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11
◈ 세 자루의 검이 (4)
* * *
그간 입황성은 지키는 싸움을 일삼았다. 민생을 아우르는 임무들은 물론, 이제 먼 과거가 된 듯한 입황대전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파상공세였다.
용암성주는 끝내 도주했다.
정수리 옆부분이 돌조각마냥 부서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끝내 세 흑색을 뿌리치고 절세의 경공으로 멀어진 것이다. 사리 판단이 빠른 군부의 대장군처럼.
실제로도 명나라 장성을 지키는 삼방대장군에 준했다. 이미 남제를 중심으로 건국이 계획된 청나라의 군왕이니까.
절세고수.
도주하는 쪽에서 수십 번 경로를 꺾어대며 하늘땅을 오르내린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동격이라도 방향을 이끄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은 당연지사. 한 번씩 돌발적으로 내치는 견제의 초식도 개세적인데, 요족이기에 지고한 생명력마저 지녔다.
즉, 절대적인 자유다.
무공이 달인지경인 요족들의 권능.
그들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의 호승심과 물러서지 못할 상황뿐이다. 신검단 산하의 대주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실이었다.
애송이 흑색이라곤 남궁화신과 헌원창이 전부인 수뇌부. 그들은 담담하게 용암성을 짓밟고 나아갔다.
“부딪쳐 올 때 죽여야지.”
“그래도 꼴에 왕(王)이다. 흑도에서도 줄행랑치진 못할 거야. 도읍이랑 같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위지극과 북궁아의 대화.
하지만 도주가 허락되었던 것은 용암성주뿐이다. 용암성의 무공군세는 신검부대주의 무형검 포격에 한 번, 광예결을 두른 신검단 무공군세에 두 번째로 크게 휩쓸렸다. 심지어 그 흐름에 맞서 동귀어진하고자 했다.
호승심에 미친 요족 강호인들.
살아남은 자가 없다.
지원군이 오기 전에 돌파해 버린 것이다.
오백여 신검단의 등 뒤엔 거뭇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만 남았다. 항상 흐릿하게 일렁이던 용암성의 하늘은 광예결 경파에 더욱 일그러져 있었고, 신검단은 쉼 없이 질주한 끝에 마경의 도읍지를 앞뒀다.
정연신을 잃은 자들. 정연신을 이은 자들.
몰랐던 것을 알게 된 흑검(黑劍)들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강호 문파를 한두 번 멸문시켜 본 것도 아니라서 피비린내에 무디기도 했다.
그렇게 비탈길을 넘어가자마자 까마득히 아래에 펼쳐진 광야. 바로 흑룡강(黑龍江)의 지류를 등진 땅이다.
거무스름한 물길이 있었다.
폭이 어지간한 범선 두세 대를 담고도 남을 정도인데, 정작 수면을 둥둥 떠다니는 것은 웬 새까만 비늘이나 뼛조각 따위였다.
이따금 아무것도 없는 물속에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 흙바닥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리고 하얀 포말을 뱉어내며 다시금 강으로 빠져 들어갔다.
바다가 아닌데도.
철벅, 철벅…….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온다.
눅진하게 가라앉은 공기 탓일까. 그것은 파도인 듯하면서도 어떤 가죽을 때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웬 거인이 제 살갗을 툭툭 치는 격타음으로도 들렸다.
반면에 사람들의 소음은 없다. 뒤쪽으로 강을 낀 채, 몹시 광대한 원을 그리며 우뚝 선 대도시는 고요하기만 했다.
남제의 영토였다.
검은 도읍. 흑도(黑都).
명나라 북경에서 위쪽으로 치우친 북동쪽 이천 리가량, 가장 가까운 흑룡강 본류에선 남동쪽으로 삼백 리 넘게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명나라보다는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에 가까운 땅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압도적인 규모를 뽐낸다. 수만에 이르는 전각들이 저마다 가로 세로로 반듯하게 배치되어 있는 까닭이다.
마경 강호인들이 이르길.
