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21
◈ 노을 (12)
* * *
본래 전후 처리가 전쟁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법이다. 때가 난세라면 더욱 그렇다.
잃어버린 전력, 박살 난 성채와 병장기,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끊기다시피 한 보급… 온갖 막대한 손실들을 어떤 식으로든 채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입황성은 천하에서 가장 큰 방파다.
흉년의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방파대전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기 힘들다. 바로 거기에 입황성의 약점이 있었다. 가진 것이 몹시 많았던 집단이기에.
그렇게 모두가 정신을 팔고 있던 찰나.
잠시 물결처럼 울렁인 햇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는 없어 보였다.
앞서 벌어진 입황대전에서 무수히 많은 내가고수들이 농밀한 진기를 풀어냈던 까닭이다.
햇빛이나 여타 지형지물 따위가 뒤늦게 흐트러지는 일은 예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총관 임진명의 귓가엔 자그마한 울림이 있었다.
―전전대다. 단주 대리에게 긴히 전수해야 할 비전(祕傳)이 있으니, 자색이 본성에 다시 현현했다는 사실만 염두에 둬라. 아주 중요한 것을 잊었지 뭐냐. 한두 식경으로는 모두 전하기 힘든 것인데.
웬 여인의 음성인데, 너무나 당당해서 오히려 광오한 느낌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극도로 섬세한 내공 운용에 갇힌 채 울린 목소리였다.
입황성 내성.
길가에 온통 내가고수들뿐인 상황.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입황성에게서 이득을 취하고자 눈을 붉힌 자들이었다.
그저 저마다의 위치에 걸맞은 격조로 자신들을 포장했을 뿐, 어느새 장내를 스멀스멀 채운 압박감이 존재했다.
“저자가 이곳의 대소사를 모두 관할한다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소. 입황성 대총관이란 자리는 대대로 강호 압제의 중심이었으니… 그뿐만 아니라 자색 위계의 거취와 향후 동선까지 저 머리에 담겨 있을 거요.”
“그렇다면, 마땅한 가문이 없는 섬예 정 공의 혼사도…?”
마치 들으라는 듯이 속삭이는 이들.
여인의 전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엿듣기가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명은 그녀의 내공 기예를 흉내 낼 수 없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어디를 다녀오셨지? 정 공께 긴히 전수해야 할 것은 또 무엇이고…?’
입황대전이 끝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임진명의 상단전은 아직까지도 과열된 상태였다. 당연히 적시에 적당한 반응이 나오기란 몹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전전대 신검단주 신천화.
그녀에게 허락되어 있던 현현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나갔다.
신검단주였던 자의 원영신을 유지시키는 광역 진법에서도 한차례 벗어났다가 돌아온 상태. 실로 많은 것들이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일부 좌중은 그의 모습을 오해한 듯했다. 정왕도 그런 눈치였다.
“과인이 무리한 요구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군. 혹은 염치를 떠올렸거나.”
정왕이 매끄러운 남빛 소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는데, 임진명은 굳이 그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정왕은 고개를 좌우로 느릿하게 틀었다가 살짝 웃어 보였다.
“신검단주 대리라는 것은 아주 모호한 직책일세. 정가 섬예에게 부여된 힘과 권위를 따져 본다면 더욱 그렇지. 마땅히 그의 정당성에 힘을 실어 줘야 하지 않겠나?”
나지막한 저음에, 미미하게나마 좌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몸가짐. 태생부터 존귀한 자의 품행이다.
이 순간 인근을 채우고 있는 빈객들 중 그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없지만, 반대로 여기서 정왕과 대립각을 세우려는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임진명은 그들이 입황대전을 보면서 느낀 바가 무엇인지 꿰뚫어 봤다.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세상.
옛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의 말이 실현된 약육강식의 세태였다. 즉, 몹시 강력한 강호 무뢰배들이 더이상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큰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어 온 천하에 날것의 영향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입황성이 있다.
그 같은 무력 집단을 덮어두고 신뢰하기 힘든 위정자들도 존재한다.
입황성 방파대전은.
완전히 도래해 버린 난세의 일면이었다.
어떤 커다란 화룡점정으로서, 천하의 시국이 달라졌음을 증명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자들이…?’
임진명의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까마귀들이 먹잇감을 찾아 폐허로 몰려든 격이었다. 은근하면서도 강한 압박으로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 다름 아닌 정연신이 어디론가 사라진 틈에.
“그런고로.”
섬예 정연신이 이끌 신검단을 가장 못 미더워하는 자, 정왕 주태일이 말을 이었다.
“혼약을 제안하네.”
“……!”
“자네라면 추진할 수 있을 테지.”
“무슨 말씀을?”
“정왕부의 후계자… 영검군주와 정가 섬예가 맺어진다면, 언제고 왕부를 입황성으로 옮길 용의가 있네. 그래, 장차 섬예를 선조로 모실 입황정가(入荒鄭家)가 만들어지는 걸세. 주씨 혈통과 함께. 당연히 입황제일가를 넘어 천하제일가를 넘보게 될 테지.”
