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10
10권
조청전쟁
다음 날 아침, 도현은 대전 회의에서 청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큰 혼란이 있을 거라는 염려와 달리 신하들 대부분은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젊은 관료와 무장 들은 오히려 이 기회에 지난 병자년에 당했던 치욕을 되갚아 줘야 한다며 뜨겁게 전의를 불태웠다.
삼전도의 치욕이 기억에 아직 생생히 남아 있는 상태라 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지만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었는데, 사대부 사이에서도 청을 상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지난 두 번의 전쟁을 승리하면서 생긴 자신감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이건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겁을 먹고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는커녕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결성해 전쟁에 나가겠다며 관청을 찾아왔다.
“허어, 그게 모두 사실이오?”
앞에 앉은 영의정 박황은 도현의 물음에 상체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곳 한양만 해도 천여 명이 넘는 장정들이 청과 싸우겠다며 찾아왔고, 숫자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옵니다.”
“참 흐뭇한 일이군.”
“맞사옵니다. 이게 다 전하께서 그동안 선정을 베푸신 공덕이 아니겠사옵니까.”
함께 자리하고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한마디 거들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큰 싸움을 앞두고 이렇게 백성들이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여 주니 정말 마음이 든든한 것 같소. 허나 그렇다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자들을 전장에 세울 수는 없으니, 잘 타일러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군사는 원래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청국이라는 아주 벅찬 상대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었기에 당연히 의병들을 모두 수용할 거라 생각하고 있던 신료들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비록 훈련이 안 된 인원이라고 하지만 후방에서 보급 물자 운송을 맡긴다든지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지 않겠사옵니까?”
“저도 병판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부디 백성들의 충절을 받아 주시옵소서.”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는 이야기에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경들의 이야기처럼 의병들을 받아들이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하지만 청과 싸우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국경으로 가는 상황에서, 또다시 많은 장정들이 떠난다면 곧 있을 추수는 누가 할 것이오?”
“……!”
잠시 망각하고 있던 문제를 도현이 정확히 지적하자 박황과 임경업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제때 추수를 끝내지 못한다면 후방에 남겨진 백성들은 아주 혹독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고, 자칫 싸움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되돌아와 우리를 압박하게 될 것이오.”
이어진 도현의 말에 두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신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소이다. 백성들이 추수를 잘 끝낼 수 있게 조정에서 각별히 신경 써 주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병판.”
“말씀하시옵소서.”
“출정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질문을 받은 임경업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든 북방으로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고, 필요한 보급 물자 수송도 벌써 시작되었사옵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군대는 절대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소. 특히 우리 군은 화약 무기를 많이 쓰는 만큼 이 점을 유의하고 보급선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다들 바쁠 테니 이만들 가 보시오.”
“예.”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칠현이 곁에 다가와 고했다.
“전하, 슬슬 수라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살짝 배가 출출한 것 같기도 해, 도현은 뒷짐을 지고 일어서며 말했다.
“중전의 처소로 가자. 곧 궁을 비워야 할지도 모르니 얼굴은 보고 가야지.”
“네, 알겠습니다.”
칠현은 옆에 있는 다른 내시에게 도현의 수라상을 교태전에 준비하라 이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도현과 칠현이 중전의 처소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연락을 받은 중전이 아들인 연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도 같이 있었구나.”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며 도현이 연에게 손짓을 해 가까이 오게 했다.
우유처럼 뽀얗던 피부가 어느새 햇볕에 타 까무잡잡해진 것을 본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중전에게 말했다.
“한창 뛰어놀 나이라 하더니, 제법 키도 크고 늠름해졌구려.”
“말도 마셔요. 어렸을 때도 노는 걸 좋아해서 다루기 힘들었는데, 이젠 처소를 지키는 무관들까지 마구 휘두르고 다닌다 합니다.”
“뭐야? 이놈, 아무리 그래도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면 못쓴다. 그들도 다 자기 할 일이 있는데 곤란하게 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짐짓 엄한 표정으로 도현이 꾸짖었지만 연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아바마마, 제가 뭘 하려고만 하면 다들 안 된다, 위험하다 하면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러다가 진짜 바보 멍청이가 되는 건 아닌가 제 미래가 걱정스럽습니다.”
설마 말대꾸를 할 줄은 몰랐던 도현이 잠시 황당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칠현이 남몰래 큭큭 숨죽여 웃었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더니 한 살 더 먹었다고 따박따박 반박하고 나서는 게 꼭 심양 관저 시절의 도현을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아,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당황한 중전이 연을 나무라는데 이때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도현이 버럭 화를 냈다.
“누구 아들인데 바보 멍청이가 돼? 절대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라!”
“저, 전하, 화를 내는 요점이 틀린 것 같습니다만…….”
“엉? 뭐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모르면 됐지 하고 칠현은 모른 척 오리발을 내밀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중전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눈짓으로 얼른 수라상을 들이도록 지시했다.
궁녀들이 차례대로 상을 들여오고, 기미 상궁이 맛보기까지 다 끝낸 후 물러서는 것을 지켜본 중전은 자신이 직접 수저를 집어 도현의 수발을 들었다.
“수라간 나인이 오늘 잡은 잉어가 살이 토실하게 올랐다 하더이다. 잉어는 정기를 보충하는 데도 좋은 영약이니 얼른 한 입 드시지요.”
“음.”
잠깐 헛다리를 짚으며 흥분했던 도현도 중전이 사근사근하게 옆에서 챙겨 주자 금세 기분을 바꿔 얌전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연이는 최근 단것을 많이 먹는다고 하던데, 당분간 당과는 금하도록 하여라.”
“어, 어마마마.”
“삼시 중 두 끼를 약과로 때운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그, 그래도…… 아바마마, 어마마마께 말씀 좀 해 주세요!”
“중전이 옳다. 단것을 많이 먹으면 나중에 이빨도 썩고 여러모로 안 좋아.”
만약 충치라도 생기면 치료할 의사도 없고 약도 없는데 무슨 생고생을 하려고, 하며 도현은 혀를 쯧쯧 찼다.
도현 역시 어릴 때 양치질도 안 하고 그냥 자 버린 적이 많아, 결국 대학생이 될 무렵엔 충치 치료에 차 한 대 값을 쏟아부은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중전의 편을 들 작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이번엔 어리광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한 연은 침울한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식은 하루에 한 개로 줄이겠습니다.”
“그래, 갑자기 끊는 것도 힘들 테니 그 정도면 됐다.”
누굴 닮았는지 고집 하나는 쇠심줄보다도 더 질긴 놈이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편이라, 중전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소?”
“네, 요즘 궁이 많이 시끄럽더군요. 대신들도 이래저래 바쁜 듯하고요.”
불쑥 내뱉은 도현의 물음에 중전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표정도 없이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거요. 그동안 궁을 잘 부탁하오.”
“물론입니다.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셔요.”
그리고 도현은 연에게도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와 누이들은 네가 지켜야 한다. 그게 장남으로 태어난 네 의무니라. 알겠느냐?”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연의 신분은 다른 양반집 자제들하곤 달랐다.
장차 보위를 물려받게 될 아이인데 이런 부담감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런 상반된 감정을 마음에 품은 도현의 말에 연은 자질구레한 걱정 따윈 다 날려 버리는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바마마!”
“하하, 그래, 듬직해서 좋구나.”
손바닥에 다 들어오는 연의 작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은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도현은 신료와 백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의주로 출정했다.
예전이라면 보름이 넘게 걸렸을 먼 거리였지만, 한양과 평양 사이에 신작로가 뚫렸고 무거운 보급 물자는 모두 해로를 이용해서 수송했기에 근위대는 열흘도 안 돼서 의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현은 다음 날부터 이 군단장인 남두병과 여러 장수들을 대동하고 의주성 일대의 방어 시설을 둘러봤다.
압록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선 도현은 한쪽 손을 펴서 눈썹 위에 올린 채 주위를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도현의 말에 오른쪽에 서 있던 남두병 이 군단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겸손하게 대답했다.
“다 전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무리 조정에서 도와줬다고 해도, 의주 백성과 병사들이 합심해서 노역을 하고 남 장군이 잘 이끌지 않았다면 제때 방어 시설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요.”
“망극하옵니다.”
임금인 도현이 그동안의 노고를 알아주고 친히 다독여 주자 남두병 장군은 그간 힘들었던 것이 한꺼번에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수많은 방어 시설을 보면 이 군단과 의주 백성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공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강폭이 가장 좁고 바닥이 얇아 청군이 도강을 해 올 것이 거의 확실한 지점에는 총병들이 안전하게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진지가 강을 따라 무려 3킬로미터가량이나 길게 파여 있었는데, 그 뒤로 일 선이 뚫렸을 때를 대비한 예비 진지도 두 개나 더 있었다.
또한 지금 도현이 있는 언덕을 비롯해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대마다 포대를 축성해 거미줄 같은 화망을 구성해 놓았다.
아무리 무적으로 군림하는 팔기군이라도 여기에 까닥 잘못 발을 들여놨다가는 그대로 곤죽이 될 만큼 엄청난 개미지옥이었다.
“며칠 안에 강변 개활지에다 목재를 잘라 만든 장애물을 설치할 계획이옵니다.”
“진지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적이 말을 타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 괜찮은 생각이군. 이왕이면 이번에 병기창에서 새로 만들어 가져온 신형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함께 묻어 두도록 하게.”
“그리하겠사옵니다.”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이장손이라는 사람이 만든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무쇠로 표면을 둥글게 만들고 내부에 쇳조각과 구슬을 집어넣어 터트려 주위에 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는 무기였다.
심지를 만들었다가 사용하기 전에 불을 붙이고 밀봉해 날려 보내는 방법을 썼는데, 도현은 이걸 조금 더 발전시켜 현대의 클레이모어처럼 멀리서 조종해 원하는 시점에 폭탄을 일시에 터트려 살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청군이 우리가 이렇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쪽으로 도강을 시도하느냐는 건데…….”
도현이 정면에 보이는 푸른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자 남두병 장군이 자신 있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강물이 얼어 버리는 겨울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곳은 강폭이 넓어 건너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지난여름에 유난히 강수량이 많았던 덕분에 지금은 가장 낮은 곳도 허리까지 찰 만큼 강물이 크게 불어 있어 여기로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언제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 전쟁이니 척후를 광범위하게 운영해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도현은 강변에 만들어진 방어진지를 천천히 살펴봤다.
한편 예친왕이 보낸 팔기군 오만이 도착해 모두 십만에 달하는 군세를 보유하게 된 호타이는 조선을 치기 위해 지체 없이 군대를 남하시켰다.
주작단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현은 압록강 북방 오십 리까지 척후대를 투입해 정찰 범위를 넓혔다.
척후대는 아직 조직적인 전투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쪽 지리를 잘 알고 승마에 능한 거란족을 적극 활용했다.
새흐나와 롭산완단이 속한 척후 십이 조도, 같은 부족 출신인 거란족 전사 열 명을 조선인 무관 한 명이 지휘해서 한 개 조를 이뤘다.
“정지!”
앞서 가던 별장이 한쪽 손을 살짝 들며 외치자 거란 출신 기병들은 일제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 잠깐 쉬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간다.”
“예.”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벌써 사흘째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척후대 조원들은 다들 약간 지친 얼굴로 말에서 내렸다.
“잘 익은 양고기와 마유주 한잔이 그립구만.”
롭산완단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는 말에 새흐나가 피식 웃으며 안장주머니에서 말린 육포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내일이면 본영으로 돌아가니, 오늘까지만 육포로 만족해라.”
“쩝, 사흘 내내 이것만 먹으니 이제 냄새도 맡기 싫어.”
“배부른 소리 한다, 언제는 양고기도 아니고 귀한 쇠고기로 만든 거라며 좋아하더니만.”
입맛을 다시며 살짝 투덜대던 롭산완단은 새흐나의 핀잔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랬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좀 해. 예전에는 육포도 먹기 어려웠잖아. 싫으면 말고.”
새흐나가 건네줬던 육포를 다시 가져가려 하자 롭산완단은 언제 불평을 했냐는 듯 그것을 낚아채 얼른 입에 넣고 씹었다.
“하여튼 성격 급하기는. 내가 언제 안 먹는다고 했어?”
“으이그.”
땅바닥에 둘러앉은 조원들은 각자 육포와 곡물 가루를 꺼내 먹고 가죽 물주머니에 든 물을 마시는 것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장기간 돌아다녀야 하고 불을 함부로 피울 수도 없는 상황이니 이런 건조 식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포만감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영양소는 다 들어가 있어서, 이걸 먹고 나면 힘이 났다.
타고 온 말들도 고삐를 묶어 놓지 않았지만 잘 훈련된 군마답게 한쪽에 모여 풀을 뜯어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편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새흐나가 약간 굳은 얼굴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왜 그래?”
“가만있어 봐.”
옆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롭산완단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한쪽 손을 들어 막은 새흐나는 몸을 엎드리고 바닥에 귀를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다른 조원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새흐나를 주시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새흐나는 어느새 앞에 와 있는 별장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최소 수백 명 이상입니다.”
“확실해?”
그러자 새흐타 대신 롭산완단이 꾸준히 교육을 받고 있지만 아직은 어색한 조선말로 물음에 대답했다.
“이 친구는 우리 부족에서도 제일가는 사냥꾼입니다. 틀림없을 겁니다.”
“으음.”
멀리 있는 사냥감도 어렵지 않게 포착하고 추격하는 거란족 사냥꾼의 능력을 알고 있는 별장은 낮게 침음을 내뱉은 후 사뭇 진지한 어투로 지시를 내렸다.
“방향이 어디야?”
“북동쪽에서 곧장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저기 언덕 뒤에 숨어서 정체를 확인한다. 서둘러!”
“옛.”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원들은 재빨리 주위를 정리하고 군마에 올라 왼편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뒤로 가서 은폐했다.
얼마 있지 않아 새흐타가 이야기한 대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기마대가 끝도 없이 몰려왔다.
얼핏 봐도 수만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군에 별장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끄응.”
“저것들, 청군 놈들 맞지?”
“보면 몰라?”
“새흐타.”
“예, 별장님.”
새흐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대답하자 별장은 품속에서 붓을 꺼내 뭔가를 급히 적더니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내밀며 말했다.
“빨리 본영으로 전서구를 보내.”
“알겠습니다.”
새흐타는 얼른 은폐해 있던 언덕을 내려와 자기가 타는 말안장 뒤에 매달아 둔 새장에서 전서구를 꺼내 다리에 쪽지를 단단히 매달아 날려 보냈다.
