장히 신비로웠다.
악수림은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태염룡의 시선이 어디에 있든 전각 내부의 정연신을 신경 썼다.
나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섬예의 안위가 중요했다.
그녀가 입술을 뗐다.
“며칠째 이러고 있었니? 우리 섬예.”
“아흐레쯤 됐습죠.”
“역시 폐관에 가깝네. 내 기별에 대주 대리가 답할 만해. 식사는?”
“끼니때에 맞춰 갖다 드렸습죠. 더 커야 하지 않습니까.”
“벽곡단마냥 실속 없는 건 아니었지?”
“그거 먹고 몸을 어떻게 닦습니까? 도가 수행자도 아니고, 한창 자랄 때에.”
“우리 애들과는 다른걸? 마광익은 대주를 잘 챙기는구나.”
스윽.
악수림은 한 손을 살짝 내리뻗었다. 기왓장 틈새로 흘러나오는 경력의 여파를 향해서다.
흑단으로 짜인 소맷자락 끝에서 흰빛이 흩어졌다. 새벽 어스름에 스미는 안개 같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특이한 경파야. 개성이 뚜렷해. 진기의 유형화와도 다른 게, 초식 발산의 여파가 농밀한 공력으로 남아서 힘을 더하는구나? 운공 같은 게 아니라 출수 수련이었어. 굳이 호법을 설 필요는 없겠다.”
홀로 중얼거리듯 말한 악수림이 고개를 들었다.
“너, 호법 서는 게 아니었구나? 섬예의 삼매경을 깨기 싫은 거였지? 황보 소가주의 면모로 보기 힘든걸. 너, 제남에서 왕족처럼 행세하지 않았니?”
“별스럽게. 이것도 호법이올시다.”
태염룡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질문에 심기가 상한 것이다.
나름대로 깍듯했던 품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의식이 현현한 것마냥 짝다리를 짚는 모습부터 그랬다.
악수림이 별 가치를 두지 않는 변화였다.
“그런데 쟤는 뭐 하는 거니?”
그녀가 지붕 한켠을 가리켰다. 완만하게 늘어진 모서리 쪽이다.
극상의 기감으로도 호흡을 느끼기 힘든 기척이 존재했다. 서까래 아래에 거꾸로 붙은 헌원창이었다.
악수림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매미마냥 달라붙은 탓이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살수 비기를 제대로 익혔는데. 제 대주를 암살하려는 거야?”
“그 반대요. 굉장히 유난스럽지만.”
“호법이라고? 뭐 하러 서까래 쪽에서?”
“근래에 들려온 풍문 탓이오. 입황성 전각 몇 채의 지붕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위에서부터 습격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자기가 맞받아치겠답디다. 같이 뭉개지지나 않으면 다행일진대.”
“…….”
입술을 꼭 다문 악수림이 아래로 사뿐 뛰어내렸다.
사락.
작은 기척에, 한 번의 도약만으로 대연무장 가운데에 내려섰다. 초고수의 발놀림이었다.
먼지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피어난 잡초 위를 밟은 까닭이었다.
가죽신 아래의 풀 끝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초상비(草上飛)의 경지였다.
옆으로 율령대주 운소유가 자연스레 내려왔다. 기척조차 없었다. 명족의 보신경을 극상으로 익힌 까닭이었다.
무인으로서 무시무시한 몸가짐. 여느 때와 같이 단아하게 차려입은 무복이 돋보였다.
“저는 돌아가지요.”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운소유의 옆얼굴을 힐끗한 악수림이 놀리듯 웃었다.
“파훼법을 용이하게 뽑아내는 요령을 알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율령대한테는 제법 중요할 텐데.”
“내일 정오에 다시 걸음할 심산입니다. 신임 대주에게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으니, 객을 받지 않는 동안 삼고초려했다 하면 이야기라도 들어주겠지요.”
조곤조곤한 어조로 얘기한 뒤에 돌아선다.
사박.
이내 멀어지는 뒷모습을 일별한 악수림이 고개를 돌렸다. 신혈극마 진명조가 꼿꼿이 서 있었다. 온몸을 둘러친 기도가 고고했다. 보혈대에서 떠나보낸 청색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라마백과 혈도귀였다.