실로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후대 왕부를 입황성에 편입시키겠다는 뜻. 달리 스스로 머리를 숙이는 제안이기도 했다. 곳곳에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무채색의 철탑마냥 표정을 굳히고 있던 임진명의 눈썹도 꿈틀했다. 하지만 정왕은 이제 주변을 돌아보기까지 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
“정가 섬예는 오늘 끝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네. 신검단이란 막강한 집단을 진두지휘하는 데 당장 이의를 제기할 권세가나 황족은 없겠지. 허나 대리란 신분으로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도처에서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네. 책잡기 좋아하는 자들이 새파랗게 젊은 자색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자 할지도 모를 일.”
제안을 확실히 끝맺으려는 걸까. 정왕의 길고도 짧은 이야기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임진명은 즉각 제동을 걸었다.
“본성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정왕은 묘한 웃음으로 그의 말을 넘겼다.
“과인이 아까 정당성을 말했지. 그래… 정당성이 부족하네. 마연적과 용희명이 얼굴을 비추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어. 누구도 그의 단주 대리 신분을 공증해 줄 수 없는 형편이지. 그토록 거대한 싸움마저 벌어진 판국에.”
―그리고 성주께도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걸로 아네.
마지막 말은 전음이었다.
“…….”
임진명은 문득 주변의 인기척을 짙게 느꼈다.
정말로 정연신과의 혼약을 추진할 요량으로 방문한 걸까. 고매한 구경꾼들은 저마다 정왕의 이야기에 대해 동조 혹은 경계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경까지 올라간 궁명왕에게서 ‘정가 섬예는 양양을 벗어나지 말 것’이란 당부까지 전해진 참인데.
내부에서 거듭된 흉년.
바깥에선 북방 강호를 온전히 억누르는 데 실패한 황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투신까지.
진정으로 난세가 도래하기 직전에, 이들은 이제 정연신이란 검을 온전히 쥐고자 했다.
입황성 신검단은 그처럼 광대한 제국 땅을 통틀어 봐도 천하를 뒤바꿀 만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난세에 자생하고도 남을 힘을.
정왕의 마지막 이야기가 그것을 방증했다.
“신검단을 움직이는 자에게 이 나라의 명운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황상께서도 그의 거취를 논하신 바 있으니, 나는 주씨 황가의 오래된 일원으로서 정가 섬예의 거취를 논할 자격이 있네. 그의 신분과 권한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지. 신검단이란 막강한 전력을 한 손에 쥐고도 온 천하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도록… 아!”
문득 스스로 말을 멈춘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과인이 귀한 사람을 혼자 붙잡아뒀구먼. 자네들도 할 말이 있으면 하게. 여기, 이 자리에서.”
끝말에 작게나마 강세가 실렸다.
모두가 눈치챌 수밖에 없다. 웬만해선 나서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뜻을.
하지만 정왕이 양양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운 정연신의 영향력을 역이용할 요량으로 온 것처럼, 당장 입황성에 당도한 빈객들 중 정왕의 눈치를 보는 자는 드물었다.
그런 세상의 그럴 만한 강자들이었다.
“긴히 나눠야 할 말이거늘, 졸지에 경합의 장이 되어버렸군. 나야 아시다시피 이번에 결맹한 휘상대천방(徽商代泉幇)의 방주, 금약란(金藥蘭)이오.”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닌 여인이 먼저 나섰다.
녹색 비단옷에서 은은하게 반들거리는 윤기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 거기에 무형의 기운마저 온몸에 덧대고 있었다.
믿을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상인이라고 무공을 어설프게 익혔다간, 믿었던 표사는 물론 쟁자수들에게도 약탈당하는 세상이었다.
그녀는 빈객들이 어떤 용무를 가지고 왔는지를 대표했다.
“기탄없이 얘기하리다. 내가 직접 정 공과 백년가약을 맺고 싶소. 대총관께서도 아시겠지만, 십 년의 연배 차이는 평생을 헤아렸을 때 아무것도 아니오.”
“…….”
“승낙한다면, 이 입황성과 똑같은 크기, 유사한 효용의 요새를 남직례에 짓고 칼을 몹시 잘 쓰는 낭인들로만 가득 채우겠소. 오직 정 공의 명령만 따르는 세력이 될 거요. 내가 전력을 다할 테니까.”
상상을 초월한 제안이 이어진다.
패악질이 아니다. 입황성이 필요한 것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자들뿐.
섬예 정연신이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난세를 상징한다지만, 천하 각계에서 새롭게 두각을 드러낸 신흥 강자들도 많았다. 비단 금약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투(神偸)의 무맥에서 파문당한 자.
“명족 은자들의 은신처를 발견했소. 무수히 많은 영물들이 있더군. 정 공… 아니, 정 공까진 바라지 않소. 나는 대총관과 차나 한잔 마시고 싶구려.”
부유한 복건 땅의 북부를 다스리는 윤명왕(論萌王).
“정왕은 제 딸을 내세웠으나, 나는 내 스스로 섬예의 옆자리에 설 용의가 있다. 특별히 그의 자식에게 주씨를 하사하마. 내 왕호를 걸고 신검 여뢰가 입신검에 준한다는 시를 써서 만방에 붙일 수도 있겠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심지어 운명왕 주소령과 같은 왕부의 인물들은 특히나 말이 많았다.
