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423)
EP.423 미유키의 결단 #2
테츠야의 목소리는 몹시 진중했다.
먼 거리에서 들어도 딱 알 수 있을 정도인데, 가까이서 놈의 똥내 나는 목소리를 듣는 미유키가 이상하게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삐걱거리는 소리가 없어졌다.
테츠야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음을 눈치챈 미유키가 그네를 멈춘 것이다.
“말 그대로야. 마츠다가 좋은 거야?”
“당연히 좋지.”
“얼마나?”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소꿉친구한테 저런 질문을 하면 할수록 상처를 받는 건 자기 자신일 텐데…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 언제는 안 그랬느냐만.
“음… 수치로 표현해야 해? 하기 힘든데…”
“많이 좋아하나보네.”
“맞아. 진짜 좋아해.”
오늘의 미유키는 저번 수학여행에서 똥볼을 찬 테츠야를 달랠 때보다 단호했다.
마치 테츠야의 음흉한 기운을 느낀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말이다.
“그렇구나…”
말끝을 흐리고 잠깐 침묵하는데, 미유키가 걱정된다.
고개를 담벼락 위로 살짝 내밀어보니,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너무 걱정이 과한 건가? 아무리 테츠야의 열등감이 터졌다고는 해도 소꿉친구에게 해코지를 할 일은 없을 텐데…
그래도 조심은 하고 있어야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테츠야의 입이 열렸다.
“나는 미유키 네가 마츠다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해.”
저번에 날 돌려 깠을 때와는 다르게 대놓고 말하는구나.
테츠야치고는 대단히 직선적이다.
“음… 왜?”
“걔가 어떤 사람인지 넌 잘 알고 있잖아. 예전에는 눈엣가시처럼 여겼었고.”
“그때랑 지금은 달라.”
“중학생 때… 정확히는 중학교 3학년 때, 네가 한 양아치가 벌인 일을 선생님한테 전부 말씀드렸던 일 기억해?”
“아, 그때? 물론 기억하지.”
“그때 네가 나한테 씩씩대면서 그랬었어. 사람의 본성은 변하는 일이 잘 없다고.”
“응. 그것도 기억나.”
“그런데도 마츠다를…”
“테츠야 군.”
테츠야의 말을 끊어버리는 미유키.
그에 잠깐 머뭇거린 테츠야가 얼떨떨한 투로 대답했다.
“응…? 왜?”
“혹시 나 좋아해?”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언제 널 좋아하지 않은 적 있어?”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말이야.”
“어, 어…?”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질문.
평소의 미유키가 하지 않던 말이라, 테츠야를 보지 않아도 놈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것 같다.
엄청난 고민에 휩싸인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놈이 내놓은 대답은,
“나는… 그저 소꿉친구로서 널 걱정하니까…”
완전한 아웃이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휴… 내가 저래서 테츠야를 증오하는 거다.
결단력 같은 게 전혀 없으니까.
저놈은 항상 여지를 남겨두려고 한다.
지금도 그렇다. 미유키를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하면,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아서 저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거다.
미유키가 나는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다고 하면 연락하기 어려워지니까, 그 일을 피하려고.
아까까지만 해도 테츠야가 꽤나 과감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취소다.
놈이 미유키에게 했던 말처럼,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테츠야는 딱 테츠야다. 내가 도키아카 엔딩을 봤을 때의 그 테츠야 말이다.
저놈은 모른다. 저런 우유부단한 면이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몰아넣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알게 해주고 싶지도 않다.
이건 스스로 느껴봐야 하는 거다.
“그렇구나. 내가 착각한 건가?”
“착각…?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미유키는 알고 있었다. 테츠야가 자신을 여자로 바라보고 있음을.
허나 테츠야가 저따위로 대답해서 선을 긋기가 어려워졌을 테지.
미유키가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하는지 보자.
“정말 그런 거야?”
“그렇다니까…?”
“그래? 다행이다.”
“다, 다행…?”
미유키가 오늘 칼을 빼든 것 같다.
테츠야의 저 애매한 답을 훌륭하게 받아쳤다.
난 널 남자로 본 적은 없다고 하지 않은 건 조금 아쉽지만, 이건 테츠야가 대답을 거지같이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본다.
만약 테츠야가 미유키의 질문에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앞선 말을 했을 테지.
“테츠야 군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날 걱정해주고는 했지. 내가 지금 이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다가 손에 상처가 나면 안절부절 못하면서 약을 가지러 갔던 것도 생각나네?”
“그, 그랬던 적이 많았지. 나도 생각나.”
테츠야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잔뜩 서려있다.
다행이라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반려한 미유키에게 미련이 남은 게 티가 난다.
“그래. 근데 그럴 때의 테츠야 군이랑 지금의 테츠야 군은 달라.”
미유키의 낮아진 톤에, 놈이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어…?”
“그때의 테츠야 군이 순수하게 날 위했다면, 지금은… 아주 나쁜 목적이 있는 것 같아.”
“나쁜 목적…?”
“응. 심증뿐이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테츠야 군은 나를 마츠다 군한테서 떨어뜨려놓으려는 것처럼 느껴져.”
정곡을 제대로 찌르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테츠야에게 했던 것 중에서 가장 단호한 말이기도 했다.
“오늘 마츠다 군이랑 싸웠어?”
