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restructuring RAW novel - Chapter 243
Chapter 52. 회사의 입장(4)
팟-
【ON AIR】
방송 내내 요상하게 꿀렁거리던 붉은빛이 꺼졌다.
[회, 회장님!]방송이 종료되었음을 확인한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회장에게 다가갔다.
[내용이…….]왠지 모르게 바닥이 경사진 것 같았지만,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다가갔다.
하지만.
[잘했네.]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잘했다고? 정말?’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왠지 머리가 안개 속에 갇힌 듯 뿌예서 정리가 잘 안 되기도 했고.
아무튼, 회장님이 잘했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녀는 그저 늘 초롱초롱하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 순간.
【ALERT!】
【변경사항 발생!】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항목 – 미션내용】
【요청자 – 회장(대리)】
【요청권한 – 확인】
지렁이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텍스트.
비서실장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감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존 미션에 변경사항이 발견되었습니다.】
【업데이트 사항을 배포하시겠습니까?】
[업……데이트……?]【Y/N】
Yes or No.
아니, Yes or Yes인가……?
헷갈린다. 왜 헷갈리는지 모르겠지만, 헷갈린다.
비서실장은 몽롱한 눈을 들어 회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끄덕.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회장이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달칵-
실장의 손가락이 마지못해 움직였으며.
【업데이트 배포중……】
【1%, 2%, 3%……】
시스템창에 그려진 기다란 네모칸.
조금씩 올라가는 진척도가 빈칸의 속을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채워 가기 시작했다.
【57%, 58%, 59%……】
이상하다. 왜 네모칸이 점점 채워질 수록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지?
비서실장은 애써 머리를 흔들었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고.
【97%, 98%, 99%……】
마침내 속이 꽉 찬 새까만 네모가 반짝이고, 진척도가 100%를 가리킨 순간.
— 띠링!
【업데이트 완료!】
회장이 다가왔다.
언제나의 인자한 얼굴.
[수고했네.]연륜이 가득 담긴 주름진 얼굴.
그리고…….
“이제 쉬어요.”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과, 젊은이의 그것 같은 맑은 목소리……로……?
‘……어?’
풀썩!
바닥이 파도처럼 일어나 덮쳤다.
* * *
“은호 씨!”
“오빠!”
“형니이이이이이이임!”
팀원 몇 명을 비밀의 방으로 불렀다.
지은 씨, 재혁이, 연보라, 그리고 윤솔아까지.
아까 전투에서 적들의 검에 베인 상처가 솔아의 손끝에서 사라져 간다.
그리 깊지 않은 상처였기에 휴식 시간 역시 그리 길지 않았지만.
“왜. 뭐.”
“음? 왜요? 우리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윤솔아를 제외한 모두가 부담스러운 눈을 빛내며 날 둘러싸고 있었다.
궁금하긴 한데, 아픈 사람 붙잡고 묻기 미안하니 눈치만 보는 듯한 반응.
“궁금하면 물어봐.”
그래서 한마디를 던지자.
“아까 숲에 별똥별 떨어지고 난리 났던데 오빠 혹시 거기서 다친 거예요?”
“은호 씨, 괜찮으신 거 맞죠?”
“근데 방금 방송은 뭐였습니까, 형님?”
“비서실장? 그 여자는 왜 갑자기 우리 편을 든 거예요?”
백 마디로 돌아왔다.
“맞고, 맞고, 방송은 술 덕분이고.”
“네에?”
그렇게 간단한 대답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그 사람, 분명 회장 측근이라고 들었는…… 꺄악!”
발에 뭔가 걸린 지은 씨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직 여기 있었어요?!”
지은 씨가 기겁한 얼굴로 방금 부딪힌 장애물을 가리켰다.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는 비서실장을.
“아…… 보다시피 움직일 상태가 아니라서요.”
“사, 상태가 왜 이런 겁니까?”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방에 팔다리가 묶인 채 널브러져 있는 여자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 게 뻔하다만.
“……취해서 그래.”
“네? 그럼 아까 술 마신다고 하신게 진짜 술이었…….”
이 술, 이렇게까지 독할 줄은 몰랐다고.
“이거. VIP 고객한테 받은 술입니다.”
‘준비된 신부’가 데이트 미션에 만족해 하며 선물했던 귀곡주(鬼哭酒).
▣ 귀곡주(鬼哭酒)
– 귀곡산장의 특산물로, 곡소리를 빚어 만든 귀한 술.
