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n away from an SSS-class obsessed man RAW novel - chapter 45
그는 이해했다는 듯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 꾸며 낸 너인지 궁금하네. 내가 파악했던 이재현인지, 지금의 이재현인지.”
놈을 꿰뚫어 볼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자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목 언저리를 긁어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나야. 전자는 너한테 감추고 싶던 나고, 후자는 보여 주고 싶던 난데. 항상 너한테는 반대가 돼 버렸거든. 타이밍도 타이밍이었지만……. 그땐 다 서툴렀으니까. 그리고, 너도 날 가면을 쓰고 대했잖아.”
“내가?”
의외의 답에 되묻자, 놈이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굴렸다.
“무표정이던 평소의 너랑 마음 준 사람한테만 보여 주는 너. 차이가 너무 나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내가 마음을 준 사람이라면 친구인 채연일 게 뻔했다. 애초에 학창 시절 추억 속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원래 다 그렇지 않아?”
“맞아. 둘 다 너지. 그러니까 나한테도 여러 면이 있는 거고. 사람은 입체적이고 양면적이잖아.”
놈이 하려는 말이 뭔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한 단어로 요약하려 하지 말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그건 사람의 특성을 파악하고 정의하기 좋아하는 내 나쁜 버릇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튼, 날 너무 의심하지 말라고. 넌 항상 날 분석하려고만 하니까.”
남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버릇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구린내 나는 사람을 거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 내 앞의 이재현도 결국 생각대로 구린 놈이었으니까. 생각이 그쪽으로 뻗어 가니 잊고 있던 짜증이 치밀었다.
“자업자득이지. 실제로 날 속이기도 했고.”
“……무슨 말이야?”
이재현은 또다시 낮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되물었다.
“입사한 목적이 김세한을 죽이는 거라고 했던 거, 거짓말이잖아.”
차분하게 나를 담은 눈이 잠시 느릿하게 깜빡이다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거짓말을 고르다 그만둔 듯한 모양새였다.
“……다른 애들이랑 벌써 대화 나눌 만큼 친해졌나 보네.”
거짓말을 포기한 이유를 알 수 있는 혼잣말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왜 거짓말한 거야?”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크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어. 네가 김세한한테 품은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싶었고, 네가 날 필요로 하는지도 알고 싶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필요한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
즉, 의도적으로 내 심리를 흔들었다는 것이었다. 놈이 던진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충돌이 오갔는지, 그때의 감정은 어땠는지 모두 생생했다. 사람의 감정도 자신이 짠 판에 이용하고 다음 단계를 설계하는 것. 바로 이런 점이 이재현의 무서운 점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나를 데려온다는 목적을 이뤘다는 게 어쩐지 조금 분했다.
“미안해.”
이미 벌어진 일에 답답함과 억울함을 홀로 삭이며 한숨을 내쉴 때쯤, 나지막한 사과가 들려왔다. 끓어오르는 속이 조금 편안해짐을 느꼈다.
“네 진짜 목적이 뭐야?”
덤덤하게 묻자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 대답했다.
“이 이야기의 끝을 보는 거.”
그리 많은 고민을 한 대답은 아닌 듯 간단명료했다.
“그러기 위해선 네가 필요해. 끝을 아는 건 너뿐이잖아.”
‘그런 게 뭐가 중요해?’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이재현이 말을 이었다.
“그 끝에 우리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우리가 여기에 왔을 때가 딱 소설의 시작이었으니까. 돌아가는 것도 소설의 끝이 아닐까 하고. 이러면 내가 너와 같은 목표를 가졌다는 건 설명이 되나?”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저번에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날 속인 전적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쌓일 만하면 무너지는 신뢰도에 내게 이재현은 여전히 수상한 존재였다. 복잡한 머릿속을 눈치챈 건지 이재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널 속이는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이재현은 마침내 나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불안한 나는 뭐든 확답을 바랐고,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내 앞으로 조심스레 내민 새끼손가락이 마치 답을 기다리듯 멈추어 서 있었다.
‘이놈…… 믿어도 될까.’
여전히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내 흔들림을 읽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믿어 봐.”
날 보는 이재현의 눈에선 작은 떨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러울 만큼이나 안정된 자아를 가진 인간. 그래서일까. 이리저리 뻗어 나가던 생각들을 다 잊게 하고, 오로지 본인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실 믿고 말고 이제 나한테 이재현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또 속이면 그땐…… 가만 안 둬.”
