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8)
헌터클럽 793화
앱솔루트 제로(Absolute zero).
서리여왕 하유라를 상징하는 빙결의 권능은 광활한 전장 일대의 마력 흐름을 크게 늦추어 놓았다. 본래 위력이라면 아예 간단한 주문조차 쓸 수 없을 정도의 마력동결이 일어나야 정상이었으나,워낙 광대한 범위를 둘러친 탓인지 위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하나 그녀가 전장에 끼친 영향은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속한 지휘체계다. 그리고 지휘관과 일선 부대장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통신의 대부분은 연락수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으로 치면 반응속도,즉 뇌가 말초신경에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유라의 권능은 그 반응 속도를 기어가는 금벵이만도 못하게 만들었다.
당장 느려터진 통신체계는 써먹지도 못할 정도가 된 데다, 블링크, 워프 등의 이동 주문도 쓰려면 한참을 기다려야만 한다. 대부분의 다른 주문들 또한 같은 이유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급작스런 사태에 직면한 리베르타의 지휘관들은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당황하는 병사들을 수습했다.
“마력동결을 오래 유지할 순 없다! 침착해라! 전력은 우리가 훨씬 우위 다!”
다급히 전력을 추스린 김상목은 곧장 사자후를 터뜨리며 부하들을 호명했다.
“조용진! 아리엔! 가라이!”
“예!”
“이만한 규모의 마력동결이다! 필시 여력이 별로 남지 않았을 터! 하유라를 찾아서 처리하라!”
트릭스터 조용진,크리스탈메이지 아리엔,윈드시클 가라이 등 리베르 타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그의 명령 에 따라 흩어졌다. 그러나 휘하의 사냥개들을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구겨진 김상목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뭔가 더 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불안감.
노구덕이란 인간을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적어도 승산 없이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으리란 것 정도는 안다.
서리여왕 하유라의 가세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더 결정적인 카드가 숨어 있을 게 자명했다.
예를 들자면…….
“부사령관님!”
“……역시.”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갈라진 공간의 틈새에서 찬란하게 솟아나는 황금의 첨탑. 그 꼭대기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오만하게 아래를 오시하는 금발의 여인을 본 김상목은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전쟁은,지금부터가 진짜였다.
후방에서 일어난 변화의 물결은 시종일관 고요하던 김정인의 낯빛에도 영향을 끼쳤다.
“서리여왕과 안개여왕. 저 둘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노구덕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조연일 뿐이다. 승리에 보탬이 될 수는 있어도 직접 결정지을 수는 없지. 승리를 결정짓는 건 나다. 내가 네놈을 때려눕히면 모든 게 끝나는 싸움이지.”
“굉장한 자신감이군요.”
“못할 것 같냐?”
“못할 겁니다. 왜냐면 당신은 절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까요.”
“글쎄,적어도 저번 싸움은 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걸. 막판에 갑자기 제삼자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누구 머리가 깨졌을지……. 어디 한 번 그 알량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네놈에게 양심이란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미묘하게 말꼬리를 늘린 노구덕이 진득한 조소를 흘리자,김정인의 눈매에 금세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흐흐흐. 가해자의 눈빛이 아닌 데?”
“더 이상 말이 필요합니까?”
노구덕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말 한번 잘했다. 암,너와 나 사 이에 말은 필요 없지!”
쿠직!
노구덕이 딛고 섰던 지면이 움푹 꺼지는가 싶더니,녹색의 거구가 흐릿한 잔상을 일으키며 늘어났다. 순 식간에 김정인의 정면을 점한 노구덕은 그의 안면을 향해 가공할 주먹을 내뻗었다. 물론,김정인의 칼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콰앙!
충돌지점으로부터 퍼져 나간 원형의 충격파는 반경 백여 미터 일대를 휩쓸었다. 권역에 휩쓸린 헌터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귀에서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으아아악!”
“컥!”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고목이 통째로 뽑혀져 나가고,너른 평지 중앙에 난데없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더불어 칼과 주먹을 맞댄 두 사람의 주위가 거울상처럼 심하게 비틀어지며 공간왜곡이 일어났다.
마력의 범주를 벗어난 신의 힘,시스템과 시스템이 충돌하며 벌어지는 이상 현상이었다.
