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94
◈ 융단 (3)
허공에서 충격파가 수차례 번졌다.
우우웅―
불청객에게 밟힌 묵빛 화살이 격하게 떨렸다. 위에서 내리누르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거무스름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공력 파동.
기이한 일이었다.
암야전의 소전주는 막 난입한 적의 기척을 정확히 헤아린 직후에 활시위를 놓았다.
암야 무맥의 순황구휘궁법(侚凰驅暉弓法)은 성취에 편법이 허락되지 않는 정통 무공이다. 다수 십삼천의 패도적인 공부들과는 달랐다.
인내의 무학. 화살을 한 번 쏘아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정교한 초식이었다.
‘어찌 움직였기에……?’
소전주의 눈이 불청객을 훑는다.
타점은 물론이고 명중의 시점마저 예견되어 있었다.
몸이나 다리도 아닌 발밑에 화살이 놓여 있다는 건, 상대의 보신경이 찰나지간에 기묘한 조화를 부렸다는 걸 방증한다.
몸놀림이 시간을 어그러뜨리기라도 한 걸까.
소전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자는 소림의 방장이나 천극문주가 아니다.
어릴 적 무(武)로써 존귀해진 그들을 본 적이 있기에 알 수 있다. 연배로 따지면 불청객이 훨씬 낮다는 느낌이 왔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젊은 사내에게 밟힌 화살이 크게 움찔했다. 그것은 이내 느릿하게 수직으로 기울어지더니, 이윽고 대리석 바닥을 뚫어버리며 그대로 처박혔다.
쾅!
화려한 깃으로 장식된 꽁지가 부르르 떨린다.
순간 빛바랜 씨족의 왕손은 직감했다. 불청객이 잠시나마 다리의 공력 파동 아래에 화살을 가두고 있던 이유. 궁격(弓擊)의 화살 경파를 요리마냥 음미한 것이었다.
화살대에 실린 발경력의 묘리와 구조를 기감으로 낱낱이 훑은 듯했다.
저자는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기이한 감흥이 소전주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멸문지화를 앞두고 예를 차릴 필요는 없겠지.”
“…….”
소리 없이 내려선 청년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자욱한 분진을 타고 흘러들어온 햇볕이 그의 이목구비를 몽환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와중이었다. 앞서 보인 몸놀림과 같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얼굴선.
소전주는 잠시 침묵했다. 화살을 쏘기에 앞서 상정한 용모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활을 장전하고 있던 수하가 낮게 외쳤다.
“어느 안전인 줄 모르는 게로구나! 제아무리 적대 문파라 한들 법도를 안다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놈은 스스로 격 없는 무뢰한임을 알고 있는가…?!”
암야전은 빛바랜 씨족의 적통을 모시는 대문파다. 소전주의 오른팔이라면 왕손의 심복과도 같다.
문무에 두루 능통해야 하는 신분. 바깥으로는 주군의 말을 수시로 전한다.
그는 언행에 무게를 싣는 술법무공에도 통달했는데, 들은 이로 하여금 한 번쯤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기예였다.
경황 중에 정신이 없을 소전주가 다시금 활을 장전할 시간을 버는 게 가능했다.
말을 끝맺은 수하가 곧장 소전주를 돌아보며 눈짓할 때였다.
퍼어억―!
소전주의 활대가 박살 났다. 멀리 있는 불청객의 검지에서 지풍이 뻗어 나온 직후였다. 수하는 먼지처럼 치솟는 나무 부스러기들을 망연히 바라봤다.
무시무시한 자기 확신이었다. 자신의 성품에 일고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극도로 패도적인 성품.
어느 쪽이든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스스로 무뢰한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든, 결코 그리 생각지 않는 것이든.
‘저자에게는 정신을 도모하는 상승의 술법무공이 쉽게 통하지 않겠구나…!’
무위부터 문제였다.
방금 활을 박살 낸 지풍은 정말로 섬광 같았다. 내공의 수발 속도에 범접하기 힘든 격차가 존재했다.
소전주는 수하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몹시 드문 절세의 안법이 느껴지는구나. 이미 저자의 시야에 놓였다. 섣불리 출수하지 마라.”
“그 새.”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신이 입술을 뗐다.
“괴흉조인가?”
소전주의 어깨를 딛고 선 새가 제자리에서 날개를 들썩였다. 회색 깃털 몇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자그마한 학처럼 생겼다. 깃의 빛깔이 다를 뿐이었다.
“아.”
소전주의 입매에 희미한 호선이 맺혔다.
“이 아이가 목적이었나.”
“암야전주에게 서찰을 보낼 때 쓴다던데.”
정연신의 투명한 시선이 소전주에게 꽂혔다. 순순히 내줄 성싶으냐 따위의 말을 불허하는 눈길.
소전주는 그를 아랫사람 보듯 물끄러미 응시하는 한편으로 내심 침음을 삼켰다.
‘분명히 검을 쓰는 자이거늘…….’
