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01
◈ 연꽃 (20)
* * *
정연신은 안도했다.
태염룡과 헌원창, 신소빈이 살협의 초대에 응한 뒤였다. 제갈청아는 그녀의 부친이 현현하는 즉시 모습을 감춘 듯했다.
몹시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다치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선룡 제갈현이 눈감은 이후, 그녀 스스로 부친의 죽음을 원한다 해도 그랬다.
‘가족이니까.’
다른 세 사람이 이 자리에 없는 것도 다행이다.
싸움이 어찌 흘러갈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상단전의 공능에 뇌리가 하얗게 물들어 있는데도 그랬다.
맞이해야 할 술법 무공의 형태가 무한대에 가깝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투명한 시선이 느껴졌다. 허공을 부유하는 제갈가주에게서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무슨.’
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물들었다. 상단전 공조였다. 절세고수 특유의 넘치는 영성으로 말미암아 놈의 감정이 들어온다.
얼음장이 폭포처럼 흐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광기다.
온갖 심상이 떠올랐다. 찰나지간 언화련의 얼굴도 스친 듯했다.
허나 곧장 알아보기 힘든 상념과 뭉툭하게 모인 감정 뭉치들 속으로 가라앉았다. 놈의 내면은 태풍이 몰아치는 심해에 가까웠다.
‘제정신이 아니야.’
정작 시야에 비치는 제갈가주의 눈은 차분했다. 명경지수란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서늘한 평정심으로 싸움에 임하면서, 커다란 행적은 광기로 가져간다.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허나 지금 헤아릴 계제는 아니다.
[그것을 재현하려는가. 황보가주 격살의 날 말이다.]제갈가주가 백학선으로 입을 가린 채 얘기했다.
[유난히 고강한 흑색이 셋이나 모였다지. 천하의 다른 민생을 뒤로하고.]“잘 아네. 유언이 있으면 남겨. 오늘 이거, 호사가들 입에서 오만가지 얘깃거리로 다 퍼질 거야. 지금 내가 체면을 차리는 이유란다. 너희랑 달리 입황성은 민초들한테도 잘 보여야 하거든.”
악수림이 은창을 옆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스스로 일으킨 돌개바람에 머리칼이 새까맣게 나부끼고 있었다.
제갈가주가 웃었다.
[이 몸은 그자와 다르다.]“알지. 너, 부끄러움도 모르고 십삼천 둘이랑 야합했잖아. 패검종, 여령. 그동안 받아 처먹은 법보랑 재물이 얼마나 많길래 이만한 영역을 짜낸 건지 모르겠네. 들이붓는 대로 효용을 내는 네 기량도 신기하고.”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고 있었다. 입을 계속 달싹이면서였다. 검성 밑에서 어떻게 참았대?
‘시간을 끄시는구나. 지형을 파악하듯이.’
정연신은 멸마청강수의 기운으로 물든 북명검을 내려 쥔 채 생각했다.
제갈가주의 술법이 무궁무진하게 강대해지는 이유를 안다. 제갈청아가 얘기했다. 무공을 연마하는 데 혈족들마저 희생시켰노라고.
놈은 원래도 술법 무공의 절세고수였다. 고강해지는 방향이 달랐다.
스으으―
귀씨 아무개를 밟아 눅눅해진 발뒤꿈치를 삼매진화로 말렸다.
곧장 가죽신에서 피어오른 증기가 발목을 스친다. 뜨겁고도 서늘했다.
자그마한 상태의 난조조차 치명상으로 이어질 싸움이다.
눈앞에 떠 있는 제갈가주의 새하얀 옷자락은 때가 묻지도, 기파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호신강기조차 술법으로 짜인 걸까.
[섬예. 너는 내 말을 잊었구나.]삼매진화가 이목을 끈 듯했다. 제갈가주의 눈이 다시금 정연신에게 향했다.
―그처럼 천지 분간하지 못하는 행실은 좋지 않다. 이르게 객사할 게다. 천고에 다시 없을 꽃도 피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 네 자질이 고금을 논한다 해도 뭇 강자들이 곱게 보지 않으리라.
상단전 공능이 무림맹회에서 있었던 일을 단번에 끄집어냈다. 제갈가주의 이야기였다.
