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31
◈ 남화광태극 (2)
방 안에서 흐르던 공기가 청아해졌다. 사람이 지내다 보면 생길 수밖에 없는 탁기가 한 점도 존재하지 않게 된 느낌. 모든 것이 맑고 뚜렷해진 듯했다.
다음 순간.
정연신은 이미 일어선 모습으로 뒤돌아보고 있었다.
후욱―
발치에서 잔영이 일었다. 본래 누워 있던 정연신의 형상이 뒤늦게 흩어진 것이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찰나지간 환익보와 풍신, 십리광요의 묘리가 모조리 뒤섞였다. 별달리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스스로 움직여 놓고 의문했다.
‘계속 이상한데?’
입황성에서부터 지금까지.
손아귀의 검 같아야 할 마음이, 무당의 제운종과 다를 바 없어진 듯했다. 모든 것이 두루뭉술한 느낌이었다.
분명히 그간 몸에 닿은 감촉들은 생생한데, 정작 그의 마음은 정교함을 잃어 엉망진창이 된 초식 같았다.
과하고.
모호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시간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왜?’
무엇이 문제일까.
하지만 정연신은 우선 생각을 접었다. 보고도 믿기 힘든 인영이 시야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대막(大漠)의 신기루마냥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노인의 형상으로.
키가 훤칠했다.
회색 도포를 걸쳤는데, 소맷자락의 옷단이 모자라 팔목이 드러나 있었다. 굵직한데도 매끄럽다는 느낌이 드는 손목이었다.
그리고 얼굴.
아주 호탕한 인상이다.
살갗이 주름져 있는데도 연배가 와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생기가 넘쳤다. 눈매에는 온갖 희로애락이 맺혀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정연신이 그를 눈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찰나에 불과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상단전이 벌떼처럼 극렬하게 떨렸다.
“……!”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격통이 끼쳤던 탓이다. 순간적으로 안구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눈 인근에서 머리까지 올라가는 모든 경맥과 세맥, 혈도가 새까맣게 불타오르는 느낌.
‘미, 친……!’
단지 노도사를 시야에 담은 것만으로도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그의 작은 몸짓과 지극히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완전무결한 몸태가 모두 어마어마한 자극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온갖 궤적이 떠오르고 엉켰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백열하며 터져 나갔다. 모든 것들이 이해 불가에 가까운 검로(劍路)였다.
‘아니.’
그 궤적들을 하나씩 놓고 본다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같은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둑을 쌓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한 대해처럼.
정연신은 황급히 시선을 비틀었다.
사아아―
곧장 상단전의 진동이 멎는다. 하지만 그 여파는 잔열처럼 남아 눈매를 경련시켰다. 열기로 이뤄진 깃털이 머릿속 세맥을 간질이는 듯했다.
“…….”
노인은 천하(天下)였다.
입황성주마냥 보이지 않는 자연검(自然劍)의 묘리로 제 자신의 몸을 안법으로부터 차단하는 배려 따위도 없었다.
무공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정연신은 그를 비스듬히 외면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당의… 개파조사이십니까?”
하지만 노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연신을 일별하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마치 벽 너머가 보이는 것처럼.
생경한 무시였다.
“어르신…?”
그렇게 몇 번을 더 불러봤지만, 노도사는 그림 속의 신선마냥 우두커니 뒷짐을 지기만 했다. 그 품행 역시 화폭처럼 자연스러웠다.
언젠가부터 가까워진 죽음을 방증하듯 늘 불타오르게 된 정연신의 백회혈이 한결 더 뜨거워졌다.
“노인장… 아니, 어르신.”
[…….]상대를 해 주지 않는다.
노도사는 여전히 촛불처럼 희미하게 일렁이기만 했다.
몹시 기이한 형상이었다. 아득한 세월을 격한 까닭일까.
정연신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래를 힐끗하곤 문득 깨달았다. 저 불안정한 원영신을 불러낸 법보가 자신의 허리춤에 있음을.
삼봉진인의 송문고검.
‘게다가….’
이 순간 칼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험한 무당산의 선기(仙氣)와 공명한 탓일까. 아니면 삼봉진인의 흔적으로 가득한 땅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언젠가 입황성주의 입멸검을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심지어 그때처럼 원주인이 패용한 게 아닌데도, 송문고검은 뭇 고수들의 기감을 벗어난 것이다.