겨우 일합(一合). 단 한 번의 격돌로 벌어진 결과다.
언덕 위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퀸젤은 바르르 턱을 떨며 경악했다.
“괴,괴물들이잖아!”
“……이미 인간의 범주로 묶일 자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항시 그녀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도정섭 또한 허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런 경천동지할 일전을 보고 있자니,일평생을 검에 바친 자신의 삶이 한낱 개미처럼 덧없게만 느껴졌다.
“물러나라!”
“더 떨어져! 더!”
기겁한 각 진영의 지휘관들은 서둘러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이미 지시하지 않아도 모두가 허겁지겁 중심지에서 떨어지는 중이긴 했지만.
부르르르!
쇳덩어리 같은 주먹과 거무튀튀한 마검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서로 맞물렸다. 붉은 눈을 치켜뜬 노구덕은 비스듬히 몸을 떠는 검 너머로 비치는 숙적의 얼굴을 응시했다.
“한창 젊은 놈이 얼굴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깊게 눌러쓴 투구 밖으로 삐져나온 피부는 젊음의 팽팽함과 윤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가느다랗게 뜬 눈매엔 잔주름이 자글자글한데다,그 주위의 피부색은 황달에 걸린 것처럼 누렇게 떴다. 딴에는 가린답시고 하얀 분칠을 한 모양이지만 노구덕의 예리한 눈썰미를 속일 순 없었다.
처참하리만큼 전락한 검신의 몰골은 이전의 결전에서 뒷일을 생각지 않고 힘을 당겨쓴 대가였다. 순리대로라면 진즉 명이 다해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욘이 개입한 덕분에 연명 에 성공했다.
“그런 몰골로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걱정 마십시오. 당신의 목을 칠 힘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캉!
맞물린 검에서 갑자기 육중한 거력이 뿜어졌다. 노구덕의 거구를 멀찍이 튕겨낸 김정인은 잠시 뒤로 물러나는 듯하더니 이내 총알처럼 땅을 박차 올랐다.
번쩍!
섬광처럼 사라진 아우터 블레이드 가 어느새 노구덕의 목젖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나 두터운 목 언저리가 반쯤 갈라졌다 싶은 순간,녹색의 그림자가 흐물흐물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사라진 노구덕이 다시 나타난 곳은 붕 떠오른 김정인의 발밑이었다. 땅 밑 도깨비처럼 불쑥 솟구친 노구덕은 재빨리 손을 뻗어 김정인의 발목 을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네 속도는 이미 적응 이 끝났거든. 헛!”
이죽이는 안색이 돌변하며 짧은 신음이 흘렸다. 김정인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던 팔이 어느새 몸뚱이 에서 달아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노구덕의 팔을 베어버린 김정인은 다시 거리를 벌리며 검기의 다발을 떨쳐냈다.
콰르르르릉!
검기에 휩쓸린 땅거죽이 뒤집히며 요란한 우렛소리를 냈다. 비질하듯 바닥을 긁어낸 검기의 물결은 팔을 잃고 틈을 보인 노구덕의 그림자를 한순간에 삼켜 버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흘러나온 짙은 피 냄새가 아릿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죽지는 않았어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터.
검을 늘어뜨린 김정의 입매가 살짝 이지러졌다. 피식. 다물린 입술에서 가벼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기냐?”
“……!”
귓가를 찌르는 음성에 황급히 고개를 튼 김정인. 그런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안면으로 짓쳐 든 시꺼먼 그림자였다.
콰직!
“끄으으으욱……!”
수십 개의 샛노란 별들이 반짝반짝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앞이 깜깜해진 김정인은 억눌린 신음성을 발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한 손으로 감 싸 쥔 안면에서 흥건한 핏물이 꾸역 꾸역 새어나왔다.
폭삭 늙어버린 얼굴을 가려주던 투구가 찌그러진 밥통 신세가 됐다.
안쪽으로 움푹 깨져 들어간 안면보호대가 오히려 얼굴의 상처를 찌를 듯이 쑤시고 있었다. 김정인이 순간 적으로 반응하여 목을 젖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것이다.
