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5
55화
“도와주러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로드 에이번데일!”
“아뇨.”
시더는 정신을 반쯤 창밖에 둔 채로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건 진심이었다. 이 저택의 누구도 버티지 못했을 공격이지만 에스페란사는 맞으면서도 훌륭하게 흘려보냈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만 있어야 하나?
마침내 에스페란사가 적의 심장을 꿰뚫는 때까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검어졌던 하늘이 개고 있었다. 던전이 사라졌다.
시더는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나왔다. 던전 탐지기가 마력 변화를 감지하고 경보음을 울렸다.
되찾은 현실 가운데로 달려오던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멈춰섰다. 살육의 쾌감이 가시지 않아 몽롱하던 눈빛이 시더를 발견하고 온순하게 가라앉았다. 열에 들뜬 뺨의 홍조만이 전투의 흔적으로 남았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에스페란사의 잔혹함보다 그 잔혹함이 그를 발견하고 사그라드는 순간이 더 황홀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솟았다가,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에스페란사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웃는 것인지, 숨을 몰아쉬는 것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둘 다일지도. 시더는 당장 어딘가로 뛰쳐나갈 것 같은 에스페란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다친 덴 없어요?”
“없어요!”
에스페란사가 기분 좋게 키득거렸다. 살육이 아니라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시더가 잠깐 당황한 순간, 부드러운 팔이 그를 끌어안았다.
“에스페란사?”
그러나 대답 대신 한참 동안 경쾌한 웃음만 귓가를 간지럽혔다. 시더는 눈만 크게 뜬 채, 마주 안아 주지도, 밀쳐 내지도 못하고 팔을 어정쩡히 들고만 있었다.
“생각을 해 봤어요.”
“전투 중에요?”
“생각을 해 봤단 말이에요.”
대답은커녕 반응도 바라지 않는 독선적인 말투였다. 정말로 취한 사람 같다. 시더는 되묻는 대신 얌전히 듣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왜 이 말을 거의 귀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여야 하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지만. 뒤섞이는 심장 소리가 목소리보다 더 커서, 에스페란사의 말은 띄엄띄엄 잘 들리지 않았다.
“당신 말마따나 우린 동료고. 이 정도면 친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커다란 몸이 뻣뻣이 굳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반쯤은 흘려듣고 있는 것 같았다. 취기도 옮던가? 머릿속이 유하게 풀어졌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요, 시더.”
“아……?”
“이름. 당신이 원했잖아요?”
물론 그랬다. 그는 자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하게 티를 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목소리로 듣는 그의 이름은, 기다림의 과실이기 때문인가? 그는 여태껏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에스페란사는 미련 없이 팔을 풀고 떨어져 나왔다. 당황할 때는 언제고, 간사하게도 그것이 아쉬웠다. 시더에게서 떨어진 에스페란사가 평소답지 않게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외쳤다.
“그리고 이건 친구에게 주는 선물!”
쿵. 저택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소리와 함께, 히드라의 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두고 보니 정말 집채만 했다.
“돌아가서 연구해 봐요!”
시체가 인벤토리로 돌아가고, 에스페란사는 미련 없이 그를 지나쳐 경쾌한 발걸음으로 저택에 들어섰다. 그러나 시더는 그 상태로 가만히 여운을 곱씹었다.
포옹은 달았다. 인사는 부드러웠고. 자비 없는 살육자의 눈빛이 녹아내리던 때의 쾌감처럼.
……친구라고?
“아, 웃기지 말아요. 에스페란사.”
* * *
해가 지기도 전에 재앙은 자취를 감추었다. 숲의 반대편 꼬리에서 소리 없이 움직인 그림자가 어둠에 녹아들어 갔다.
부상자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거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집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갔기에, 저택은 몇 시간 전보다 훨씬 한산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고요한 저택 4층의 침실.
시더의 의식은 명료했다. 오늘은 그에게도 힘든 하루였지만, 그는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낮잠을 자면 잤지.
파오란을 말아 불을 붙이고 열린 테라스 방향으로 놓인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희뿌연 연기가 눈앞을 가렸다.
이 연기처럼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는 감정을 느낀 순간 그 정체를 알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여태껏 아무 생각 없다가 갑자기 한눈에 반해 버린 것도 아니다. 늘 어느 정도는 에스페란사에게 매료되어 있었으므로.
에스페란사는 세상 유일한 그의 마법사였고,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상대였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한집에서 둘만의 비밀을 속삭이다 보면 그 감정과 저 감정을 넘나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다만 그때 그 순간에 부정하지 못할 확신을 얻었을 뿐이었다.
‘불가항력이었지.’
궐련을 비벼 끈 시더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마법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엇에도 정을 주지 않고 선을 그었다. 더 가까워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멀찍이서 서성거린다. 이유도 짐작할 만했다. 썩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들어와도 돼요, 하고 문을 열어 줘도 한참 뒤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겁쟁이 에스페란사.
그러더니, 예상치도 못한 순간 성큼 뛰어 들어왔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게. 그를 똑바로 보고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에스페란사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가장 안쪽의 빗장까지 녹아내리듯 풀려 버렸다.
방법이 없었다. 살기로 일렁이던 눈이 그를 보고 순하게 풀어지는데, 그렇게 활짝 웃으면서 목을 끌어안고 이름을 불러 주는데.
