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20
◈ 노을 (11)
어른이란 걱정이 많은 존재였다.
몹시 담백하게 작별인사를 건네 놓고도 별스러운 말이 많았다. 묘한 감상에 빠져 있던 정연신이 혼미한 정신으로나마 얼른 본성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만큼.
용희명과 마연적.
나라의 신검으로 인정받은 자들.
두 신검단주의 공월무를 한자리에서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정신이 몽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별히 예민한 기감을 지닌 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 순간 정연신은 한때 고검진인 앞에서 술주정을 부렸을 때마냥 머릿속이 붕 뜬 느낌이었다.
‘사람의 강호… 내가 맡아야 할…….’
안개가 낀 듯이 흐려진 그의 시야에 여러 광경이 담긴다.
“그쯤 살았으면 영면할 때도 됐소.”
[그 새파랗게 젊은 낯가죽으로 할 말은 아니지. 마가 애송아, 자중하고 문이나 잘 틀어막거라.]마연적과 신천화가 짧은 눈짓으로 서로를 일별하는 모습.
이내 외손자를 다시 한번 눈에 담는 마연적의 얼굴, 그리고 젊고도 패도적인 음성으로 늙수레하게 건네는 조언까지.
“그리 큰 싸움을 치렀다면 잠깐은 여유가 생길 것이다. 적어도 힘 있는 자, 제 알량한 위치를 권력이랍시고 자랑하는 잡것들에겐 더더욱 연신이 네 덕에 얻은 소강상태가 단비와 같을 터. 무인, 상인, 위정자. 이 같은 집단의 수장이란 작자들의 협잡질을 경계하거라. 본성 자색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려는 놈들은 늘 존재해 왔느니라.”
[심지어는 내게 제법 정중히 매파를 보낸 놈도 있었지. 이 애송이, 그러니까 네 외조부가 그놈의 머리를 깨부숴 버렸지만 말이다.]외조부 마연적은 입신검을 두고 겨루게 될 경쟁자가 아니다. 당연히 그의 모든 말은 정연신이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한편 당대 입신검주의 조언도 있었다.
정연신은 스스로 공력을 진동시켜서 일으킨 이명 탓에 웅웅거리는 귀로 신검단 수장의 협잡질을 경계했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네겐 산에 틀어박혀 신선놀음하는 작자들을 꾀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뭐… 성품과 무관하리만치 신령스럽게 만들어진 그 법력 덕이겠지만.”
능청스럽게 신경을 건드리는 어조.
용희명의 목소리는 정말로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반문을 허용하지 않고 이어졌다.
굳이 귀담아듣지 않아도 뇌리에 꽂히는 게, 도발에 능한 언변과 굉장히 깊은 내가공부가 집대성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길 잃은 무당 장문인부터 하산시키는 편이 좋겠지. 제법 큰 힘이 될 거다. 공백을 염려할 것도 없어. 무당산에는 무공을 도(道)와 동일시하는 말코 괴물이 수두룩하다. 장문인 하나에 의지하는 문파가 아니지.”
“길 잃은…?”
“명심해라.”
돌연 용희명의 동공이 또 한 번 위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샛노랗게 물든 눈동자 속에 검 한 자루가 새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신검단주의 검은 베어 가르지 못할 것이 없다. 적들의 신묘한 계책, 아군의 깊은 절망… 모든 게 무용하지. 심지어 태생적인 한계나 하늘이 정해두고 있던 명운마저도 벤다. 그래서 입신(入神)이다.”
곧이어 그가 슬쩍 웃으며 말을 맺었다.
“너라고 다를까.”
그것은 물음이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기를 새삼스럽게 말해준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당연히 반문도 허용되지 않았고, 정연신은 상단전이 몽롱해져 있는 와중에 가까스로 진중한 당부를 전할 수 있었다.