푸드드득!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전서구는 새흐타의 머리 위에서 크게 한 바퀴 선회하더니 이내 의주성이 위치한 남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청군이 왔다는 것을 알린 척후 십이 조는 행군 대열이 다 지나갈 때까지 언덕 뒤에 쥐 죽은 듯 숨어 적군의 규모와 상태를 살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의주성 관아에 마련된 지휘 본부에서 장수들과 전략을 논의하고 있던 도현은 군단 소속 연락관이 가져온 통신문을 직접 읽고 안색을 굳혔다.
“심양을 떠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후속 병력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보병 없이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근위대 사령관인 박영식의 말에 남두병 이 군단장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보나 마나 지난 병자년 때처럼 압록강을 돌파한 다음 산재해 있는 성들을 무시하고 곧장 한양까지 내려올 속셈일 겁니다. 이미 한번 당한 계책에 또다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오만하기 그지없지 않사옵니까.”
조선군을 무시하는 청군의 행동에 남두병 장군이 분통을 터트리자 상석에 앉은 도현은 차분하면서도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오만함이 청군에게 지옥을 안겨 줄 것이오.”
말을 끊고 잠시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지난 수년간 피땀을 흘리며 준비해 온 것들을 보여 줄 때가 왔소. 배수지진背水之陣,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자세로 적을 맞이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결연한 얼굴을 한 장수들은 도현의 말에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지금 즉시 적색경보를 내리고 지휘부도 방어진지로 옮기시오.”
“옛.”
망루에 설치된 비상종이 요란하게 울리자 막사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무장을 갖추고 모여들었다.
적이 지척까지 왔음을 알리는 적색경보가 내려진 것이었다.
땡땡땡!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뛰어!”
“빼놓고 가는 것 없이 다 챙겨.”
의주성 안은 순식간에 벌통을 쑤셔 놓은 것처럼 북새통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미리 세워 둔 계획에 따라 준비해 놓은 수레에다 창고에서 꺼낸 보급 물자를 착실하게 옮겨 실었고, 집결을 끝낸 병력들은 각 연대별로 성을 나가 방어진지가 있는 강변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오와 열을 맞추고 빠진 인원이 없는지 확인해!”
“다 집합했습니다.”
“일 연대, 출발!”
척척척.
갑옷에 투구를 쓰고 각종 무기를 패용한 병사들은 행군 대형을 갖추고 속보로 아치 모양의 성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갔다.
이 군단과 근위대 병력 수만 명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가 움직이는 것처럼 엄청난 장관을 연출했다.
도현도 곤룡포 대신 황금색 갑옷을 갖춰 입고 등 뒤로 붉은색 망토를 늘어뜨린 채 말에 올라 장수들을 거느리고 강변에 구축된 방어진지로 갔다.
지휘부와 보병이 오고 있는 사이에 방어진지 주변 언덕 위에 위치한 포대에서는 폭발의 위험 때문에 땅을 파고 보관소를 만들어 넣어 둔 포탄과 화약을 꺼내 각 화포별로 분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읏차!”
“조심해서 옮겨.”
보급되는 물품은 각 포대마다 포탄과 화약을 합쳐 연속해 마흔 발을 쏠 수 있는 분량이었는데, 포탄은 인마 살상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냥 커다란 쇠구슬에 불과해 큰 피해를 입히기 힘들었던 기존의 것과 달리, 신형 포탄은 땅에 떨어지면 내부에 들어 있는 화약이 터져 수십 조각의 파편을 뿌려 반경 스무 보 이내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방어진지에는 현대의 다련장포와 비슷한 신기전 화차 수십 개가 배치되어, 적이 나타나면 불벼락을 뿌려 줄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물기에 젖지 않도록 가죽으로 덮어 놓은 수레에서 소신기전 뭉치를 꺼내 온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하나씩 장전을 했는데, 화차 하나당 한꺼번에 무려 마흔 발을 날릴 수 있었다.
전방에 촘촘히 깔아 둔 비격진천뢰에 각종 화포 그리고 신기전까지, 조선군이 방어진지에 배치한 화력은 웬만한 성 하나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다 운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화약도 엄청나게 들어갔는데, 총생산량의 반년 치에 달하는 화약이 이번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것은 전쟁에 나선 친정군親征軍이 보유한 화약의 오분지 일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으로, 도현이 첫 전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력을 모두 투입해 놓고도 지거나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 뒤부터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도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의주성을 나온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방어진지에 모두 투입되었고,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 언덕 위에 국왕을 상징하는 봉황기가 휘날리며 지휘부가 차려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평온해 보이지만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돌쇠는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 진지를 순찰하러 나섰다.
둘씩 짝을 지어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거나, 여럿이 모여 나직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거나 하면서 취침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흔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실이 팽팽히 당겨진 듯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반응하듯,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한층 예민해진 것을 느낀 돌쇠는 한 손으로 얼굴 한쪽의 자상을 쓰다듬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다시 평정을 되찾은 돌쇠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한 무리의 병사가 동그랗게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별다를 것도 없는 잡담에 불과했지만,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병사들은 여느 때처럼 큰 소리를 내며 웃기도 하고 편안한 표정인 반면 맞은편의 젊은 병사들은 입맛이 뚝 떨어진 표정으로 다 식은 밥알을 깨작거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너희들, 그래서야 내일 싸울 수나 있겠냐?”
“별장님.”
불쑥 들려온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든 젊은 병사들은 상대방이 돌쇠임을 알고 허둥지둥 일어서려 했다.
“아아, 됐어.”
양반도 아닌데 뭘 그리 예의를 차리냐며 돌쇠가 한쪽 발로 자갈을 슥슥 치우고 옆에 끼어 앉았다.
“뭐야, 왜 이리 축 처져들 있어?”
“그게…….”
“막상 전투가 코앞이라니까 쫄았냐?”
돌쇠의 거침없는 말투에 병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상관 앞에서 어떻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랴.
그러자 돌쇠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희들, 이게 뭔지 알아?”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 한쪽에 길게 그어져 있는 오래된 흉터를 드러내 보였다.
벌써 한참 전에 아물었지만, 칼에 베인 상처가 워낙 깊어 흉터가 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인상이 몇 배로 나빠지긴 했으나, 정작 본인은 이 상처가 꽤 마음에 드는지 틈만 나면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다.
“예전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다친 상처라고 들었습니다.”
돌쇠의 얼굴 상처는 나름 유명한 화젯거리였기에, 아직 신참티를 벗지 못한 젊은 병사들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이것 말고도 내 몸엔 흉터가 많아.”
돌쇠는 소맷자락과 옷고름을 반쯤 풀어 몸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상처들을 보여 주었다.
할퀸 것처럼 얕은 게 있는가 하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깊은 것도 보였고, 몸 전체가 어디 하나 매끈한 곳이 없었다.
그걸 본 병사들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이미 다 나은 상처인데, 뭘. 가끔 비 올 때 쑤시는 것만 빼면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아.”
“역시 별장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비록 출신은 내수사 노비로 미천했지만, 그동안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병졸에서 하급 군관인 별장까지 승차한 돌쇠의 이야기는 근위대에서도 유명한 전설이었다.
“별장님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으신가 봅니다.”
“인마, 나도 사람인데 어찌 무서운 게 없겠어? 이 흉터는 말이다, 나한텐 훈장 같은 거야.”
“훈장요?”
“그래. 전투를 치르면서 사선을 넘나들다 보면 몸에 이런저런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결국 이건 내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증거란 뜻도 되지. 그리고 흉터가 하나둘씩 늘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강하다고 말이지.”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아무렴! 쇠도 여러 번 두드려야 더 튼튼해지지 않냐, 그거랑 마찬가지야. 그리고 일단 마음가짐이 바뀌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지고, 살아남을 확률도 훨씬 높아지는 거지.”
돌쇠는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기술이나 요령의 차이도 무시할 순 없지만,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을 정하는 건 이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거다. 그걸 결코 잊어서는 안 돼.”
“별장님…….”
돌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관절이 부드럽게 풀리고,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았던 몸의 떨림 또한 어느새 멎었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계집애처럼 밥알이나 깨작거리고 있지 말고 사내답게 퍽퍽 퍼먹으란 소리다, 알겠어?”
“예!”
돌쇠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젊은 병사들은 남아 있던 주먹밥을 한 톨도 남김없이 싹싹 비운 뒤 씩 웃어 보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군이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지평선을 가득 메운 채 강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찰을 돌다가 찾아낸 야생 더덕을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고 있던 돌쇠는 눈앞에 보이는 적을 보며 퉤 하고 침을 내뱉은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더럽게도 몰려오는군.”
“별장님, 우리 이길 수 있겠지요?”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신병이 마른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자, 돌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대답했다.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무조건 우리가 이기니까 쫄지 마. 알았지?”
“네.”
“그래.”
이처럼 실제로 적과 맞닥뜨리게 되자 약간의 동요가 일었지만, 하급 군관과 고참 들이 나서서 다독여 주자 병사들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앉아 조선군 방어진지를 확인한 호타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조선군이 잔뜩 모여 있군.”
척후를 통해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마치 단단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도독, 이대로 돌파를 강행하실 겁니까?”
바로 옆에 말을 타고 있는 부르칸이 꺼림칙한 얼굴로 묻자 잠시 침묵하던 호타이가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 상태로 정면승부를 하면 패하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클 겁니다. 차라리 조금 시간을 지체하더라도 다른 도하 지점을 찾아보시지요.”
그러자 호타이는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강이 가로막고 있고 상대가 방어진을 구축해 놓고 있으니 공략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회할 수는 없어.”
“어째서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는 저 병력을 남겨 두고 곧장 한양까지 내려가면 언제든지 퇴로가 막히거나 뒤통수를 맞을 위험이 있어서고, 둘째는 저기 정면에 보이는 언덕 위에 꽂혀 있는 깃발 때문이야.”
“…….”
“자세히 보면 봉황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을 거야.”
탁 트인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목민족답게 시력이 유난히 좋은 부르칸은 호타이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강 건너에 있는 언덕을 쳐다보았다.
너무 멀어 봉황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깃발보다 족히 배는 더 큰 황금색 사각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봉황기는 국왕만이 쓸 수 있는 깃발이지.”
“설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치켜뜬 부르칸을 보며 호타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기에 조선 국왕이 있을 거야.”
“한양에 있어야 할 자가 어떻게 여기에…….”
부르칸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쩌면 심양성에 간자가 있어 출정 사실이 사전에 유출됐을 수도 있어.”
“혹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조선 관리들의 모습을 볼 때 다른 것도 아니고 국왕을 상징하는 봉황기를 가짜로 세웠을 가능성은 낮을 거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수만 명의 청군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황제인 홍타이지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하자 소식을 들은 사대부들이 줄지어 자결했던 것을 기억하는 부르칸은 호타이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잘만 하면 굳이 한양까지 안 가고 조선 국왕을 잡아 항복을 받아 낼 기회이고, 함정이라고 해도 상대편 주력을 격파해 먼저 기선을 제압할 수 있으니 손해 볼 것은 없겠지.”
이야기를 들은 부르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공격을 하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얻을 것이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길게 끌 것 없이 대열이 갖춰지면 바로 공격을 시작할 테니까 준비해.”
“알겠습니다.”
청군의 계획은 간단했는데, 일제 돌격으로 중앙을 돌파한 다음 배후에서 선회해 조선군의 측면을 유린하는 것이었다.
딱히 작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단순했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파괴력이 큰 공격 방법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말을 타고 일제히 돌격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와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워낙 병력이 많아 한꺼번에 돌격하는 것이 어려웠던 청군은 총 세 개 제대로 나눠 각각 대형을 만들었다. 그래도 제대 하나에 속한 기병 숫자가 삼만이 훌쩍 넘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호타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며 크게 외쳤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든 조선군을 싹 다 쓸어버린다. 팔기군, 돌격!”
뿌우우웅. 뿌우우웅.
돌격 명령과 함께 긴 뿔피리 소리가 전장 가득 울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일 제대 기병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나갔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 제대가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핫, 핫!”
두두두두두.
청군은 육중한 말발굽 소리로 사방을 진동시키며 마치 시커먼 해일이 몰려오듯 정면에 보이는 조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 방어진지까지는 사백 보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중간에 넓은 압록강과 모래톱이 펼쳐져 있어 지형이 그다지 안 좋았지만 기병의 속도라면 2~3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강변을 따라 길게 파 놓은 참호 안에 들어가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청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히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뭐가 저렇게 많아?”
“완전 개미 떼가 몰려오는 것 같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까 별장님 말 못 들었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리가 이겨.”
막상 전투가 임박하자 병사들은 긴장과 불안 그리고 초초한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삼한 지방 반란부터 군에 있으면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고참병들도 이때만큼은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포 준비!”
그때 같은 진지에 있던 돌쇠가 검을 들고 크게 소리치자 병사들은 어느새 머릿속에 든 잡념이 사라지고 훈련받았던 대로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했다.
철컥, 철컥.
노리쇠를 비틀어 연 뒤에 총알을 약실에 넣고 다시 되돌려 밀어 장전하며 병사들은 조금씩 긴장된 마음을 풀었다.
그런 보병들 머리 위로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울리더니 포대에서 쏜 포탄이 날아갔다.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피던 도현은 공격을 시작한 청군이 화포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포대에 신호를 보내라.”
“옛.”
대답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군관이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고는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바로 각 포대에 화포를 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 중 가장 사거리가 긴 천자총통부터 차례대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발포하라!”
신호를 본 군관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자, 미리 장전을 다 끝내 놓고 기다리던 화포장들이 바로 들고 있던 횃불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꽝! 꽝! 꽝!
육중한 포성과 함께 순식간에 뿌연 화약 연기가 포대를 온통 뒤덮었고, 포수들은 곧장 포신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 낸 뒤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고는 얼마 안 있어 이 탄을 연이어 쐈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말을 달리며 돌격하는 청군 사이에 정확히 떨어져 폭발했다.
슈우우웅- 쿠우웅!
쿠쿵!
“으악!”
“끄어억.”
이히히힝.
폭음이 터질 때마다 말의 구슬픈 울음소리와 청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명과 싸우면서 이미 화포를 경험했지만, 이렇게 백여 문 가까이 되는 화포가 동시에 불벼락을 치는 것은 청군도 처음이었다.
특히나 커다란 쇠공이 그냥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폭발을 하며 수많은 파편을 사방에 뿌렸기에 피해가 더 컸다.
청군도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놀란 건 말들이었는데, 요란한 폭음에 겁을 먹고 흥분해서는 달려가는 걸 멈추거나 이리저리 날뛰었다.
“이런!”
“워워.”
푸르릉.