그러니까 이건 그냥 씨알도 안 먹힐 경고였고, 약속을 해 주는 건 이재현이 자비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여기 온 이상, 관계의 주도권을 쥔 건 명백히 이재현 쪽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들어 올려진 내 새끼손가락이 이재현의 손가락에 닿았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낯설어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그는 닿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대로 걸어. 내가 걸까?”
놈은 작은 미소와 함께 낚아채듯 손가락을 걸어 왔다. 거기에 조금 놀라 작게 움찔거렸고, 다시금 마주친 눈에 침묵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들려온 바람 소리에 이재현의 고개가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갔다.
놈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서는 계단 부근, 다시 말해 출입구 부근에 가만히 서 있는 b.w 팀원들이 보였다. 언제 왔는지 그 옆에서 피닉스도 조류 특유의 고개를 갸웃거리는 움직임을 하며 이쪽을 보았다. 하나같이 벽에 기대어 마치 영화라도 감상하는 듯한 눈이었다.
“언제 왔어?”
친근하게 묻는 이재현의 목소리가 묘하게 감돌던 침묵을 깨자 피닉스가 그제야 인사를 건네듯 피이이-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왜? 하던 거 계속해.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배준형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난 그제야 닿은 손가락을 떼어 냈다. 별것도 아닌데 저 말을 들으니 괜히 민망해졌다. 떨어진 손가락에 손을 거둔 이재현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들어오지?”
이재현이 눈썹을 까딱이며 손짓하자 그제야 하나둘 안으로 발을 옮겼다. 각자의 손에는 투명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내용물은 몬스터의 사체로 보이는 고깃덩어리와 통조림 캔들이었다.
“분위기가 묘~ 해서. 우리 다시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돌아야 하나 고민했잖아.”
어느새 다가온 김성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재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약속한 거뿐이잖아.”
덤덤하게 말하는 이재현과 달리 마치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배준형과 김성민이 눈을 맞추며 차례로 입을 열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손가락 걸고 약속할 일이 흔치는 않지?”
“이성재, 이제 보니 수법이 꽤 클래식하네.”
두 놈의 말에 문득 아직 온기가 남은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불편한 감각은 역시 이런 행위가 익숙지 않아서인 모양이었다. 어릴 때를 제외한다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할 일은 없으니까.
“너희 심심한 건 알겠는데, 오랜만에 봤으면 안부를 먼저 물어 줄래? 나 거의 죽다 살아났거든.”
그 말에 잠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지만, 곧 다시 각자 하던 일을 할 뿐이었다. 어제 그가 누워 있을 때보다도 못한 관심이었다.
“제대로 말하는 거 보니 다 나았구먼 뭘.”
권지우는 어제의 그 드럼통에 나뭇가지를 채워 넣으며 말했고.
“여자랑 손가락 걸 생각 하는 거 보면 다 나았지, 암.”
배준형은 나뭇가지에 고기를 끼워 넣으며 거들었다.
“그나저나 이성재, 완전 시체 되기 직전 같아 보였는데. 힐이라는 거 신기하다.”
결국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뱉고 있었다. 유태영은 피닉스에게 흡혈 늑대의 사체를 내밀어 보였고, 피닉스는 고개를 위로 젖혀 순식간에 삼켜 냈다. 마치 애완동물의 밥을 챙겨 주는 느낌이었다.
“짹짹아, 파이어!”
그 명령 한 번에 드럼통 안에선 다시 불이 타올랐다. 차분하고 나른했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복작복작한 느낌이 났다.
“하여튼…….”
이재현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멍하니 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일어나라는 제스처였다.
“뭐 해. 밥 먹어야지. 배 안 고파?”
“……배고파.”
쭈뼛쭈뼛, 몸을 일으킨 내 귓가에 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맞다. 낯 많이 가렸지.”
이재현이 내 상의를 잡아당겼다.
“가자. 내가 편하면 내 옆에 있고.”
묘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얼굴, 그게 꼴 보기 싫어 고개를 저었다.
“권지우 옆에 앉을래.”
