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restructuring RAW novel - Chapter 53
Chapter 12. 타인의 기억(4)
불특정 다수의 스크린이 있던 자리를 하나의 커다란 기억이 가득 채웠다.
잿빛 하늘. 무너져 내린 도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 외벽이 과자처럼 바스러진 한가운데.
쓰러진 지은 씨와 그녀를 붙들고 있는 내가 있었다.
【‘홍보국 프리지아’가 이거 설마 새드 엔딩이냐고 묻습니다.】
【‘감사국 레몬사탕’이 지금 남주가 살려내는 중이니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줍니다.】
지은 씨가 염동 스킬을 개방했을 때다.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내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런 날 구하기 위해 애쓰다 무너진 건물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을 때.
[‘용산구’ 지역 생존자, 1,000명.]999명에서 다시 1,000명으로 늘어난 생존자 수.
정확히는 쓰러진 뒤, 석청을 막 사용한 시점인가.
‘이 기억을 골랐다고?’
조금 의외였지만, 영 이상한 선택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난 기억.
그만큼 특별한 기억이 또 없을 테니.
【‘조사국 냥냥이’가 13지구가 로맨스 맛집이라더니 사실이었다며 박수 칩니다.】
【‘감사국 레몬사탕’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은 오랜만이라고 환호합니다.】
……참관자들 반응이 좀 이상하긴 하다만.
마치 로맨스 영화라도 보는 듯한 반응.
불편하네.
지은 씨는 지금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중인데.
“제발……!”
그런 지은 씨를 붙들고 있는 나도 필사적인 표정이고.
【‘홍보국 프리지아’가 이제 입맞춤으로 깨우는 거냐고 묻습니다.】
【‘감사국 레몬사탕’이 빨리하라고 재촉하며 두 손을 모읍니다.】
근데 이 상황에서 입맞춤이니 뭐니…….
저들 목숨이 걸려 있어도 팔자 좋은 소릴 늘어놓을까 싶다.
눈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그나저나.
‘왜 안 일어나지?’
원래대로라면 눈을 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분명 석청을 사용하자마자 으깨진 머리가 재생되고, 곧바로 눈을 뜨지 않았었나?
그때.
【익명의 참관자가 왜 석청을 썼는데, 깨어나지 않느냐고 의아해합니다.】
‘!!’
생각만 했을 뿐인데 자동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이 내 머릿속과 동기화되어 있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안 통하는 건가?”
불안한 건 스크린 속 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이를 빠득 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스으으으으윽!
일어서는 옷자락을 지은 씨가 잡아 쥐었다.
가느다란 검지와 엄지만 겨우 들어, 느릿느릿하게.
‘방금 뭔가…….’
세상이 느려진 것 같았는데?
‘가속 스킬을 썼을 때처럼.’
착각이겠지 생각하며 다시 화면에 집중하는 사이.
“으, 은호 씨!”
지은 씨가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빨개진 얼굴로.
【‘조사국 냥냥이’가 여주 수줍어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키득거립니다.】
“지은 씨! 괜찮아요?!”
“네……!”
살았다. 살아났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이 스크린을 채웠다.
구경꾼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홍보국 프리지아’가 그럼 지금 서로 살려 준 거냐고 묻습니다.】
【‘감사국 레몬사탕’이 둘 다 좋아 죽는다며 흐뭇해합니다!】
음…… 여전히 핀트는 조금 이상했지만.
“지은 씨, 방금 죽다 살아났어요.”
이 상황을 연애 감정으로 해석하다니.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자기 몸부터 지켰어야죠.”
어마어마한 착각이다.
지은 씨를 잘 모르는 이들이기에 할 수 있는 착각.
이어질 말을 들으면 저들도 깨닫겠지.
“분명히 은호 씨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워낙 착한 사람이라,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한 행동이라는 걸.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누구였어도 구했을…….
“은호 씨니까요.”
음?
나한테 했던 말이랑 좀 다른데……?
“은호 씨라서 그런 거예요.”
나라서 그랬다니.
어감이 묘하다.
싱긋 웃는 얼굴도 묘하고.
그리고 가장 묘한 건.
갑자기 들려오는…….
─ She~ maybe the beauty or the beast~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팝송과.
‘응?’
“지은 씨, 그게 무슨…….”