“…단주님도, 외조부님도 마찬가지겠지요. 설령 하늘이 두 분의 성품에 걸맞은 악운을 내린다고 해도, 이런 땅에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아무렴.”
용희명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죽더라도 시체는 남겨야지.”
“시체 말고 입신검.”
“음?”
“입신검… 멀쩡히 가져오셔야 합니다.”
직후 정연신은 까마득한 세 선배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가당찮다는 조소라기보단, 정말로 상당히 즐거워서 터진 날숨인 것 같았다. 그는 경황 중에 중얼거렸다.
“진담입니다.”
곧이어 웃음기 섞인 신천화의 진언이 대기를 매끄럽게 흔들었다.
[이형공허.]정연신은 몽롱한 와중에도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여뢰를 뽑아 올리며 신천화의 이형공허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아득한 압력이 살갗을 짓누르고 온몸을 옥죄는 순간, 그의 흐린 시야가 외조부와 단주의 얼굴로 잠시간 선명하게 채워졌다.
지금도 정연신보다 고강하며 스스로 신검이란 이름을 짊어진 이들.
‘…이쪽 땅이 심연 같다고 해도.’
그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정연신의 시야 바깥에서는.
우웅―
그는 찰나지간 백회혈의 진동을 느끼며 다시금 꿈결 같은 몽롱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호광성 양양.
오랫동안 힘차게 달렸다가 속도를 낮춘 듯이 숨을 몰아쉬는 세 마리의 준마가 있었다.
후욱, 후욱―
거칠어진 가죽 재갈을 타고 허옇게 피어오르는 날숨, 그 준마들이 이끄는 자단목의 호화스러운 마차, 그리고 지면과 고즈넉하게 마찰하다가 이따금 흰 서리 조각을 사방으로 튕겨내는 네 개의 바퀴.
천하제일방파로 이어지는 관도였다.
길고 광활했다.
달리 입황성 무인이 자색의 옷을 하사받았을 때 양민들의 공손한 인사로 점철되는 길.
하지만 지금은 인적이 드물었고, 그나마 길을 걷던 몇몇 양민들은 멀찍이 멈춰선 채 마차를 살피다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누군가에게 마차의 출현을 고하러 가는 것처럼.
마부가 존재하지 않는 마차에서 자연스러운 물음이 흘러나왔다. 앳된 여인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된 걸까요?”
곧장 청년의 것에 가까운 음성이 대답했다.
“난세 탓에 관아의 정보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고 해도, 입황성은 여전히 입황성이지. 방파대전의 전조를 느끼자마자 양민들을 대피시켰을 터. 아마 선목천(仙木川) 인근과 순천로(順天路) 근처는 양양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들은 또 누가 지키고요? 요즘 같은 때에.”
“다수의 백색을 차출했겠지.”
“그렇게 전례 없었던 규모의 방파대전을 앞두고요?”
“그게 또 입황성이다.”
“아.”
덜컹.
바퀴가 웬 병장기 조각을 깔고 넘어간다.
얼핏 보기에도 지체 높은 이가 타고 있는 마차였다. 세 마리의 준마가 스스로 길을 따라 움직이며 그들을 입황성의 정문까지 이끌었다.
“…….”
마차의 내부에 있던 이들의 대화가 서서히 잦아든다.
완전히 말라붙은 해자와 조금쯤 깎여나간 성벽에 이리저리 널린 시체들, 도처에 넓게 눌러붙은 핏자국들이 마차의 창틀에 걸리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단 한 수에 당한 듯이 동산마냥 쌓인 인마의 시체를 지나칠 때는 누군가의 날숨이 흩어졌다.
그리고 문을 지키고 있던 백색무사들 중 한 청년이 마차 앞까지 다가선 뒤에야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왔군. 그야말로 제때 당도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과시하는 걸까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대전을 치른 직후이니라. 저마다 몸을 추스르기도 바쁜 형편이겠지.”
저벅.
한 쌍의 남녀가 마차에서 내린다.
