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34
◈ 대종사 (8)
* * *
분홍빛 장포를 걸친 사내가 검 한 자루로 이무기를 잡고 다닌다는 괴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그저 흔히 흘러가는 낭설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풍문을 입에 담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녹옥검장을 휩쓴 소식은 그에 비할 바 없이 거셌다.
―입황성과 점창파가 무공 고하를 가린다!
양측 대방파가 모든 배분의 고수들을 쏟아낸다. 문파의 미래라 불리는 후기지수부터 자색 절세고수와 검의 신선까지.
큼지막한 장원이 들떴다. 높이 솟은 담장 바깥에서는 놀음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머나먼 진한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도박이 대전(大戰)의 향방을 두고 일확천금의 기회를 자아냈다.
젊은 대종사가 이끄는 강대한 무맥이 구파의 천년무공에 맞서는 구도.
섬예 무맥의 고강함은 익히 알려졌다. 이제 등봉현의 어떤 호사가도 정연신이 창안한 무공들을 낮춰 보지 않는다.
그저 강호 최상층부의 우열을 두고 소란스럽게 갑론을박을 벌일 뿐. 많은 이들이 그 속에 섞여들었다.
하지만 마광익에게는 뒷전인 일이었다.
“지금껏 치른 비무가 전부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파백총람을 써선 안 돼. 상대가 구파잖아.”
커다란 석제 원탁.
외눈의 명족 청년이 느긋하게 얘기했다. 저마다 원탁 앞이나 방바닥에 걸터앉아 있는 마광익 무인들을 향해서였다.
청안마검 청명의 품행은 언제나 그랬듯 여유로웠지만, 그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세는 맑고도 차가운 북풍 같았다.
“파훼식은 죽여야 할 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이런 곳에서 섣부르게 꺼냈다간 강호 공적이 되고 말아. 특히 우리 대주님이 말이지. 그러니까 질 것 같으면 차라리 깨끗하게 패하라고.”
마광익 무인들에게 주의를 주듯이 말한다.
파백총람은 중요도 아홉 등급 중 상상(上上)에 해당되어 본성 흑색만 열람할 수 있는 비급이다.
하지만 정연신은 헌원창의 입을 빌려 마광익 무인들에게 다수의 정파 무공 파훼식을 가르친 지 오래였다.
비급의 증여와 함께 벌어진 일이라 총관부가 어찌할 수도 없었다.
원탁 한쪽에 앉은 백미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순수한 무공으로만 이겨야 의미가 있는 비무결이다. 그러지 않으면 뒷말이 나오기 십상이야.”
“맞아. 여긴 고리타분한 정파 강호라서.”
청명이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치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정연신이 앉아있었다.
청안마검과 일련검매가 그를 보좌하는 모양새로, 머지않아 보기 힘들어질 광경이었다. 마광익주가 자색으로 올라선 까닭에.
“신선들의 세상에서 유유자적하는 구대문파를, 우리 대주가 창안한 무공으로 거꾸러뜨린다……?”
태염룡이 푸른 양귀비 줄기를 손가락 틈새로 이리저리 굴리며 중얼거린다. 원탁에서 멀리 떨어진 벽면에 대충 등을 기댄 채다.
그는 그동안 한 번도 화산지약의 비무에 나서지 못했는데, 그 탓에 종종 시답잖은 말을 던지며 정연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주지시키곤 했다.
“굉장히 재미있을 텐데.”
태염룡의 뇌까림을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상석에서 정연신이 천천히 입술을 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을 정했다.”
옆자리의 백미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반투명한 기막이 걷혔다. 동시에 내실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의 널찍한 대청에 줄지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무인들이 고개를 든다.
섬예 무맥이었다.
정연신이 세 명의 이름을 말했다.
장내의 반응이 엇갈렸다. 수십 명의 면면에서 희비가 교차했고, 태염룡의 손아귀에서는 녹빛 이파리가 바스락 구겨졌다.