팔기군 병사들이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말들은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앞발을 들고 날뛰자 낙마하는 이들이 속출했고, 몸 위로 덮쳐 오는 말발굽에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런 청군을 향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포탄이 쉬지 않고 계속 쏟아졌다.
슈우우웅!
꽈광!
하지만 최강의 군대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것은 아님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포격에 크게 당황하기는 했지만 팔기군은 이내 전열을 빠르게 재정비한 뒤 포탄 세례를 뚫고 계속 앞으로 돌격했다.
“거리를 좁히면 조선 놈들도 화포를 쏘지 못한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와아아!”
포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청군은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남아 있었고, 호전적인 전사들답게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말에 채찍질을 했다.
풍덩! 풍덩!
강에 도달한 청군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강에 뛰어들었다.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속력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수위가 낮아 물이 말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으니 그대로 도강을 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래로 백 보 당기고 준비되면 쏴라!”
포수들은 빠르게 접근하는 청군을 따라 탄착 지점을 계속 바꾸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장전과 발사를 반복했다.
쿠쿵! 꽈아앙!
폭음과 함께 하얀 물기둥이 솟아오를 때마다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지만, 청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기세를 올리며 앞다퉈 조선군 진형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내 청군 일 제대가 강을 건너 이쪽 모래사장에 올라서자 남두병 장군이 도현을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비격진천뢰를 터트려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이대로 방어선까지 적이 쇄도해 들어올까 봐 마음이 초조한 남두병 장군과 달리 도현은 계속 전장을 주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멀었어. 조금 더 기다렸다가 효과를 최대화해야 돼.”
“하지만 이러다가 방어선이 뚫리기라도 하면…….”
“이쯤은 총병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예.”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지만 남두병 장군은 도현의 말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방어선에 있는 조선군 병사들은 포격을 뚫고 달려오는 청군을 쳐다보며 바짝 긴장했다.
“적이 온다, 모두 사격 준비!”
“먼저 격발하지 말고 지휘관의 명령을 잘 들어라!”
두려움을 없애고 병사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데군데 배치된 군관들은 일부러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댔다.
머리 위로 계속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참호 벽에 기대서서 가늠쇠로 전방에 보이는 적을 조준했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점으로 보이던 청군이 이제 사납게 일그러뜨린 얼굴이 구분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이 새까맣게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조선군 병사들은 강한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엄청나게 쏴 댔는데 아직도 더럽게 많이 남았잖아!”
“그러게. 우리가 놈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옆에 선 동료가 불안한 듯 창백한 표정을 짓자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병사가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먼저 못 죽이면 우리가 뒈지는 수밖에.”
“으음.”
“아까 군관들 하는 이야기 들었지? 살아 돌아가서 가족들 다시 보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
불안해하던 병사는 가족이라는 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신형 조총을 든 손에 힘을 꽉 줬다.
이 병사뿐만 아니라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사납게 달려드는 팔기군의 모습은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해지면 양옆에 수많은 전우가 함께 있음에도 마치 적이 자신만 노리고 달려오는 듯한 공포와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면 이성을 잃고 뒤로 도망치는 병사가 나오고 공포가 삽시간에 확산되어 결국 대열 전체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군관들은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고함을 내지르며 부하들을 다그쳤다.
상대가 백 보 안으로 들어오자 보병 지휘를 맡은 박영식 장군이 첫 번째 방어선 바로 뒤에 있다가 큰 소리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신호를 올려라!”
삐이이익.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돌쇠는 화살 끝단에 명적을 단 효시嚆矢가 위로 올라가는 걸 보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발사!”
그러자 아까부터 적을 조준하고 있던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타탕! 탕!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참호선에서 불꽃이 번쩍이며 일제히 조총이 발사되었고, 총구에서 나온 총탄은 공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 정면에 있는 팔기군을 맞추었다.
“으아악.”
“크흑!”
“컥!”
히히힝.
수천수만 정에 달하는 신형 조총의 일제사격을 그대로 뒤집어쓴 청군 일 제대 선두는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두세 발씩 몸에 총탄을 맞은 적병은 피를 뿌리며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주인 잃은 말들은 총성에 놀라 앞발을 들고 날뛰거나 그대로 뒤돌아 도망갔으며, 비록 낙마했지만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던 청군 병사들은 흥분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군마 말발굽에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재장전! 쏴!”
철컥, 철컥.
군관이 외치기 전에 훈련받은 대로 쏘자마자 곧바로 능숙하게 재장전을 한 병사들은 쉬지 않고 계속 사격을 가했다.
탕! 탕! 타탕! 탕!
이 시대에 가장 흔한 화승총이 보통 1분 내외로 재장전이 가능했는데, 조선군이 쓰는 신형 조총은 30초 정도면 다 끝낼 수 있었고 거기다 피땀이 어린 반복 훈련으로 시간을 더 단축해 거의 10초에 한 번씩 총을 발사했다.
여기다가 총병 숫자까지 엄청나다 보니 청군은 연속해서 계속 조총이 발사되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의 기병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강변은 어느새 청군 병사와 군마 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고 그들이 흘린 피로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뿌연 화약 연기로 뒤덮인 조선군 진영에서 불빛이 번쩍이고 총성이 울릴 때마다 청군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시체로 변했다.
연거푸 날아오는 치열한 총탄 세례와 포격에 일 제대는 이미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던 청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악착같이 조선군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뒤에서 계속 후속 병사들이 강을 건너 몰려오고 있었기에 좁은 백사장에 갇혀 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으음.”
강 건너편에서 아군이 조선군한테 혹독하게 당하는 걸 보며 호타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저항이 거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조총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규모로 총병을 운영해 총격을 퍼붓는 건 호타이뿐만 아니라 청군 장수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너무 성급하게 돌격 명령을 내린 건 아닌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도독, 피해가 너무 큽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부르칸이 말하자 호타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호통을 쳤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거리를 좁히면 저까짓 조총은 무용지물이 될 테니 머뭇거리지 말고 계속 돌격시켜!”
“하지만…….”
“뭘 꾸물거리고 있나, 어서 명령을 전파하지 않고!”
조선군 방어선에 닿기도 전에 기병들이 먼저 전멸하겠다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는 호타이의 얼굴에 부르칸은 말을 삼켜야 했다.
“옛.”
이미 조선군 방어진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일 제대 병사들의 시신과 피로 뒤덮여 있었고 벌써 이 제대가 강을 넘어간 상황이라 돌격을 멈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병사들의 죽음을 의미 없이 만들지 않으려면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았다면, 호타이는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결코 재차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큼한 화약 연기와 총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뒤엉킨 전장에 흥분할 만도 했지만, 도현은 시종일관 차갑게 냉정을 유지하면서 손에 든 지휘봉으로 막 강을 건너온 이 제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이야. 비격진천뢰를 폭발시키게.”
“알겠사옵니다.”
언덕 위에 설치된 지휘소에서 깃발 신호를 보내자 초조하게 폭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은 지체 없이 도화 장치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강변에 묻어 둔 비격진천뢰까지 이어진 얇은 대나무 통에 삐죽이 나온 심지는 금방 불꽃을 피워 올리며 안으로 타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 사방을 진동시켰고, 동시에 수십 개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꽈과광! 쿠쿵! 쿵!
방어진지 앞에 땅을 살짝 파고 미리 묻어 둔 비격진천뢰 수십 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이 얼마나 큰지 백 보가 넘게 떨어진 방어선까지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고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렸다.
엄폐물도 없이 폭발에 그대로 휩쓸린 청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폭발도 치명적이었지만 사방으로 뿌려진 수십, 수백 개의 날카로운 쇳조각 또한 살상반경 안에 있는 적들을 걸레처럼 찢어 놓았다.
“끄허억.”
“커컥……!”
“아악!”
지리멸렬한 일 제대를 추월해 곧장 조선군을 유린해 버릴 것처럼 기세를 올리며 달려오던 청군 이 제대는 비격진천뢰가 터지면서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폭발에 휩쓸려 그대로 박살이 났다.
드넓은 모래사장은 청군 병사와 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강하게 압박해 오던 청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에 조선군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우와아아!”
“이놈들아, 맛이 어떠냐!”
굳은 얼굴로 전투를 지휘하던 박영식 장군도 뿌연 화약 연기가 걷히면서 드러난 비격진천뢰의 위력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다시 정색을 하며 외쳤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모두 진정하고 남아 있는 적에게 계속 사격을 퍼부어라!”
그러자 조선군 병사들은 이제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 냈는지 참호 위로 상체를 드러내면서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조총을 쏴 댔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치켜뜬 호타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적을 자랑하며 앞에 있는 건 뭐든지 다 짓뭉개 버릴 것처럼 거센 파도가 되어 돌격해 들어가던 팔기군이 상대가 쏟아 낸 화약 무기에 너무나도 어이없이 녹아내린 것이다.
처음 포격과 총탄 세례에 선두 열이 무너질 때까지만 해도 다소 피해는 있을지언정 전투에 패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격렬해지는 공격에 청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급기야 비격진천뢰가 동시에 터지면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미 강 주위는 시산혈해를 이루며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지만, 조선군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탄을 날리고 사격을 가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공격을 해 대는지, 쳐들어온 청군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리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도현은 만주를 보다 손쉽게 장악하기 위해 호타이가 끌고 온 팔기군을 여기서 모두 괴멸시킬 작정이었다.
주위에 있던 장수들은 전멸 상태에 놓인 일 제대와 이 제대를 보며 너무 놀라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거나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삼 제대가 강을 넘어가려 했지만, 앞서 보낸 병력이 다 박살 난 상황에서 다시 돌격해 들어가 봤자 조선군의 제물이 되어 축차 소모가 될 뿐 적진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선군이 가진 화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돌격을 감행한 것이 너무나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다 부질없는 짓일 뿐, 이제 전세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어졌다는 걸 깨달은 호타이는 분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해야 했기에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후퇴시키게.”
“알겠습니다.”
내심 바라고 있던 명령이었기에 얼른 머리를 끄덕인 부르칸은 후퇴 신호를 울리도록 했다.
땡! 땡! 땡!
퇴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달려가던 삼 제대는 황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고, 강변에 돈좌된 채 포격과 총탄 세례를 뒤집어쓰며 죽어 나가던 청군들은 허겁지겁 피로 물든 압록강을 다시 건너갔다.
“전하, 적이 후퇴하고 있사옵니다.”
이겼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목소리로 남두병 장군이 말하자, 갑옷을 입은 채 전장을 계속 주시하던 도현은 표정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봉으로 강 너머에 있는 적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어렵게 승기를 잡았는데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지. 남 장군.”
“하교하시옵소서.”
“효시를 쏴서 우회시켜 놓은 기병대가 측면을 강타하도록 신호를 보내고, 신기전으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시오.”
“알겠사옵니다.”
허리를 숙인 남두병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다시 당당하게 언덕 위에 서서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폈다.
잠시 뒤 지휘소에서 발연통을 매단 효시가 붉은색 연막을 피우며 하늘 높이 솟구쳤고, 방어선에 배치된 화차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신기전 수천 발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쉭! 쉬쉬쉭! 쉬이익―! 쉭!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자 화차 한 개당 백 개의 신기전이 발사됐는데, 매캐한 화약 연기와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기전은 엄청난 장관을 연출했다.
몸체에 장착된 화약통이 연소하며 만들어 낸 추진력 덕분에 일반 화살로는 어림도 없는 거리를 단번에 빠른 속도로 가로지른 신기전은 강 너머에 있는 청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끄억.”
“이건 또 뭐야!”
“어서 피해!”
이히히힝.
푸르릉.
겨우 화포 사정거리 밖으로 나와 안도하고 있던 청군에게 신기전 공격은 말 그대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신기전은 비처럼 쏟아져 청군을 덮쳤고, 적병들은 한 번에 두세 발씩 꿰뚫린 채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말들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날뛰다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직접 타격하는 것도 있었지만 일부 신기전은 비격진천뢰처럼 몸체에 도화선이 달린 폭탄을 달고 있다가 적군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꽈꽝! 꽝! 꽝!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이 청군의 귀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폭탄 안에 꾹꾹 채워 둔 날카로운 쇳조각이 아래로 쏟아졌다.
신기전 자체로도 위력적이었지만 공중에서 터트리면 효과가 한층 더 배가한다는 걸 알고 있던 도현의 꼼수가 제대로 통했는데, 청군이 허겁지겁 원형의 방패를 꺼내 들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작은 쇳조각 수백, 수천 개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크헉!”
“으아아악!”
“사, 살려 줘.”
“여긴 지옥이야!”
공중에서 연이어 신기전이 터지는 것과 함께 청군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쇳조각이 여기저기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나가는 동료들을 본 팔기군은 어느새 무적의 군대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겁에 질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밀치며 발버둥을 쳤다.
급기야 같은 편끼리 칼부림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저리 비켜!”
“너나 나와!”
“이 자식이.”
슈각!
“컥.”
“끄억.”
신기전이 공중에서 터지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오직 살려고 하는 본능만이 남아 적병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에 질린 적병들은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그게 같은 편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고, 낙마했지만 아직 살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동료를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냥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며 지나갔다.
“오, 오지 마!”
“끄헉.”
이성을 상실한 청군은 더 이상 아군을 아군이 아니라 그저 퇴로를 막고 있는 장애물로만 인식했다.
강을 건너 날아온 신기전이 공중에서 폭발까지 하자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던 호타이는 혼란에 빠진 부하들이 상잔을 벌이는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멍청한 놈들, 어서 병사들을 진정시키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
호통을 친 호타이까지 부장들과 함께 나서서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팔기군이라도 지금처럼 명령 체계가 무너지고 우왕좌왕한다면 그저 평범한 기병에 불과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평소 오합지졸이라고 놀리던 명나라 군대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조선군이 보유한 신기전 수량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금방 사격을 멈췄기에 망정이지 반 시진 정도만 계속 쏴 댔다면 청군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대로 괴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신기전 사격이 멈추자 호타이는 만신창이가 된 병력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는 남은 병사들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재차 후퇴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이 강을 넘어오기 전에 모두 파속부로 퇴각하라!”
파속부는 현재의 단둥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청나라 마을이었다.
제대로 된 성곽이 없어 방어에 취약했지만 호타이는 일단 그곳으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가깝기도 했고, 비록 전투는 패했지만 설마하니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 안으로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거기서 숨을 돌린 뒤 병력을 다시 끌어모아 오늘 당한 치욕을 몇 배로 되갚아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타이의 희망은 후방에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조선군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두두두두!
“제기랄, 조선군 기병이다!”
근위대와 이 군단 소속 기병 일만이 미리 강을 건너 숨어 있다가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불쑥 후방에서 나타나자 청군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기병대 지휘를 맡은 박경지 장군은 손에 든 장검을 앞으로 내밀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돌겨어억!”