“모르시겠어요?”
흔들리는 내 동공을 한껏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 Maybe the famine or the feast~
느끼한 bgm.
쓸데없는 클로즈업.
시간 잡아먹는 슬로우 모션까지.
이거 꼭…….
‘로맨스 드라마잖아!’
【‘조사국 냥냥이’가 여주의 돌직구에 입을 틀어막습니다!】
【익명의 참관자가 달달한 편집에 기겁합니다!】
맙소사. 뭔가 잘못됐다.
그리 생각하며 입만 쩍 벌리고 있자니.
“살려 줘서 고마워요, 은호 씨.”
자그마한 머리를 내 가슴팍에 폭 기대는 지은 씨와.
빠밤- 빠밤- 빠바밥바바밤-
하며 울리는 밴드 반주.
그리고.
─ I! love! you! baby~ and if it’s quite alright~
뭔지 모를 극의 하이라이트를 알리는 경쾌한 음악.
‘지은 씨, 설마…….’
【‘조사국 냥냥이’가 풋풋한 스킨십에 꺅 비명을 지릅니다!】
【복지 포인트 1,000점 후원!】
허어.
지은 씨의 당돌함에 놀랐다.
정말로.
이렇게 적극적인 타입이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홍보국 프리지아’가 시작하는 연인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복지 포인트 500점 후원!】
【‘감사국 레몬사탕’이 오랜만에 설레는 커플을 발견했다며 박수 칩니다!】
【복지 포인트 1,000점 후원!】
참관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후원금을 받기 위해 로맨스 채널을 운영하기로 결심하다니!
비서 출신이라 똑 부러지고 눈치도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다니…….
다시 봤다.
‘혼자서도 잘하네.’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괜히 방해하지 말고 나가는 편이 좋…….
【‘조사국 냥냥이’가 키스하면 5천 점 바로 쏜다고 선언합니다!】
【복지 포인트 1,000점 후원!】
……어?
뭘 하라고?
【익명의 참관자가 긴장과 충격으로 멈칫합니다.】
나가자.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여기 있다간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게다가 내가 이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지은 씨가 알게 된다면…….
‘안 돼!’
빨리.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 휘익!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요상한 클로즈업을 시작한 스크린을 피해.
* * *
─ 파앗!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잿빛 풍경이 사라졌다.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전체 화면이 아닌 옆 영상으로 넘어간 모양.
[E13-HRN-CJH#8251 채널에 접속합니다.]생경한 광경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공간.
‘여긴…….’
수십 개의 책걸상. 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칠판. 교복 입은 아이들.
학교다.
그것도.
“그, 그만해, 이 새끼들아!”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만해?”
무릎 꿇은 한 명과 그를 둘러싸고 낄낄대는 나머지가 다섯.
아까 지은 씨 바로 옆에 있던 영상이었다.
꼴 보기 싫어서 지나쳤는데, 다시 봐도 한심하다.
기껏 고른 기억이 저런 거라니.
─ 짜악!
주동자로 보이는 덩치 큰 놈이 무릎 꿇은 학생의 뺨을 갈겼다.
고개가 홱 꺾이고 상체가 휘청거릴 정도.
하아.
절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유형이다.
학창 시절, 폭력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쓰레기들.
‘멋모를 때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멋모를 때’이기 때문에 더 그자의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눈 버렸네.’
그리 생각하고 채널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뒤로 가…… 어?]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까만 얼굴.
익숙한 겁쟁이가.
‘!!’
학교 폭력의 현장.
영 어울리지 않는 광경 한가운데에서.
[최재혁……?]……네가 왜 거기 있어?
* * *
최재혁. 스물다섯.
형님! 형님-! 하며 따르는 통에 나나 지은 씨나 동생처럼 데리고 다닌 녀석.
덩치도 커다란 주제에 겁은 많아서, 작은 상처에도 기겁하고 죽은 마물의 사체도 제대로 찌르지 못하는 놈.
군인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린 놈인데.
그런 재혁이가…….
짜악!
맞고 있다.
퍼억!
발로 차이고 있다.
똑같은 교복 차림의 애새끼들에게.
“너 이 새끼, 오늘 수금 날인 거 알아, 몰라?”
“이 새끼 또 돈 못 받은 거 아냐?”