거인 반고(盤古)의 바둑판이라 했다. 옛 오나라의 삼오역기(三五歷記)란 서책에 처음 저술된 거인의 바둑판.
하나같이 칼처럼 솟아오른 지붕에, 강박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 구획과 물길들. 모든 전각군의 바깥쪽에 정(井) 자로 관도가 트인 형태였다.
터무니없이 질서정연했다. 남제의 성미가 고스란히 묻어날 정도였다.
한편, 흑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살다 살다 마경의 도읍에….”
흑포의 검객이 뇌까린다. 새까만 머리칼을 연검마냥 한 줄기로 묶어 내리고, 흰빛 허리 요대의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다.
광검대주 학소선.
다른 대주들과 나란히 선두였다.
그녀의 옆에 선 천소소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저게 남제의 진법이라는 말이 있었어. 모든 땅이 격체전력처럼 지배자에게 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예전에 장안성(長安城)이 저랬다던데… 초대 천마가 밀어버리기 전까지는.”
한 걸음 앞으로 대열을 이탈한 위지극의 혼잣말이다. 그는 이내 제자리에 쪼그려 앉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흑도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리가 너무 한산해.”
적을 가늠한다.
이미 시작된 것이다. 무공으로 치면 파훼식을 엮는 과정. 대다수의 흑색들은 이러한 분석에 익숙하면서도 능했다.
흑도로 진격하는 내내 정가동공의 구결만 법문(法文)처럼 중얼거리던 창천대주 한철목도 마찬가지였다. 키가 훤칠하게 큰데도 까치발로 안법의 시야를 높이는 모습.
“그 많은 양민을 모조리 대피시킨 것인가? 못해도 십만이 넘어갈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을….”
세 가지를 뜻한다.
남제의 무시무시한 통치력, 휘풍령으로 말미암아 신검단의 동선을 훤히 꿰뚫고 있는 정보력, 근본적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황제의 그릇까지.
섬뜩한 일이었다.
이미 기습의 효과는 없다.
그저 다른 북왕들이 흑도로 더 몰려들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할 뿐이다.
하지만 여의천주 북궁아는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표정 없는 멸섬대주 신황과 함께 대열의 중앙에 자리 잡은 채였다.
“신검단이 무섭긴 했나 봐. 차라리 잘됐어. 양민은 안 휘말린다잖아.”
“제가 잠입하여 명교주와 남제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법한 미청년이 나섰다.
맑다 못해 광기마저 일렁이는 눈동자에, 터무니없이 잘 닦인 잔근육이 소맷자락 사이로 비친다. 늘 그랬듯 천재적인 검객의 풍모였다.
“본가의 암검(暗劍)으로 길러진 몸, 지금 보니 오늘을 위함이었습니다. 옥쇄하는 것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백기린 남궁화신의 음성은 담담하여 듣기 좋았지만,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입황대전 때부터 신검순천의 말을 귀담아듣는 흑색은 없다시피 했다. 주화입마에 잘 듣는 영약 따위를 의약전에 주기적으로 의뢰할 뿐.
애초에 그들의 명령권자는 따로 있다. 신검단주의 부재 시에는 단주 대리, 단주 대리마저 없을 때는 신검부대주다.
순간 모든 신검단 무인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하나뿐인 바위에 걸터앉은 진명조를 향해.
“…….”
그는 무표정으로 손아귀의 돌조각들을 굴리고 있었다. 잘그락, 잘그락 나지막한 소리가 천천히 새어 나왔다.
명교주 소천무적이 역루성에 다녀간 직후부터 늘 같은 얼굴이다. 그가 어렵사리 대하던 신검죄수 역시 흑도를 앞두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
이 자리에서 공월무를 이룬 무인은 진명조뿐이었다. 끝내 흑색들 틈에서 헌원창이 물음을 툭 던졌다.
“이제 어찌합니까?”
“…모든 무력대를 지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나는 네놈들을 잘 몰라. 관심을 둔 적이 없다.”
얼음장이 부서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직하게 대답한 진명조는 다시금 멀리 있는 흑도로 시선을 돌렸다.