다시 악수림에게 시선을 돌린 제갈가주가 말했다.
[술법진은 충분히 파악했는가? 나는 이제 술식의 셈을 마쳤다. 네놈들은 역으로 공략당할 줄 꿈에도 몰랐겠으나, 그 덕에 이 몸은 최상의 상태를 발동할 시간을 벌었구나.]“뭐?”
그녀의 촘촘한 눈썹이 치켜 올라갈 때였다. 제갈가주가 입술에서 부채를 뗐다.
몹시 나긋한 손짓을 따라 백학선의 부챗살 끝이 대기에 곡선을 그렸다. 흐릿한 잔영과 함께였다.
공야세가 전역을 반투명하게 둘러싼 술법진이 웅웅거리면서 크게 공명한 순간.
[문중재래(聞仲再來). 자웅신편(雌雄神鞭).]우웅―
입술뿐만 아니라 공력으로도 말한다. 구순술의 극치. 수십 마디의 곡조 같은 중얼거림이 절세 쾌검처럼 극도로 빠르게 겹쳐졌다.
감각도를 연마하지 않은 자라면 천둥소리로만 느낄 법하다. 본래 술법의 진언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힘을 품는다고 했다.
문중(聞仲)은 도교의 벼락 신이 인간이었을 적 지닌 이름이고, 자웅편(雌雄鞭)은 그가 부리는 채찍이었다.
파직! 우르릉!
찰나였다.
고풍스러운 백학선의 깃들이 줄기줄기 갈라졌다.
부채를 이루고 있던 열 개의 살이 비수처럼 분리되어 무지막지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제갈가주의 어깨 위로 흩어지며 엄청나게 강력한 내공을 머금고서는, 천둥 구름에서 뽑아낸 실타래마냥 기다란 강기(罡氣)들을 둘러쳤다. 흐린 무색이었다.
제갈세가의 선법 비기, 자웅신편.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전개됐다.
흑립에 백포를 걸친 절세 미남자의 주변을 둘러싼 채 선녀의 예복을 잇는 천자락처럼 너울지는 실타래들. 기이할 정도로 초월적인 기질이 번졌다.
“보화신공(普化神功)의 자웅신편?!”
그 순간 똑같이 은창을 시커멓게 물들인 악수림의 눈매가 곤두섰다.
악가창을 극성으로 펼칠 준비를 마치고도 놀람을 감추지 못한다.
“그걸 가솔들의 도움도 없이 펼친다고? 그동안 가만히 있던 이유가, 진법을 네 몸에 온전히 담아내려고……?”
[너희가 나에 대한 파훼법을 강구할 때, 이 몸이라고 가만히 있었겠느냐. 어차피 본신이 고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암야전주의 십리일살 같은 극한의 변수에도 방비하자면 말이다. 너희라고 그런 절기가 없을까.]
제갈가주가 손목을 살짝 돌렸다.
[하여, 이제 본좌가 곧 제갈세가다.]순간 천지사방에 색채 없는 그물이 새겨졌다. 대주 셋을 동시에 공격하는 광역 절기였다.
무공 달인들의 싸움. 우열이 명확하다면 상대를 살피는 게 먼저일 수밖에 없으니, 선공은 대개 하수의 몫이 아니다.
만인이 숨죽인 공야세가에서 초상승의 세계가 열렸다.
우르릉!
바람과 우렛소리가 요란했다.
난생처음이다.
정연신은 자색 영역에서 살의에 차 짓쳐들어오는 일격을 마주했다. 아니, 그저 눈앞에 완전히 다른 속도가 펼쳐졌다고 하는 게 맞았다.
이미 위로 올려 치고 있던 북명검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신령스러운 법력의 내공 얼개를 검신까지 뻗어낸 차였다.
정연신의 감각은 이제 손과 검을 구분하지 않는다.
멸마청강검(滅魔靑剛劍)이라고 이름 붙인 제갈가주 공략의 검법 기예가 길고도 푸른 궤적을 새겼다.
쾅!
자웅신편 한 줄기를 가르고 두 줄기째를 맞받아쳤다.
검신으로 파고드는 마찰력이 엄청났다.