“그럼 돼지 잡아서 번 돈 훔쳐서라도 가져왔어야지!”
‘돼지?’
재혁이, 어릴 때 부모님이 정육점을 운영하셨다고 했지.
거기다 지금과 달리 살집이 있는 모습이라 타깃이 된 건가.
……이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하, 돼재혁 새끼.”
내려다보던 주동자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갈 꺼내 들었다.
“!!”
드륵!
놈이 꺼내든 커터칼을 보자마자 부들부들 떠는 재혁이.
하지만, 놈들은 재혁이가 벌벌 떨든 말든.
“흐이이이익!”
“야! 움직이지 마라.”
익숙한 손길로 재혁이의 교복 셔츠를 풀었다.
그리고.
“저번에 어디까지 했지?”
“목살이랑 등심 구분해 주지 않았나?”
“그럼…… 오늘은 뒤집자.”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한쪽 눈을 감고 커터칼을 휘휘 저었다.
마치 캔버스를 앞에 둔 화가가 4B 연필을 들고 가늠하듯.
“보자…….”
그리고.
스윽-!
“아악!!”
교복 셔츠 아래, 훤히 드러난 복부를 슥 그었다.
핏방울이 배어 나올 정도로.
“오늘은 쉽네. 이게 삼겹살이지?”
“오겹살 아냐? X발.”
[이 새끼들이……!]학교 폭력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관리국 쾌남’이 통쾌한 액션에 몸을 들썩입니다!】
【‘영업국 실적 1위’가 크게 될 싹이 보인다며 환호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폭력. 처절하게 짓밟히는 약자.
어리기 때문에, 사회 경험이 없어서, 뭘 몰라서…….
그렇기에 더욱더 순수하게 표출되는 ‘악.’
참관자들은 거기에 환호했다.
【‘조사국 간판’이 답답한 전개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일부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폭력에의 반대가 아닌 전개상의 답답함 때문이었고.
“아악!! 너무 아파……!”
“X발, 움직이지 말라고! 잘못 그었잖아!”
“죽을 거 같아! 진짜 제발 그만…….”
“이 정도로 안 죽어.”
……알아 버렸다.
재혁이가 유독 겁이 많았던 이유.
자잘한 상처에도 민감해했던 이유.
‘트라우마…….’
이 기억이 재혁이에겐 트라우마였던 거다.
거진 십 년 가까이 지났어도 잊을 수 없는.
아니, 어쩌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
그렇기에 가장 극복하고 싶었을 트라우마.
【익명의 참관자가 참을 수 없는 만행에 분노합니다!】
툭!
이성을 붙잡고 있던 끈이 끊어진 느낌.
이런 모습을 봐 버리면…….
[상점 열어.]못 참지.
─ 파앗!
[중급 상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황금 마차’를 소환합니다!] [구입할 물품을 선택하세요!]‘근력 강화, 체력 강화, 또…….’
아예 무기를 보내 버릴까?
그렇게 폐점 직전의 마트에서 장바구니, 아니 카트에 쓸어 담듯, 이 악물고 아이템을 고르고 있자니.
“개자식들…….”
재혁이가 제 손바닥을 뚫으려는 것처럼 주먹을 세차게 쥐고.
“내가 누구 때문에 아직도 이러고 사는데……!”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오늘 왜 이래?”
놈들에게 양쪽 팔다리를 모조리 붙들린 채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더니.
─ 화악!
오른손으로 칼날을 잡고.
콰득!
부숴 버렸다.
“?!”
“뭐, 뭐야!”
타닥!
유일한 무기는 부러져 땅에 떨어진 뒤.
재혁이가 놈들이 당황해하는 틈에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들어.
─ 콱! 퍼억-!
벌새처럼 찔러 버렸다.
애새끼 눈을.
“으아아아아악! X발! 개새끼야!!!”
“이 새끼가 미쳤나!”
옆에 있던 놈들이 달려들었지만.
“미친 건 너희지! 개자식들아!!!”
─ 끼긱!
벌떡 일어난 재혁이 손에는 이미 의자가 들려 있었…… 아니, 들려 있었다가.
─ 퍼억!
날아갔다.
녀석들을 볼링핀처럼 날려 버리며.
‘음, 이거…….’
굳이 안 나서도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