“우와아아!”
뿌우우웅! 뿌우우웅!
신호수가 말을 탄 채 뿔고동을 길게 불면서 돌격을 알렸고 기병들은 연신 채찍질을 가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덮쳐오는 것 같았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호타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빨리 전투대형을 갖춰라! 적을 막은 다음 포위당하기 전에 그대로 활로를 뚫어 파속부로 물러난다.”
이대로 포위를 당한다면 끝장이었기에, 피해는 크겠지만 일단 조선군 기병과 맞붙어 퇴로를 열 작정이었다.
호타이의 외침에 우왕좌왕하던 청군은 다급히 모여 전투대형을 갖췄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제대로 대형을 갖출 수 있었지만 벌써 조선군 기병대가 백 보 안까지 짓쳐들어오고 있었기에 호타이는 혀를 차며 명령을 내렸다.
“공격!”
“이랴!”
호타이가 우렁차게 외치며 옆구리를 걷어차자 깜짝 놀란 말은 힘껏 앞으로 내달렸고 그 뒤를 부르칸과 다른 팔기군 병사들이 따랐다.
여기서 조선군 기병대를 이겨 내지 못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었기에 청군도 필사적이었다.
“거검擧劍!”
차차차창.
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앞으로 내민 청군은 더욱더 빨리 말을 몰았다.
양쪽을 합쳐 수만 기에 달하는 기병이 지축을 울리며 서로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강 건너 지휘소에 서서 전장을 살피던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리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방어진지에 있는 병사들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기병 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조선군 기병들이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지난겨울에 벌어진 북방 전투에서 우라타 부족 전사들을 괴멸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웅-오식 권총이었다.
선두에 서서 돌격을 지휘하다 그것을 본 호타이는 뭔지 몰라도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어서 달리고 있는 이상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려는 듯 호타이는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부하들을 독려했다.
“단번에 돌파하는 거다.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다 쓸어버려라!”
양쪽의 거리가 오십여 보로 좁혀졌을 때 박경지 장군이 일제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타탕! 탕! 탕! 탕!
불꽃과 함께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는데 조선군 기병들은 아주 능숙한 솜씨로 말을 달리면서 권총에 장전된 다섯 발을 연달아 모두 발사했다.
앞에서 들리는 격렬한 총성에 호타이는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이게 무슨……!”
강을 건너 돌격하다 괴멸당한 부하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날아온 총탄이 팔기군을 덮쳤다.
피슝! 슝!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총탄이 아슬아슬하게 호타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살이면 검으로 쳐 내기라도 하겠건만, 이건 섬뜩한 소리만 들릴 뿐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공포 그 자체였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병사들이 무더기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총성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마주 보며 달려오던 팔기군 수백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박경지 장군은 검을 좌우로 흔들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우오!”
어느새 사격을 다 끝낸 조선군 기병들은 재빨리 권총을 집어넣은 후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반대편 손으로 장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칼날은 햇빛을 반사해 섬뜩한 반사광을 내뿜었고 기세가 오른 조선군 기병은 살기를 가득 피워 올렸다.
전체 병력으로 볼 때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적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팔기군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 조선군 기병대와 팔기군이 서로 엇갈리면서 빠르게 충돌했다.
촤촤촹!
“크악!”
“으윽.”
이히히힝.
“이야아!”
박경지 장군은 눈앞에 가죽 갑옷을 입은 청군 병사가 가득 들어오자 지체 없이 상대의 옆구리를 검으로 힘껏 베었다.
슈각.
“끄흑.”
일격에 당한 적병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옆으로 굴러떨어졌고, 그 순간 박경지 장군이 탄 군마가 어깨에 총상을 입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또 다른 적병을 말발굽으로 무참하게 짓이기면서 지나갔다.
꽈직.
“죽어라!”
살짝 불쾌한 느낌에 눈가를 찡그리던 박경지 장군은 적병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무기를 휘두르자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바로 상대편 가슴을 노리고 검을 위로 그어 올렸다.
뼈가 부딪쳐서 잘려 나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고 이내 적병이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박경지 장군뿐만 아니라 조선군 기병들 대부분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몰아붙였고, 기세가 꺾인 팔기군은 반격은 고사하고 제 몸 하나 지키기에 급급했다.
말 울음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를 뿌리면서 낙마하는 것은 열에 아홉이 청군이었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화약 무기에 방어선 돌파는 실패했지만, 장기인 기병끼리의 전투는 자신이 있었던 호타이는 무적의 팔기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드넓은 벌판 곳곳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는 건 태반이 청군 병사들이었다.
아직 조선군 기병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며 저항하는 병사들도 보였지만,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참호를 나온 보병들이 전투대형을 만들어 강을 건너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기랄!”
이를 부드득 간 호타이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러고는 부관인 부르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일 가까이 있는 조선군 기병을 향해 달려갔다.
“하압!”
호타이의 기세에 놀란 상대가 허겁지겁 방어를 했지만 그가 길게 내뻗은 검이 더 빨랐다.
푹.
“끄억.”
검은 상대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내며 쓰러지는 조선군 기병을 피한 호타이가 말 머리를 돌려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뭔가 날카로운 것이 어깻죽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큭.”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박혀, 입고 있는 갑옷이 시뻘건 피로 흠뻑 젖고 있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젠장할.”
몸을 휘청거린 호타이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겨우 중심을 잡고는 한쪽 손으로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나름 지혈을 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배어 나왔고 호타이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낙마하고 말았다.
털썩.
흙바닥에 떨어진 호타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뭐라고 크게 외치면서 황급히 다가오는 부르칸의 모습이었다.
푸른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벌어진 격렬한 전투는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함께 조선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인해 청군은 총 십만의 병력 중 절반이 넘는 육만 팔천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간 청군은 겨우 천여 명 남짓이었는데 어깨에 총상을 입은 호타이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에 반해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삼백육십 명에 부상 칠백이십 명으로, 이것만 봐도 얼마나 일방적인 전투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심양 도독인 호타이를 놓쳤지만 이걸로 만주 지역에 남아 있던 청군은 완전히 괴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 정리를 하며 하루를 압록강 강변에서 머문 조선군은 다음 날 봉황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강을 건너 만주 내륙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대승을 거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의주성을 떠나 한양으로 달려갔다.
심양 공략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난 중전 장씨는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에 가채를 올렸다.
도현이 없는 동안 대궐의 기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중전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몸가짐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마마, 세자 저하와 공주들께서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예.”
궁녀들이 주변을 치우고 방을 나가자 곧이어 교대하듯이 연과 숙안, 숙휘 공주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밤새 평안하셨나이까.”
“오냐.”
도현이 출정하기 전에 남긴 당부의 약발이 상당했는지, 제법 의젓한 자세로 문안 인사를 하는 연을 중전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연이도 간밤에 잘 잤느냐?”
“네.”
“우리 공주들은 어떻고?”
“저희도 아무 일 없었어요.”
“좋은 꿈이라도 꾸면 재밌었을 텐데, 그냥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던걸요.”
깜찍한 표정으로 넷째 숙휘 공주가 그리 말하자 중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느냐. 길몽이면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이니 기쁘기야 하겠다만, 평소에 꾸는 아무런 뜻도 없는 꿈은 잡념이 들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하니 없는 것이 더 나은 게다.”
“그런가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숙휘 공주에게 중전은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거라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숙안.”
“예.”
“잘 잤다고 한 것치곤 안색이 별로 안 좋구나. 피부도 거칠어 보이고,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는 게냐?”
“아…….”
날카로운 중전의 눈썰미에 숙안 공주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간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긴 했습니다만, 푹 자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왜?”
숙안 공주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얌전해 손이 잘 가지 않는 착한 아이였는데 갑자기 고민거리가 있다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아바마마께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데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에 계시니 어떻게 지내시는지,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저런, 그래서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게냐?”
“예.”
부끄럽다는 듯 숙안 공주가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연은 사내아이라 후계자로서 특별한 존재고 숙휘 공주는 막내 특유의 애교로 도현을 웃게 하지만, 숙안은 심양에서 첫째를 잃고 두 번째로 얻은 아이라 도현에게도, 중전에게도 각별한 존재였다.
숙안이 중전의 배 속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연과 숙휘가 과연 태어났을까 싶을 정도로 부부 사이에 큰 기점이 되어 준 아이.
게다가 머리는 사내 뺨치게 총명한데 어릴 때 앓은 곰보 때문에 여자로서 제일 중요한 용모를 망쳤으니, 두 사람 다 그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도현과 중전은 숙안의 말에는 유독 물렀다.
그런 마음을 숙안도 아는지 남매들 가운데 가장 효심이 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혼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는지라 중전은 새삼 감동했다.
“네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중전의 칭찬에 숙안 공주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익은 채 얼굴을 푹 숙였다.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글쎄다.”
연의 물음에 중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미도 잘 모르겠구나. 다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편지라도 한 통 써 주시면 좋을 것을.”
“그럴 시간도 없이 바쁘신 것이겠지.”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중전 역시 도현의 소식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과 중전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돌연 장지문 밖에서 상궁이 소란스러운 인기척을 내더니 말했다.
“중전 마마, 잠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지금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
중전이 먼저 부르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상궁이나 내관이 먼저 말을 걸어 대화의 흐름을 깨트리는 일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중전이 일단 들어오라며 문을 열도록 시키자 상궁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다.
“말해 보아라.”
“네, 마마. 지금 막 전해진 소식이온데, 전하께서 대승을 거두셨다 합니다!”
“그, 그게 정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의주성에서 보낸 파발이 가져온 승전보이니, 확실하옵니다.”
들뜬 목소리로 상궁이 그리 말하자 중전의 얼굴에도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들었느냐, 연아, 숙안, 숙희!”
“네, 어마마마!”
“정말 다행입니다.”
연은 역시 아바마마라며 한쪽 손을 힘껏 하늘로 치켜들었고, 숙안 공주는 곰보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환하게 미소로 밝혔다.
고대하던 승전보에 잔뜩 고무된 조정은 곧바로 한양 곳곳에 방을 붙이고 알림꾼을 내보내 백성들한테 대승을 알리도록 했다.
복잡한 한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는 운종가.
아직 정오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보가 붙는 게시판 앞에 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점잖게 의관을 차려입은 선비와 장사치 그리고 아이 손을 잡은 아낙네까지 온갖 군상들이 다 있었다.
관청에서 나온 아전들이 커다란 방을 게시판에 붙이자 다른 한 명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들으시오! 이레 전 의주성 인근 국경에서 또다시 아국을 침략하려던 간악한 청군과, 주상 전하께서 친히 이끄시는 근왕군이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오. 이날 전투에서 벤 적군의 목이 무려 삼만 두가 넘고 그보다 많은 숫자를 포로로 잡았다고 하오!”
불과 몇 년 전에 한양까지 점령당하고 온갖 패악과 약탈을 저지른 청군이었기에, 그 상처가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을 한다고 하자 두려움에 질려 걱정하던 백성들은 이겼다는 말에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우와아아!”
짝짝짝.
“우리가 이겼어!”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러게.”
솔직히 왜국과 북방에 있는 거란족은 그렇다 쳐도, 명을 쫓아내고 자금성까지 차지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는 대부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당히 일전을 겨뤄서 이겨 지난날 당한 치욕을 되갚아 주었다고 하니, 다들 흥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팔을 들어 올려 천세를 외쳤다.
“천세! 천세!”
운종가뿐만 아니라 한양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고 전쟁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아 있던 도시는 환호에 휩싸였다.
며칠 사이로 지방에도 승전보가 전달되어 백성들을 기쁘게 했다.
한편 도현은 북상을 계속해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황릉과 황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심양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푸른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혼하渾河 강 너머에 우뚝 서 있는 심양성을 도현은 말 위에 앉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시옵니까?”
남두병 장군이 옆으로 다가와 묻자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 장군.”
“예.”
“저기 앞에 보이는 성문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덕성문德盛門이라고 들었사옵니다.”
“맞네. 나에게 아니, 우리 조선한테는 한恨과 치욕스러운 기억이 서린 곳이지. 바로 저기서 병자호란 때 청군의 출병식과 승전식이 열렸고, 형님과 내가 끌려와 수년을 볼모로 잡혀 있어야 했던 조선관도 근처에 있었다네.”
뜻밖의 사연에 남두병 장군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장수와 호위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인 줄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저 성문을 볼 때마다 언제고 내가 직접 군대를 몰고 와 지금 당하고 있는 굴욕을 전부 되갚아 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제 그걸 실제로 이루게 되다니 가슴이 벅차올라 심양성에서 눈을 뗄 수가 없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 남두병이 성을 함락시켜 전하께 바치겠사옵니다.”
상체를 숙인 남두병 장군이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자 도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하하, 장군이 그렇게 말해 주니 심양 황궁에 짐이 발을 들여 놓고 황좌에 앉아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군그래.”
“금방 그리될 것이옵니다.”
“남 장군만 믿겠네.”
“맡겨 주십시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조선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적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린 나루터를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도하 준비는 다 끝났나?”
“예. 주변 숲에서 통나무를 잘라 뗏목 수십 개를 만들었고, 적이 도하를 방해하는 것을 대비해 강변에 화포를 배치해 두었사옵니다.”
예상을 깨고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빠르게 북상하자 당황한 청군 패잔병들은 허겁지겁 심양까지 후퇴하면서 나루터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모든 배들을 불살라 버렸다.
폭이 넓고 수심 또한 깊은 혼하渾河 강을 천연 방어선으로 이용해 조선군의 공격을 어떻게 해서든 늦춰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사이 북경에 지원을 요청하고 만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여진족 장정들을 모아 심양성에서 수성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올 것임을 예상했던 도현은 지체 없이 뗏목을 만들어 도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단 하루 만에 준비가 다 끝났다.
“병사들도 하루 동안 머물며 푹 쉬었으니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 주시면 도하를 실시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이 불리해지니 머뭇거릴 것 없이 지금 바로 작전을 실행하게.”
“옛!”
명령이 떨어지자 남두병 장군은 군례를 취하면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혼하 강은 북만주 지역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길게 흘러 발해만으로 빠져나가는 아주 큰 강이었다.
예전에는 심수瀋水라고도 불렸는데, 심양성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자 만주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도 했다.
강이 넓고 깊어 도하가 쉽지 않았지만 상대가 방어 준비를 다 끝내기 전에 심양성을 함락시키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병력을 한꺼번에 다 건너보냈으면 좋겠지만, 뗏목 숫자에 한계가 있어 백인대 다섯 개씩 순차적으로 도하를 시키기로 했다.
