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04
◈ 별밤에 취하면 (6)
* * *
“혈왕의 거처로 초대받았다고?”
어웅공에게 업힌 주광신개가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린다. 그 바로 밑에서 어웅공도 고개를 갸웃했다.
곧이어 그는 아이처럼 종알거렸다.
“전각이고 뭐고 엉망이던데, 비밀 안가(安家)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아니, 그 전에… 우리의 신분을 알고도 들여보내 준다던가?”
“예.”
정연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노소.
정연신이 선봉일 수밖에 없는 일행이었다.
각자의 무공 수위를 떠나서 어웅공의 몸 상태만 봐도 그랬다. 남제에게 입은 내상의 회복이 느린 만큼, 길게 이동할 때도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혈곡을 앞둔 순간 다시금 주광신개를 업었다. 명 황실의 어른다운 행실이었다.
한혈곡.
북왕 광풍막주와 혈왕의 전장.
일행은 양쪽으로 갈라진 산의 한구석에 올라가 있었다. 지각변동의 여파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쿠쿠궁―
황톳빛 순정한 속살을 드러낸 토양, 반쯤 뽑히다 말고 그네처럼 삐걱거리는 나뭇가지, 완전히 쪼개졌음에도 물기 한 점 없는 건너편 산의 절단면…….
아래쪽에선 지반 전체가 간헐적으로 무너져 내리길 반복한다. 메마른 바위 조각들과 물기 없는 흙더미가 파스스 하고 몸을 부대끼는 소리.
천재지변이 휩쓸고 갔다.
토질(土質)이 무른 것은 명나라와 마경이 다르지 않았다.
‘땅이 허약하군.’
정연신이 패협처럼 생각할 때였다.
“이건 무엇인가? 지난번, 천마비고에서도 한 번 펼쳤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어웅공이 그에게 물었다. 흙바닥에 푸르스름하게 펼쳐진 원을 보면서였다. 폐허와 기묘하게 어울리는 태극이었다.
끄트머리에 핏빛 눈동자를 지닌 부녀 한 쌍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혈왕과 그의 후계자 적이서였다.
“협상 수단입니다.”
정연신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
혈왕적가 왕족들의 미간에 주름이 진 것도 동시였다.
그간 한혈곡에서 살아있는 법도로 행세해 온 자들. 하지만 혈귀들 특유의 광기가 정연신에겐 와닿지 않았다.
오랫동안 칠사도를 겪은 까닭일까.
‘순후한 자들이다.’
이젠 말이 통하겠지. 정연신이 진실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남제를 치러 간다? 너희가?”
혈왕이 피 묻은 소맷자락을 크게 털어내며 묻는다. 스산한 목소리였다.
“우리가 어때서 그러나?”
갑주를 걸친 아이가 양다리 없는 노인을 고쳐 업으면서 되물었다.
혈왕은 어웅공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안광만 번뜩일 뿐이었는데, 눈에서 핏물이 튀어나올 듯했다.
한편 정연신은 혈왕의 곁에 선 여인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적씨가 맞소?”
진혈지체의 적씨(赤氏).
여러 강호인이 칠사도를 지칭할 때 썼던 말이다. 당연히 정연신의 뇌리에도 남아있었다.
“자네 말투가 왜 그런가?”
곁에서 어웅공이 그를 멀뚱하게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정연신은 미미한 묵례로 대답을 갈음했다.
이제 그의 품행에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기에 어웅공도 더 묻지 않았다. 실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혈왕적가의 후계자.’
달리 혈왕의 적장녀라 했다.
한 끗이 달랐다. 광기가 훨씬 짙어지고, 머리칼이 밤하늘처럼 길게 내려오면 누군가와 같아질지도 모른다.
남화광태극의 끄트머리에서 경악 어린 눈으로 정연신을 바라보던 여인이, 이내 거짓말처럼 표정을 평온하게 수습했다.
“적이서예요.”
그녀의 존대는 자연스러웠다.
장차 왕이 될 인물. 당연히 이해득실에 밝다. 이 자리에서 누가 가장 고강한지 곧바로 꿰뚫어 본 것이다.
그 첫마디로 말문이 트인 걸까. 적이서는 곧장 정연신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전한다고 하면 멸문시킬 셈인가요?”
말투 자체가 귀족적이다.
한어에 능숙한 정도가 아니었다.
“혈왕적가, 역시 남방에 뿌리를 뒀군. 풍문으로는 혈염교주가 탐낼 만큼 특별한 씨족이라던데…….”
주광신개가 중얼거렸다.
“아무렴.”
혈왕의 한쪽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 괴물은 본가를 크게 탐했다. 혈기(血氣)를 본가만큼 순정하게 쌓을 수 있는 씨족은 달리 없었으니까.”
“흡정하지 않는다는 게 참인가?”
어웅공의 물음이었다.
그 말에 적이서가 입술을 뗐다. 남화광태극이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모으면서였다.