즉사를 면하긴 했으나,위기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김정인의 얼굴을 짓뭉갠 노구덕은 주춤주춤 비틀거리는 김정인의 명치를 강하게 후려쳤다. 심장을 터뜨릴 기세로 휘둘러지는 그 주먹은 조금 전 김정인 에게 잘려 나갔던 바로 그 왼팔이었다.
쿠웅!
“호오?”
묵직한 충격과 함께 일어난 잔바람 이 세차게 안면을 때려댄다. 살벌하게 번들거리는 노구덕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김정인은 피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 냈다. 그것도 검이 아닌 맨주먹으로 노구덕의 주먹을 정면에서 붙잡았다.
김정인의 손아귀를 전부 펼쳐봐야 노구덕의 반이 될까 말까한 크기다. 일견 간신히 그의 철권을 받아낸 것처럼 보였으나,실상 주먹을 통해 전해지는 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고 말았지만, 김정인을 바라보는 노구덕의 도리어 히죽 웃고 있었다. 이 상황 또한 그 가 예상했던 시나리오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진짜배기가 나타나시는군.”
“노구덕……
우그러진 투구 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굉장히 기묘했다.
음색은 분명 김정인의 것인데,꼭 두 명이 한 번에 말하는 것처럼 웅 웅 울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입 안 가득 피가 관 탓인지, 목소리 자체도 가래가 낀 것처럼 탁하게 변했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목소리를 내는 건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욘. 드디어 어려운 걸음을 하셨구만.”
“어리석은 자. 끝내 발레기우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건가?”
어둠에 잠긴 투구 속에서 스산한 신광(神光)이 피어올랐다. 어딜 봐도 평범한 인간의 눈빛은 아니다.
관리자 욘. 스퀘어의 정상에 선신이 김정인이라는 인간의 육체를 빌어 이 지상에 강림한 것이다.
“발레기우스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하여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크크크크……
방금 전,노구덕이 쓴 능력은 발레기우스가 사용하던 ‘어둠 타기’,즉 공간이동이었다.
그것을 본 욘은 노구덕이 발레기우스와 야합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혹은 자신과 김정인의 관계처럼 그가 발레기우스의 사도로 들어갔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가 아니라면 노구덕이 발레기우스의 능력을 쓰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적어도 욘의 상식선에서는 그랬다.
“멋대로 생각해라.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들을 생각도 없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말한 놈들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결국에 뒈지는 건 그놈들이더군.”
검을 던져 버린 김정인은 얼굴을 짓누르던 투구를 벗어 내던졌다. 그러자 흉물스럽게 함몰된 콧대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드러났다. 분노 와 격정에 삼켜진 그의 얼굴은 마치 악귀처럼 구겨져 있었다.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절대로.”
“거 참, 햇갈리니까 한 놈만 말해라.”
“노구덕!”
활짝 펼쳐진 손아귀에서 찬란한 빛의 칼날이 솟구쳤다. 눈이 멀 정도의 광량을 뽐내는 빛의 검을 든 김정인의 모습은 날개를 잃은 타천사를 보는 듯했다.
신의 그릇으로 변모한 육체가 완전 한 화신(化神)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욘의 아바타가 된 김정인은 외양부터 새롭게 바뀌었다.
끊임없이 흐르던 핏물이 멎고,형편없이 깨졌던 콧잔등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며 새살이 돋아났다. 낙인처럼 찍힌 잔주름 또한 본래의 팽팽 함을 되찾았으며,탈색된 눈썹과 머 리털 역시 윤기 흐르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갈변했던 피부에도 건강한 혈색이 떠올랐다.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은 김정인의 얼굴은 어느덧 은은한 서기(端氣)마 저 머금고 있었다.
해탈한 고승처럼 눈을 반개한 김정인은 예의 그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조건은 동일하다. 당신이 날 이길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흐흐흐. 호가호위가 따로 없구나. 그래,그놈하고 같이 싸우면 좀 살 만할 것 같더냐?”
“당신도 다르지 않을 텐데?”
“하여튼 멍청하기는.”
끌끌 혀를 찬 노구덕은 위엄찬 광휘를 내뿜는 김정인을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닥치고 덤비기나 해라,철부지 애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