“나이가 백 살쯤 차이 나면 일가(一家)에 불화가 생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주 궁합 따위로 길흉을 점칠 필요조차 없을 터, 내 왕부의 첩들을 내치고 그 하나만을 본부(本夫)로 인정할 심산이다.”
임진명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정연신의 그림자를 원하는 이들. 저마다의 입장이 강맹한 발경의 경파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형태로 거래를 걸어왔다.
정연신이 항주에서 천명한 말, 경거망동했다간 강호 문파들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교묘하게 피하면서였다.
양민을 볼모로 잡지도 않는다. 그저 철저히 입황성과 정연신이 필요한 것들만을 파고들었다.
“나는 다르오. 본가의 권보(拳寶)를 받으러 왔소. 언가제일권, 권무공 언화련이 남긴 비급 말이오.”
임진명은 그렇게 말한 거한의 낯이 눈에 익었다. 칠권불태(七拳不殆) 언기보(彦伎寶). 자신의 조카인 언가권룡에게 후계 경쟁에서 패한 인물이다.
별호 그대로 주먹을 일곱 번 뻗기 전까지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지 않는 권법가라 했다.
“맨손으로 오진 않았소. 언젠가 내 누이… 권무공이 정 공의 ‘환강’을 겪어본 경험으로 공월무를 엮고자 한 적이 있소. 그때 누이에게서 받은 서찰을 정 공께 드릴 셈이오. 물론 천하오검에게는 큰 선물이 아닐 수도 있으나, 내 누이의 식견은 권장(拳掌)에 한하여 검성 현소백조차 놀래킨 적이 있소. 분명 도움이 될 거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임진명은 우두커니 선 채 침묵했다. 소란 탓에 빠르게 들이닥친 입황성의 무인들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고명한 인물들뿐이다.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북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시기라서다. 건릉제, 북방 강호, 사도 십삼천의 결집과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지방 호족들의 봉기…….
아무리 정연신이라도 여기서 이들을 힘으로 압제했다간, 단주 대리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요량이 컸다. 이 자리에 있는 주씨 왕과 군구들이 몇 명인가.
임진명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패협 마연적도 이처럼 황권이 요동치는 시기를 살아보진 못했다.
설령 용희명이 돌아온다 해도 막대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곧바로 경질될지도 모른다. 이 나라 황실과 민생에 근본을 둔 입황성의 한계였다.
말조차 꺼내지 못한 몇몇 빈객이 임진명을 흘깃거리며 속삭였다.
“외통수군요.”
“부담이 상당할 거요. 차라리 정 공은 나타나지 않는 편이 좋겠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가 위신이 상할 바엔….”
임진명은 내심 그 말에 동의했다. 드물게 젊은 신검단주 대리. 그처럼 남은 앞날이 아득한 권력자에겐 신분에 상응하는 책임과 체면치레가 따른다.
당연히 자리를 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요절할 인물쯤 되어야 큰 책임이 따르지 않는 법이었다.
‘음…?’
순간 임진명의 머리가 미미하게 옆으로 기울어졌고.
웅웅거리는 음성이 햇살과 함께 쏟아졌다.
[잔칫상이 따로 없군. 참으로 많이들 가져왔어.]“……!”
좌중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홱 꺾어 올렸다. 아무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 위였다.
기다란 산자락이 불긋하게 물들어있는 쪽.
저물어가는 태양 속에 한 여인의 그림자가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자고로 보급품은 적지에서 취해야 제맛인데, 이것도 제법 신선하구나. 제 스스로 굴러들어오다니. 음? 거기 그쪽, 정수리는 무탈한가?]정왕, 영검군주, 금약란, 윤명왕, 언기보, 그리고 완전한 타인마냥 입황대전을 방관하여 전력을 보존시킨 빈객들의 몸에서 흐릿한 동심원이 터져 나왔다.
실로 쾌속한 보신경의 추진 경파였다.
[축역(蓄役). 미옥(黴獄).]쿠르릉!
순간 고드름마냥 땅에서 치솟은 바위들이 그들을 옭아맸다.
쩌저정 하고 유리 조각 부서지는 굉음이 울린 건 물론이다. 저마다의 호신강기가 송두리째 깨지는 소리였다.
노을 진 땅거미에 소리 없이 스미는 진기의 파편들. 더러 몇몇은 그 속으로 핏물을 울컥 토했다. 충격이 뼛골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는 일격이었다.
“어찌…?!”
그들이 만면에 채 경악을 드러내기도 전.
임진명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샌가 웬 지붕 위에 천소소가 정연신의 소매 끝단을 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목령주가 단주 대리의 출진을 말린 것인데, 정연신은 그 손을 떨치지 못했다. 정확히는 방파대전으로 내상을 입은 선배의 몸 상태 탓일 터였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니, 놔 봐요.”
[전부 내놔라.]두 자색의 음성이 겹쳐 울렸다.
삐이이이익!
멀리서 웬 새의 울음소리가 번져 온 것도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