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491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18화
원래 네브라는 남들과는 차별화된 특출한 재능을 이용해 깔끔한 전투를 펼치는게 특기였다.
남들처럼 한 번 막고 한 번 공격하고 하는 식이 아니라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상 대방의 움직임을 읽어 내며 공수 일체의 묘리를 살리고 상처 하나 입지 않는 마술 같은 전투 방식.
그러나 지금은 그런 방식을 고집할 여유가 없었다.
“포그!”
짙은 안개와 채찍에 휘감겨 있는 불꽃의 열기가 어우러져 시야를 더 흐릿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잠깐이라도 움직임을 놓치면 치명적인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것을 짐작한 랏시는 본능에 따라 허공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느낌이 있어!’
공기를 가르는 감촉을 느낌과 동시에 살이 타오르는 매캐한 냄새가 아련하게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비록 요새 조직을 꾸리느라 일선에 나가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형 길드를 이끄는 수장쯤 되서 제 한 몸 간수하지 못할 리가 없다.
적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예상보다는 강하다는 수준일 뿐, 단신으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는 상식 외의 강함은 아니었다.
랏시가 만약 조금만 더 실전 경험이 많았으면 채찍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을 통 해 몸통이 아닌, 훨씬 더 얇은 걸 베었다고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공격을 한 번 성공시켰다고 이렇게 쉽게 긴장을 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걱!
안개를 가르며 튀어나온 검이 채찍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팔뚝째로 잘라 내버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멍한 눈동자로 바닥에 떨어지는 오른팔과 피분수가 솟아오르는 어깻죽지를 바라보고 나서야 랏시는 자신의 팔이 베여져 나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채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복부에 날아든 발차기에 맞고 그대로 뒤의 벽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내 팔을 베어 낸 사람이 전부 여자라니. 기묘한 일이로군.”
“큿, 파, 팔이”
“팔 하나 내주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
왼팔을 희생하는 대신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네브라는 스킬의 효과로도 완벽 하게 막지 못하는 통증 때문에 미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을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깔끔 떨고 지는 것보다는 어떤 수단을 쓰는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된 지금은 이런 방법도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에 그대로 무릎 꿇고 비명을 내지르려던 랏시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팔이 잘려 나갔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네브라를 보자 입술이 터지도록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 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적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 주지 않겠다는 오기였다.
“끝내세요.”
“목숨 구걸은 하지 않는 건가”
“악취미로군요. 살려 줄 생각도 없으시면서.”
돈을 받고 고용된 용병들이나 중간 관리직 같은 경우라면 몰라도 적대 조직의 명령권자 내지 권력층은 후에 어떤 분쟁의 씨앗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살려 두면 안 된다.
특히 랏시처럼 한 조직의 대표였던 인물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이야 기책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두 세력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큰 세력이 작은 세력을 흡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흡수한다는 건 생각처럼 절대로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역으로 먹힐 가능성이 커지고 어찌어찌 통제한다 하더라도 전 세력의 권력층은 그 존재만으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깔끔한 처형만이 답. 그러나 네브라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살고 싶다면 살려 줄 수 있다. 아니, 죽여달라고 해도 나는 널 살릴 것이다. 살아서 내 밑으로 들어와라.”
“……하, 미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 없군요. 지금까지 벌인 일을 생각해 보면 멍청한 건 아닐 테고 미친 건가요 만약 부하가 된다고 해도 제가 순순히 당신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 안 해. 예전에 지긋지긋하게 겪어 본 적이 있어서 너 같은 사람은 잘 알아.”
“그러면 대체 왜?”
“이제부터 내가 벌일 일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배신할 생각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하나. 유능한가 그렇지 않은가 뿐, 그리고 내가 볼 때 너는 유능한 인간이다.”
핏!
목젖에 검을 가져다 댄 네브라는 냉혹한 눈동자로 랏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택해라. 순순히 나를 따를 건지, 아니면 맞고 나서 따를 건지.”
“……끄, 끄흐흐흐, 아, 아아아아.”
도저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네브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뚱맞은 말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웃음과 신음이 섞인 기묘한 비명을 한참 동안 내뱉던 랏시는 곧 네브라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났다.
* * *
두 집단이 부딪힌 여파는 의외로 크지 않았다.
바리케이드를 이용해 최대한 시간을 끄는데 집중한 탓에 실질적으로 병력끼리 맞붙었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제임스와 이정의 활약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때 유토피아의 최상위권 랭킹에 속해 있었던 제임스는 3차 각성자 한 명을 격살하고 나머지 한 명과 수십 명의 전투원을 대로변에서 붙잡아 둠으로써 실력이 녹슬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또 이정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었다. 전방보다 비교적 더 많은 후방 기습 조와 3차 각성자 두 명을 상대로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조차도 단 한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붙잡아 두는데 성공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것이다.
새로운 신인 강자의 출현과 기존 거대 세력의 몰락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정 씨.”
“고생은 뭘. 그다지 힘든 상대도 아니었는데.”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는 건가 나도 열심히 싸웠는데 말이야.”