신비로우면서도 오싹한 일.
전설상 자연검(自然劍)의 공능으로 추측되는 현상이었다.
칼을 찬 정연신 본인은 물론 현공진인도, 그리고 다른 무당파의 고수들도 검을 인식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금 정연신이 기억하기로는, 입황성에서 무당의 공력 파동을 뿜어내는 이들과 마주한 이후부터였다.
문득.
정연신은 미량의 시원함을 느꼈다. 마땅히 풀어야 할 의문들을 어렴풋이 깨닫고, 이 순간 그중 하나를 밟아 부순 것이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노도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절대 허상은 아니다.
노도사가 정연신을 무시하는 것이든, 혹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든 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청아한 공기를 장내에 은은히 퍼뜨리면서.
‘내게 대화할 자격이 없는 건가?’
그때.
“정 공,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주세화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노도사가 문득 정연신의 한 손을 가리켰다. 그간 잠든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상자를 쥔 손아귀였다.
고검진인의 머리가 든 석함(石函).
앞서 장문대리 옥암진인은 정연신에게 포기 따위를 종용하지 않고 상자를 맡긴 바 있다.
순간 정연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후욱!
그의 손이 흐릿해지더니 석함을 뒤로 숨겨 버린다. 시화무극수 권화의 묘리. 정말 반사적으로 나온 출수였다.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노도사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올라가는 양쪽 입꼬리.
미소를 지은 것이다.
이 순간 천하에서 가장 초월적인 환영이 사람의 도리에 반응했다.
정연신은 인기척으로나마 그것을 느꼈다. 또 한 번 눈이 불타오를까 감히 시선을 맞대지 못하는 와중이었다.
기감으로 노도사를 느끼는 것도 자중하는 형편인지라 유독 크게 다가온 변화였다.
곧이어.
웬 늙수레한 음성이 환영마냥 정연신의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네 태극에는 색깔이 있겠구나.
순간 정연신의 고개가 빠르게 들려 올라갔다.
* * *
푸른 옷자락이 질풍에 나부꼈다.
파악!
청색 장포를 걸친 신소빈이 경공으로 광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넓은 보폭으로 땅을 박찰 때마다 은은한 빛무리가 지면에 남았다.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거칠 황(荒) 자 역시 끊임없이 흔들렸다.
경맥에서는 공력이 요동친다.
그 소맷자락 아래에선 핏줄이 푸르게 맺힌 하얀 손목이 훤히 보였다. 어느새 그만큼 키가 자랐다.
‘…불면, 달빛, 그네, 불쌍한 우리 대주님. 십리쟁란(十里爭亂), 사성광요(死星光窈).’
동공과 경공 구결을 끊임없이 되뇐다.
정연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의 동갑내기 대종사와 마찬가지로 열여덟의 새해를 맞이한 몸이었다.
굴곡진 근육의 결이 몹시 탄탄해졌다. 언젠가의 정연신처럼. 당장 다리가 길어졌음은 물론이다.
정가동공 덕분일 터였다.
혹은 식사 때마다 정연신이 밀어주던 반찬들을 억지로 입에 넣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주 대리보다 키 작은 마광익 무사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이제 신소빈은 모든 면이 눈부신 성년 고수였다.
화악!
선두의 흑포 검객, 마광익주 청명이 고개를 힐끗 돌리곤 싱긋 웃는다. 휘날리는 나뭇잎마냥 부드럽게 질주하면서였다.
“발놀림이 제법이네. 음, 십리광요의 전인은 그래야지. 천하에 너뿐이니까.”
드문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소빈은 그저 숨을 할딱이며 다른 말을 외치기만 했던 것이다.
“우리도 말! 말 좀 가져가죠!”
“관아에 들르면 쟤네가 곤란하다잖아.”
청명이 정면을 향해 눈짓했다. 그곳엔 희끄무레한 먼지를 구름마냥 두르고 내달리는 인마의 뒷모습이 있었다.
신소빈은 격하게 달음박질치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입황성 좋다는 게 뭐냐고요! 역참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우리가 무서운 건데!”
“조금 실망인걸.”
청명의 입매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물론 본성의 백색이나 청색들은 역참 덕에 더 무섭지만, 적어도 십리광요의 전인이 할 말은 아니지. 네 언행은 무거워야 해.”
가벼운 타박이었다. 하지만 청명의 진심이 서늘하게 담긴 말이기도 했다.
