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08
◈ 세 자루의 검이
* * *
강호에 나온 이후.
정연신은 굉장히 짙은 시간을 살았다.
한시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다. 모든 경험에 의미가 존재했고, 거기서 비롯된 무공들은 정연신의 삶과 둥글게 이어져 있었다. 심장을 둘러싼 광륜처럼.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기지 못할 상대가 없다. 적을 궁지로 모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을 잠가 버렸군. 내가 졌네.”
천극문주는 결국 두 팔을 들었다. 어느샌가 거짓말처럼 동몽검을 검집에 집어넣어 둔 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안전한 무극이야말로 자신의 신조라던 사내다.
이형공허가 완전히 봉쇄된 상황.
자신의 영성이 깃든 애검마저 버리고 정연신과 생사결을 벌일 리가 없다. 진퇴양난이 이런 경우다. 천극문주로서는 전에 없이 어이없고 암담한 일인 듯했다.
“거 참, 살다 보니…….”
하지만 그의 꺼끌꺼끌한 수염 밖으로 나온 목소리에선 어쩐지 유쾌함이 묻어났다.
“별일이 다 있군. 참 별일이야.”
“따라와라.”
천극문주는 그 말대로 정연신을 뒤따라야 했다. 너무 뒤처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반파된 한혈곡에서 혈왕 부녀와 정연신이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음공기예 검가(劍歌)로 광풍막의 기마고수들을 몰살 직전으로 내몰기까지.
정연신은 검가 시전에 앞서 천극문주에게 동몽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묘한 기색을 느낀 천극문주가 거절한 탓에 광풍부막주의 협봉검으로 만족해야 했다.
광풍막주와 광풍부막주는 살아 있었다. 무형검의 검날로 내장의 틈새를 관통시켰던 까닭이다. ‘별밤’에서 터져 나오는 경파마저 억눌렀기에 가능했다.
그저 온몸이 피투성이에 거동마저 불편해진 것뿐. 내가공력이 예전처럼 막강하지도 않을 터였다.
마혈을 당한 채 짐짝마냥 정연신에게 끌려다닌 광풍막주. 마적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도 목울대에서 긁히듯 끌려 나온다.
“나를 왜 살려 둔 거냐? 신검단주라면서.”
“반투신파 아닌가? 친투신파 북왕들 앞에 떨구어 놓으면 뭐라도 하겠지. 살기 위한 발버둥도 내겐 도움이 된다.”
“…….”
“이것이 협객이다.”
그때쯤엔 봉우리에서 뒤늦게 내려온 어웅공과 주광신개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천극문주를 본 뒤로는 더욱 그랬다.
신검단주는 빠르다.
한혈곡에 도착한 지 반의 반나절.
칼집에 잠든 검과 뽑혀져 나온 검이 다른 것처럼, 무위를 드러낸 정연신 앞에선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그래서 목적이 뭔가? 크게 대거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네 이형공허를 써라.”
“뭐?”
“날 남제의 영토로 데려다줘야겠다. 흑도(黑都), 마경의 도읍지 말이다.”
본래 남동쪽으로 일천 리가 넘는 길을 가야 했는데, 그것조차도 마경을 일직선으로 관통했을 때의 이야기. 심지어 땅의 형세가 평탄하지도 않았다.
괴력난신들이 난립한 원말명초.
정가장의 신야현처럼 지형이 바뀌어 버린 경우가 부지기수다. 마경은 더했다. 애초에 ‘문(門)’을 닫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원나라대까지 새겨져 내려온 지도가 모조리 폐기된 당금의 시대.
정연신이 홀로 어검비행을 쓴다고 한들 중간중간 축기에 걸리는 시간이 크다.
온 천하에 셋뿐인 이형공허의 달인을 만났다면, 마땅히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극문주의 반응은 상식적이었다.
“장난하는 것인가?”
“늘 하던 것처럼 공간을 베라. 우리가 모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검로를 넓게 펼쳐서.”
차분하게 내뱉은 정연신의 등 뒤.
혈왕적가의 식솔 이백여 명. 광풍막의 인마(人馬)가 백이십 기가량이다.