“이의 있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쪽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장내를 관망하던 나락살 마진의 질문인데, 그 품행이 재주가 많은 학사들을 내려다보는 폭군 같았다.
누구도 손을 들거나 대답하지 못했다.
“안건을 이어 가겠다. 인선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비무 당일까지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를 일이니.”
곧이어 마진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가 정연신에게 고개를 돌린 까닭이었다.
“초식의 세세한 파훼가 힘들지언정, 방파대전 상대 문파의 고수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두루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주로 쓰는 무공, 비무대전에 나설 만한 인물들… 이 비무회에 참석한 모든 문파들이 이와 같이 분석하고 있겠지요. 본성 역시 많이 파헤쳐졌을 겁니다. 구파쯤 되면 섬예 무맥에 대한 대비책이 이미 나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정연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공석인지라 하대였는데, 그 언행이 무척 어울렸다.
마진은 깊은 우려와 온정이 함께 담긴 눈빛으로 자신의 조카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색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나올 게 분명하다 할 수 있는 인선은 하나입니다. 검후 금선선 외에는 자색의 면전에서 검을 뽑을 자가 없지요.”
검후.
구파의 장문인.
몇몇 무인들이 침음을 흘린다.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도 그런 반응이다.
구름 위를 올려다보면 누구나 잠시 머리가 아득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점창파의 무공은 구파 중에서도 유별나게 공격적입니다. 점창 비전의 사일검법에는 뒤가 없지요.”
“모든 절초가 찌르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인가?”
정연신의 물음에는 희미한 흥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젠가 점창의 소검후와 만났을 때 척초(刺招:찌르는 검초)에 관심을 둔 적이 있다.
또한 검뢰섬릉식에는 아직 칼끝을 내지르는 초식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본성 총관부가 판단하길, 패도적인 검력(劍力)으로 따지면 구파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라고 합니다. 천년 내가공부를 일점(一点) 집중의 검격에 싣는 종자들이니 약해선 안 되겠지요.”
“일점 집중… 어느 정도로?”
정가장 시절부터 구파의 신선들을 동경해 온 정연신이다. 이야기에 몰입하자 자연스럽게 말이 더욱 짧아졌다.
그 찰나 마진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지만, 그는 실내에서 남빛을 발하는 조카의 옷자락을 보자마자 심오한 고찰에 빠진 듯 시선을 살짝 내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손발을 제법 잘 놀리는 점창 제자와는 겨룬 적이 없어 확언하기 힘듭니다만, 구파의 장문인쯤 되는 절세고수가 시전한다면 어지간해선 방어초가 무의미해지겠지요.”
“방어 불가?”
“삼불지검(三不之劍)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 가지가 불가능하다?”
그때 두 사람의 이야기에 눈을 빛내고 있던 헌원창이 얼른 끼어들었다.
“점창 장문인의 검공을 일컫는 얘기지요. ‘달아날 수도, 튕겨낼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이기려거든 그보다 먼저 도달해야 하는데, 해를 꿰뚫는 검은 새벽빛처럼 쾌속하여 도무지 당해낼 도리가 없구나’… 십여 년 전 운남에서 독공으로 황제 행세를 했던 암천제(暗天帝)가 남긴 말입니다. 독곡(毒谷) 출신의 무시무시한 절세고수였다는데, 점창 장문인과 일곱 합을 겨루고 죽었지요.”
정연신이 고개를 주억였다.
“유언이 길군.”
“실은 앞의 한 구절이 전부였습니다.”
“삼불(三不)?”
“예, 원문은 운치가 없어서…….”
잠자코 듣던 마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정연신은 헌원창의 뒷말을 사일검법에 대한 통찰로 받아들였다.
검후의 칼놀림이 삼불지검이란 말 그대로라면, 그보다 빠르면서도 검로를 가장 짧게 가져가는 척초(刺招)가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일 것이다.
문제는 천하에 그런 검법이 존재하느냐였다.
섬예 무맥의 백색무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삼불지검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검후야말로 무적이 아닙니까?”
