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91
■ 690화. 시련 (2) □ ᓚᘏᗢ
이렇게까지 행복한 날들이 있었을까. 케이트와 함께 다니면서 체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 흠모하던 아이작의 곁을 빙빙 배회하면서 주변인들과 교류를 넓히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한 이야기도 쓸 수 있었다.
그것이 다소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게 조금 의아하긴 해도 상관없다. 아이작에 대한 설명이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아카데미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으며 휴학 신청서를 냈다. 기한은 ‘성서’를 모두 작성할 때까지.
가문에서도 말을 해놓았기에 별 탈은 없었다. 차기작을 구상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니 존중해줬다.
옛날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녀의 아버지, 레티시 백작은 과거에 꿈을 한 번 짓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작과의 대화를 통해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녀의 꿈을 존중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마음 편히 케이트를 따라 글을 쓸 수 있었으며, 좋아하는 일들을 동시에 하니 세상이 분홍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되는 걸까요······?”
그러나 아이작과 이어지는 건 별개의 문제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더 큰 행복을 바라는 건 과욕이다.
레티시 백작에게 꿈을 짓밟혔을 때 깨달은 것이다. 그때 용기를 품고 자신 있게 말했다가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가.
그래서 마음 속에 묻어두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을 향한 마음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자고.
아이작이 웃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데다가 그의 곁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지 않은가.
글을 잘 쓰는 것빼고 잘하는 게 하나 없는 자신이 결코 낄 수 있을 자리가 아니다.
“체리라면 충분합니다. 아이작 님도 체리가 용기를 내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 ···”
“한 번만 용기를 내는 게 어떠세요? 언제까지 그 마음을 품은 채 살 수는 없잖아요.”
케이트도 체리와 진지한 토의를 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아픈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죽이 잘 맞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체리 특유의 어두운 면모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조언을 듣고 상세히 파고드니 예상보다 더 암울한 과거를 안고 있다.
만약 아이작이 구원해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위험했겠지.
다행히 조기에 발견한데다가 꿈까지 회생시켜줬지만 위태위태한 건 다르지 않았다.
“······더이상 아픈 건 싫어요.”
“체리.”
“선배님은 괜찮아도 다른 분들이 싫어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리 된다면 선배님이 곤란해하실 거고······ 그러면 또······”
복잡한 아이작의 여자 관계가 체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충분히 일이 있는 말이다.
원래 여자 관계가 복잡할수록 치정극이 활발한 법. 서로 사이가 좋은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체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들이 어째서 체리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요······?”
“잘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체리는 이미 아이작이 원하는 바를 충족했으니까요.”
“제가요······?”
케이트의 말에 체리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에 케이트는 기회라 여겼다. 여기서 치고 나가야 체리를 완벽히 설득할 수 있겠지.
그녀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부드러이 말했다.
“목소리를 내어라. 침묵하지 말아라.”
“그건······”
“아이작 님께서 강조하시는 교리 중 하나죠.”
체리도 알고 있다. 케이트가 스타비르크에서 발생한 일들을 모두 알려줬으니까.
그 모든 일들이 케이트의 계획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아이작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걸 체리에게 말한 것이다.
물론 체리는 딱히 놀라지 않고 기록만 할 뿐이었지만. 아이작과 관련된 건 모두 쓰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다.
“체리는 그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셨어요. 안타깝게도 한 번 좌절하셨지만, 꿈을 위해 용기를 내셨죠.”
“···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체리가 자신의 아버지, 레티시 백작에게 원고를 내밀며 꿈을 밝혔을 때를 말하는 것일 터.
비록 그 용기는 허무하다 못해 절망적인 결과로 돌아왔으나 아이작의 교리(?)에 정확히 부합했다.
“어쩌면 아이작 님은 그때부터 체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단지 체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아니다. 아이작이 구해준 건 엄연한 사실이나 받아들이는 건 별개다.
그때는 정말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올까봐 사람 한 명 살리는 셈으로 정체를 밝힌 것이다.
이후에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더 나아가 레티시 백작의 고집까지 꺾어버렸다.
그 성자에 그 전파자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오해와 착각으로 빚어낸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케이트의 설득력과 입담은 아이작 못지 않게 훌륭했다. 어쩌면 진심으로 믿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네. 그리고 아이작 님의 애인분들이 체리를 견제하거나 겁박한 적이 있나요?”
“··· ···”
“아마 없을 겁니다. 오히려 친절하게 대해줬겠죠.”
맞는 말이다. 체리가 아이작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아이작은 물론 그의 여인들이 환대해줬다.
으레 있을 법한 치정극?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서로가 좋은 친구이자 아이작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으니.
그들은 상처가 깊은 체리를 항상 배려해줬으며 귀여운 동생처럼 대해줬다. 체리도 상냥한 그들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아이작과 가까운 사이가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이 관계가 망가질 수도 있지 않은가.
케이트도 그 생각을 읽었는지 서둘러 체리를 불렀다.
“체리.”
“네······?”
“저도 아이작 님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셨어요. 다른 분들도 허락하셨고요.”
케이트의 고백 아닌 고백에 체리가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뒤이어 케이트는 조심스레 손을 뻗더니 체리의 손을 맞잡았다. 정말 부드러운 손이다.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내면 됩니다. 제가 곁에서 도와드릴게요.”
“그래도······”
“욕심이라 생각하고 계시곘지만 전혀 아니에요. 체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요.”