‘심사를 헤아리기 힘든 놈이란 말이지.’
악수림은 생각했다.
신혈극마는 묘한 놈이었다. 속내를 읽기 힘들 만큼 창백한 낯빛은 둘째다. 흑색 비무와 같은 입황성의 공적인 행사에 나서지 않았다.
내심을 잘 숨기는 한편, 유독 사파를 상대로 엄청난 공적을 세워 왔다. 기파로써 살피건대 무공 수위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성명절기로 알려진 섬혈조법 말고도 위험한 한 수를 숨긴 것이다. 웬만한 흑도 고수들보다도 사마외도다웠다.
지금도 그랬다. 옛 수하들을 향해 되묻는 말에서 싸늘함이 풍겼다.
“너희 무공을 한 번도 살펴주지 않았다?”
풍란과 나일천의 하얀 안색이 더욱 희게 질렸다. 보혈대는 군문에 가까운 무력대라 했다.
두 사람의 낯빛에서 청색고수들의 격조를 찾기 힘들다. 마광익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
기질적으로 보혈대에 가까웠다. 아직은 그러했다.
“마광익주께서 경황이 없었겠지요.”
“탓할 일이 아닙니다. 흑색은 공사다망하지 않습니까.”
“네놈들, 기파가 허술해졌군. 진기의 유동이 군데군데 끊긴다. 낯선 무공을 비급만으로 깊이 연성하려는 머저리들이 주로 겪는 상태로구나. 이도 저도 아니야. 형편없다.”
진명조가 뇌까렸다.
신검단 산하의 대주들은 일문을 이끄는 문주와 같다.
제자로 삼았던 이들의 성취가 미진하다면, 그 감흥이 유달리 클 수밖에 없다. 화를 낸다 해도 과한 품행이 아니다.
‘분루(憤淚)를 흘리며 보냈는데……!’
진명조는 정연신에게 써 보낸 서찰을 떠올렸다. 분한 눈물을 몇 번이고 흘릴 뻔했다.
신임 마광익주는 풍란과 나일천을 이리 대해서는 안 된다. 실로 너무한 처사다.
황실의 학사들마냥 후진 교육의 체계를 만드느라 칩거한 것도 아닐 터인데.
“신임 마광익주의 얼굴, 두 번은 보았나?”
“…….”
풍란과 나일천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하든 진명조와 정연신을 욕보일 일인데, 침묵이 곧 답이었다.
신혈극마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뭐든 펼쳐 봐라. 평소의 호흡으로 세 번 연격이 가능한가? 불가하다면 내 출중한 후배에게 어찌 된 일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
진명조는 아닌 척 마광익주 전각을 한 번 흘끗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무슨 핑계로 빠져야 할지 궁리하면서다.
따져 묻기는 개뿔이었다. 수하를 방출한 대주로서 보여야 하는 언행이기에 억지로 내뱉었을 뿐이다.
그는 생각했다. 한 호흡에 늘어놓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하는데.
주변의 고수들은 달리 받아들였다.
날숨과 들숨 사이에 세 가지 초식을 풀어낼 수 있냐는 물음이다. 흑색 초고수의 말이었다.
전력을 전제한 출수라고 봐야 했다.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벅.
얇게 굽은 도를 등 뒤에 찬 여인, 풍란이 한 발 나섰다.
별호가 혈도귀였다. 보혈대주의 섬혈 무맥 가운데 섬혈난적도법(閃血亂跡刀法)을 익혔다.
거침없는 연격이 주된 묘리였다. 청색의 도법 고수들 중에서도 대적이 쉽지 않은 무인으로 거론되곤 했다.
“성취가 없지 않습니다. 진전 속도가 이전보다 느려졌을 뿐입니다.”
풍란이 말했다.
마광익 대연무장이 고요해졌다. 보혈대주가 노기를 드러낸 탓이었다. 삽시간에 그녀 쪽으로 이목이 집중됐다.
혈도귀 풍란.
같은 혈족인 것마냥 신혈극마와 닮았다. 새하얀 얼굴에 갸름한 턱선이 칼날 같은데, 등 뒤의 도갑으로 손을 가져가는 몸짓은 아주 나긋했다.