강을 건너면서 물에 빠질 수도 있어 습기에 취약한 화약 무기를 쓰는 총병은 일단 모두 제외됐고 창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한테 임무가 주어졌다.
“준비가 됐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말에 도현은 뗏목에 탑승한 일단의 병사들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결행해.”
“예!”
대답과 함께 남두병 장군이 손짓을 하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관 한 명이 깃발을 좌우로 크게 흔들어 공격을 개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선봉 부대 지휘를 맡은 유혁연柳赫然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뗏목을 띄워라!”
“와아아!”
유혁연의 외침에 강변을 따라 주욱 늘어서 있던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커다란 뗏목을 강으로 밀어 넣었다.
“읏차!”
풍덩.
서른 명씩 탄 뗏목 수십 척이 일시에 출발하는 모습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양옆에 촘촘히 붙어 앉은 병사들은 뒤편에 서서 키를 잡고 있는 군관의 구령에 맞춰 나무를 깎아 만든 노를 힘차게 저었다.
쏴아아.
물살이 꽤 셌지만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뗏목들은 한 척도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가르며 반대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성문 위에서 이쪽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청군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한쪽에 설치된 북을 쳐 비상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덕성문의 성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일단의 청군 병사들이 황급히 강변으로 달려 나왔다.
“놈들이 이쪽으로 건너오게 해서는 안 된다. 어서 화살을 쏴라!”
재빨리 대형을 갖춘 청군은 활을 꺼내 들고 조선군이 탄 뗏목을 향해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씨잉! 씽!
하늘 높이 날아오른 수백 발의 화살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뗏목 대열 위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자칫하면 강을 건너기도 전에 화살 비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그 순간 뗏목 중 하나에 타고 있던 유혁연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방패를 들어 올려라!”
처척.
병사들이 가운데 놓아둔 커다란 사각 방패를 집어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화살이 쏟아졌다.
투투툭. 후두둑.
마치 소나기가 지붕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화살이 방패에 박혔다.
“똑바로 들어!”
“징하게도 쏴 대는구먼.”
“그러게.”
화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병사들은 움찔하며 얼굴을 구겼다.
방패 덕분에 화살 세례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노를 젓지 못해, 뗏목은 강 한가운데 그대로 멈춰 섰다.
퍽!
“히익.”
겹쳐서 든 방패 틈으로 화살 하나가 파고들어 와 바닥에 박히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병사가 기겁했다.
“젠장, 우리 포병대 녀석들은 뭘 하는 거야?”
병사의 불평을 듣기라도 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선군 쪽에서 폭음과 함께 방열해 놓은 화포들이 차례대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방포하라!”
꽝! 꽝! 꽝!
씨우우웅! 씨우우웅!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포탄은 강 건너편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청군을 직격했다.
“화포 공격이다.”
“어서 피해!”
포격을 하는 걸 알고 허둥지둥 적병들이 피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음을 내며 주위에 있는 청군을 날려 버렸다.
“아아악.”
“크윽!”
폭발 섬광과 화염이 연이어 피어올랐고 사방으로 뿌려진 파편은 청군 병사들을 갈가리 찢어 걸레로 만들었다.
엄폐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강변 모래사장이라 피해가 더 컸다.
포격에 말 그대로 맨몸으로 노출된 청군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거나 무기를 내팽개치고 성으로 달아났다.
뗏목 대열에 가해지던 화살 공격은 자연스럽게 뚝 멈췄고 방패를 내린 조선군 병사들은 불바다로 변한 맞은편 강변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잘한다!”
“아주 묵사발을 내 버리라고!”
강 건너에 있는 적이 한 명이라도 더 줄어들면 그만큼 자신들의 생존 확률이 올라가기에 반응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낸 유혁연은 좌우를 둘러본 뒤 큰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 틈에 강을 건너야 한다. 어서 다시 노를 저어라!”
그러자 흥분을 가라앉힌 병사들은 방패 대신 노를 잡고 뗏목을 움직였다.
“영차, 영차!”
팔이 저리고 힘들었지만 무방비 상태로 강물 위에 떠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다들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다.
“거의 다 왔다, 조금 더 힘을 내라!”
뗏목들이 강을 거의 다 건너가자 조선군은 포격을 중단했고, 얼마 뒤 단 한 척도 침몰하거나 하류로 떠내려가는 일 없이 모두 도하에 성공했다.
“하선!”
우렁차게 소리치며 유혁연이 먼저 나서자 병장기를 챙겨 든 병사들이 우르르 따라 내렸다.
맡은 임무대로 후속 병력을 위해 모래사장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놈들!”
요행히 살아남아 달려드는 청군 병사 한 명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찬 유혁연은 뒤로 넘어져 버둥거리는 상대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았다.
푹.
“끄흑.”
그의 숨통을 끊어 놓은 유혁연은 또 다른 적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끔찍할 정도로 훼손된 시신들뿐이었고, 운 좋게 남아 있던 적병 몇몇은 조선군 병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강력한 천자총통 포탄과 파편에 살상당한 시체들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구토가 나오고 입맛이 딱 떨어지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압록강에서 더 처참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 유혁연과 부하들은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시신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선발대가 무사히 교두보를 확보하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하를 지켜보던 지휘부는 크게 고무되었다.
“좋았어, 화포로 계속 지원을 해 주고 빨리 더 많은 병력을 건너보내 교두보를 튼튼히 할 수 있도록 해.”
“예.”
천리경을 눈에서 뗀 도현의 지시에 장수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고, 뗏목들은 쉬지 않고 양쪽을 왕복해 계속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러자 다급해진 청군이 어떻게든 도하를 막아 보려고 몇 차례 더 병사를 내보냈지만,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포탄을 날려 대는 포병대의 화력 지원에 교두보 근처에도 못 가고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다.
그사이 강을 건넌 병력은 점점 늘어났고, 통나무로 목책까지 세워 방어를 단단하게 굳힌 조선군은 밤에도 횃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 도하를 계속했다.
날이 밝으면 건너가라며 장수들이 만류했지만 도현은 고집을 피워 뗏목에 올랐다.
“장관이군.”
뒷짐을 진 채 뱃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도현이 중얼거리자 함께 있던 박영식 장군이 이야기를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하늘에 있던 별들이 땅에 내려와 있는 것 같지 않사옵니까?”
병사들이 피워 놓은 수십 수백 개의 횃불을 별에 비유하자 도현은 작게 감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것 참 멋진 말이군. 박 장군한테 이런 풍류風流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송구스럽사옵니다.”
박영식 장군의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도현은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교두보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예친왕에게 패전 소식이 전해졌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압록강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전초전에 불과할 뿐, 아직 북경에 수십만이 넘는 팔기군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예친왕 이야기를 꺼내자 박영식 장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친왕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잠시 고심을 하던 박영식 장군은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동력이 좋은 기병으로 구성됐다고 해도 최소한의 준비는 갖춰야 될 테니, 빨라도 달포는 걸리지 않겠사옵니까? 거기다 심양이 떨어지는 걸 감안해 공성무기와 보병까지 합류시킨다면 날짜는 더 늘어날 것이옵니다.”
“달포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린 도현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달빛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심양성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황성으로 사용됐던 곳답게 높고 튼튼한 성벽이 이중으로 둘러져 있었고 규모도 커서 십만 병력이 일 년은 너끈히 농성전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북경까지 군대를 몰고 가서 예친왕과 청국 황제의 무릎을 꿇리고 싶었지만, 아직 조선에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심양을 포함한 요동과 남만주 일대를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딱 그 정도가 지금 조선이 탈이 나지 않고 그럭저럭 소화시킬 수 있는 땅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조만간 잔뜩 독기가 올라 달려올 예친왕을 격퇴하는 것이 먼저였는데, 청이 작정을 하고 전력을 다한다면 열세에 놓일 것이 분명했지만 도현은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두 달 정도만 버티면 혹독한 추위가 만주 일대에 몰아친다는 것과, 아무리 청나라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고 해도 지난 몇 년간 계속 이어진 전쟁과 반란 때문에 오랫동안 조선과 싸울 수 있는 체력이 없다는 거였다.
전부 주작단을 통해 확인한 사실로, 현재 청나라의 국고는 텅텅 비어 먼지만 날리는 상태였다.
덩치는 커졌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든 모양새로, 이런 약점이 없었다면 아무리 도현이라도 섣불리 청나라와 싸울 생각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적은 피해로 심양성을 함락시켜야 해.”
“성에 웅크리고 있는 청군이라고 해 봤자 몇천 명이 안 되고, 그나마도 압록강에서 우리 군에 된통 당하고 쫓겨 온 패잔병과 급히 끌어모은 의용군이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지.”
박영식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도현은 기병 전력을 모두 빼내 우회시키는 모험을 해서 앞뒤로 청군을 들이쳐 괴멸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전장을 빠져나간 청군 잔존 병력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심양성을 공략하는 게 어려워졌을 테고, 그럼 도현이 세운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을 것이다.
어느새 맞은편 강바닥에 닿은 뗏목에서 도현 일행이 내리자 유혁연이 다가와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전하.”
“오, 경은 선발대를 이끈 장수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화살 비를 뚫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 정말 용맹스러웠어.”
도현이 친히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자 유혁연은 황공하다는 듯이 상체를 숙였다.
“앞으로도 이번처럼만 하게.”
“예.”
“청군의 동태는 어떠한가?”
“몇 차례 저희를 강변에서 몰아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두 시진 전부터는 꼼짝하지 않고 성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야습을 해 오려고 준비 중일지도 모르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거야.”
“그렇지 않아도 한 개 천인대가 경계를 서고 있사옵니다.”
“잘했어.”
“쉬실 곳을 마련해 놨으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혁연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 그 전에 교두보를 둘러보고 싶으니 안내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를 위해 한쪽에 대형 천막을 쳐 놨지만, 도현은 그리로 가지 않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병사들을 격려하며 도하 작업이 잘 진행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워낙 병력과 장비가 많아 다리 없이 뗏목만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무거운 화포와 물에 젖으면 쓸 수 없는 화약을 옮기는 건 보통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놀라운 끈기와 노력으로 정확히 딱 이틀 만에 모든 병력이 교두보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진하던 조선군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쳤다.
쉬이이이잉!
“뭐, 뭐야?”
“헉, 포격이다. 어서 피해!”
이젠 익숙해진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조선군 병사들은 심양성에서 포탄이 날아오자 기겁을 했다.
쿠쿵! 쿵! 쿵!
“으악.”
“큭.”
“살려 줘!”
밀집대형을 이루고 앞으로 나아가던 조선군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조선군이 쓰는 포탄처럼 파편이 사방으로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큰 쇠공에 불과해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압록강 전투의 승리로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고 설마 청군이 화포로 공격을 해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에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컸다.
“이런!”
도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데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어서 우리도 반격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남두병 장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사정거리 밖이옵니다. 적 화포를 맞추려면 더 접근해야 되는데, 그러면…….”
“젠장!”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반격을 하려면 쏟아지는 포탄 세례를 고스란히 맞으며 화포를 방열해야 되는데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도현은 지금도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나가는 병사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기에 지휘봉을 꽉 움켜쥐며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일단 병사들을 모래사장까지 뒤로 물려.”
“예.”
뿌우우웅! 뿌우우웅!
후퇴를 알리는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자 포격을 당하고 있던 조선군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우왕좌왕하며 스스로 무너진 청군과 달리 대열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천천히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에 성루 위에서 지켜보던 호타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준비해 둔 기병은 쓸 수 없겠군.”
조선군이 혼란에 빠지면 바로 성문 뒤에 대기시켜 둔 기병을 내보내 피해를 키우고 가장 골칫거리인 화포를 망가뜨리려고 했었는데 전혀 빈틈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걸로 조선군이 함부로 성을 공격하지 못할 테니 충분히 효과를 거뒀지 않습니까?”
“그렇지.”
호타이는 압록강에서 있었던 패전을 떠올리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생각지도 못한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부하들을 다 잃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쳐야 했던 치욕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이었다.
“놈들만 화포를 쓸 줄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이걸로 똑똑히 깨달았을 거야. 조선 국왕이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심히 궁금해지는군.”
그렇게 말하며 호타이는 성루 위에 부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조선군이 후퇴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호타이가 복수의 쾌감에 젖어 있을 때, 커다란 지휘 천막에 모인 조선군 장수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쉽게 거머쥘 수 있을 줄 알았던 승리가 모래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버렸으니, 차마 도현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아 아까부터 계속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현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피해가 얼마나 되지?”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두병 장군이 대답했다.
“백삼십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끄으응.”
청군이 쏜 포탄의 위력이 크지 않고 신속하게 물러선 덕분에 피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상대 또한 화포를 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조선군에 상당한 충격을 줬고 천막 안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 표정을 푼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니고 그냥 공격 시도가 한번 좌절됐을 뿐인데 다들 왜 이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어? 그리고 청에 화포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
“그것보다 내가 듣기로 홍이포紅夷炮의 사정거리는 칠백 보 남짓이라고 했는데, 그게 틀린 거야?”
“칠백 보가 맞사옵니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된 거야?”
도현의 물음에 천막 한쪽에 앉아 있던 포병대 지휘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병기창에서 개량한 천자총통이 이십 보 정도 사거리가 더 나와야 되지만, 적이 높은 성벽 위에다가 화포를 거치시키고 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사옵니다.”
“그런 변수가 있었군.”
성벽 높이만큼 청군이 쏘는 홍이포의 사거리가 길어진 것이다.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러면 화포 지원을 받기 어려워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도 심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예친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라오기 전에 성을 장악하고 방어 준비를 끝내야 하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진 것이었다.
“성에 있는 홍이포가 많아 봤자 서른 문이 안 넘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하고 공격을 하는 건 어떻사옵니까?”
남병두 장군의 의견에 장수들 상당수가 동조했다.
“피해는 있겠지만 상대가 방어를 더 단단히 하기 전에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가장 신임하는 측근 중 한 명인 박영식까지 남병두 장군의 말에 찬성하자 도현도 그쪽으로 마음이 살짝 기울어졌다.
병사들이 희생되는 건 안타까웠지만, 현실적으로 머뭇거릴 여유가 조선군에게는 없었다.
총공격으로 결심을 굳히려는 순간 말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고만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지략이 아주 뛰어난 고만정이었기에, 시선을 준 도현은 약간 기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우선 저도 심양성을 빨리 함락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만간 예친왕이 끌고 올 청군과 벌일 일전을 생각한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왼편에 있던 남병두 장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살짝 짜증을 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우리도 병사들한테 쏟아지는 포탄을 맨몸으로 뚫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싫지만, 적이 쏴 대는 홍이포를 박살 낼 방법이 없잖은가.”
“아니, 있습니다.”