어깨를 으쓱한 이재현이 먼저 앞서갔고, 불이 담긴 드럼통을 둥글게 감싸듯 모인 놈들이 하나둘 나를 돌아보았다. 비어 있는 의자 대용 드럼통은 마치 내 것이라는 듯 남겨져 있었다. 내 자리는 권지우와 이재현 사이였고, 막상 앉고 나니 숨 막히게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콩콩콩- 작게 뛰어오는 심장 탓인지, 아니면 드럼통 안에서 뿜어지는 연기 탓인지 어쩐지 코끝이 매워졌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소속감에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울 때쯤, 권지우가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내 무릎 위로 담요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길드 내 연애 금지야.”
뜬금없는 말이었다. 혹시 아까 이재현과 그러고 있던 탓에 오해해 내게 경고하는 걸까, 라는 추측을 했을 때쯤, 권지우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흘끔거리지들 마라.”
그 말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언뜻 이재현이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
김세한을 떠나와 b.w의 일원이 된 지도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재현의 의도와는 달리 작은 업무로도 입소문을 탄 b.w의 이름이 점점 세간에 알려져, 밀려드는 의뢰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긴, 이 정도 되는 인물들을 모아 놓고 조용히 지내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옆면이 전부 뚫린 건물에서 드럼통 모닥불을 둘러싸고 그날 잡은 몬스터 고기를 구워 먹던 시절이 지나가고. 바닥은 침대로, 드럼통은 의자로, 나뭇가지는 포크로 바뀌는 데 6개월 정도 걸렸다. 즉, 제대로 된 거처를 얻었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여자 방과 남자 방을 나누어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안정되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옥상이 딸린 작은 단층 주택이었다.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세한의 건물은 정확히 강남 중심부에 있었고 어디에서든 보일 만큼 높았다. 그나마 처음 김세한을 떠나왔을 땐 KSH 건물의 꼭대기 부근만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거처를 옮긴 현재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김세한과 가까워졌다. 물론 가깝다고 해도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현재 아고라 안쪽이 아니라면 부동산 시세가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거처를 옮기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건 거주민이 많아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된 아고라와 어느 정도 가깝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피닉스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 그 어려운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바로 지금 우리의 숙소였다.
아고라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고, 이 주변을 몬스터들이 한 번 쓸고 간 탓에 주변 사람들은 다 이사를 해 이 동네 자체가 유령 도시였다. 따라서 대놓고 낮은 옥상에 피닉스를 두어도 비명 한 번 들리지 않았다. 물론 이 드문 조건의 집도 이재현이 찾아낸 곳이었다.
탁-
노오란 조명 아래, 테이블 위로 잘 구워진 닭고기가 올려졌다. 풍겨 오는 고기 냄새에 조건 반사적으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현재로선 구경하기 힘든 아주 값비싼 음식이었다. 몬스터를 잡아먹는 게 이제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원래 인간이 먹던 고기는 그 가치가 높아져 부(富)의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테이블에 올려진 닭고기는 우리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새삼 김세한이 내게 베풀던, 그리고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식사가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를 지난 1년간 절실하게 깨달았다.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다더니, 딱 그 꼴이네.”
툴툴대며 닭 다리에 손을 뻗는 배준형을 김성민이 저지하며 말했다.
“창문 없는 곳에서 자던 때보단 낫지 뭐. 일할 수 있는 걸 감사하다고 생각해.”
고생스러웠던 지난날들이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내가 만들었다지만 캐릭터를 파악하기엔 너무 정보가 없는 엑스트라라 낯설기만 했던 b.w 팀원들도 이제 행동을 예상할 수 있을 만큼이나 캐릭터를 꿰뚫고 있었다.
“먹어.”
닭고기 분배권을 쥔 이재현이 내 앞 접시에 닭 다리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 옆, 권지우의 접시에도 닭 다리가 놓였다. 지극히 ‘레이디 퍼스트’를 중시하는 이재현다웠다.
“와, 이거 성차별 아니야?”
장난스레 툴툴대는 배준형에게 이재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철저히 성과 중심으로 배분하는 건데? 너 오늘 헛짓거리해서 애들 애먹였다며. 그거 권지우가 수습하고.”
“아, 그거 내가 아니라 김성민이 실수한 거라니까?”
배준형이 억울한 듯 김성민을 가리키자 김성민 또한 할 말이 있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보통 시끄러운 저 둘을 조용히 시키는 건 박도윤 담당이었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이재현에게 미루는 듯 보였다. 이미 사냥 내내 시달려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아는 이재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어. 어차피 1, 2등 외에는 다 똑같잖아. 그리고 김성민이랑 배준형, 너희 집에서 레슬링 좀 그만해. 쓸데없는 부상으로 힐러 고생시키지 말라고.”