그들이 전부였다. 행색에 비해 파격적일 만큼 어떤 수행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 쪽은 검날처럼 날카로운 귀를 지닌 데다 휘황한 남색의 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어깨에 새겨진 용의 문양이 존엄한 신분을 방증했다.
천하에서 가장 귀한 황제의 어깨에는 해와 달이 있고, 그다음으로 지체 높은 자들은 용을 짊어진다. 즉, 왕의 복식이었다.
그는 품에서 나무 모양으로 깎인 상아 조각을 꺼내 들었다.
왕의 신분을 뜻하는 아패(牙牌)로, 황족 외에는 입황성주만이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법보였다.
“정왕(庭王)이다.”
우웅!
나지막한 공명음과 함께 아패에서 허연 김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인근을 둘러싸고 있던 한겨울의 찬 공기가 따스한 기운에 밀려 나간 것도 동시였다.
한서불침의 공능을 일으키는 법보.
극도로 귀한 보물이다.
보통은 번왕의 아패를 접하는 즉시 크게 놀라 몹시 공손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정왕 일행을 대하는 백색무사의 안광은 변함없이 무미건조했고, 심지어 미미하게나마 다소 전투적인 기질마저 번뜩였다.
형식적으로 취한 예법에만 흠잡을 구석이 없을 뿐이었다.
“왕을 뵙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당연한 통찰이 정왕 주태일의 뇌리를 스쳤다.
‘전쟁을 알게 된 자.’
동시에 정왕의 곁에 있던 여인이 서리처럼 차갑고 뚜렷한 음성을 흘렸다.
“기질이 불손하구나. 품행에 유의하는 편이 좋겠어.”
새하얀 면사가 드리운 삿갓을 쓴 모습인데, 음영 진 턱선이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반투명한 면사의 끝단이 팔락였다.
깊은 내공에서 비롯된 공력 파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영검군주(瀛劍郡主).
정왕의 적녀. 문무겸전으로 유명한 강서의 신룡(神龍)이다. 강대한 정왕부를 홀로 물려받을 신분이었다.
“조심하지요.”
이름 모를 백색무사가 단답한다.
하지만 입황성의 자색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일 터.
다른 때라면 있기 힘든 일임에도, 영검군주는 그를 더 문초하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될 분위기가 광대한 성벽을 타고 무형의 불꽃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백색무사의 공손한 안내를 따라 들어가며 정왕에게 말을 건넸다.
“좋지 않은 시기에 온 듯싶습니다만?”
“네가 틀렸다.”
정왕은 즉답과 함께 전음을 보냈다.
―실질적으로 천하에 하나뿐인 자색인 데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방파대전마저 벌어졌다. 이제 섬예 정연신의 거취를 논할 시기는 지금뿐이니라. 오늘이 아니면 그의 허리에 고삐를 묶어둘 자, 이 땅에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지난번 항주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정이 몹시 다르지 않느냐.
그의 예스러운 말이 전음 특유의 진동을 남긴다.
화악!
순간 사방팔방에서 온갖 입황성 무인들의 기세가 일어났다.
어떤 협잡과 뒷이야기도 허용하지 않는 기질. 그저 살기만 없을 뿐 실로 무시무시한 경계 태세였다.
그럼에도 정왕의 전음은 꿋꿋이 이어졌다.
―이 아비는 패협의 재래를 원치 않는다. 태평성대의 마연적은 관아가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내는 자였다. 허나 난세에는 얘기가 다르다. 제대로 된 친우 한 명도 없는 그가 어지러운 시기를 살았다면, 필시 이 땅의 결집을 해쳤을 것이다. 하물며 정가 섬예는 그 패협보다 더한 놈이었느니라.
영검군주의 얼굴을 가린 면사에 희끗한 상이 맺혔다. 작게나마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였다. 분명히 잘못 왔는데.
그 이후.