“지금, 심양성에 있는 홍이포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했나?”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고개를 바로 한 고만정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자세히 설명해 봐.”
“가장 큰 문제는 성벽 위에 올려진 홍이포가 아군이 보유한 화포보다 사정거리가 길다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럼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이 더 멀리서 쏠 수 있는 무기를 동원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옵니다.”
“천자총통이 제일 멀리 날아가는데 그것을 가지고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나?”
실망한 표정을 지은 남병두 장군이 질책하듯 고만정을 나무라는 것과 달리, 도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쪽 손으로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탁!
“그렇군,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어!”
“……?”
갑작스러운 도현의 행동에 고만정을 뺀 나머지 장수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현은 어느새 수심이 싹 다 사라진 표정을 하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화포뿐만이 아니라 우리한테는 신기전도 있잖아. 아마 사거리가 천 보가 넘지?”
도현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말하자 시선을 받은 포병대 지휘관은 눈을 반짝이고는 약간 흥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확히 천이백 보이옵니다. 새로 개량한 공중폭발형을 쓴다면 청군 포대를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천자총통을 전진시켜 성문을 깨뜨린다면 심양성은 손쉽게 함락될 것이옵니다.”
고만정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덧붙이자 그제야 남병두와 장수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 참, 해결책을 바로 옆에 두고 생각해 내지 못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보다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도현이 말했다.
“화포는 화포로 상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군. 아무튼 좋은 계책이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현재 보유한 화약 재고가 얼마나 되지?”
그러자 보급을 맡은 장수가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압록강 전투에서 소모가 많았지만 아직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또 보름 뒤에는 보급대가 도착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조선군은 화약 무기가 주력인 만큼 화약 재고 관리가 가장 중요해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눈엣가시 같은 홍이포를 제거할 방법을 찾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도현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신기전을 써서 적 포대를 박살 낸 다음 총공격을 퍼붓도록 하지. 모레 아침은 심양성 황궁에서 맞았으면 좋겠군.”
도현의 말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될 것이옵니다, 전하.”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얀 쌀밥을 지어 병사들을 든든하게 먹인 조선군은 정오가 되기 전에 다시 공격대형을 갖추고 성문 앞에 늘어섰다.
“조선 놈들이 또 공격을 해 오려고 한다고?”
도독부에 있던 호타이가 수상한 낌새에 연락을 받고 황급히 문루 계단을 뛰어 올라오자 부르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예, 저길 보십시오.”
성 밖으로 고개를 돌린 호타이는 새까맣게 늘어서 있는 조선군을 확인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징글징글한 것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하지요?”
“가까이 다가오면 어제처럼 홍이포를 쏴서 쫓아내 버려!”
“풍기는 기세로 봐서는 작정하고 덤벼들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 죽여 주면 돼. 성벽이 있는 이상 우리가 유리해.”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부르칸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 손으로 여장藜杖을 짚고 서서 조선군을 바라보던 호타이는 어깨에 입은 총상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준비가 다 끝났사옵니다.”
병사들과 함께 직접 말을 타고 성문 앞에 선 도현은 군관의 보고에 잠시 심양성을 쳐다보다가 힘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격하라!”
“옛!”
크게 복명한 군관은 가지고 있던 활에 효시를 끼워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삐이이익!
귀청을 때리는 경적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젯밤 홍이포가 쏘아진 곳을 향해 미리 각도와 방향을 맞춰 둔 화차 여섯 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발사됐다.
쉭쉭! 쉬쉬쉭! 쉭쉭!
화차 하나당 백 개에 달하는 신기전이 장전됐는데,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차례대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와아아!”
모두 육백 개나 되는 신기전이 길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는데, 어제 있었던 전투로 약간 의기소침해 있던 조선군은 그걸 보며 사기가 올랐다.
반면 이미 압록강에서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청군은 기겁을 하며 허둥지둥 숨을 곳부터 찾았다.
“헉!”
“귀, 귀신 화살이다.”
“피해!”
일반 화살의 세 배나 되는 크기에 섬뜩한 소리를 내며 상상도 못 할 거리를 날아오는 신기전을 언제부터인가 청군 병사들은 귀신 화살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신기전의 위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의용군들은 정규군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허둥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기전이 공중에서 폭음과 함께 터지며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비를 뿌렸다.
꽝! 꽝! 꽝!
투투툭! 투툭! 툭!
“으악!”
“컥.”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간신히 파편을 막아 낸 병사들도 있었지만, 태반이 우왕좌왕하다 비명을 내지르고 피를 뿌리며 나자빠졌다.
특히 공격이 집중된 홍이포 포대에 있던 포수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찢겨 나갔다.
단단한 무쇠로 만들어진 홍이포는 포신에 살짝 흠집만 생겼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포를 쏠 포수들이 다 죽임을 당했기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천리경으로 홍이포 포대가 전멸했음을 확인한 도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손에 든 지휘봉을 위로 치켜들고 크게 외쳤다.
“공격! 성을 함락시켜라!”
그러자 천인대별로 모여 있던 보병들이 대열을 갖춰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조선군 병사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이윽고 바퀴가 달린 포가에 올려진 천자총통 한 문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든 병사 이십여 명에게 둘러싸여 나왔다.
화포를 쏴서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깨려는 것이다.
문루에 있던 호타이는 그것을 바로 눈치채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적이 화포를 쏘지 못하게 막아라!”
수적으로도 불리한데 성문까지 열리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포수들이 다 당했습니다.”
부르칸의 말에 호타이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악을 썼다.
“다른 병사들을 시켜서 쏘면 되잖아!”
“하지만 화포를 다룰 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야? 성문이 뚫리기 전에 어떻게든 포를 쏴!”
“……예.”
무리한 지시였지만 호타이의 말처럼 지금은 비상 상황이었기에 부르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호타이의 독려에 포대로 올라간 병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그대로 놔둔 채 홍이포를 쏘려고 애를 썼지만, 역시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포신 안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쏴야 하는 것을 모르고 그냥 심지에 불을 붙였다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나마 운 좋게 발사를 해도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아 포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박혔다.
그러는 사이 성문을 유효 사정거리 안에 넣은 천자총통은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무릅쓰고 방열을 서둘렀다.
방패병들이 앞에 서서 성벽 위에서 쏴 대는 화살을 든든하게 막아 주고 있었지만, 빗물이 처마 지붕을 때리는 것처럼 화살이 방패에 박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지만 포수들은 겁을 먹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침착하게 고각을 조정해 정문에 보이는 덕성문을 겨냥했다.
“장전해!”
소매를 걷어붙인 포술장이 고함을 지르자 포수들이 얼른 탄약상자를 열어 포탄과 장약을 꺼내, 헝겊을 감아 놓은 막대기로 포신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바로 장약과 공 모양의 포탄을 밀어 넣었다.
“장전 끝!”
마지막으로 조준이 제대로 됐는지를 확인한 화포장은 직접 심지에 불을 댕기면서 외쳤다.
“발사!”
꽝!
슈우우우웅!
뿌연 화약 연기를 뿜어내며 발사된 포탄은 첫 탄임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으로 날아가 성문을 정확히 맞췄다.
쿠쿵!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덕성문 전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크윽.”
문루에 서 있던 호타이는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자빠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얼른 다가와 부축하는 부르칸을 보며 호타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성문은 어떻게 됐어?”
“그것이…….”
부르칸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고, 호타이는 여장 쪽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완전히 박살 나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본 호타이는 절망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안 돼.”
높고 단단한 성벽을 의지하고 버틴다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심양을 지켜 낼 수 있을 거라 한 가닥 희망을 품었는데 이제 다 틀려 버렸다.
“도독, 예비대를 보내 성문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이백여 명에 불과한 예비대로 뭘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그냥 있을 수도 없었기에 호타이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충격에 휩싸인 청군과 달리 뿌연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드러난 성문을 본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됐어! 전군 돌격, 단번에 성을 함락시켜라!”
도현의 명령에 호종 군관이 깃발을 흔들어 수기 신호를 보내자 천천히 전진하던 조선군은 함성과 함께 창을 앞으로 곧추세우고는 일제히 심양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가자!”
“막아라! 조선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살을 쏴라!”
슈슉! 슉! 슉!
“아악.”
“윽!”
성벽 위에서 쏴 대는 청군의 화살에 일부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지만 조선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조선군 선두는 부서진 성문 앞까지 육박해 들어갔고, 무기를 빼 든 채 통로를 막고 있던 일단의 청군 병사들과 부딪쳤다.
“한 발도 물러서지 마라!”
“다 죽여!”
채챙! 챙! 챙!
슈각.
“커억.”
“어머니!”
좁은 성문 통로는 순식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으로 변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양쪽은 악에 받친 눈빛으로 무기를 휘둘렀고 사방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성문이 뚫리면 끝장이었기에 청군은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뒤로 밀려났다.
“계속 밀어붙여!”
유혁연은 장검을 휘두르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고, 그의 독려에 부하들은 더욱 힘을 내 적에게 덤벼들었다.
“다 쓸어버려라!”
다시 한 번 크게 고함을 지른 유혁연은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앞에서 도끼를 들고 그를 내려치려던 적병이 가슴에 검을 맞고는 시뻘건 피를 뿌리며 뒤로 자빠졌다.
서걱.
“꾸엑.”
솟구친 피가 갑옷과 얼굴을 적셨지만 유혁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적병을 찾아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병장기가 부딪쳐 불꽃이 튀고 거친 숨소리와 함성이 뒤섞여 들리며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가운데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혁연과 부하들은 적군의 방해를 이겨 내고 성문을 통과했다.
일단 길이 열리자 그곳을 통해 조선군 병사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청군은 커다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청군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두세 명씩 한꺼번에 덤벼드는 조선군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나가는 청군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전세는 조선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성문이 뚫렸습니다. 이제 성이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우리가 이겼사옵니다.”
시커먼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덕성문을 보며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들뜬 얼굴로 말하자 도현도 마음이 벅차오르고 흥분됐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아직 전투가 다 끝나지 않았어. 후속 병력을 투입해서 청군을 완전히 제압하도록 해.”
“옛.”
잠시 후 도현의 명령대로 예비대가 움직여 공격에 가담하자, 청군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급기야 전의가 꺾이고 지휘 체계마저 상실한 청군은 뿔뿔이 흩어진 채 민가로 숨어들거나 다른 성문을 통해 달아났다.
도망치려던 적은 미리 포위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기병들이 모조리 다 잡아들였고, 성안에 숨은 놈들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소탕되었다.
그리고 도현이 오래전부터 소원하던 대로 덕성문 문루 위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인 봉황 깃발이 내걸려 바람에 휘날렸다.
이걸로 청나라의 모체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머물던 황궁이 위치한 심양성이 조선군에 함락되었다.
쩔그럭, 탁. 쩔그럭, 탁.
도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걸친 비늘 갑옷에서 차가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심양 황궁의 대리석 복도를 걸으며 숭정전으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형님인 소현세자가 살아 있었을 무렵엔 멀리서 심양 황궁의 그림자를 보기만 해도 거대한 무엇이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며 차가운 땀이 등골을 따라 흐르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전쟁의 승자로서 당당하게 안을 누비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할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감정을 품에 안고 도현은 활짝 열린 숭정전 문 앞에 섰다.
대전은 무척이나 크고 넓었으며, 바닥은 반들반들하니 흠 하나 없는 대리석으로 깔려 있고, 정면엔 황제가 앉는 금색 옥좌가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옥좌 양옆에는 황제를 수호하듯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생생한 두 마리 용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붉은 기둥을 사이에 두고 화려하게 치장된 향로가 그 아래 각각 한 개씩 쌍을 이루고 있었다.
도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단상에 올랐다.
사치스러움이 지나쳐 부담스럽기까지 한 옥좌를 힐끗 쳐다본 도현은 그 앞에 서서 등받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진짜 해낼 수 있을까, 행여나 잘못된 선택은 아닐까 번뇌와 고민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운 끝에 드디어 고지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종착점이 아니라 중간 기점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도현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도현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요란한 기척과 함께 심양성 도독인 호타이가 숭정전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큭!”
듬직한 체구의 두 병사에게 붙잡혀 끌려온 호타이는 완전히 패배가 확정된 지금도 반항을 멈추지 않으며 악을 썼다.
하지만 병사들이 무릎 뒤쪽을 쳐 억지로 바닥에 꿇리자 분노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도현을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네 이놈……!”
호타이는 지난 압록강 전투에서 입은 어깨 부상 외에도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머리는 완전히 봉두난발이 되어 있고 신발은 너덜너덜했으며 갑옷은 그야말로 넝마라도 주워 입은 양 누더기가 따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그가 포로로 잡힌 뒤에도 끊임없이 틈을 봐 도망치려 하면서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호타이는 처음엔 여기가 어딘지 의문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심양 황궁의 최중심부인 숭정전인 것을 깨닫고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양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의 수도였던 곳이다.
비록 지금은 수도가 북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황궁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상징성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도독인 호타이조차 이곳을 드나드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성지와도 같은 곳을 적에게 침범당했으니, 그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로군.”
그와는 과거 심양 관저에 살던 시절 잠시 안면 정도는 있던 사이다.
도현이 말을 걸자 호타이는 대번에 노성을 터트렸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지난날 황제 폐하와 섭정왕께서 네게 얼마나 은덕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검은 머리 짐승이라는 건 바로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난 한 번도 청나라에 은혜 같은 걸 받은 적이 없는데,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한 나라의, 그것도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세자와 왕자를 자기네 나라에 억류해 두고 양팔 양다리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어 감시하는 것도 은혜라면 이 세상에 지옥에 떨어질 악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 은혜를 받은 것이 없다? 조선은 우리 청을 사대하는 속국이었거늘, 어찌 감히 얻은 것이 없다고 입을 나불거리느냐! 게다가 네놈이 심양에 있던 시절 거처하던 관저는 물론이거니와 입에 들어간 음식 모두 우리 청의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더냐? 주인을 향해 송곳니를 들이대는 어리석은 짐승 주제에 감히 어디서 입을 놀리는 게야!”
“말은 바로 해야지, 대체 언제부터 조선이 청을 섬겼단 말이냐.”
호타이의 끊임없는 도발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침착한 표정을 흩트리지 않자 바짝 약이 오른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려 저주를 퍼부었다.
“두고 봐라, 반드시 섭정께서 네놈을 처벌하러 행차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조선 땅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야!”
“과연 그럴까?”
도현이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 청나라 황제나 예친왕이 직접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나를 상대하러 온다면, 그야 당연히 맞이하러 가 드려야지. 그리고 이 손으로 그의 목을 베는 모습을 특등석에서 구경할 수 있게 해 주마.”