양측은 야트막한 둔덕에서 조금쯤 떨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광풍막 고수들에게 혈왕적가의 식솔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곤 했다.
힘으로 모았다. 서안에서 마광익과 함께 산적 행세를 했던 경험이 컸다.
강호인의 화합이었다.
“흠.”
천극문주의 입매가 꿈틀한다.
“이형공허처럼 섭리에다 칼집을 내는 일에… 제법 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내가 열어준 문으로 드나들 사람이야 편안하겠지만.”
“물론이다. 너는 외도(外道)답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줄 알았는데.”
“청산유수로군.”
천극문주는 삿갓의 넓은 챙을 입매까지 끌어 내렸다. 굳이 더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남은 것은 혈왕뿐이었다.
―네놈이 아느냐? 명나라에서 혈귀들의 붉은 눈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본래 혈염교와 함께였던 본가가 어째서 이곳 마경까지 밀려 올라와선 요족들 틈에서 살고 있는지!
아직 귓가에 선명한 이야기였다.
그때 전음으로 격하게 토했던 말처럼, 이 순간 혈왕은 가솔들의 선두에서 핏빛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정연신을 향한 안광에 일말의 호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적이서가 부친의 팔을 당장이라도 뜯어 잡을 것처럼 옆에 서 있을 뿐.
“저들이 더 강합니다. 부왕, 경거망동해선 안 돼요.”
“네가 어찌…?”
“저는 하린이가 보고 싶어요. 갈 수 있다잖아요.”
“저놈을 어찌 믿느냐?”
“분명히 사실만 말했어요. 상단전으로 느끼셨잖아요?”
“그게 문제다!”
우스운 듯해도 광폭한 기세.
그것은 실제로 위협적이기도 했다. 정연신은 명교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혈왕이 추구하는 자연체(自然體)는 분야가 다른 경지였으니까.
“저런 태도는 당연한 걸세. 자네가 말을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주광신개였다.
이젠 어웅공의 등이 몹시 편한 듯했는데, 반대로 어웅공은 슬슬 주광신개를 정연신에게 떠넘기고 싶은 눈치였다. 앳된 볼살이 몇 번이나 움찔거렸으니까.
정연신은 그것을 못 본 척 적이서에게 훌쩍 다가섰다.
그녀야말로 혈왕적가의 왕족들 중 유난히 어색하면서도 가장 편한 인물인데, 그 모든 게 칠사도와 닮은 탓이었다.
가솔들이 기겁했다.
“멈춰라!”
무시하고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고도 꿈결처럼 빠른 출수였다.
한편 정연신은 적이서가 부친의 팔을 단단히 붙든 지 오래임을 눈치챘다.
짐승의 피를 술처럼 마실 것 같은 사내가 후계자에게 전전긍긍인 것이다. 그렇게 혈왕이 뭐라 하기도 전에 정연신은 물음을 건넸다.
“이서란 이름도 아명입니까?”
적이서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보통은 자(字)를 대외적으로 쓸 텐데, 그게 거꾸로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정연신은 첫 번째 광륜에 잠든 혈공 진기를 깨웠다.
칠사도와의 거래로 그녀만을 위해 창안한 신공(神功) 공력. 능법광륜기의 창안 당시부터 환강의 진기 마찰을 가능하게 만든 내공이기도 했다.
마라진혈공(魔羅眞血功).
반투명한 기파가 불규칙적으로 번지더니, 그대로 적이서의 안구까지 파고든다. 그때쯤 정연신의 중대한 전력이 될 혈왕은 발작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끝내 출수하진 못했다. 이어진 적이서의 대답이 평온했기에.
“…우리 씨족은 공공연한 자를 쓰지 않아요. 대신 성년 관례식 때 진명(眞名)이란 이름을 받고, 거기에 운수를 맡겨요. 그리고 삶을 나눌 사람들에게만 알려주는 거예요. 비밀스러운 이름처럼, 혈귀를 사냥하는 이들에게도 잡히지 않길 바라는 전통이죠.”
우우웅―
그때쯤 정연신의 혈공 기파는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발밑에서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돌가루들. 참다못한 혈왕이 적이서의 팔을 떼어낼 정도였다.