이제 어엿한 청색무사로서 태염룡의 위신을 넘보는 헌원창이 검지를 들어 좌우로 저었다.
“구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본산 인근에서 무적자로 통하네. 무공의 초월자들끼리 겨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인물은 극소수라고 봐야지. 물론 이제 곧 많은 이들이 그것을 보게 될 걸세.”
곧이어 젊은 대종사를 향해 쏠리는 시선들.
몇몇 눈길이 심려를 띤다. 신임 자색의 무위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저마다 정연신의 연배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는 약관도 되지 않은 인물이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마진이 미간을 모았다.
“너희가 염려할 계제는 아니지. 상대는 구파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제 몫을 다할 궁리만 해도 모자라다.”
“승산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도가 있다.”
정연신이 말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곧이어 주변을 담담하게 쓸어 본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수련.”
한마디였다. 굉장한 것을 입에 담았다는 감회가 묻어났다. 찰나지간 장내로 흘러들어오던 바람이 몹시 청량해졌다.
정연신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폐관에 들어간다. 너희들의 성취도 기대하겠다.”
폐관이란 단어에 드물게 힘이 실렸다. 돌원숭이들의 화과산에서 불 피우는 법을 설파하는 느낌으로 말한 것이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신은 경직된 분위기를 마땅한 경외로 받아들였다.
* * *
여느 때와 달랐다.
이제까지 정연신의 무공 창안은 사후(事後)에 이루어졌다.
어떤 일을 직면한 뒤에, 그 경우를 영감으로 삼거나 당장 해법을 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뒤에야 절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파훼법이 아니라 공격초를 미리 준비한다면 어떨까. 이토록 평화롭고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
후우―
입황성 처소의 지하 내실.
정연신의 숨결을 타고 흐릿한 먼지가 번졌다.
소림 속가 출신의 대부호들이 지어 올린 녹옥검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숭산 소림을 향해 온 강호가 모여들 일이 한 번은 있으리란 것을 상정한 듯, 이 순간 정연신이 서 있는 지하 바깥에선 미미한 기척만 느껴질 뿐이다.
대문파의 수장 격 절세고수들을 위해 갖춰 놓은 공간이라 했다.
스릉.
신검 여뢰를 뽑아 내렸다.
전신의 감각이 곤두섰다. 별무리처럼 내실을 떠다니고 있는 먼지들이 알알이 느껴졌다.
‘점창 사일검법… 삼불지검.’
그의 강호행은 삶에 쫓기는 과정이었다.
긴 세월에 걸쳐 앞서 간 이들을 따라잡고자 질주하는 달음박질이기도 했다. 그가 지닌 모든 무공들은 그 과정에서 움텄다.
하지만 작금의 정연신은 자색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궁지에서 상단전을 굴리고 싶지는 않았다. 앞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견주어 보는 거지.’
자신에게 천하목의 과실을 취할 자격이 있는가.
언젠가 입황성주에게 열매를 건네받고, 그것을 온전히 감당하여 천명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키이이이잉―!
심장에 깃든 빛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두 겹 중 한 겹의 광륜만 회전했다.
비역에 다녀온 이후 희미하게 생성된 바깥의 고리는 당가 쌍둥이들의 몫이었다.
능법광륜기가 오른팔 경혈을 가득 채웠다. 검파를 쥔 손아귀에서 콰드득 소리가 났다.
증대된 악력이 팔과 검을 하나로 이어붙인다. 패도적인 신검합일이었다.
정연신은 가벼운 손짓으로 검을 뻗었다.
스윽.
느릿한 찌르기. 여뢰의 검극이 먼지를 가르며 나아간다. 칼날을 무수히 스치는 알갱이들이 검신을 타고 팔까지 올라왔다.
한 알 한 알이 먼지보다 훨씬 작고 바람결보다도 극히 미세한 무언가였으나, 정연신의 감각은 그 모든 것들의 움직임과 무게를 헤아렸다.
그는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비유혈(脾腧穴)과 지정혈(支正穴).’