도현의 마지막 말은 절로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이노오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호타이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었다.
온몸이 두꺼운 동아줄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이 깨지든 말든 상관없이 단상 위의 도현을 향해 기어오르려 하는 그의 모습에서 증오에 가까운 집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위에서 병사들이 호타이를 찍어 눌렀고 그는 끝끝내 단상에 다다르지 못했다.
“이것 놓아라! 내 직접 저놈의 사지를 찢어 놓고 말 테다!”
“입 닥쳐!”
퍽!
아무리 해도 반항을 그치지 않는 호타이를 제압하기 위해 병사 중 한 명이 그를 한쪽 팔로 단단히 붙잡은 후 뒤통수를 눌러 바닥에 쿵 찧었다.
“으으윽……!”
이마가 깨져 피가 주르륵 흐르는 와중에도 그는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도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모든 소동을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다루도록 해라. 나중에 긴히 쓰일 데가 있을 테니.”
“예!”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한두 군데 정도는 부러뜨려도 괜찮았다.
그럼 적어도 더 이상 병사들이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
도현은 손을 내저어 그를 끌고 가도록 했다.
호타이가 떠난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 배어 있는 것을 본 도현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곧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등을 홱 돌렸다.
털썩.
오로지 황제에게만 허락된 옥좌에 앉아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다리를 꼰 도현은 엉덩이로 전해지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2차 심양 전투 1
며칠 간격으로 압록강 전투 패배와 심양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 자금성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예친왕의 분노가 극에 달했는데, 그는 보고를 들었던 왕부 서재 집기를 다 부수어 놓았다.
당장 대전 회의가 소집됐고 연락을 받은 신료들은 속속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하얀 대리석 축대 위에 일흔두 개에 달하는 나무 기둥과 황금빛 기와로 만들어진 이중 처마가 올라 있는 태화전太和殿은 자금성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로, 황제가 신료들을 접견하고 회의를 하는 정전이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 조각이 새겨진 여섯 개의 나무 기둥 안에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옥좌가 있었고, 그 밑으로 수십 명의 대소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서 넓은 태화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많은 수의 인원이 실내에 모여 있었지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옥좌에 앉아 있는 어린 황제마저 숨을 죽이고 단 바로 아래에 서 있는 예친왕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다른 신료들과 구분되게 화려한 복식을 갖춘 예친왕은 눈에 핏발이 선 채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새벽까지 독한 화주를 들이켰기에 술 냄새까지 약간 풍겼다.
혼자서 열 병이 넘는 술을 비웠지만, 예친왕은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신이 또렷해졌다.
천천히 모여 있는 신료들의 얼굴을 훑어보던 예친왕은 병부상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보고하게.”
명목상 군부 총책임자인 병부상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이야기했다.
승전 보고였다면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겠지만, 청제국의 역사에 대대로 기록될 만큼 큰 패배이자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병부상서의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어젯밤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심양성이 조선군에 함락됐고, 도독부 소속 병력과 지원군 십만이 모두 괴멸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요동과 남만주 일대가 조선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고…….”
보고가 이어질수록 태화전에 모인 신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많은 병력과 넓은 영토를 잃은 것도 뼈아팠지만, 무엇보다 신료들을 허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제국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성이 함락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누르하치가 청을 건국한 이후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조선한테 일격을 당한 것이었기에 더 허탈하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눈을 치켜뜬 예친왕은 병부상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뜩 날이 선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다른 주변국들까지 우릴 우습게 볼 것이오!”
황제가 있었지만 마치 자신이 태화전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친왕은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망가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당장 팔기군 전체에 동원령을 내려, 감히 겁도 없이 우리한테 칼을 들이민 조선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고 은혜도 모르는 조선 국왕을 끌고 와 참수하기를 건의하는 바이오!”
먼저 대군을 일으켜 국경을 넘어가려고 했던 건 청나라였지만, 예친왕과 태화전에 모인 신료들은 그딴 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원으로 제국의 중심을 옮겨 왔다고 해도 예친왕을 포함한 만주족 대부분이 자신들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만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에, 군대를 일으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예친왕을 추종하는 무장과 문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병에 찬성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조선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찬동하는 말들이 쏟아졌고, 금방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졌다.
그때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와 칙령을 총괄하는 통정사通政司의 책임자인 이제갑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지금 팔기군을 동원하는 건 무리입니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감히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나오자 예친왕은 와락 인상을 쓰며 이제갑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뭐야?”
한겨울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실내가 차갑게 얼어붙고 신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통정사 이제갑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인데 여기서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원정을 나서는 건 무리입니다.”
이제갑은 명나라 출신으로 청나라에 귀의한 이신이자 예친왕과 대립각을 세우는 태후의 측근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예친왕의 전횡에 불안감을 느낀 태후는 조정 내에서 소외된 이신 세력과 손을 잡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며 상대를 견제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북경 함락 이후 야심차게 추진한 강남 정벌이 무산되고 각지에서 벌어지는 반란과 여러 가지 실책 등이 쌓이면서 예친왕의 권위가 조금씩 손상되자 반대로 그만큼 태후의 발언권이 커졌다.
가장 결정적인 건 조정 신료들을 폭넓게 끌어안지 못하고 만주족 출신, 그중에서도 자신의 측근들만 챙기는 예친왕의 행태가 다른 상당수 관리들에게 소외감을 줬고 자연스럽게 태후를 중심으로 뭉치도록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평소에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제갑이 반대를 하고 나서자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그럼 이대로 심양과 만주를 포기하자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단지 사정이 어려우니 팔기군 전체를 소집하는 건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예친왕이 화를 내자 이제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섭정께서는 팔기군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재화가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
“이번에 심양 도독부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 오만을 보내는 데 은자 십만 냥이 들어갔습니다. 적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조선까지 점령하려면 그보다 몇 곱절은 많은 병력이 필요할 텐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하라는 겁니까? 병장기부터 먹고 자는 것까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지금 날 가르치려는 건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변한 예친왕은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네놈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황제를 호위하는 무장 외에는 그 누구도 황궁에서 병장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섭정인 예친왕은 당당히 관복에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것만 봐도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를 것처럼 예친왕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이제갑은 그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건방지게 말을 늘어놓더니 이제야 무서운가 보군. 어디 더 입을 나불거려 보시지.”
그때 태화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비단옷에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태후가 안으로 들어와 칼을 들고 서 있는 예친왕을 보며 소리를 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껄끄러운 인물의 등장에 예친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은 중요한 국사를 논하는 자리이니 태후께서는 나가 주시지요.”
황제의 친어머니로 명목상 황실 최고 어른이었기에, 짜증이 났지만 예친왕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말했다.
하지만 태후는 오늘 아주 작정을 하고 왔는지 날이 선 목소리로 예친왕을 공격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습니까? 그리고 섭정이야말로 황상께서 계신 자리에서 칼을 뽑다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나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태후가 쏘아붙이는 말에 예친왕은 한쪽 뺨을 실룩이다가 이내 손에 든 칼을 집어넣은 뒤, 두려운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돌아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죄를 했다.
“소신이 무지하여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흥분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숙부.”
예친왕의 기에 눌린 어린 황제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더듬더듬 이야기하자 태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쯧.”
무례를 용서(?)받은 예친왕은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시선으로 태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논의해야 될 국사가 많으니 다른 볼일이 없으면 태후께서는 이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예친왕이 대놓고 축객령을 내렸지만, 예전과 달리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며 힘이 생긴 태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듣자하니 예친왕께서 밀어붙인 조선 정벌이 실패하고 심양성까지 함락당했다던데,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의도적으로 태후가 그의 이름을 강조하며 말하자 예친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징계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거예요.”
“…….”
얼핏 듣기에는 타당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군부를 장악하고 조선 정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곳이 바로 섭정왕부라는 걸 생각하면 결국 예친왕 일파의 실책을 부각시키고 세력을 꺾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이런 얄팍한 술수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예친왕은 이를 갈면서 태후를 노려보았다.
“그건 차후에 사태를 다 수습하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고로 제국을 잘 이끌어 나가려면 상벌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친왕께서도 반란을 제대로 막지 못한 죄로 전 직례 안찰사를 극형에 처한 것이 아닙니까?”
태후가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거침없이 꺼내며 핍박하자, 예친왕은 화가 나면서도 곤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다른 때 같으면 그가 가진 막강한 권력으로 대충 뭉개 버렸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거기다 태후까지 지적을 하고 나서니 더더욱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런 예친왕을 보며 내심 조소를 머금은 태후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내가 밖에서 들으니 이 통정사의 의견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더군요. 병부에서 계속 무리한 전쟁을 추진하는 바람에 국고가 텅텅 빈 데다가 비록 화북에서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명나라가 남쪽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 아국을 노리고 있는데 팔기군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건 안 될 말입니다.”
“태후께서 병략에 훈수를 두는 건 월권이십니다.”
“너무 답답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십만이면 조선을 정벌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시더니, 이제 팔기군을 모두 끌고 가지 않으면 이길 자신이 없어진 겁니까?”
태후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예친왕은 이마에 핏발을 세웠다.
“뭐요!”
“자꾸 총동원령을 고집하시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익.”
자존심을 건드리자 흥분한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고는 화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좋소, 백기단과 왕부 직속 병력만으로 심양을 되찾고 조선 국왕을 잡아 오겠소.”
“서, 섭정 전하.”
“헉!”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설전을 듣고 있던 신료들은 예친왕의 폭탄 발언에 화들짝 놀랐다.
특히 야골타와 용골대 등 예친왕 일파에 속하는 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당혹스러워했다.
반면 예친왕을 자극해 원하는 상황을 이끌어 낸 태후는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태후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료들한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고, 더불어 예친왕에게 조선과 벌일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물론 예친왕이 전쟁에 승리한다면 오늘 한 행동이 오히려 전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태후 쪽이 얻는 게 더 많았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총동원령을 내리는 대신 백기단을 비롯한 팔기군 일부와 섭정왕부의 통솔을 받는 병력만을 일으켜 조선을 치기로 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갈등을 벌이던 예친왕과 태후가 서로 완전히 등을 돌리며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지금까지 허수아비 황제를 앞에 두고 뒤에서 예친왕이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것이 기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내부적으로 엄청난 불안과 갈등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런 가운데 심양을 함락한 도현은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고 곧 있을 청군의 반격에 대비해 방어 시설을 확충하는 데 모든 심력을 쏟고 있었다.
“주상 전하를 뵙사옵니다.”
심양성 전투에서 제일 먼저 적군을 물리치고 성안에 들어간 공을 인정받아 정오품 사직으로 승차한 유혁연은 시찰 나온 도현을 보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옹성은 이제 마무리 중이고 포루도 보름 안에 모두 완성될 것이옵니다.”
옹성甕城은 예전부터 만들었던 성곽 방어 시설로, 공격에 취약한 성문 밖에 성벽을 하나 더 둘러서 방어력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화포를 쏴서 단번에 성문을 깨고 승리를 거둔 도현은 적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심양성에 있는 성문마다 높다란 옹성을 쌓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군의 장점인 화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성벽 곳곳에 포루砲樓를 만들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는 치성과 비슷한 모양의 포루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지붕을 위에 납작하게 세우고, 몸을 숨긴 채 화포를 정면과 위아래로 쏠 수 있는 구멍을 군데군데 뚫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포루만 긴 성곽을 따라 무려 서른 개나 만들어지고 있었고, 이것 외에도 해자를 넓히고 기병 방어용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도현은 심양을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철옹성으로 바꿔 나갔다.
공사 규모도 상당히 크고 주어진 시간도 짧았기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는데, 도현은 포로가 된 청군 병사들을 투입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
천천히 작업 현장을 둘러본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상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군.”
“심양성에 있던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사를 도와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 전 보고를 받았던 도현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청나라에 노예로 잡혀 있으면서 고초가 심했을 텐데 이렇게 솔선수범해서 짐을 돕다니 정말 갸륵한 일이군.”
그러자 동행한 남두병 장군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 그렇사옵니다. 성내 치안도 이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리 빨리 질서를 세우기 어려웠을 겁니다.”
천도와 함께 북경으로 옮겨 가고 그동안 도현이 봉황상단을 통해 꾸준히 노예들을 사들여 자유를 줬지만, 그래도 병자호란 때 잡혀 온 숫자가 워낙 많아 심양을 함락했을 때 남아 있는 조선인이 무려 이만 명이 넘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아픈 역사이자 현실이었지만 도현이 북벌을 단행하자 이들이 낯선 땅에 원정을 와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조선군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더 빨리 구하러 오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또다시 빚을 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두들 한평생을 노예로 살아갈 뻔했는데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전하께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맞사옵니다.”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유혁연의 말에 모두들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된 자로서 백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보다, 청군 포로들은 그렇다 쳐도 공사를 돕는 우리 조선 사람에겐 곡식이든 뭐든 합당한 대가를 주도록 하게. 지금까지 험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니 아무리 자발적인 협조라 해도 공짜로 부려 먹는 건 안 될 일이야.”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도현의 명을 받은 유혁연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장수들과 함께 한창 보강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성벽을 따라 걷던 도현은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돌을 날라 돌무더기를 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틀어 올린 상투에선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삐죽 튀어나와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고, 본래는 희었을 의복도 지금은 흙먼지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은커녕 오히려 약간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도현이 일단 멈춰 서자 그 뒤를 따르던 장수들도 주위를 둘러싼 채로 무슨 일인가 싶어 서 있는데,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조선인 중 한 사람이 일행을 발견하곤 경악한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주, 주상 전하를 뵈옵니다!”
사내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내 상황을 깨달았다.
“전하시래.”
“뭐야?”
“아니, 어떻게 이런 험한 곳까지…….”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던 것도 잠시,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도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크고 작은 소음이 가득했던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한 침묵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하긴 여기 있는 자들 대부분이 다 양민 아니면 천민일 텐데, 감히 도현의 용안을 뵙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국왕의 가마가 행차라도 하려 치면 기나긴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고, 행여나 호기심으로라도 고개를 들어 올리는 행위는 무엄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죄인 취급을 받았으니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너희들이 해 주는 일에 대해 벌써 다 들었느니라.”
도현은 흙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자발적으로 나서서 공사를 거들어 주다니, 너희들의 심성이 참으로 갸륵하고 대견하다.”
“저, 전하……!”
그 간의 고생을 다 녹여 버리듯,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와 어루만져 주는 도현의 말투에 어느새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옵니다, 전하. 저희가 어찌 전하의 칭찬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먼 길을 달려와 구해 주셨는데 평생 목숨을 바쳐 섬겨도 모자랍지요.”