“이놈아, 혈공을 익혔다고 네놈이 본가와 어떤 연이라도 생긴 것 같더냐? 지금 무슨 짓거리를….”
정연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진혈지체의 스승입니다.”
삶을 허투루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혈공의 진기구조를 밑바닥까지 파헤치다 못해, 그 광기와 외관마저 감각으로 주무른 지 오래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수명을 가져가고 적선하듯 던져준 자질. 언젠가 정연신을 태사로 부렸던 혈염교주의 뜻이 이 순간 손아귀에 있었다.
동시에 모든 혈귀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스윽―
돌연 적이서의 눈동자가 검은빛으로 변색되기 시작한다. 꿈결처럼 몽환적인 광경.
홍옥 같은 안광을 불태우던 진기가 정연신의 수명처럼 빠르게 색채를 잃었고, 이내 적색의 눈동자는 그을린 땔감마냥 칠흑의 빛깔로 타다 남았다.
“…….”
혈왕이 할 말을 잃어버리는 한편.
후욱―
때마침 말소리가 비어버린 공터에 북새풍이 내려앉더니, 무수한 솔방울을 튕겨 올리며 끝도 없이 치솟았다.
늦겨울에도 쩍쩍 갈라져 있는 강줄기들을 몇 번이고 건너, 광활한 산맥과 평야를 쉴 새 없이 훑어내리고.
끝내 입황성 신검단의 주둔지를 스칠 때까지.
* * *
주둔지의 막사들.
비탈진 평야의 한복판에 세워진 진영으로, 무지막지한 열기에 하늘이 소용돌이처럼 일그러지길 반복하는 곳이다.
북왕 용암성주(鎔巖城主)의 용암성을 앞둔 장소. 더 올라가면 마경의 도읍지인 흑도가 나오는 땅이기도 했다.
그중 얼기설기 지어진 천막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마를 영웅건으로 묶은 흑포의 미공자, 흑발을 목덜미 아래까지 잘라낸 청색 장포의 어여쁜 소녀, 마찬가지로 청포인 데다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앳된 청년까지.
헌원창과 신소빈, 연소하였다.
“치극왕이 돌아섰대요.”
신소빈이 말했다. 곧이어 그녀는 텅 빈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려다가 멈칫거렸다. 예전 습관이 나올 뻔했던 것이다.
“점입가경이네.”
연소하가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신검단을 숨 막히게 둘러싼 상황은 그의 태도와 별개다.
남녘으로 퇴각한다면 휘풍령을 지닌 세력들에게 뒤가 잡힐 것이고, 애시당초 역루성에 머물렀다면 마경 강호의 거대 세력들에게 포위당했을 터.
“역시 머리를 쳐야 하는데… 용 대협이라도 계셨으면…….”
연소하가 이리저리 느릿하게 고개를 까딱인다.
어떤 세력에게도 따라잡히지 않도록 쾌속하게 북상했지만, 애초부터 위에서 내려오는 북왕 세력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대왕 바즈라(大王 ʋɐ́d͡ʑ.ɽɐ)가 남하 중인 북서쪽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빈번해진 지 오래였고.
북왕 고요성검주(皐陶聖劍主)는 최초의 첩보 이후에 소식이 끊어졌다.
한편 남제의 후계자, 애신각라 흑환(黑還)은 또 다른 북왕으로서 마경 각지의 명류대원들을 죽이면서 내려오는 중이라 했다. 척후를 말소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자였다.
그리고 신검단이 앞둔 용암성의 주인.
용암성주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광야를 완전히 가로막을 만큼 기다란 성에서 농성할 기세였다.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북왕임에도.
“치극부마란 놈이 또 사신으로 왔대요. 항복을 권하러.”
신소빈이 자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선 두 종류의 공력이 벼락처럼 마찰하고 있었는데, 정종무공으로 유명한 제천무경과 혈귀무학 마라진혈공의 진기였다.
파지직―
이따금 튀어 오른 마찰력에 천막의 천장이 펄럭거리는 광경. 헌원창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소빈의 질문을 듣는다.
“헌원 선배도 흑색이잖아요? 임시 보혈대주면 사신을 응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안 갔어요?”