벌써부터 불규칙적으로 일어난 공력 파동이 날카롭게 번진다. 보혈대주처럼 요사스러운 면이 있었다.
스앙!
발도와 함께 칼날의 춤사위가 시작됐다.
그녀가 익힌 섬예 무맥의 무공은 시극경이었다. 진기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힘을 증진시키는 묘리였다.
그 말인즉, 도법 경파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웅!
섬혈난적도법의 투로가 기다랗게 풀려나왔다. 얇은 도신이 노을의 빛무리를 갈랐다.
흐릿하게 번지는 칼날 궤적이 날카로운 경파를 터뜨렸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컸다. 두 번 휘두름에 대기가 찢어지는 듯했다.
세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스악!
소리부터 줄어들었다. 경파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횡 베기와 함께 바닥으로 향한 도극이 살짝 떨렸다.
앞서 강창무와 위예령이 겪은 바와 같다. 내공 호흡을 이어가지 못했다. 세맥에 담긴 공력이 삼초째에 흐트러졌다.
감각을 중시하는 낯선 무맥에서 한계를 만났다. 독학에 가까운 수련도 문제였다.
오래도록 익힌 본신 무공을 앞지르지 못했다.
수련을 이어나가면 해결될 일이다. 허나 입황성의 무인들은 쉽게 훗날을 말할 수 없었다.
청색고수쯤 되면 정예로서 즉시 전력으로 행세해야 했다. 본성에서 미완성이란 말만큼 수치스러운 글귀는 드물다.
노을 진 대연무장에서, 풍란이 도를 내려 쥔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퇴보했군.”
진명조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구태의연이라 말하기도 힘들다. 힘을 싣는 수법부터 어설퍼진 게 보이는데…….”
“…….”
“본신 무공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겠다. 직접 목도하고 보니 내 출중한 후배를 문책할 일이 아니로구나. 그저 너의 부족함이다. 분에 넘치는 무공을 탐하여 연격을 잃었는데, 더 무어라 할까. 그래, 섬예를 탓할 게 아니야. 그는 특출난 자질로 비범한 무학을 증여했고, 뱁새들이 용을 따라가지 못했을 따름이다.”
냉랭한 이야기는 한 가지를 뜻했다. 뒤늦게 익힌 섬예 무학을 버리라는 의미였다.
네가 따라할 무학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상승 무학이란, 시야가 높은 데 있을수록 익히기 어려운 법이었다.
우물을 깊게 파기 힘든 이치와 같다. 백색보다는 오히려 청색에게 더욱 지난했다.
섬예의 무학을 제대로 쓸 만한 자는 섬예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드러날 파탄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보혈대 쪽을 주시하던 이들이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악수림도 별말 않고 대주 전각만 주시했다.
어느새 문 틈새와 기왓장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사라진 뒤였다.
“마광결을 어떻게 잘 알려줄 방도가 있나?”
“지금 익혀서는 연수합격에 써먹기 힘들지. 다른 무력대마냥 소규모 임무부터 돌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도 문제다. 매화검수급 전력을 집단전에서 만나면 감당할 도리가 없어. 순천익처럼 적합한 검진이 따로 있었다면 인원 벌충이 쉬웠을 텐데…….”
애써 소리를 죽이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청색고수들이 지천에 서 있는 장소였다.
어쭙잖은 배려로 음성을 낮추는 게 오히려 수치가 된다는 걸 안다.
마광익 무인들은 고수들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또 제 자신들을 염려했다.
소란스러운 적막이었다.
태염룡이 다시 지붕에 몸을 누였고, 헌원창의 기척은 그때까지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연무장의 담벼락에 비스듬히 앉은 청명과 백미려 또한 백색무인들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불현듯 대주의 거처에서 문이 열리기 전까지였다.
구구궁.
악수림이 담벼락 위로 몸을 띄웠다. 얼굴 가득 반가움을 띤 채였다.
새까만 바짓단과 함께 담장 모퉁이를 밟고 서는 움직임이 찰나에 이루어졌다. 그녀의 발밑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우리 섬예! 뭐하느라 두문불출한 거야? 원수라고 불러서 토라진 건 아니지?”