손아귀까지 거친 불꽃이 내려오는 듯했다. 삿된 마음이나마 정종 무공을 극성으로 연마한 절세고수다.
법력이 자아내는 멸마의 공능은, 그저 상성에서 조금의 우위를 점하는 게 전부였다. 이전에 겪은 자들의 술법 무공과 달랐다.
허나 그나마도 절대자의 눈에 거슬린 걸까.
[굉뢰(宏雷).]하늘에서 일어난 무채색 기둥이 지상까지 이어졌다.
강하게 요동친 공기가 정연신의 머리칼을 흩트리는데, 다섯 줄기를 세 사람에게 나눈 듯했다.
극도로 쾌속한 일격이라 떨어진다기보단 새겨진다는 느낌.
허나 정연신의 뇌리에서 불타오른 상단전은 이미 요동치는 기운의 흐름을 팔방으로 꿰뚫고 있었다.
저 공격초가 목표의 위치를 따라 분열한다는 것도 인지했다.
‘정수리.’
쩌어어어어어엉―!
왼팔과 북명검을 교차시켜 받아냈다.
몸 안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팔뚝이 비스듬히 꺾여 인대마저 늘려 버렸다.
뇌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법력이 순간적인 충격량을 완전히 삼키지 못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통증이 머리까지 치달았다.
[호오.]기색은 달랐다. 마광익주는 무심한 얼굴로 검을 떨쳐냈다. 능법광륜기와 정가동공으로 몸을 보하면서였다.
꽃잎처럼 흩날린 잔여 경파가 검객의 자태를 돋보이게 만드는 가운데,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린 제갈가주가 검지 손가락을 위로 까딱였다.
다른 손으로 일으킨 다섯 줄기 실타래의 감옥에서는 진명조가 흐릿한 묵빛으로 움직이며 절기 시전을 방해받고 있었다.
앞서 당한 부상이 터졌는지 새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아귀를 모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검을 쥔 듯했다.
‘진 선배님이 만전이면……!’
정연신의 발꿈치에서 공력 파동이 폭발하기 직전.
제갈가주의 손짓에 자웅신편이 반응했다. 빛살처럼 빠른 탓에 분절되어 보이는 손가락질이었다.
두 줄기가 서로 부딪치자 전광이 번뜩였고, 한 줄기는 무지막지한 강격으로 땅을 내려쳤다.
콰지지직! 쾅―!
마찰에서 비롯된 벼락이 시퍼렇게 몰아쳤다. 투석기마냥 강력한 힘으로 튕겨 나온 바윗덩이들과 함께였다. 무시무시한 경력이 실려 있었다. 마주한 정연신의 왼손에서 상시 환강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굵은 돌 부스러기들이 불통에 섞여 비산했다.
‘이래선 상성이 무용지물이야.’
눈을 가늘게 뜬 정연신이 북명검을 고쳐 쥐는 와중이었다.
얼굴 살갗이 찌릿해지는 동시에 또 한 번 전격과 바위 조각들이 폭발했다. 재앙마냥 눈을 채우는 공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연신 터지는 충격파가 엄청났다.
전쟁터 한가운데로 떨어진 듯했다. 모든 방위가 투로처럼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술법 공격초를 마광익주에게 직접 가하지 않는다. 파훼 불가의 여파에만 힘을 싣는 것이다. 무공 생사결에 있어 제갈무후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허나 정작 그의 시선은 정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창의 신선이 된 악수림의 흐릿한 몸놀림을 좇는 눈동자가 녹색 광채로 빛났다.
자웅신편의 실타래 대부분이 그녀와 충돌하고 있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사방으로 지진이 번졌다.
쩌저저저정―!
경천동지.
말 그대로였다.
하늘과 땅이 떨었다. 정연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싸움이었다.
[역시.]그리고 마침내.
[너부터다. 입황신창.]제갈가주가 아래로 내려온다. 품이 넓은 소맷자락이 거대한 백학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사박.
고아하게 땅을 디딘 발끝에서 어둠이 일었다. 불현듯 칼을 땅에 박고 선 정연신을 보면서다.
하늘을 덮은 제갈가주의 영역이 조금 더 희미해졌다. 몸과 일체화시킨 술법진의 힘을 크게 끌어 쓴 걸까.