술잔을 건네받은 상대가 마실 경우, 지정된 환영을 보게 된다.
– 단, 취한다.
‘취한다.’
딱 한 문장이었고, 딱 한 잔이었다.
아마 술의 도수가 높아서라기보단 환영을 보고, 그에 심력을 소모한 탓에 지쳐서 취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싶다.
아무튼.
“환영이요?!”
환영의 정교함이 어느 정도일지 몰라 아껴 뒀었는데. 딱 적절한 기회였다.
“그럼 저 여자는 환상을 본 거예요? 아저씨가 만든?”
치유를 마친 윤솔아가 비서실장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 내가 회장인 척 흉내를 좀 냈지.”
환영(幻影).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상황을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불어넣는 거였는데.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더라고.
“의심할까 봐 회장실 밖으로 못 나가게 했어. 회장 말투랑 표정은 연습했고.”
“와, 오빠 대박! 회장실은 또 언제 가 봤대?”
“안 가 봤는데?”
“엑? 그럼 엄청 허술했을 텐데…… 그걸 속아 넘어갔어요?”
“자료 조사를 좀 했거든.”
《세라》 여기가 비서실.
《세라》 이 복도 지나면 바로 회장실이에요.
《세라》 여기 사진.
그럼에도 허술한 부분이 분명 있었을 텐데. 다행히 잘 넘어갔다.
“아마 세부적인 건 자기 기억이랑 섞어서 떠올렸을 거야.”
그게 이 귀곡주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부족한 부분을 본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 메워 주는 까닭에, 만들어진 환영을 자연스럽게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
어쨌든 간에.
“그럼 이분은 이제 어떡하죠?”
지은 씨가 눈썹을 살풋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널브러진 비서실장은.
[회장뉘임……줘도 쥔그읍…….]지금 제 운명이 결정되는 줄도 모르고 술주정을 했고.
“실장님.”
스윽.
빠드득 이까지 갈아 대는 비서실장의 앞에 주저앉았다.
“다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살짝 열이 올라 빨개진 볼이 꿈틀거린다.
“진짜 넘어왔으면 부회장까진 아니어도 한 자리 챙겨 줄 생각이었는데.”
인재 등용과 처벌에 누구보다 진심이며 확실한 회장이 가장 가까이에 데리고 있던 직원.
수많은 아첨꾼 중 가려낸 옥석이자, 회장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었다.
‘그래서 욕심났던 건데.’
[제가 회장님을 모신 세월이 얼만데요. 전 다시 태어나도 회장님뿐입니다.]그 정도 충신이 말 몇 마디에 넘어올 리는 없었을 터. 당연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말이지.’
그나저나.
[뭣이?! 함정이라?] [확실합니다! 그러니 절대, 절대로 본체로는 가시면 안 됩니다.]회장의 본체. 그 얘길 좀 더 나누고 싶은데.
[우으음…….]이 상태에선 무리겠지.
그럼,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고.
짤랑-
환상 속에 갇힌 비서실장이 알아서 꺼내든 아이템들을 챙겼다.
▣ 비서실 출입증(Master)
– 비서실 출입증.
Master 권한이 부여되어 제한 없이 사용 가능.
▣ 회장실 출입증(User)
– 회장실 출입증.
일반 User 권한이 부여되어 Master 이용자가 ‘잠금’ 또는 ‘출입금지’ 상태로 지정하지 않을 경우 사용 가능.
비서실장의 얼굴이 박혀 있는 카드 두 장.
자, 그럼 볼일은 다 봤고.
“이 여자 좀 가둬 줄래?”
멀뚱히 서 있던 재혁이에게 말했다.
“예? 어디에 말입니까?”
“감옥.”
“……?!”
“보라가 안내해 주고.”
그러자 옆에 있던 지은 씨와 연보라를 쳐다보며 대답을 구하는 녀석.
“우리 성에 감옥이 있었습니까?”
“있었나? 못 봤는데…….”
“오빠! 우리 감옥 안 만들지 않았어요?”
어리둥절한 반응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대쪽 벽면에 띄워 둔 수백 개의 카드.
형형색색의 카드 중 칙칙한 쇠창살이 그려져 있는 은색 카드를 뽑아 들었다.
핑그르르-
파앗!
[‘감옥’을 설치합니다.] [400p가 소모됩니다.]“있어. 이제.”
‘통곡의 성’에 첫 죄수가 들어온 순간이었다.
* * *
— 참관이들~ 안녕!