“이거 봐. 또 구재희만 챙기지……. 너희 사귀냐? 사귀지?”
놀리는 패턴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저 말에 나도, 이재현도 적응한 지 오래였다. 마지못해 이재현이 먹고 떨어지라는 듯 닭 날개를 떼어 주고 나서야 배준형은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듯 하품을 한 박도윤이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보며 권지우에게 물었다.
“유태영 이놈은 왜 안 와?”
“왜 그놈 행방을 나한테 물어? 새대가리 밥 챙겨 주고 오겠대. 먼저 먹어.”
“잘만 알고 있구먼 뭘.”
권지우의 거친 말투도, 박도윤의 시니컬한 태도도 이제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친 눈에 약간 미소 짓는 이재현의 얼굴도 더는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빨리 먹어.’
이재현이 입 모양으로 나를 재촉하기에 별다른 부담 없이 포크를 들었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닭고기는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다.
“오늘 나온 그 몬스터, 지금까지 나온 애들 중에 제일 특이한 거 같아. 피해도 크고.”
“덩치가 커서 피해는 큰데, 강하진 않던데?”
“그거랑은 상관없이 한번 뜨면 싱크홀이 생기잖아.”
“싱크홀보다는 호수지.”
김세한이 곁에 없어도 몬스터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나타난 새로운 몬스터는 은빛 고래. 나타날 때마다 갑작스레 그 몬스터 주변으로 둥글게 땅이 꺼지며 물이 들어차는 게 특징이었다. 잡는 건 어렵지 않지만, 땅이 꺼지고 물이 찬다는 특징만으로도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야기의 반 이상 왔네.’
한창 테이블 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아, 새로운 몬스터라 그런지 김세한도 왔더라.”
챙- 내 손에 쥐어졌던 포크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조금 놀란 탓이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당황해 몸을 굽힌 나보다 먼저 포크를 주워 든 이재현이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새로 가져다줄게.”
“아, 고마워.”
그가 내 포크를 가지고 멀어졌고, 비어 버린 손에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박도윤이 턱을 괸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 아직도 신경 쓰이는 이름이야? 반응하고는.”
“그런 거 아니야. 타이밍 좋게 떨어졌을 뿐이지.”
“타이밍도 참~.”
삐딱한 태도로 날 놀리듯 말하는 박도윤을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니면 아닌 거지. 아무튼, 너 오늘 안 따라가서 다행이네.”
보통은 유태영과 건물 위에서 사냥을 지켜보곤 했지만, 오늘은 따라나서지 않고 집을 지켰다. 남으라는 이재현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재현은 촉이 꽤 좋은 편이었다. 내 앞에 새 포크가 놓이고, 내내 눈치를 살피던 배준형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김세한은 오늘 계속 보고만 있던데. 자기네 팀 보는 걸 텐데, 괜히 감시당하는 느낌이라 좀 쫄렸다, 오늘.”
다시 자리에 앉은 이재현은 포크를 들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무 유명해져서 그래. 새 몬스터를 잡으러 온 길드는 많지 않고, 우리는 거의 신생 길드라 생각하니까 루키로 보이겠지. 아마 다 신기하게 보고 있을 거야. 얼굴들이 다 알려지기 전에 이쪽에서 감추는 게 낫겠어.”
“뭘 어떻게?”
“내일부터는 가면 쓰고 일할 거야.”
“가면?”
김성민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나도 구재희도 그쪽에선 죽은 사람이야. 걸리면 김세한이 무슨 짓을 할 거 같아?”
“모르긴 몰라도 구재희 빼 온 날 김세한이 건물 날리는 건 봤는데. 확실한 건 이성재, 네 모가지는 날아가지 않을까?”
김성민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말을 뱉었다. 여느 때와 같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다. 이재현은 눈을 반쯤 뜬 채 눈썹을 까딱이며 답했다.
“거기에 너희가 휘말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 있어?”
이재현이 나이프를 들어 목 부근을 긋는 듯한 모션을 취했고, 김성민은 굳은 얼굴로 머리를 털었다.
“……젠장. 가면 답답한데.”
납득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