두 사람이 내성으로 들어선 뒤에도 방문객들이 이어졌다. 정왕부로 끝나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왕부들.
진주언가를 위시한 무림 호족들.
그리고 흉년에 물자를 비축하여 각자의 땅에서 손꼽히게 존귀해진 대상단들까지.
수십의 마차 혹은 행렬이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더니 똑같은 위치에 멈춰서길 반복했다.
양양 땅을 잠시 떠났던 양민들의 과반수가 채 돌아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 * *
입황성이 방파대전을 치렀다.
심지어 그 여파가 온 세상에 미칠 만큼 큰 싸움이었다. 전례 없는 규모란 말이 맞았다.
강호 정세는 물론 상계와 천하 정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일이 필연이었다.
무수한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랬다.
어떤 땅과 어느 길이 안전한지, ‘입황대전’으로 몰락할 대문파들의 위치와 그들의 산하에 있던 문파들이 향후에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북방 강호와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도는 와중이다. 들어본 적도 없는 세력과 무맥들이 남하한다고 했다.
‘황실이 천하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직전이다. 신분과 권세를 불문하고, 어떤 자들이든 기댈 곳이 필요할 수밖에…….’
임진명은 생각했다.
입황대전에서 활약한 고수들과 그 무공, 대전의 세세한 과정까지도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알려질 터였다.
하지만 당장 입황성 내성에서 벌어진 언쟁의 논점은 완전히 다른 부분에 존재했다.
“내 이미 천자께서 명하신 바를 알고 있네. 섬예 정연신은 그 뜻을 엄히 받들어야 할 걸세.”
“말씀의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앞서 침입한 적도들의 핏물로 얼룩진 길가.
임진명은 성주 내성에서 총관부로 이동하다 말고 정왕과 대치했다.
본래는 접견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왕이 신출귀몰한 보신경으로 임진명을 막아선 것이다.
투명한 햇살이 기울어져 새하얀 성벽과 맞닿은 시간대였다. 신분 높은 자들의 위신마냥 비스듬히 떨어져 내리고 있는 그늘 아래.
“과인을 기만하지 말게. 이미 항주에서 만방에 공표되지 않았는가? 입황성의 대총관이라는 자가 그 내용을 모를 리 없지. 섬예는 이 땅을 벗어나선 아니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세세한 거취 문제는 황실의 관할에 놓임이 마땅하네. 황상께서 친히 논하신 사안이니 그리 처리되는 게 옳아.”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들기도 힘듭니다.”
“궤변으로 들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네. 내 부덕을 탓하게.”
“…….”
“자네가 전후 수습에 힘써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만, 그 모든 건 자네에게 전권이 있는 탓이지. 오늘날 입황성의 모든 대소사는 대총관 임진명의 관할이지 않나?”
임진명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주변을 훑었다.
‘의도를 모르겠군. 항주에선 곧장 물러났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무엇을 느꼈길래…….’
정왕은 고강한 무인이다.
그런데도 이 순간 기막을 펼치지 않았다.
그 탓에 입황성을 오늘 동시다발적으로 방문한 귀빈들이 하나둘씩 주변으로 착지해 오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들 중 반수가 신검단주 대리와 동년배에 가까운 여인들이었다.
“…….”
별다른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두 초상비의 경지를 밟은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본성을 돕지 않은 이들.’
심지어 하나같이 지근거리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에 섣불리 승패를 점치기가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승산을 떠나서 늘 양민들의 칼받이였던 입황성이 고려할 바는 아니었다.
임진명의 눈매에 노기가 맺혔다.
곧이어.
그의 목까지 치밀어올랐던 조언이 다시금 삼켜졌다.
두 벌의 자색 장포가 공간을 격하고 펄럭이기 전에 떠나란 말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고.
우웅―
이내 석양에서 쏟아지던 빛이 부챗살마냥 여러 줄기로 나뉘며 소리 없이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