“잠시.”
짧은 음성이 울렸다. 다소 잠긴 목소리였다.
저벅.
마광익 고수들 전원이 담벼락을 채 넘어서기도 전에, 그들의 대주가 바람과 함께 허공을 가로질렀다.
환영처럼 홀연히 대연무장 중앙을 밟고 내려서는 모습이 신비롭다. 무게감 있는 전신 균형에 새까만 옷자락만 펄럭였다. 신법 풍신이었다.
정연신의 행색이 드러났다.
왼팔 맨살을 드러낸 흑색 장포를 걸친 모습이 여전했다.
점차 어깨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 머리칼이 흑단 같았다. 노을빛이 차분하게 물결쳤다.
“대주! 성취가 있었소?”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연무장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째 몸이 더 좋아진 것 같구려.”
한껏 반기는 이들 속에서 진명조만 고아하게 뒤로 걷는데,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청명과 백미려, 헌원창을 비롯한 마광일조와 기존의 마광익 고수들이 정연신을 둘러쌌다.
머릿수가 서른에 가까웠다. 초겨울의 투명한 공기가 순식간에 덥혀졌다. 중견 신입으로 들어온 고수들도 어색하게 발을 옮겼다.
“사랑받는 대주였네. 저기, 섬예야! 우리…….”
싱긋 웃은 악수림이 외칠 때였다.
마광익 고수들이 몇 걸음씩 물러섰다. 정연신이 입술을 살짝 달싹인 직후였다.
거리가 점차로 넓어졌다. 긴 대열로 큼지막한 원을 그렸다.
스윽.
신임 대주의 두 발이 자연스레 땅을 디뎠다.
처음은 정권이었다.
빠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절도 있게 뻗어냈다. 어깨어림에서 일어난 경파가 눈꽃처럼 흩어졌다.
양발을 채우고 있던 진기의 일부가 손으로 치달은 것이다. 중첩된 기운이 밀도를 불렸다.
전신의 기파는 강하지 않은데, 주먹이 극점에 이르러 폭발을 일으켰다.
화아악!
공기가 찢기는 듯한 느낌이 선명하게 끼쳐들었다. 시화무극수의 진벽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환익보의 발걸음과 조화되어, 물살 같은 유장함으로 뻗어나갔다. 거센 충격파가 퍼졌다.
제이초에서도 그랬다. 옆으로 이어지는 손짓에 대기가 휘우뚱 일그러진다.
나선의 경파였다. 권면에 모인 회전의 파동에서 빛이 흘렀다.
쿵! 화아악!
발경이 거듭될수록 유형화에 가까워지는 경력이다. 산란된 햇볕이 경파에 부딪쳐 흰빛으로 이지러졌다.
흑포로 감싼 전신에서 백광이 드문드문 번뜩였다. 무서울 만큼 날 선 신비로움으로.
“저거…….”
누군가가 침음을 흘리는 순간에도 초식이 이어졌다. 세 번째로 뻗은 주먹이 흐릿한 광채를 만발시킨 뒤였다.
시화무극수 권화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정연신의 허리춤에서 달칵 소리가 났다.
스릉.
핏줄이 뚜렷한 손으로 북명검을 뽑는다. 새하얀 검신에서 초겨울 서늘한 공기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투명한 질감이 사방으로 번졌다. 자욱하게 일어난 침묵과 함께였다.
칼 한 자루가 움직였다.
우웅.
정연신은 검무를 췄다. 광채로 이루어진 궤적이 무수한 줄기들로 피어났다.
빛살로 번진 검로의 흔적은 아주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를 새로운 궤적이 채웠다.
땅거미진 노을 속에서 새벽을 일으키는 듯했다. 검을 쥔 오른팔과 함께 흑색 소맷자락이 너울졌다.
공력 파장이 농밀해질수록, 온몸을 아지랑이처럼 둘러친 광채도 짙어졌다.
처음 드러낸 기파로 낼 수 없는 힘이 허공을 갈랐다. 시극경이 전제된 움직임이었다.
시화무극권과 환익보, 광화검류가 춤사위 하나에 녹아들어갔다. 고수 아닌 자가 없는 장소였다. 모든 이들이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