팔꿈치 위아래 혈도의 수축과 이완을 느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극쾌(極快)의 찌르기를 얻으려면 느림을 지배해야 했다. 직감의 영역에서 그런 느낌이 왔다. 그것은 타고난 자질이었다.
후웅―
이따금 찌르는 동시에 허리를 틀면서 요추 주변의 경혈과 근육을 관조하기도 했다. 그 모든 동작이 느릿하게 이루어졌다.
허리에 반동을 거는 전사경, 오른팔을 앞으로 뻗는 순간 그 경혈에서 진기의 중첩을 일으키는 시극경, 온몸에 힘을 준 순간 모든 동작에 탄력을 일으켜 주는 심극기린.
자색의 장포 자락이 스스로 마찰하면서 소담스러운 소리를 냈다.
묘리를 엮는 데 막힘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잘 담겼다.
‘먼지가 방해되는군. 검속(劍速)을 줄이고 있어.’
순간 정연신은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환익보였다.
화아아아아악―!
발끝에서 일어난 경파가 대기를 좌우로 가른다. 마치 반투명한 파도가 두 갈래로 벌어지는 듯한 광경. 평상시의 환익보와는 달랐다.
상대의 기세를 겨냥한 보법이 아니다. 살갗에 거슬리는 것들을 양옆으로 치워버린 것. 공허의 무리(武理)였다.
찰나지간 그 사이로 검을 찔러넣고 끄집어냈다.
훨씬 쾌속했다. 검극으로 집약되는 힘이 달랐다. 근육에 들어가는 부하도 그러했다.
‘몸의 균형을 달리해야겠군.’
자색의 체면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시 반복했다.
환익보를 딛고, 허리를 틀어, 검을 앞으로 찌른다. 원숭이도 하품할 만한 기본공.
정연신은 무료함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동작을 일검으로 관통하기까지 조율해야 할 균형감, 힘의 배분, 진기의 흐름이 제법 복잡했다.
겉보기에 한 번의 칼질로 끝나는 일이 몸의 내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전신 경혈이 점차 폭발할 듯 팽창해 갔다.
시야가 감각 속으로 일그러진다. 천천히 무아지경에 빠졌다.
‘축마경.’
잘 담겼다.
‘등허리와 팔꿈치에는 환강.’
무리없이 스몄다.
‘원거리일 때는… 환익보로 한 발 딛고, 십리광요로 추진 경파를…….’
여반장이라 할 만했다.
‘검로는 일직선. 힘의 방향은 상황에 맞춰서, 구결은 감각에 맡긴다.’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단 한 줄기를 그리는 검로가 점차로 완성되어 갔고, 이내 그 궤적은 본래 그의 손아귀에 있었던 초식처럼 익숙해졌다.
“아.”
정연신은 문득 고개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밤하늘이 밝았다.
달은 없었다. 천지의 어둠을 가득 채운 별빛들이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칠흑 속에서 희게 아롱지는 모습들이 몹시 아름다웠지만, 별무리는 지하 내실의 먼지들만큼 빼곡하지 않았다.
살갗이 간질거렸다.
잠시 밤하늘과 묵묵히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습한 공기가 별들의 숨결인 양 살갗으로 내려앉았다.
사일검법은 태양을 꿰뚫어 떨어뜨리는 검이라 했다.
정연신에게는 그토록 환한 빛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저 중에 한 쌍으로 떠 있을 당가 남매로 족했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지.’
곁에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웅―
손아귀의 여뢰검이 공명음을 토했다. 그의 검초에 심상이 내려앉은 것이다.
무공을 신공절학으로 탈바꿈시키는 영성. 순간 정연신의 뇌리에 패도적인 구결 한 자락이 새겨졌다.
―어떤 별이든 떨어뜨릴 수 있는 검초.
정연신은 자신의 성정과 달리 이기적인 구결을 마음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속으로 뇌까렸다. 거기서 쉬어라.
* * *
입황성과 점창파.
비무대전 당일이 밝았다.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