시더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순간의 열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유혹할까?
유혹해서, 질릴 때까지 연애를 즐기다가 성숙한 신사 숙녀답게 그 전의 관계로 돌아가면 된다. 가벼운 연애 감정. 한껏 시시덕거리고 재미를 보다가 질리면 깔끔하게 털어 내면 그만이다. 이런 건 원래 영원히 가는 감정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놀랍도록 불쾌해졌다. 무심코 새 궐련에 불을 붙이려다가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으면? 시더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머릿속의 영민한 연구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끝이 있을 줄 알고 몸을 던진 곳이 무저갱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쾌락주의자가 대답했다. 그의 흥미가 그의 목숨보다 짧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그게 그를 괴롭게 하진 않을 것이다. 길어 봤자 1년일 테니까.
문이 열리고 그는 새까만 복도로 거침없이 몸을 밀어 넣었다.
마벨우드의 밤은 차가웠다. 그러나 괴물들이 나타나 마을과 숲을 유린하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저택의 수많은 방들은 커튼을 닫고 잠들어 있었다. 딱 한 곳만 빼고. 커튼을 활짝 열고 노란 등불을 테라스에 올려놓은 방.
정원으로 내려온 시더는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대화와 저택의 구조를 놓고 보면 저 방이 누구의 방인지도 알 수 있었다. 잔웃음이 터졌다. 김이 나는 우유를 가지고 테라스로 나온 방의 주인이 깜짝 놀라 난간에 매달렸다.
“왜 나와 있어요?”
“당신이 깨어 있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히단 듯 혀를 찼다. 시더가 물었다.
“내려올래요?”
“내려갈까요?”
아까의 들뜬 기분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일까, 에스페란사는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물음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스 문을 열어젖히고 뒤로 물러나 도움닫기 할 거리를 확보하더니, 등잔을 든 채로 뛰어내렸다.
커튼이 거칠게 펄럭였다. 착지는 완벽했다. 다치지도 않았고, 아래에서 기다리던 신사와 부딪혀 어처구니없는 꼴을 연출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앗.”
“들뜨면 생각이 짧아지는 편인가요?”
할 말이 없었다. 거센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촛불이 꺼져 있었다. 이래서야 등불을 가지고 내려온 의미가 없었다.
“알면 좀 말리지 그랬어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그다음에 분명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도 했잖아요.”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로군?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였다. 얄밉게 굴긴.
“불은, 미리 말을 안 한 내 잘못이니까.”
라이터를 꺼낸 시더가 그렇게 말하며 심지에 불을 붙였다. 아, 라이터가 있었지. 마법도 있었고. 뒤늦게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을 켜자 아까까지는 어렴풋한 윤곽으로만 보이던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셔츠 위에 가벼운 코트만 걸친 간소한 차림 위에서 금빛 머리칼은 장신구처럼 반짝였다. 내리뜬 속눈썹과 얇고 섬세한 입술은 그려 놓은 듯 고요했다. 찬바람에 섞여 든 싸한 향기가 그를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달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등불이 비친 에스페란사의 뺨을 바라보았다. 고요히. 살피듯이.
어슴푸레 밝은 등불. 마도 공학의 시대에 양초로 켠 등불을 든 여자.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등불 대신 거대한 총을 들었던 손. 노란 불빛이 흰 살갗과 모슬린 드레스의 넓은 네크라인 사이에 고여서 흔들렸다.
한껏 틀어 올렸던 머리칼을 편안하게 내려 묶은 에스페란사에게서는 아까의 공격성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더는 빙긋 웃으며 관찰을 마쳤다.
“그래서, 에스페란사. 그 깜찍한 양 갈래는 뭐죠?”
“아. 맞다.”
뒤늦게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양쪽으로 내려 묶은 머리칼이 등 뒤에서 살랑거렸다. 정말로 어린 소녀나 할 법한 머리였는데, 에스페란사에게도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그냥 둬요. 이상하지 않으니까.”
시더는 아기 강아지처럼 온순한 눈매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았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시선을 자기 머리칼에서 떼어 내려는 듯 말을 돌렸다.
“……당신은 왜 등불도 없이 나와 있어요?”
“잘 시간이 아니라서요.”
야행성이었지, 이 사람. 대답이 너무 명쾌했다. 채 지우지 못한 파오란 향기와 달리.
“그러는 당신은? 피곤할 텐데.”
“잠이 안 와요.”
에스페란사가 마른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든 등잔을 말없이 받아 쥐었다. 손가락이 스친 순간 눈도 마주쳤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려보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두 사람은 등잔을 중심으로 팔뚝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걸었다. 걷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정원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을 만큼 밝지도 않았고, 목적지도 없었다. 대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정원을 반쯤 돌았을 때,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들어 시더를 흘끔거렸다.
“오늘, 실수를…… 좀 했잖아요.”
“실수?”
“제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서 일부러 되묻고 있는 거다.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굳이 내 입으로 들어야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침묵이 이어지자, 시더가 다시 물었다.
“실수였나요?”
그렇지만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대답을 망설이자, 시더가 이어 말했다.
“난 당신이 실수해 줘서 좋았어요.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