“열심히 싸웠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지. 분명히 나는 피해를 최소화하라고 말했을 텐데 두 자릿수에 이르는 사상자가 나온 건 무슨 까닭이지”
“최대한 분투하기는 했는데 적이 영 만만찮아서 말이야. 어설프게 싸우다가 내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난 밤 격전으로 작은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브라는 알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필요 이상의 희생을 낸 부하를 심하게 질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달랐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니 다행이야.”
최상위 랭커인 제임스 한 명의 가치와 반쪽짜리 3차 각성자, 그리고 수십 명의 전투원의 가치. 어느 쪽이 더 우위인지는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쓸데없는 일로 귀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깨달은 네브라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지. 일단 가장 먼저 지금까지 주먹구구식으로 난잡하게 이루어졌던 명령 체계와 조직의 구조를 체계화하기로 하겠다.”
“그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게 있지 않아”
“정해야 할 거라면”
“이름말이야 이름. 지금까지처럼 막연하게 가게 이름을 내세울 것도 아니고 제임스파, 네브라파처럼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
“……조직의 이름이라면 해방 전선으로 정하기로 하지.”
“해방 뭐로부터의 해방인데”
“자유연맹의 지배도 좋고 지금의 거짓된 평화도 좋고 그 밖의 무엇이든 좋다. 현 세상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가 됐든 동료로 받아들일 테니.”
“뭐 나쁘지는 않네. 그걸로 하지.”
과거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조직에서 일했던 만큼 애초에 조직의 이름은 제임스에게 있어서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부르기만 편하다면 특정 종교의 이름이든 전혀 의미 없는 단어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 전선은 크게 우리들의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내당內堂과 동맹관계로 이루어진 세력이 속할 외당外堂으로 구분한다. 아직 외당은 없으니 그 부분은 나중에 정하고 내당에 대해 정해야겠지. 일단 길드장인 내 밑의 직속인 부길드장의 권한을 이정, 제임스, 랏시 세 명에게 모두 주겠다.”
“그렇게 된다면 명령 체계가 너무 복잡해지는 거 아닌가요”
“부길드장의 권한은 추후 앞으로 정할 구역과 맡게 될 전투 집단으로 철저하게 제한한다. 권한 내에서라면 무슨 일을 벌이든 상관없지만 내당에 속한 자가 분수를 모르고 설치거나 내 명령에 거부하면 그 어떤 상황이라도 즉결 처분이다.”
살벌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반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임스야 원래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던 잭 애프론 밑에서 구른 전적이 있었으니 이 정도야 별로 놀라울 것도 아니었고 랏시는 지난 밤의 사건을 겪으면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랏시에게는 내정 관리와 재정에 관한 일을, 제임스는 과거 인연이 있던 유토피아의 랭커나 범죄자들로 이루어질 부대를 맡기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정 씨는 임시로 블랙 버드 길드의 세력을 맡아 주십시오.”
“임시”
“구파와의 연계가 보다 확실해지면 구파의 인물들로 이루어진 내당의 조직과 외당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직위를 따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나 귀찮은 거 싫어하는데. 최대한 빨리빨리 부탁해.”
평범한 대화였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임스와 랏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넘버 투는 저 녀석이군. 건들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드는데 언제 한번 면상을 찢어 주고 싶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명백하게 차이나는 공손한 태도. 일단 기억해 둬야 겠네요.’
* * *
“……그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으아아아아!”
“어이, 이정 형씨. 심심해 보이는데 잠깐 어울려 주지 않겠어”
“어울린다니 뭐 좋은 술이라도 있나”
“술보다 더 좋은 거지.”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제임스는 이정의 팔을 잡고 질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미미하게 풍겨 나오는 투기와 팔뚝에 드러난 힘줄을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네브라는 굳이 말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싸움은 일어나는 법이었고 이정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결과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일까요”
“말장난하기 싫다. 빨리 본론을 꺼내.”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가 위에 올라탔는데도 아무 반응을 안 한다니. 혹시 고자 아니야’
네브라의 냉막한 눈을 본 랏시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전 꿈이 있었어요. 이제는 사라진 블랙 버드 길드를 크게 키워서 권력이든 재력 이든 뭘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최후의 무대 공략조에 들어가겠다는 꿈이었죠.
그리고 어젯밤 네브라 님을 만나고 마음을 바꿨어요. 제가 백날 천 날 노력하는 것보다 네브라 님을 따라가는 게 그 꿈을 이룰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거든요.”
“그것과 지금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행동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무정한 남자도 자신이 안은 여자를 무심히 버리지는 않아요. 그 어떤 남자도 말이죠.”
“이런 짓을 한다고 해도 난 네게 구속되지 않는다. 만약 네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널 버릴 거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단순히 불안한 제 마음을 달래 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안아 주신다면 네브라 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게요.”
“…….”
머릿속에 루시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뿐, 네브라는 랏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을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리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이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꼭 팝콘을 챙겨 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