“…….”
신소빈은 그대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결 강하게 땅을 쿵― 내디뎠다.
곧장 별무리에 섞인 혜성처럼 경쾌하게 내쏘아지는 신형. 반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제야 청명의 웃음이 돌아왔다.
한편 그들의 뒤로 늘어져 달리던 마광익 가운데 사월궁귀 위예령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무당파로 향하는 게 맞는지는 둘째 치고, 설령 정말로 무당의 산문이 목적지라 해도… 이 방향은 아닙니다. 완전히 둘러서 가야 해요. 옥청, 상청, 태청의 모든 관문이 산자락 반대편에 있으니.”
청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생각이 있겠지. 우린 당장 대주를 만나러 간다는 저 친구들의 행태를 낱낱이 감시하기만 하면 돼. 혹시 모를 일만 대비하는 거지. 쟤네 덕분에 광검대에 광검대주까지 본성으로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마광익은 임무를 완수했다.
웬 사마외도의 소문파를 제집으로 삼아 정양하고 있던 광검대주, 그리고 광검대의 일부 생존자를 온전히 추슬러 입황성으로 귀환하게끔 만든 것이다.
북방 강호의 무리 덕분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타지 강호에서 경악스러운 정보력을 보여줬다. 정연신이 항주에서 보인 행적마저 꿰뚫은 뒤, 다음 행선지를 무당산으로 추측하는 기행마저 보였다.
우선적으로 신검단주 대리의 기량을 가늠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장강 인근으로 흩어진 광검대 무인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짧지만 핵심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자신들이 북방의 투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 선두에 괴력난신이 있었다.
한때 투신의 좌수(左手)로서 건릉제의 한 수를 튕겨냈다는 인물. 황실로부터 북도(北刀)라 명명된 요주의 절세고수였다.
콰아아아앙!
길 없는 산자락이 넓게 요동친다.
삿갓을 쓴 북도의 전투마가 불현듯 강맹하게 땅을 박찬 까닭이었다. 순간적으로 언월도를 비껴 맨 북도의 등에서 흐릿한 공력 파동이 번졌다.
기질이 신묘했다.
동시에 극도로 파괴적이었다.
쩌저저저정―!
거짓말처럼 아득히 위로 도약한 전투마가 그대로 허공을 유릿장마냥 박차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기에 이른 허공답보(虛空踏步)였다.
말발굽이 대기를 강타할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풍이 지상으로 내리꽂혔고, 지면이 엉망으로 파헤쳐졌다.
그대로 무당파까지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기세. 사람의 이동 수단이 아니다.
“저게 무슨…….”
신소빈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였다.
믿기지 않는 허공답보의 반동 탓인지. 아니면 북방 강호가 이만큼 대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인지.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이루어진 산을 넘어가던 인마로부터, 웬 서책 하나가 마광익을 향해 떨어져 내려왔다.
전투마를 수단으로 시전된 허공답보의 반탄력 때문일까. 그야말로 쏜살같은 속도였다.
“대주, 제가 받을게요!”
쿵!
신소빈은 십리광요로 솟구쳐 그것을 낚아챘다. 동시에 표지를 훑었다.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인명록(人名錄).
신소빈은 곧장 허공에서 책장을 넘겼다.
파락!
지면마다 글자가 빼곡했다.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이름들로만 이뤄져 있었다. 심지어 나름의 위험 순위마저 매겨 놓은 듯했다.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미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구름처럼 아득한 자들이 펼쳐졌다. 신소빈은 시천법을 발동시켰다. 곧이어 그것을 찰나지간에 거꾸로 읽어 올라갔다.
二十. 심무련 태사 영천검귀
十九. 청성 장문인 양벽검군
十八. 만상수로채 배반자
十七. 형산(衡山) 장문인 인장선(刃掌仙)
十六. 점창 장문인 검후
十五. 몽인월주 무애신마(無碍神魔)
十四. 군마녹림 비겁자
十三. 아미 장문인 뇌정관음
十二. 공동(崆峒) 장문인 후천광성자(後天廣成子)
十一. 화산 장문인 성화검신
十. 무룡회주 존무역괴(尊武逆魁)
九. 한중 무림맹주 검성
八. 신검단주 대리 광야일멸
신소빈은 거기까지 읽자마자 허공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새 북도의 인마가 점이 되어버린 곳.
무당산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