무언가가 전개됐다.
극히 짧은 발 디딤 한 번이 자연지기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벼락이 줄기줄기 떨어지는 것마냥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허공이 군데군데 극렬하게 일그러지더니, 정연신이 북명검을 치켜든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망막에 마지막으로 맺힌 건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진법! 진법이야! 통천영락진(通天零落陣)……!
‘악 선배.’
삽시간에 암흑이 드리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선명한 단절이 인식됐다.
정연신은 곧장 체내외를 관조했다.
심장에서 회전하는 광륜, 여전히 탄력적인 전신 경맥과 세맥, 뜨겁게 달아오른 근육 뭉치의 박동, 들숨과 날숨의 길이 차이, 바깥의 인기척…….
‘환영이 아니야.’
시천법을 강하게 발동하자 푸른빛이 희끄무레하게 일어났다.
명암이 선명해졌다. 어두컴컴한 하늘처럼 주변을 둘러싼 공간이다. 거리감이 이상했다.
스악!
진각을 디디면서 검을 내쳤는데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살갗을 스치는 공기만 희미하게 일렁일 뿐이었다.
그렇다. 제자리다.
신검처럼 날을 세운 정연신의 감각은 현 상태를 제대로 파헤쳤다.
‘통천영락진이라고?’
익히 들었다. 제갈세가의 가솔 전원이 본가에서만 펼칠 수 있다는 비전 진법. 지금 제갈가주에게서 일대일 상황을 만드는 데 쓰였다.
술법 무공계에서는 화산파 매화검진이나 무당파 현허검진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절기일진대.
됐다. 알 바 없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두웅―
손을 한 번 움켜쥐자 몸속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체내에 휘황찬란한 빛이 일어났고, 십이경맥과 전신 세맥을 타고 거력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큭!’
핏줄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이전보다 심했다. 조카 혜아의 영약을 구하러 갔을 때와 지금 사이에 축기량의 간극이 있는 까닭일까.
증강된 힘에 비례하는 무리가 끼쳤다. 몸 안으로 여과 없이 환강을 받아낸 듯했다.
발동을 거둬야 하나 고민한 순간.
십이경맥과 삼백육십오 혈도가 부드러운 질감으로 조여들었다.
그가 아는 따스함 중 가장 오래된 느낌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를 꼭 껴안는다. 어머니. 완성과 동시에 대성을 이룬 정가동공의 오의였다.
콰아아아―!
보신의 공능이 몸속에서 일어난 균열을 감당했다. 경맥과 세맥이 전신 환강의 격렬한 힘을 그대로 머금는다.
‘환강, 종극뢰.’
발밑의 용천혈에서부터.
우웅―!
공력 파장이 동심원의 형태로 수십 겹씩 퍼져 나갔다.
몸에서는 흐린 빛무리들이 커다란 잎사귀의 형태로 너울졌다.
바깥으로 무지막지한 진동을 내뿜으면서였다. 빛깔이 없는 벼락처럼 작렬하고 있었다.
이윽고.
화악!
반투명한 꽃봉오리가 정연신의 전신을 완전히 둘러쳤다.
‘어머니.’
제 한계를 파훼해 주십시오.
그는 천천히 한 걸음을 뗐다. 악수림을 향해서다.
발밑의 진흙땅이 벽력탄이라도 맞은 것마냥 크게 패이고, 큼지막한 꽃망울에서 천둥 같은 울림이 번져 나왔다.
곧이어 온몸을 감싼 꽃봉오리가 활짝 갈라졌다.
우우우우웅―!
어둑한 하늘의 정점에서부터 광채로 일어난 균열이 팔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종극뢰의 개화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대하게 내려앉는 결계의 잎사귀들.
아래위로 격하게 부딪친 공력의 파편들이 언뜻언뜻 자색빛 불똥을 튀기다 바스라졌다.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정연신의 눈이 붕괴로써 낱낱이 드러나는 진기 구조를 받아들였다.
쿵―
하늘이 열린다.
[음?]제갈가주의 의념이 강하게 웅웅거렸다. 크게 술렁거리는 주변의 인기척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