다시 없을 친구이면서도 추기경에 해당하는 케이트의 설득 덕분일까.
체리의 눈빛에 고민의 흔적이 짙게 새겨졌다. 낮은 자존감이 여전히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최후의 일격이 필요하다. 케이트는 온화한 미소를 유지한 채 결정타를 날렸다.
“만약 체리가 거부한다면, 저 또한 아이작 님에게 은혜를 받지 않을 거예요.”
“네, 네······?”
“아시다시피 저는 아이작 님에게 은혜를 받고 싶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을 날이 올 테고요.”
체리의 낮은 자존감을 역이용하는 방법이다. 설득보다는 이런 게 더 잘 통할 터.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체리가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가장 친한 친구인 케이트와 거리가 멀어진다.
그러기는 싫다. 하지만 수락한다면 아이작에게 마음을 밝혀야 된다.
“저, 저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이작 님은 체리를 기다리고 계세요. 체리만 목소리를 낸다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겠죠.”
“행복한······ 삶······”
“네. 행복한 삶이요. 체리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가요?”
케이트의 물음에 체리는 상상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아이작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삶.
그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가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단순히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을 뿐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것만으로도 체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체리는 잠깐 침묵을 고수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은가요?”
케이트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고 온화하게 웃을 뿐이다.
첫 번째 시련을 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체리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네. 괜찮고 말고요. 체리도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은혜를 받았다 하지 않았나요······?”
“아.”
케이트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생각하는 은혜와 체리가 생각하는 은혜가 많이 다르다.
잘못 하면 원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케이트는 약간 고민하다가 조용히 진실을 꺼냈다.
“사실 제가 착각하던 부분이에요. 은혜가 어떤 거냐면······”
케이트가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은혜’의 정체에 대해 밝혔다. 겸사겸사 어떤 오해를 불렀는지 전부 설명했다.
체리는 그 설명을 잠자코 듣다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섹스요?”
뒤이어 직설적으로 그 은혜가 무엇인지 말했다. 참으로 외설적인 단어 선정에 케이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반면 체리는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케이트가 손부채질을 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행위죠. 혹시 거부감이 드나요?”
“아뇨. 단지······”
가문에서 정조 관념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새겨들었다. 성관계는 반드시 반려와 행해야 하는 일이라고.
아이작은 결혼을 한 몸이지만 첩으로라도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딱히 상관없는 문제다.
단지 관계를 통해 아이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냐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
“그거라면······ 선배님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거죠?”
“당연하죠. 체리라면 충분히······”
케이트는 말을 하다 말고 밑을 힐긋거렸다. 단연코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체리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저 흉기(?)라면 사랑받고도 남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작이 계속 체리를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같은 여자인 자신마저 멍 때리게 만드는데 아이작은 오죽할까. 덕분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장담할게요.”
“그래도······ 가문에서 반대할 수도 있는데······”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거든요.”
솔직히 따로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누가 아이작의 선택을 막을 것인가.
“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 겁니다.”
케이트는 체리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자신이 아니라 체리를 위해서다.
체리도 그녀의 단호함을 읽고 아주 미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귄 것 같다.
이 모든 게 아이작이 자신을 알아주고 구원해줬기 때문이겠지. 그녀에게 아이작은 구원자를 한참 넘어섰다.
“그런데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제가 가문에서 들었는데······ 부부가 관계를 치를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된다고 들었어요······”
“준비요?”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전혀 듣지 못한 사실인데.
체리도 이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건 마찬가지인지라 따로 조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아마 세실리 님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
“체리의 저택으로 가기 전에 물어봐야겠군요. 고마워요.”
체리와 케이트가 대화를 나누는 곳은 저택의 신전이다. 평소에 체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집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 두 여인은 로즈베리 백작가로 향하기 전, 저택으로 잠시 복귀했다. 당연하게도 세실리를 찾기 위함이다.
공교롭게도 세실리 또한 아이작의 저택에 있던 상황이라 그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준비요? 당연히 중요하죠. 잠깐 수도로 가서 옷부터 살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실리의 적절한 서포트 다음으로는 곧장 로즈베리 백작가로 찾아갔다.
체리와의 면담이 첫 번째 시련이었다면, 두 번째 시련은 당연하게도 레티시 백작과의 면담.
“실례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게······ 아이작 님의 사상이 심히 의심되어서······”
두 번째 시련은 다소 험난할 것으로 추측됐다.
* * *
비슷한 시간.
아이작은 멸망기사의 원고들을 모두 확인하고 곧장 출판사로 전송했다.
발간 기간은 출판사가 알아서 할 테니 자신은 마음 놓고 놀면 그만이다.
물론 진짜로 노는 게 아니라 할 일은 마저 할 생각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피와 강철 외전이다.
“이번에는 어떤 내용이야? 또 꿈도 희망도 없는 전쟁 이야기?”
마리의 물음에 아이작은 피식거렸다. 하기야 여태까지 시궁창적인 내용을 쓰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
더구나 종말론까지 퍼뜨린 자신이지 않은가. 그 덕분에 다소 염세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아니. 그 반대야. 인간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지.”
“무슨 이야기인데?”
아이작은 원고지를 우편에 넣으면서 담담히 얘기했다.
“돈과 양심을 바꾼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내용은.
“아마 흥미로울 거야.”
두 여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