검권의 너비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초식의 범위가 자신이 뒤에 둔 태사의는 물론 전각 너머에 이를 듯싶다.
가늠 불가.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별호를 대면 모르는 자가 없는 절세 검객들에게서다.
제각각 동산을 베는 검기, 절세 어검술, 축지법에 가까운 보신경 등을 지닌 자들이었다.
소전주의 무공 성취와 자질은 동년배의 십삼천 후기지수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였지만, 지금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괴흉조의 목을 꺾고자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자신의 목이 날아가리란 느낌이 왔다. 족히 칠 장은 떨어져 있는 거리인데도.
씨족의 왕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입황성 마광익주.”
정연신은 천천히 대답했다. 소전주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무위가 풍문을 뛰어넘는구나. 기백과 성품도 인상적이다.”
“안법의 성취가 깊군.”
“천것에게 듣는 칭찬이 기껍다니, 기분이 묘하구나. 괴흉조를 빼앗으러 온 것이겠지? 곱게 내어주면 물러날 텐가.”
소전주가 물었다. 순간 밑에 있던 심복의 고개가 그를 향해 홱 돌았다.
암야전주에게 직접 서찰을 전달하려면 괴흉조를 통할 수밖에 없다. 귀하디귀한 영물인 동시에 암야전의 신물이다.
문주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무공과 존귀한 혈통을 고루 갖추어야 부릴 수 있고, 그렇게 길들여진 괴흉조는 주인들이 어디에 있든 찾아가는 습성을 지녔다.
길을 잃거나 맹금의 먹이가 되기 십상인 전서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문도들의 피해가 크다. 지금도 참혹한 기파가 땅을 울려대는구나. 그래도 명족이 섞였다고 초목에는 손대지 않아 다행이라 할까.”
소전주가 조곤조곤 얘기했다. 심복은 고개를 숙였다.
“착각을 하는군.”
정연신이 말했다. 그는 괴흉조와 소전주의 머리를 이어붙이고 있는 영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말로만 듣던 고독(蠱毒)이 저러할까. 명족의 비술이다. 소전주의 목을 날리면 괴흉조가 죽으리란 느낌이 있었다.
“착각?”
“너희는 수탈을 일삼은 대역죄인이다. 여기서 참형을 면해도 추포를 피하지는 못해.”
정연신이 말했다.
그는 소전주의 언행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바깥에서 굶주린 이들을 무수히 봐 온 까닭이다.
나라에 닥친 기근은 흑색 집결에 비할 바 없는 천재지변인데, 무장 호족에 가까운 다수의 무림 방파들은 약탈로 제 배를 불렸다. 암야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 기어이 입황성이 본전에 당도한 게야.”
소전주는 느릿하게 부러진 활대를 쓰다듬었다. 몹시 고아한 손길이었다.
쿠구궁―
굉음이 점차로 가까워졌다. 무지막지한 진동이 대전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격변이 십삼천을 찾아왔다.
열둘의 흑색에, 눈앞에 서 있는 검객.
정연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항복을 종용하고 있었다. 압박감이 엄청났다. 소전주는 끝내 동강 난 활대를 툭 떨어뜨렸다.
“우선 추포해 주게.”
* * *
소문이 폭풍처럼 퍼졌다.
사천에서 벌어진 운회봉 대회전. 전투의 내용과 결과에서 비롯된 여파가 컸다. 몇몇은 졸지에 이름이 더욱 알려져 강호의 표적이 될 정도였다.
섬예 무맥이 대표적이었다.
“다 끝났다잖아요! 너무 늦었다고요!”
흰 무복의 소녀가 자조적으로 외쳤다. 길게 땋은 머리칼이 준마 위에서 흔들렸다.
백묘 신소빈이었다.
양옆으로 메마른 숲이 펼쳐진 관도.
푸른 영웅건을 이마에 맨 헌원창이 선두에서 고개를 저었다.
“대주의 경공이 너무 빠른 걸 어찌하나. 말을 타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데.”
“하잘것없는 청색과 백색들이 발목을 잡은 까닭이지.”
새파란 장포를 침의마냥 어깨에 대충 걸친 사내가 나른하게 비꼬았다. 마광익의 태염룡. 눈 밑으로 희미한 음영이 내려와 있었다.
신소빈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요?”
“축기량 덕분이다만, 본 공자의 경공은 대주와 비교해도 크게 처지지 않아. 먼저 출발했으면 진작 내려와 있었겠지.”
“어이가 없네. 경공만 재빠르면 끝이게요?”
“하수의 혀가 길구만.”
“결국 대주님이랑 먼저 만나는 건 저였을걸요? 주정뱅이에 양귀비쟁이를 겸하는 한량보다야, 섬예 무맥의 수제자가 훨씬 더 착실히 움직였을 테니까.”
“수제자라…? 염강(炎江)에 입문은 했나?”
“방계 무공에는 눈길이 안 가더라고요.”
