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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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얼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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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재능은 사라졌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무궁한 지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납검(納劍)과 발검(拔劍), 정자세 및 베기와 찌르기 등 말 그대로 검술의 기본기만 간단히 구술해준 하유라는 이내 노구덕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분야를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일러준 수법을 가만히 되새긴 노구덕은 그 기상천외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유라가 입으로 풀어준 수법들은 연결 동작이 서너 가지도 되지 않는 간단한 기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검술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수준이 낮거나, 정도(正道)에서 심하게 벗어난 비열한 수법들이었다.
그 수준을 논하자면 과거 노구덕이 써먹었던 고춧가루 뿌리기나, 흙먼지 뿌리기 등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저열한 기술들. 이른바 사도(邪道)였다.
“이제 막 검에 입문한 초보자한테 이런 걸 가르쳐도 되는 거냐?”
“네 수준에는 이게 맞다. 아니면 백일 동안 찌르기만 연습할 테냐?”
“그건 아니지.”
기가 막혀 항의 아닌 항의를 했던 노구덕은 금세 깨갱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유라의 말이 맞다. 방금 배운 기본기는 어디까지나 형(形)을 간단히 짚고 넘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찌르기와 베기 같은 기본기들도 제대로 수련을 한다면 백일이 아니라 천일을 거듭해도 모자라다.
노구덕에겐 그럴 시간도, 의지도 없었다. 실상, 그에겐 하유라가 가르치는 속성 잡기들이 가장 잘 어울렸다.
검을 눈앞에서 폭발시켜 상대를 당황시키는 기술, 정면에서 대치했을 때 상대방의 눈을 속여 신속히 발검하는 기술, 햇빛의 각도에 따라 교묘하게 반사광을 일으켜 상대의 눈을 멀게하는 기술…….
하유라가 알고 있는 잡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무재밖에 없는 노구덕으로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크게 벅찬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능하군. 네겐 기껏해야 하루에 대여섯 개 주입하는 게 최선이겠어.”
“…미안하다. 내가 이 모양이라서.”
졸지에 배우는 입장이 된 노구덕은 스승의 독설에 아무 변명도 못하고 자라목이 되었다. 뭐든지 금방금방 터득했던 하유라가 보기엔, 그의 재능이야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레벨로 보일 테니까.
“내일은 창을 준비해라.”
“응?”
“모레는 도끼다.”
“자, 잠깐만….”
당황한 노구덕이 손을 뻗으며 이름을 불렀지만, 하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으로 사라지는 하유라의 뒷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던 노구덕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었다. 무슨 꿍꿍이로 나왔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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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유라의 무예 강습은 그 뒤로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검, 도, 창, 도끼, 방패 등 갖가지 종류의 무기들이 노구덕의 손을 거쳐갔지만, 이렇다 할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모두 잡는 법이나 쓰는 법 등 기초적인 자세만을 구술로 전해들었을 뿐, 나머지는 수준을 논하기에도 부끄러운 잡기술, 혹은 비겁한 암수들이 전부였다.
그녀의 가르침은 무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어느 정도 병장기들이 손에 익었다 싶으니, 이번엔 중갑과 부츠, 건틀렛 등 방어구를 이용하는 기술들이 튀어나왔다.
하루하루 늙은 머리로 따라가기엔 숨이 차는 학습량의 연속이었지만, 노구덕은 오랜만에 이를 악물고 배움에 열중했다. 제법 성과도 있어서, 하유라가 열을 가르치면 칠, 팔은 그럭저럭 알아먹고 응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기실 노구덕이 아주 초보자였다면 하유라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노구덕은 십 년이 넘도록 거친 전쟁터에서 뒹군 베테랑이다. 대부분의 싸움을 단순한 주먹질이 주인 막싸움으로 일관하긴 했지만, 그간 보고 듣고 체득한 경험이 어디로 증발한 것은 아니다. 그새 까먹긴 했어도 가이탄에게 무예의 기본기를 배운 적도 있었고, 잠깐이긴 하지만 나름 병기에 속하는 클로와 쇠스랑을 쓴 적도 있었으니.
물론, 잡기들을 배우면서 의구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허접한 수법들이 발레기우스에게 통할까?”
한창 수련에 힘쓰는 중, 땀으로 목욕한 노구덕의 질문을 받은 하유라는 잠시 뜸을 들이며 대꾸했다.
“수법이 저열하다고 해서 고수에게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만 해도… 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주먹질에 얻어맞은 적이 있으니까.”
“호오.”
내심 상당히 놀란 노구덕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 하유라가 지난 흑역사를 직접 언급하다니. 확실히 뭔가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쓰레기, 날파리 같은 눈으로 어딜 훑어보는 거냐?”
‘변하기는 개뿔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리면서도, 노구덕은 하유라의 말에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비겁함과 저열함으로 따지면 노구덕도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지난 과거를 되돌아봤을 때, 그는 더러운 언변과 교활한 짓거리로 전력상 열세를 뒤집은 경험이 많았다. 특히, 세치 혀를 놀려 상대를 격분케하는 도발을 자주 애용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쟤한테도 똥갈보라고 한 적이 있었지….’
다시 생각해봐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망발이다. 노구덕은 행여나 얌전해진 하유라가 그 기억을 떠올릴세라, 별안간 힘찬 기합성을 내지르며 단창을 쥔 팔을 바쁘게 휘둘렀다.
그런 노구덕을 한동안 심유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하유라는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헙! 헙…! 엉? 끝이라고? 벌써?”