“저희는 축기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씨족이고, 무엇보다 흡정은 상승(上昇)의 걸림돌이 되니까요. 흡정으로 얻은 기운에는 피 빨린 자의 원념이 들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 축기로 삼화취정을 이루긴 힘들죠. 어지간한 괴물이 아니면.”
혈염교주와 혈염교 사도들이 그런 존재였다.
본단이 온전할 적엔 입황성주가 현현해야 했을 만큼 강대한 세력. 명교주 소천무적의 존재가 대두되기 전까진 명실공히 십삼천 최강의 방파였다.
혈왕적가가 혈염교에게 밀리고 수탈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협행 따위를 위해서 본가에 온 것이라면, 잘못 짚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디 돌아가 주세요.”
적이서가 잔잔하게 말했다.
똑같은 씨족이라고 세력마저 같지는 않다. 온통 한족과 명족인 명나라 강호가 무수히 많은 문파들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혈귀들이 축기보다 출수의 자연스러움을 중시한다…? 이것 참.”
주광신개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북방 자연체(自然體)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인가? 피 빨아먹는 귀족들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본가인들의 이에 피비린내가 묻은 적은 없어요.”
조곤조곤한 대답이었다.
심지어 적이서는 입술을 아 하고 벌려 보이기까지 했다.
새빨간 혀의 양쪽으로 미세하게 날 선 송곳니. 정연신은 문득 자신의 목덜미를 깨물었던 치열의 가지런함이 생각나서 시선을 내려 버렸다.
혈왕적가. 한혈곡의 왕족들.
다른 방식으로 무(武)에 미친 세력이다.
운기조식으로 흡정을 대신할 수 있는 체질, 가주가 북왕의 위(位)에 오를 만큼 마경에 잘 융화되는 가풍.
그런 씨족에서 비범한 자질을 타고난 아이가 칠사도였던 것이다. 혈염교주가 그녀를 차기 교주로 탐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강호는 이처럼 다종다양했다.
정연신은 푸르스름한 태극의 한가운데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투가 또 한 번 변화했다. 상대와 입장에 따라 바뀌는 언행인데,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정연신이 추구하는 신검단주였다.
그는 슬슬 천하가 흑백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저게 마가라고…?”
이젠 어웅공의 중얼거림도 큰 칭찬이 되지 못했다. 당연한 말이었던 탓이다.
“말씀하세요.”
적이서의 대답은 빨랐다.
그녀는 부친인 혈왕을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마침 그가 정연신을 크게 비꼴 것처럼 입매를 일그러뜨렸던 까닭이다.
정연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반투신파의 북왕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그자를 따르지 않은 겁니까?”
“스스로를 배 불리기도 어려운 형국 아닌가? 본가는 남제 놈에게 아쉬운 것도 없다! 굳이 무엇 하러 남의 밑으로 들어가서 종노릇을 할까!”
혈왕의 외침은 광오했다.
본질적으로 혈염교주와 같다. 사람을 홀릴 만큼 새하얗게 내려온 백발에, 마성(魔性)적인 자태까지도 그렇다. 누군가의 휘하에 있을 자가 아니었다.
“이해했습니다.”
정연신은 바로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왕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떨떠름함으로 물든 것은 물론이었다.
“사람은 안 드십니까?”
그는 제법 공손하게 물었다.
이제 혈왕은 욕지거리를 참는 얼굴이었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구태여 사서 탁기를 쌓을 필요가 있나?”
예스러운 말투로 내뱉는다. 혈귀들의 왕 같은 행색만 아니면 도사로 생각될 정도였다.
유난스럽게 하얗고 긴 손가락을 쥐었다 펴 보이는 혈왕.
“내가 지극히 자연스러워지면 네놈과 굳이 공력 싸움을 할 것도 없다. 그 뒤로는 초식의 겨룸만이 남을 테니, 최소한 이런 굴욕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북방 자연체의 경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어감과 비슷한 것을 남제로부터 겪어봤다.
두 가지 이상의 술법을 한 호흡으로 시전하고, 무공과 술법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있던 초월자.
그리고 차기 황제.
‘배울 점은 있다.’
동시에 정연신은 혈왕 부녀의 의복에 가려진 몸이 깡말라 있음을 자각했다. 최초로 혈왕과 부딪칠 때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지금 눈치챈 것이었다.
혈귀로서 섭식에 병적으로 신경을 기울이는 편이니, 거의 도(道)를 닦는 수준이다. 마경의 도관이 여기에 있었다.
‘이런 집안이었구나.’
솔직히 정연신은 이들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대화를 마치고 싶었다.
“그럼 됐습니다. 남제를 칠 만합니다.”
“미친놈이 제자리걸음을…?”
“부왕(父王)께선 물러나 계십시오.”
적이서가 혈왕을 등지고 선다. 그녀는 이제 정연신을 광인 보듯이 응시했다. 서로에게 향한 시선이 똑같았다.
“남제를 치는 데 손을 보태라는 건, 이 터전을 버리란 말인가요?”
“왜 말이 그렇게 됩니까?”