이어지는 미유키의 물음에, 테츠야의 말이 더듬거렸다.
“아니… 싸운 건 아닌데… 마츠다는…”
또 다시 날 깎아내리려는 기색이 보여서였을까?
미유키가 딱 잘라서 놈의 말을 끊었다.
“됐어. 그냥 안 들을래. 오늘 엄청 이상해. 수학여행 때도 그러더니… 내가 알던 테츠야 군이 아니야.”
“…..”
“내 눈엔 테츠야 군이 흥분해있는 게 보여. 돌아가서 머리를 좀 식히는 게 어때?”
“…. 나는…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한숨을 푸욱 내쉬는 소리와 함께, 발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테츠야가 그네에서 내려온 거다.
이제 슬슬 멀리서 오는 척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내가 거리를 벌리려 할 때,
“테츠야 군.”
미유키가 돌연 테츠야를 불렀다.
“응…?”
“테츠야 군이 스스로 생각했을 때, 오늘 나한테 한 말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 그러면 당분간은 연락을 자제하는 게 좋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어 놀이터 안의 두 사람을 살폈다.
미유키가 테츠야와의 연을 끊게 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 뭐…?”
“나 오늘 실망 많이 했어.”
“…..”
15년 이상 가까이 지내온 소꿉친구를 냉대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억지로 짓는 표정은 아니었다. 미유키는 정말로 괜찮은 듯했다.
목소리에도 흔들림이 없다. 미유키가 결단을 내렸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찜찜한 감정이 남아있을 테지.
회식 자리에서 내가 직접 테츠야와 담판을 지었어야 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테츠야는 지금처럼 미유키에게 질척거렸을 터다.
차라리 이러는 게 낫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쓴소리를 들어야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마음도 접는 법이다.
근데 자업자득이라고는 해도 미운 정이 든 건가?
미유키에게 얻어터지는 테츠야를 보니 왠지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지, 저놈이 불쌍한 척을 해서 그런 거다.
동정할 여지는 단 하나도 없다. 저 연기력에 속지 말자.
테츠야는 결국 고개를 푹 수그리고 놀이터 바깥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에 빠르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담벼락에서 떨어진 나는, 지금 막 도착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며 발을 놀렸다.
그렇게 입구에서 나온 테츠야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
자신의 동네에서 날 보았음에도, 테츠야는 놀라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유키와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나서 대화를 하던 도중, 내가 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뭐하냐? 여기서?”
미간을 구긴 내 말에, 놀이터 안쪽을 흘끗 곁눈질한 테츠야가 대답했다.
“미유키 만났어.”
“놀이터에 있어?”
“어. 들어가. 그리고 축하한다.”
아이 씨발.
뒷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욕이 안 나올 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축하한다고? 미유키의 마음을 완전히 얻은 나를 비아냥거리는 게 분명하다.
역시 저놈에게 동정은 사치다. 잠깐 마음이 약해졌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냐.”
테츠야는 정면으로 내게 맞서지 않고 음침하게 수작을 부렸다.
그렇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듯 나 또한 놈과 비슷한 짓을 해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포용하라는 속언이 있는데, 그건 다 개소리다.
사람은 똑같이 당해봐야 안다. 오늘을 기점으로 놈과 미유키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낼 거다.
나는 이런 연기엔 도가 텄다. 그러니 아주 훌륭한 상황을 만들어보자.
이상한 눈으로 테츠야를 자극하니, 기분이 나빠진 듯한 놈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그렇게 약간의 자극을 주고 테츠야를 지나치려던 나는,
툭.
놈이 내게 마주 걸어오면서 자신의 어깨를 내 어깨에 부딪치자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예상과 한 치의 다름없는 짓을 할까? 역시 저놈은 구원이 불가능하다.
내 옆엔 인도를 비추고 있는, 기둥이 굵직한 가로등이 있었다.
이걸 이용하면 될 것 같다고 판단한 나는, 몸이 밀리는 타이밍에 맞춰 이마를 가로등 기둥에 갖다 대었다.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았다가 튕겨져 나가는 머리.
이마 한쪽 상단부에 얼얼한 통증을 느낀 나는 부딪친 부위를 문지르며 황당한 눈으로 테츠야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아, 그…”
놈의 사나웠던 눈은 온데간데없어진 상태였다.
열등감을 죄다 쏟아 붓고 나니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얼마나 찌질한 짓을 했는지.
근데 뭐 어쩌랴? 이미 업보는 쌓일 대로 쌓였는데.
여기서 봐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마음만 같아선 주먹질을 하고 싶지만, 미유키는 폭력을 싫어한다.
그 행위에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몹시 껄끄러워하고, 놀이터에 그녀가 있는 상황인데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지.
어차피 상황은 내 바람대로 흘러갈 테니, 나는 겉으로만 인자하게 굴면 된다.
“됐다. 그냥 가라.”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은 나는 그대로 놀이터 입구에 발을 걸쳤다.
“마츠다 군!”
날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잔뜩 내보이며 달려오는 미유키.
그런 그녀가 내게 생긴 이상반응을 확인하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마에 그거 뭐야…? 피야?”
달빛과 가로등에서 내리쬐는 빛에 비추어진 내 이마를 확인한 그녀의 말.
이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이마를 만지작거린 나는, 약간 찢어진 상처에서 전해져오는 따끔함에 과장을 조금 섞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