“네게 할 말이 있다.”
여느 때처럼 건초 더미 위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하유라가 눈처럼 흰 손가락을 들어 이리로 오라고 작게 손짓한다.
저기에 요염하게 미끄러지는 눈웃음만 더하면 영락없는 창부일 텐데. 노구덕은 갑자기 떠오른 시답잖은 생각에 실없이 혀를 찼다.
“…그래, 드디어 요구사항이 떠오르셨나.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리 없지.”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실의에 잠겨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죽어가던 하유라. 그녀가 제 발로 방문을 열고 걸어 나왔을 때엔, 작든 크든 그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일 터.
과연 그 속내를 언제 터놓고 얘기하나 잠자코 기다렸건만, 오늘에서야 겨우 말문을 열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노구덕이 무심결에 하유라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걸쳐 사이좋은 그림이 완성되려는 순간,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대부님,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오. 고맙구나.”
커다란 쟁반을 받쳐 들고 소리 없이 나타난 소냐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노구덕과 하유라 사이의 공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부족한 솜씨입니다만, 모쪼록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쟁반을 두며 힐끔 하유라를 곁눈질하는 눈초리가 여간 심상찮은 게 아니다. 영락없이 점찍은 수컷에게 접근하는 다른 암컷을 경계하는 눈치다. 그 맹랑한 눈총을 받은 하유라는 불쾌하게 입매를 뒤틀었다.
“기우가 차고 넘친다, 꼬맹이.”
“저도 기우이길 바랍니다.”
“하. 어이가 없군.”
소냐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린 하유라는 정말로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천하의 서리여왕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늙다리 오크와 엮이겠는가.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나 노구덕의 팔자에 ‘행운’이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소냐로선 당연한 감시였다.
난데없는 두 여인의 기싸움에 속이 거북해진 노구덕은 갓 구운 빵을 잘게 찢어 두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쥐어주었다.
“…거, 빵맛 떨어지게 왜들 그러는 거냐. 그쯤하고 빵이나 먹자. 여기, 이 버터를 찍어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구만. …그런데, 할 얘기라는 게 뭐냐?”
“앞으로의 일정엔 내가 필요하지 않을 테지?”
“음? 그야…….”
“얼버무릴 것 없다. 그 자리엔 나도 있었으니까.”
노구덕은 말없이 빵을 곱씹었다. 그 강대한 힘을 잃고, 삶의 목적마저 상실한 그녀에게 달리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너희들이 산치루를 벗어나는 대로 여정을 끝내고 싶다.”
“여정을 끝내고 싶다니?”
“이대로 너희와 헤어져 어디든 사라지겠다는 말이다. 상관없을 텐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서리여왕님의 지금 상태라면 어딜 가시든 오래 견디지 못할 겁니다.”
소냐의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서리여왕 하유라는 그 극강의 힘으로 오랫동안 대륙에 군림하며 빛나는 명성을 쌓아 올렸지만, 그만큼 그녀를 증오하는 적들도 많았다.
만일 힘을 잃은 하유라가 홀로 세상에 나선다면, 그녀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마찬가지다. 굳이 이를 갈고 있는 정적들이 아니더라도, 그녀만한 미녀가 홀로 배회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되는 곳이 이 스퀘어란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유라는 고집스럽게 눈을 치떴다.
“꼬맹이 주제에 내 걱정이라니… 분수를 알아라. 나는 서리여왕 하유라다.”
“지금은 그 꼬맹이 하나 못 당하는 신세이지 않습니까?”
“이 시건방진…!”
“자자, 싸우지 말고.”
가라앉아있던 불씨가 다시 재점화할 기미를 보이자, 노구덕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두 여인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하유라, 우린 약 삼 주 후에 산치루를 떠날 예정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때 널 자유롭게 풀어달라는 거겠지?”
“그래. 내가 네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어려운 요구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끙…. 내 쪽에서 먼저 가르쳐달라고 매달린 적은 없다만, 네가 칼립스를 도운 것은 사실이지. 하여튼.”
잠깐 힘주어 말을 끊은 노구덕은 하유라의 냉막한 얼굴과 마주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 요구는 그리 쉽게 들어줄 수 없는 문제다. 외부에 알려지길, 공식적으로 너는 레그나토르 소속이니까. 예전이었다면 네가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상관없었겠지만, 이젠 네 행동 하나하나가 레그나토르의 평판과 직결된단 말이다.”
“억지를 부리는군.”
“억지가 아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하유라의 말대로 억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억지일지라도, 노구덕은 하유라를 이렇게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능력을 잃긴 했어도 서리여왕 하유라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인재다. 기업체를 키워내는 그녀의 경영수완과 뛰어난 머리는 여러모로 써먹을 구석이 많았다.
예컨대 공석이 되어버린 패터슨의 자리라든가, 아니면 본래 그녀가 운영하던 퀸즈가든의 부지를 다시 재건하여 그 책임자로 임명한다든가.
‘아직까지 따르는 부하들이 많은 걸 보면 나름대로 인망도 있는 모양이고….’
문제라면 그녀가 도무지 살아가는데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혹시라도 그에게 묵은 원한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인데, 후자는 어떻게든 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희석시키는 식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전자로군.’
시기는 나쁘지 않다. 어차피 예전부터 쭉 물어보려고 했던 일이었으니까.
“마침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다.”
“쓸데없는 얘기라면 사양하겠다.”
“쓸데없는 얘기는 아닐 거다.”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하유라를 잡아둔 노구덕은 그녀의 차디찬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네가 그렇게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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