“부왕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그렇게 될 테니까요. 아시다시피 이 협곡을 영토로 삼은 북왕은 둘이에요.”
정연신은 이 대화에서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말을 나누기 힘들다.’
내면 깊은 곳에서 그런 느낌이 불쑥 들었다. 저런 이목구비로 저렇게 격식 있는 언행을 구사해선 안 된다는.
때문에 그의 손아귀는 시화무극수 파천(破天)의 기수식으로 오그라들 것마냥 움찔거렸다.
오히려 적이서 쪽이 옳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렇다. 이제는 되돌리기 힘든 반응이었다.
때문에 정연신은 시선을 혈왕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담담히 물었다.
“굳이 안가에서 더 이야기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무도한 행동과 무위 탓이고, 둘째는 광풍막주 때문이다. 나와 더불어 이 한혈곡을 양분한 북왕.”
혈왕이 시린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정연신에 대한 노기가 풀릴 기미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검단주 정연신은 거듭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마외도와 진중한 대화를 나누려면, 그 상대에게 힘의 우열을 각인시키는 것이 먼저임을.
약육강식의 이치를 가장 신봉하는 자들이라서다. 약자와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강자의 목을 호시탐탐 노린다.
적이서의 얼굴을 보기 전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혈왕과 한 번은 손을 나눠야 했을 터였다.
“광풍막주.”
정연신은 혈왕의 말을 되뇌었다. 맞은편의 큰 산에 시선을 둔 채였다.
한혈곡.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골짜기를 중앙에 두고, 두 개의 거대한 산이 좌우를 막아선 지형이었다.
그중 왼쪽 산은 정연신의 검격에 반으로 갈라졌다. 온전한 것은 오른쪽 산뿐이다. 이 순간 정연신 일행의 눈길을 맞이한 거악(巨岳).
“옛 원나라 기마고수들의 주둔지라 했네. 광풍막(廣風幕)이니 뭐니 하는 걸 보면 마적 떼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주광신개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큰 산사태를 봤을 텐데도, 광풍막이 주둔 중이라는 산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다. 마치 풀숲에 몸을 숨긴 이리 떼 같은 느낌.
정연신은 두 노인과 시선을 맞췄다.
“하나씩 풀겠습니다.”
혈왕적가가 먼저. 광풍막은 그 이후다.
마경에서 가장 존엄한 북왕들을 칼마냥 두드리는 일이었다. 각각에게 당가 남매의 망치질처럼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이제 보니….”
혈왕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간다. 고집스러움이 묻어나는 입매. 공월무를 이룰 만큼 두꺼운 인생사가 아스라이 느껴졌다.
“불청객이 본가를 크게 원했군.”
그가 말했다.
정연신은 개의치 않았다.
밤하늘처럼 깊은 인내심이 심장에서 고리를 맺은 지 오래였으니까.
후욱―
산사태의 여파가 그친 걸까. 불현듯 불어온 미풍에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젠 밑동만 남아버린 고목도, 곳곳에서 산산조각 난 돌멩이도, 큰 바위가 깔고 지나간 탓에 흙바닥과 단단히 붙어버린 풀잎도.
그저 고요했다.
정연신의 눈에 거울처럼 비치는 광경이었다.
“하린(霞嶙)이란 아명을 아십니까?”
“뭐…?”
“그녀에게 목을 물린 적이 있는데.”
“무슨.”
천천히.
혈왕의 시린 핏빛 눈동자가 큼지막한 흰자위로 둘러싸인다. 그렇게 정연신은 입 밖으로 태풍 같은 말을 꺼내면서도, 마음은 북새풍처럼 건조했다.
‘곧 남하한다.’
* * *
[대총관께 보고.―신검단, 신검단주 대리 상실. 명교주 야율진의 소행.
―신검말단 태염룡과 마광익주 청명이 역루성을 이탈. 각각 단독으로 추적을 개시.
―신검단, 흑색과 청색 전 인원이 ‘신검단 정가동공’에 입문. 요결이 간이본과 상이. 흑색 전원과 마광익 무사들이 대성(大成).
―신검단, 역루성에서 마경의 도읍지로 진격 중. 남제의 거병으로 북왕들이 집결하기 전에 머리를 치는 것이 옳다는 결론.
신검단은 아직도 정 공을 상실한 상황입니다.
이 서찰을 쓰는 시점에서 용암성(鎔巖城)을 앞뒀습니다. 지금 신검단의 진격 속도로 헤아리건대, 내일 신시 초(申時 初: 15시)에는 반드시 충돌합니다.
척후를 맡은 명류대 아랫것들의 보고에 의하면, 남제의 아들인 ‘애신각라 흑환(黑還)’과 대왕 바즈라(大王 ʋɐ́d͡ʑ.ɽɐ), 고요성검주(皐陶聖劍主)가 용암성의 지원군으로 남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총관께서도 아시다시피 모두 휘풍령 친투신파의 북왕들입니다.
강하겠지요. 명나라를 점령할 만할 겁니다.
하지만 신검단은 여전히 신검단주 대리를 잃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진합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신검부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