— 지금 한창 이슈인 핫플! 노사협력팀 사무실에 왔어!
거대한 스크린 속, 오똑한 이목구비에 화려한 화장과 장신구를 덧댄 여자가 입을 열었다.
— 아직 공유 못 받은 참관이들은 없지~?
— 그래두 혹시 모르니까 보여 줄게!
한참을 조잘대던 여자가 ‘요기!’하며 반투명한 미션창을 공유했다.
【내용 : 이은호를 처치하시오】
──────▼──────
【내용 : 이은호를 구하시오】
하나의 미션.
그러나 지나간 지령과 새로운 지침이 함께 담긴 창을.
— 이거 분명히 원랜 처치 미션이었거든? 근데 노조 가입했더니 바로 업데이트되더라?
— 넘 신기하지 않아? 나 이런 거 첨 보잖아!
그렇게 한참을 호들갑 떨던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 사실 첨엔 그 팀장 처치하는 거 찍으려고 요기 온 거였단 말이야?
— 근데 구하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아서 가이드라인 따라 한 거야. 어때?
미션이 바뀌었다.
직원들의 미션이 바뀌고 있다.
— 응? 내가 처맞을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냐구? 아니거든?!
— 암튼, 암튼! 쪼~기 이은호 팀장 보이네! 회복해 볼게!
이은호를 처치하라 보냈던 미션이.
— 짠! 체력 회복시켰어. 나 실력 아직 안 죽었지?
이은호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 어? 근데…….
— 와아아아! 대박! 진짜 진급했어!
— 이거 진짜 개이득인데?!
그 망할 구원자들이 보상까지 받아 챙겼다.
— 와! 넘어질 뻔한 거 잡아 주고 진급한 애도 있대! 미쳤나 봐 진짜!
[이게…….]— 노조 최고!
— 다들 뭐 해? 얼른 가입 안 하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물었다!!]콰앙-!
[저년이 지금 무어라 지껄인 거냐고!!]회장실 테이블이 박살 나 사방으로 튀었다.
귀하디귀한 무지개석 흉상이 산산조각 났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물었다!]시퍼런 강기(強氣)를 담은 서류 조각들이 날붙이처럼 날아다니며 책장을 쓰러뜨리고, 벽을 무너뜨렸다.
[아, 아무래도 비서실장이 이은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닐지…….] [실장이 넘어갔다고?! 실장이?!]콰드득!
무너지는 책장 속, 회장의 백발이 벼락 맞은 사람처럼 쭈뼛 솟았다.
[망할 계집년이 지금껏 먹여 주고 길러 준 은혜도 모르고……!]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콰드득!
감히 저를 배신한 찢어 죽일 수하보다, 그년을 빼 간 이은호에게 더 큰 분노가 일었다.
[……이은호.]쓸모없는 땅.
가만뒀다면 쓰레기장 속에서 죽고, 부패하고, 소멸했을 영혼이었다.
그걸 구제해 줬더니, 감히 이따위 짓을 벌여?
‘회사’가 지닌 숭고한 가치를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할 벌레 새끼가……!
[받아 주지. 그 싸움.]번쩍-!
회장이 감았던 눈을 떴다.
두─웅!
건물이 울린다. 폐허가 된 방이 어둠으로 물든다. 창밖이 캄캄해진다.
그 만들어진 어둠 속에서.
콰드드드드득!
벽면에 금이 간다. 진동한다.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회, 회장님! 건물이 무너지려 합니다!]그리고 용기 내어 말리겠다 달려온 새내기 비서가.
콰앙-!
폭발에 휩쓸려 날아갔다.
[……크헉!]무너진 벽 너머의 바닥에 처박히는 몸뚱어리. 먼저 떨어진 다리가 아작 났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고온에 살가죽이 녹아내린다.
[회……장님…….]회장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프로토콜 999 발동.]형형한 안광을 내뿜는 눈자위는 이미 눈동자를 잃었다.
[전 국장들을 소집한다.]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가 일렁이고, 요동치고, 폭발한다.
그러나.
[그 찢어 죽일 놈을 회사의 적으로 규정하노라.]회사의 적.
기나긴 세월, 홀로 군림해 온 하늘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은 벌레의 이름.
[……이은호.]폭발과 분진이 만들어 낸 어둠 속.
그 이름 하나만이 오롯이 울려 퍼졌다.
[진정한 힘이 어떤 건지 보여 주마.]아주 크고 또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