입황성에서도 암암리에 천대받던 혈귀. 붉은 눈동자에 복잡한 도시 구획이 하나둘씩 새겨진다. 거대한 판에 박히는 바둑알들처럼.
어스름의 영토.
척박한 어둠에서 밝은 곳 명나라를 내려다본다. 정확하게는 투신과 남제가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천하목을.
“도시 전체가 뭔가를 준비하는 느낌일세.”
무극전주 금청원이 거무튀튀한 의족을 천천히 까딱인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를 방비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야. 확실히 무언가를 겸하고 있네. 이를테면… 투신의 현현과 같은 일을.”
그때 문득.
푸르스름한 빛으로 도시 외곽이 밝아졌고.
쿠르릉!
때아닌 천둥소리가 떨어졌다.
끝없이 늘어진 성벽의 좌측이 새까맣게 그을린다. 어느새 하늘에서 흑도까지 나뭇가지마냥 이어진 벼락을 따라서다.
곧이어 푸른 번갯빛이 실타래마냥 스스로 풀어 헤쳐진 자리에, 키가 굉장히 큰 여인이 서 있었다.
요족이 아니다.
눈언저리에 깊은 음영이 새겨져 있고, 콧대는 유난히 굵으면서도 높았다. 행색도 이국적이었다.
푸른 비단을 허리에 감아 맸는데, 거기서 다시 천을 어깨에 걸치고 밑으로 내려 입은 것이다.
존엄했다.
진귀한 천 자락으로 의복을 대신한다. 전투와는 거리가 먼 행색. 바로 천축(天竺: 인도)의 특별한 예장이었다.
그녀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곧장 용암성까지 갈 뻔했다.”
종소리처럼 맑은 음성.
상단전 의념이나 큼지막한 육합전성이 번진 것도 아닌데, 머나먼 언덕을 기어 올라가 신검단 무인들의 귓가에 선명히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끝 모를 내공이 대기를 공명시켰던 까닭이다.
“너희가 이미 무너뜨린 줄도 모르고.”
명백히 휘풍령의 북왕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신분을 짐작할 만했다.
대왕 바즈라(大王 ʋɐ́d͡ʑ.ɽɐ).
보리달마의 고향 땅에서 왔고, 온 세상의 기근을 가엾게 여긴다. 그래서 천하를 배회하던 중 북방의 투신에게 매료된 존재.
뇌전기공(雷電氣功)의 초월자였다.
쇠붙이를 수련한 무인이라면 대적이 불가능하다 했다.
절세고수가 아니면 격이 맞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진명조의 차례다. 순간 그의 몸이 언덕의 암석 위에서 희끗해졌고.
후욱!
산등성이와 흑도의 정중앙에 펼쳐진 광야를 딛고 섰다. 귀신 같은 보신경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 되오.”
동시에 늙수레한 음성이 진명조를 멈춰 세운다. 정확히 백 보 앞이었다.
쾅!
폭이 일 척(一尺: 약 32cm, 명나라)에 가까운 대검이 균열진 땅에 움푹 박혔다. 어느새 거대한 칼자루를 지팡이마냥 거꾸로 쥔 노인이 광야에 서 있었다.
명백히 진명조보다 머리가 서넛쯤 더 큰 신장에, 두꺼운 얼굴 가죽을 중심으로 살짝 기울어진 이목구비. 이마에 잡힌 주름살과 눈매를 파고든 칼자국들도 돋보인다.
하얗게 탈색된 머리칼은 윤기 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진명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고요성검주(皐陶聖劍主).”
“그렇소. 나는 이 강호의 율법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대들의 진군을 허락하지 않을 심산이오.”
요족 노검객의 말은 몹시 차분했다. 풍채 좋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고요(皐陶).
옛 순나라의 전설적인 법관이다. 거기에 성검(聖劍)이라 함은, 천하의 요족 검객들을 통틀어 가장 고결하다는 의미였다.
중원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투신에게서 비롯된 별호다. 싸움 신의 부탁으로 이 땅의 질서를 맡고 있으니, 왕의 위계를 지닌 감찰어사라고 해도 된다.