“청산유수로군. 차기 대설검이 여기 있었어.”
헌원창은 끼어들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정연신의 무공은 짧은 합 나눔을 오의로 삼는다.
애송이와 양귀비쟁이가 뭐라 떠들든 광예결을 발군으로 쓰는 자는 정해져 있었다.
“대주의 소식이 본성에 들어갔을까 모르겠구려. 우리가 접한 지 이레쯤 되었으니, 슬슬 양양에도 폭풍이 당도할 법한데…….”
“몸을 둘로 나누고 싶어요.”
“왜?”
“원로원주님 얼굴을 꼭 봐야 하거든요. 저는 아직도 잘 안 믿기는데……!”
“지금 당장은 본성에서 격론이 오가고 있겠지. 흑색 집결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시원하긴 해도, 분명히 미친 일이니까.”
그들의 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간혹 남하하는 속도가 늦춰지기도 했다. 정보력과 눈썰미, 크나큰 담량을 두루 갖춘 고수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가 많아진 까닭이었다.
“입황성, 마광익인가?”
“그런데?”
“용모를 보아하니 황보세가의 망나니겠군. 네겐 용무가 없으니 물러서라.”
“뭐?”
“섬예 무맥을 익힌 자가 나서라. 금시문의 봉황을 패사시킨 무공을 직접 봐야겠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염룡의 눈매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어두운 눈그늘이 조금 더 짙어지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관에 몸을 누일 듯했다.
그와 반대로 전신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옷자락을 흔들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내겐 자격이 없었군. 결례를 범했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검객이 포권을 취한 뒤 물러갔다.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었다.
땅이 넓은 만큼 온갖 군상이 존재했다. 풍문에 밝다 한들 자신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자는 드물었다.
고작 셋이서 일조를 구성한 탓도 있었다. 청명과 백미려를 위시한 마광익의 중견 고수들은 돌연 웬 감찰어사의 서신을 받고 북경으로 올라갔다.
정연신의 안위를 확인한 이후의 일이었다.
신소빈의 미간이 모였다.
“쫓아가서 본보기를 보여주는 건 어때요? 한두 번도 아니고.”
“효수라도 할 테냐?”
낯선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
일행은 기민하게 고개를 위로 올렸다.
호쾌한 인상의 미남자가 나뭇가지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데, 기파 따위의 존재감을 일절 내뿜지 않았다.
식견 있는 고수라면 누구든 짐작할 만했다. 반박귀진의 경지였다.
신소빈과 헌원창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사내의 헤아리기 힘든 경지 때문이 아니다. 얼굴. 태염룡과 놀랍도록 닯은 이목구비 탓이었다.
사내가 웃었다.
“마광익주에게는 교룡의 진법에서 신세를 졌지. 이제 보니 후학마저 닦아 뒀군. 참으로 놀랍다.”
“…누구쇼?”
태염룡이 멀뚱히 물었다.
“너희 대주의 말을 전할 겸, 손주 놈의 얼굴을 보러 왔는데…… 잘못 찾아온 모양이다.”
신수혜왕 황보곤이 말했다.
* * *
암야전의 본단.
명류대주가 회색 숲에 남기로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을 포승줄로 묶어 관에 넘기기 위해.
끝이 아니었다.
빛바랜 씨족의 민초들을 피신시키는 데 동원된 무인들이 많았다. 입구의 반대 방향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무형의 진법에 막혀 있는데, 대주들의 초식을 몇 번이고 견뎌냈다. 대문파에 으레 존재하는 법보의 힘을 모조리 몰아넣은 듯했다.
“섬예야, 네가 해 볼래? 뚫는 건 시간 문제이긴 한데.”
“괴흉조와 소전주의 감응을 먼저 끊어 보겠습니다. 단주님의 안위가 우선이니까요.”
“일단 돌아서 가 볼게.”
그 와중에 소전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살짝 반개한 채 천룡대주의 분근착골마저 버텼다.
정연신은 알면서도 물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천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소전주가 담담히 뇌까릴 때였다.
전각 바깥으로 나온 그들이 서 있던 숲.
화아아악―
불현듯 하늘이 좌우로 갈라졌다. 광활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진법이 뒤쪽에서부터 완전히 찢긴 것이었다.
“암야전이 맞는가 보오.”
“그런 듯합니다.”
늙수레한 여인의 음성과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둘의 인영이 햇빛을 등진 채 날아왔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승포와 도포가 길게 휘날렸다.
강호에서 가장 존귀한 자들.
무거운 기파가 허공을 넓게 감싸며 내려앉는다. 몇몇 흑색의 눈이 커졌다.
“요양을 마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처럼 일찍 떠날 줄 몰랐네.”
“패협의 핏줄, 운회봉 대회전의 공적을 헤아려 봤지. 자네는 화산지약의 적통 계승자가 맞아.”
아미와 청성.
구파의 장문인들이 능공허도로 정연신의 앞에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