“죽일까 봐.”
헌원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영에서 탈주한 지 오래된 태염룡처럼, 그의 입매도 호선를 잃은 지 한참이었다.
우웅―
붕대로 묶인 칼 한 자루만 그의 허리춤에서 요란스러울 뿐.
그때였다.
누군가가 막사의 입구를 거침없이 젖혀 버리며 들어왔는데, 일행은 그 흑포의 사내를 담담하게 맞이했다.
천룡대주 위지극.
굉장히 무심한 얼굴이다. 호쾌한 인상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신소빈을 힐끗하더니, 그녀에게 얇은 서책을 건넸다.
“대성 이상, 극성(極成)의 성취다. 이제는 안 봐도 돼. 단주 대리께서 계시지 않으니 네게 주는 거다.”
신소빈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대주님도 천재는 천재네요. 차기 흑색삼강이라더니.”
“나 말고 또 극성이 있나 보군? 내가 몇 번째냐?”
“네 번째요.”
“나머지는?”
“차례대로 양귀비 선배, 여의천주님, 마광익주님이었죠.”
“…이미 내가 다시 훑었지만, 그래도 혹여 빠진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라. 확인이 되는 즉시 삼매진화로 태워.”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신소빈이 서책을 펼친다. 결전 전야의 밤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사라락 내려앉았다.
[잠든 이들은 평온하다. 고단함을 잊는 까닭이다.하지만 본성 중앙연무장의 벽면에 걸린 등롱들은 불빛을 꺼트리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숙면하지 않는다. 본성 무인들의 의협심처럼.
금강불괴의 마음.
이미 중요한 의념을 지녔다. 단전에서부터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순환하는 원을 이루기 제격이다.
그리하면 단전은 본성과 같은 존재가 된다. 진기가 어디를 떠돌건, 적의 발경력이 어떤 곳에서 짓쳐들어오건 능히 받아내고 되돌려 주는 것이다.
본성으로 입문한 순간부터 꺾이지 않는 신념이 생겼으니, 그 마음이야말로 후술할 운기행공의 요결이다.
내공을 마음껏 돌려라. 이 글귀를 읽은 순간부터 경혈은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집단이 대성하면 집단전에서 무적에 이를 구결이다.
당신들이 크게 다쳐도, 설령 죽을 위기에 빠져도 온몸을 감싸준다.
단독임무처럼 홀로 움직이는 내공을 어디에서든 북돋아 줄 것이다. 굳이 바깥에서 온정을 찾을 필요가 없도록.
하단전 기해혈(氣海穴)을 온전히 집으로 삼으면, 전신을 쓸어내린 진기가 등 뒤 명문혈(命門穴)로 돌아온다.
한 번 나갔다 돌아오면 더욱 강해져 있다. 뼈, 근육, 혈도, 전신 세맥, 두꺼운 경혈이 모두 그럴 것이다.
진기를 이끄는 의념은 본성으로 귀환할 때의 기분과 같다. 우리처럼 쉼 없이 움직이기에 동공(動功)이다. 마음을 이렇게 먹어야 효험이 생긴다.
입황성 신검단. 사람 된 도리로 서로를 감싸 준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황(荒) 자로 묶인 가족들아.
손짓으로 강물을 부수고, 진각으로 호수를 짓밟으러 가자.
가끔은 강호의 물살에 떠밀려도 괜찮다. 그러다 지치면 돌아와도 좋다.
내가 당신들의 집이니.
이것을 신검단의 정가동공으로 삼겠다.]
“…….”
그녀가 서문을 넘길 때쯤, 천룡대주 위지극은 막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곧장 헌원창의 물음이 그를 뒤따랐다.
“그쪽은 숙소가 아닌데, 원평일검장이 열린 겁니까?”
“아니.”
입황성 무인이라면 누구나 품에서 꺼내기 힘들어했던 서책을 제출한 까닭일까. 어느새 위지극의 음성에선 조금쯤 공허함이 묻어났다.
“진격이다. 그 몽요지체의 사신은 내가 죽이고 따라붙을 테니, 먼저 가라.”
살기조차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