그의 오형옥신검결(五刑獄神劍結)은 꾸밈없이 패도적인 신공으로, 정면에서 받아낼 자가 육원성군 문곡뿐이라 했다.
진명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성 명류대의 첩보가 있었다. 우리가 받아 가야 할 것만 내어주면, 너희에게 은원을 따질 생각은 없다.”
“받아 가야 할 것?”
“투신 재래의 진법, 산 채로 포박된 명교주 서천명왕, 남제의 머리.”
하나같이 천하를 뒤흔들 조건이다.
고요성검주의 두꺼운 입에서 누런 균열이 번졌다. 요족의 미소였다.
“좋은 담대함이오.”
그가 조용히 뇌까린 직후였다.
“초행길일 텐데 놀랄 만큼 빨리 왔군요. 이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성문 안쪽에서 울렸다. 마찬가지로 한어(漢語)였다. 하지만 그 발음은 대왕 바즈라와 고요성검주보다 훨씬 또렷했다.
쿠구궁―
강철로 이루어진 중앙 성문이 과감하게 열리기 시작한다. 마경의 강호인들에겐 수성(守城)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렇게.
양문이 활짝 열린 자리에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 산등성이와 광야, 성 쪽을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과 함께였다.
“음.”
북경 한림원의 학사들처럼 고아한 문사복에, 한 손으론 커다란 판관필(判官筆)을 쥐고 있다. 굉장히 큰 꼬챙이 형태로서 크기가 줄어든다면 붓으로도 보일 병장기.
손아귀가 워낙 크고 우악스러운 까닭일까.
판관필의 촉에서 웬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의 손에 있으니 정말로 붓과 같았다.
“…그럼.”
육원성군 문곡이 입을 연다.
“개전에 앞서 한 가지를 주지시키겠습니다. 아무래도 신검단의 흑색들 말고는 진실을 아는 이가 드물 듯하고, 저는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는 편인지라….”
동시에 그의 판관필이 성벽으로 휘둘러졌다. 일필휘지(一筆揮之)란 말 그대로였다. 만인이 봐야 한다는 것마냥 굵직하게 새겨지는 글귀가 있었다.
신검단주 섬예.
서천명왕이 그의 수명에 대해 가로되.
하늘이 무심하여….
쾅!
진명조가 문곡의 판관필을 밟아 성벽으로 박아버리는 소리였다. 굵직한 균열이 돌담을 타고 사방으로 질주한다.
강대한 신검단 전력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뻔한 수작. 문곡이 빙그레 웃었다.
“문사의 붓을 꺾다니요.”
“경거망동하지 마라. 죽는다.”
‘내가.’
진명조는 문곡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묵야(默夜).]그리고 시작부터 공월무였다.
찰나지간 그의 손에서 검붉은 안개가 검(劍)의 형상으로 일렁이고, 어느새 등 뒤까지 내달려 온 고요성검주의 대검을 충돌음마저 집어삼키며 튕겨 버린다.
“……!”
고요성검주의 눈이 커지는 한편.
휘이이이이익―!
도시 맞은편의 산등성이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길게 치솟아 올랐다. 마광익 출신 신검대원, 사월궁귀 위예령의 명적(鳴鏑: 피리 구조의 화살)이었다.
* * *
산새의 울음이 피리마냥 유유자적한 오솔길.
삿갓을 쓴 외팔의 이야기꾼이 말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칼질이 아닐세. 자네는 내가 사라지는 모습만 봐서 몰랐겠지만, 고작 칼부림으로 원하는 곳에 재깍재깍 갈 수 있다면 술법무공이 왜 있겠나? 인생사가 다 그렇듯 계곡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웬 산짐승을 마주치는 일도 있고, 더러 이렇게 엉뚱한 길이 열리기도 하는 걸세. 운이 좋아야 해.”
“…….”
“그리 차분하게 있지 말게. 사람이 너무 성숙해졌어. 차라리 욕지거리라도 내뱉게.”
“쓸모가 덜하군.”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네. 두고 보게. 한순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