“이토록 큰 전하의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저희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에 도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곧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띄고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 다시는 그대들처럼 힘이 없어 고통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흑흑…… 전하.”
잠시 빚어진 소란을 뒤로하고 나머지 공사 현장도 천천히 둘러본 도현은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심양 황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휴우, 어째 적군과 싸우는 것보다 그 뒤처리가 더 힘든 것 같구나.”
“공사 진척 상황이 맘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얼굴은 밝은 표정인 것을 금세 눈치 챈 칠현이 차를 건네며 그리 말하자, 도현은 살짝 목을 축이곤 답했다.
“음, 생각보다 빨리 일이 끝날 것 같아.”
“그거 참 다행입니다.”
청 황제, 정확히 말하자면 섭정왕이 조만간 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했기에 방어 시설을 보강하는 일은 빨리 마무리할수록 좋았다.
흔히 그를 가리켜 친조카를 꼭두각시처럼 휘두르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내라고 하지만, 도현이 보기에 섭정왕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데 탁월할 뿐 사실은 누구보다 성정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특히 자기 것이라 생각되면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 야욕과 원대한 야망을 가진 사내가, 어찌 보면 현재 수도인 북경보다 더한 상징성을 가진 심양을 조선군의 손에 내주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 답답한 마음으로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는데 칠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오늘은 전하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그러자 칠현은 히죽 웃어 보이고는 곱게 접은 서찰을 내밀었다.
“오늘 도착한 보급대가 가져온 것입니다. 중전 마마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며 맡긴 것이라 평소보다 더 빨리 길을 재촉해 왔다더군요.”
“중전이?”
혹시 대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도현은 서둘러 서찰의 봉인을 뜯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아이들 중 누군가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기라도 한다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서둘러 서찰을 펼친 도현은 이내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중전 마마께서 뭐라 하십니까?”
칠현도 서찰의 내용이 내심 궁금했는지 편하게 풀어진 도현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대궐은 아무 일 없이 평온하다는군. 연이와 공주들도 어디 다치거나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단다.”
서찰은 중전의 성격만큼이나 정갈하고 가냘픈 필체로 요즘 근황을 전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원에 꽃이 피었다는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연이 여전히 승마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 공주들은 하루가 다르게 어여쁜 아가씨가 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 상상만 해도 절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일들이 담담하게 이어졌고 마지막은 도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났다.
도현의 승전보가 대궐에 당도하였을 때는 모두가 기쁜 얼굴로 감격스러워했고, 특히 효심이 깊은 숙안 공주가 눈물까지 흘렸다는 이야기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이고 되새기듯 중전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은 도현은 곧 칠현을 불러 말했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중전에게 답장을 써야겠다.”
“네, 전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칠현이 금방 붓과 종이 그리고 먹을 준비했다.
칠현이 옆에서 먹을 가는 동안 도현은 붓을 들고 고심했다.
“왜 그러십니까?”
“음…… 뭐라고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말이야.”
백지를 눈앞에 두니 뭐부터 적어야 할지 막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일이 있으시군요.”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하여튼 고놈의 주둥이는.”
“아야야야.”
손을 뻗어 칠현의 입을 살짝 꼬집은 도현은 다시 제대로 붓을 잡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칠현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어깨에 힘이 빠졌는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칠현이 정성껏 간 먹물을 붓 끝에 적셔 종이에 점 하나를 찍는 순간 도현은 언제 고민했냐는 듯 일필휘지로 긴 답장을 써 내려갔다.
오늘 중전이 보낸 서신을 읽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삭막한 전장에서 들은 중전과 아이들의 소식은 내게 큰 힘이 되었소. 그대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라오. 어린 나이에 먼 타국까지 따라와 고생을 했는데 지금도 대궐과 아이들을 다 맡기고 이렇게 홀로 나와 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구려. 하지만 중전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내 마음이 든든하다오. 이렇게 중전을 생각하며 글을 적으니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와 앵두보다 더 붉고 탐스러운 그대의 입술이 너무나도 그립구려. 사랑하오, 중전. 이 세상에 그대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갈 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으시오.
편지를 다 적은 도현은 직접 여러 번 접어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한 뒤 시립해 있는 칠현에게 건네주었다.
“내일 떠나는 파발이 있지?”
“예.”
“거기에 함께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편지를 받아 든 칠현이 묘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책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뭐, 할 이야기라도 있어?”
“그냥, 전하를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아서요.”
“뭔 말이야?”
“다른 분들은 후궁도 많이 두시고 그러시는데 전하께서는 중전 마마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몇 해가 지나도 한결같으시니 말입니다.”
“부러우면 너도 장가를 가든가.”
“너무하십니다.”
칠현이 울상을 짓자 도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이야.”
“툭하면 놀리시고…….”
“삐쳤어?”
“아닙니다.”
칠현은 새치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이, 삐친 것 맞네.”
“아니라니까요.”
“어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끄으응.”
도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신음하는 칠현을 웃으며 달랬다.
“자, 자, 그만하고 표정 풀어.”
“……예.”
하루하루를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도현에게 지금처럼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친구인 칠현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투덕거리는 시간은 몇 안 되는 해방구 중 하나였다.
한편 왕부에 모인 예친왕의 측근들은 태화전에서 태후가 보인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다.
“아무리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만, 누구 덕분에 황실 최고 어른 자리를 차지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이건 섭정에 대한 도전입니다.”
야골타를 비롯한 측근들이 언성을 높이면서 태후를 비난하는 것과 달리, 상석에 앉은 예친왕은 무슨 생각인지 담담한 얼굴로 앞에 놓인 마유주만 마셨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처럼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굳은 용골대가 예친왕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왕부 병력만 가지고 심양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사내가 한번 말을 꺼냈으면 지켜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부담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려 섞인 용골대의 말에 예친왕은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
“내가 조선군 따위를 이기지 못할 것 같나?”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전장을 호령하는 청나라의 이름난 맹장이었지만 예친왕이 분노를 드러내자 용골대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덩달아 실내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고 다른 측근들도 마른침만 꿀꺽 삼키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멍청한 호타이 때문에 치욕을 당했지만, 조선군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어. 이제 좀 살 만해 지니까 태후가 자꾸 딴생각이 들고 내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인데, 마음껏 까불라고 해. 조선 정벌을 끝내고 돌아와서 주제도 모르고 건방 떤 것들을 모조리 다 쓸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크게 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살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예친왕의 말에 측근들은 담담한 척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깨닫고, 조만간 자금성에 거센 피바람이 불 것을 직감했다.
“용골대.”
“예, 전하.”
“자네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북경에 남아 있도록 하게.”
뜻밖의 지시에 용골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태후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견제해 줄 사람이 필요해. 자네가 그 역할을 맡아 줘야겠어.”
타고난 무장인 용골대는 전쟁에서 빠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북경을 지키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기에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만약 태후 쪽이 수상한 짓을 벌이면 그때는 가차 없이 먼저 행동에 나서도록 해.”
“무력을 써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긴장한 얼굴로 용골대가 묻자 예친왕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당하는 것보단 먼저 치는 게 낫지 않겠나.”
“……!”
예친왕의 말에 용골대를 비롯한 측근들은 숨을 삼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친어머니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건 반역에 준하는 행동이었다.
충격과 놀라움도 잠시, 경우에 따라 황위를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내심 그가 섭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만이었던 측근들의 눈빛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예친왕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며칠 뒤 태후의 요구대로 패전 책임을 지고 병부상서와 군부 고위 관리 여섯 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모두 예친왕 휘하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빈자리는 태후를 따르는 인물들로 채워졌는데 섭정왕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조선군에 패하고 심양까지 내준 것을 물고 늘어지며 계속 공격을 해 대자 결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던 양쪽은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태후의 행동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속으로 분노를 삭인 예친왕은 자신의 친위대격인 백기단을 비롯해 모두 이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끌어모았다.
일반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정예인 순수 만주 팔기 다섯 개 단이 전쟁에 참가했다.
이건 예친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청나라 군사력의 핵심인 팔기군을 이루는 만주족 전사들한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란 듯 상대가 대군을 북경성 밖에 집결시키자 태후 쪽은 큰 위협을 느꼈다.
북경성 문루에 올라 직접 모여 있는 병사들을 확인한 태후는 예친왕이 언제든 반역의 깃발을 세우고 황위를 찬탈하려 들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가슴속 깊이 새겼다.
선선했던 가을바람이 어느새 차가운 기운을 품고, 맑게 지저귀며 하늘을 날던 새들도 곧 다가올 추위에 대비해 열심히 모이를 모으러 다니는 늦가을 무렵.
겨울의 초입에 성큼 다가선 한양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병사들에게 보낼 옷이니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게. 솜은 얼마든지 있으니 속을 빵빵하게 채워 넣는 것도 잊지 말고.”
엄한 표정을 한 관리들이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주의를 줬다.
마침 추수도 다 끝나고 농사일이 한가해질 계절이다.
손이 잠시 비어 여유가 있는 틈을 타 용산에 만들어진 한 건물에선 한양 내에 있는 아낙네들을 모두 불러 모아 전장에 있는 병사들에게 보낼 동복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북방의 겨울은 조선에서 보내는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혹독하다고 하니, 평상시에 지급되는 얇은 홑옷만으로는 한참 부족할 것이었다.
게다가 겨울옷은 부피도 크고 양도 많아서 지금부터 얼른 만들어서 운반해야 곧 불어닥칠 추위를 병사들이 이겨 낼 수 있었다.
“일 차로 보낼 동복은 다 만들어졌는가?”
진행 상황도 점검할 겸, 궁녀들과 함께 아낙네들이 바느질을 하는 장소를 찾은 중전이 곁에서 안내를 하던 관리에게 물었다.
“하루나 이틀만 있으면 얼추 수량은 채워질 듯합니다.”
“그래?”
중전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아무리 한양 내의 거의 모든 아낙네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작은 아기 옷도 아니고 성인의 몸에 맞춘 겉옷을 만들려면 못해도 한 사람이 반나절은 꼬박 매달려야 겨우 한 벌을 지을 수 있었다.
만약 수량이 한참 모자라다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독촉을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 진행 상황이라면 생각 외로 수월하게 보급대가 떠나는 날짜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아낙네들의 절반은 호란 때 집과 재산, 친척 등을 잃은 경험이 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자식이나 남편을 병사로 떠나보낸 사람들이니까요. 자기 가족이 입을 옷이라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가.”
중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관리에게 말했다.
“아무리 시간에 쫓긴다고는 하나 밥과 휴식 시간은 제대로 잘 챙겨 주도록 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대궐의 궁녀들을 써도 상관없네. 나이가 많은 상궁들은 눈이 침침해서 바느질은 무리일 테니, 젊은 아이들 위주로 뽑아 가게나.”
“하오나 어찌 감히…….”
“전하께서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계시는데 궁녀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놀고 있으면 되겠는가? 시중을 드는 것뿐이라면 상궁들 몇 명만 있어도 충분하네.”
“알겠사옵니다.”
관리는 단호한 중전의 태도에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게 짧은 외출을 끝내고 대궐로 돌아오자, 찬 바람이 부는 바깥과는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가득한 방이 중전을 반겼다.
“중전 마마, 출출하실 텐데 다과를 준비할까요?”
“아니, 됐다.”
중전은 어깨 위에 둘렀던 두꺼운 겉옷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은 할 일이 없으니 다들 나가 있어라.”
“네.”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궁녀들이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중전은 햇빛이 환히 잘 들어오는 창가 쪽으로 옮겨 앉은 후 어젯밤에 하다 남은 바느질거리를 꺼내 품에 안았다.
몇 날 며칠 동안 붙들고 앉아 있던 보람이 있어, 도현에게 보낼 동복이 거의 완성된 참이었다.
솜을 두툼하게 넣고 기워 한철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두꺼웠고, 입고 벗기 쉽도록 품이 적당히 넓어 지금 당장이라도 포목점에 가서 내다 팔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았는지라, 중전은 흰색 실 대신 도현이 좋아하는 청색과 홍색 실을 사용해 소매 자락에 자수를 넣기 시작했다.
이것만 끝내면 내일 모레 출발할 보급대 편에 도현의 옷을 같이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중전은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는 듯한 심정으로 도현의 안부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세심하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바늘을 움직였다.
이렇게 중전과 아낙네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동복은 며칠 뒤 보급대 짐마차에 가득 실려 북방으로 옮겨졌다.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고도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태후 측의 교묘한 방해와 군량미가 부족해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예친왕은 마침내 시월 첫째 날 심양을 향해 출병했다.
심양이 조선군에 함락된 지도 벌써 달포가 지났고 조금 있으면 혹독한 겨울이 시작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불안 요소에 측근들 사이에서도 출병을 내년으로 미뤄야 된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지만, 지난번 패배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예친왕은 그냥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무려 이십만에 달하는 대군의 출정이었기에 행군 대열은 수십 리에 걸쳐 이어졌고, 이 소식은 곧장 북경에 잠입해 있던 주작단 단원을 통해 한양과 심양으로 전달됐다.
“청군 포로들은 다 내보냈나?”
상석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장군이 왼편에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예. 늦어도 보름 뒤면 의주성에 도착할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동 중에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를 철저히 해야 될 거야.”
“기병 한 개 천인대가 호송을 맡았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는 동안 방어 시설 공사와 보급을 모두 끝낸 도현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칫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청군 포로들을 모두 압록강 이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의주와 평양을 잇는 새로운 도로 건설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더불어 노예 생활을 하다가 구출된 조선인을 제외하고 심양성에 거주하던 만주와 한족 주민들을 모두 만리장성 쪽으로 쫓아 보냈다.
포로들을 옮긴 것처럼 미리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향후 심양과 만주 지역을 영원히 조선 땅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정리 작업의 일환이었다.
심양성만 해도 십만이 넘는 만주와 한족 주민들이 있어, 잘못하면 대륙을 정복한다 해도 결국에는 절대다수인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고 사라져 버린 많은 이민족들처럼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조금 냉정해 보여도 이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예상과 달리 적이 빨리 반격해 오지 않고 머뭇거린 덕분에 재정비를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잘하면 올해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영식 장군의 말에 도현도 약간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곧 겨울이 시작되니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말입니다.”
탐보망을 통해서 예친왕이 이십만 대군을 북경성 밖에 모아 뒀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지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준비를 갖춘 뒤에 청군과 대결을 벌였으면 하는 것이 도현과 장수들의 바람이었다.
그때 누가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위사인 박태철이 안으로 들어와 급보를 알렸다.
“전하, 바로 보셔야 되는 전갈이옵니다.”
보통 이렇게 위급을 요하는 일은 나쁜 소식일 경우가 많았기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박태철이 내민 서찰을 건네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봉인을 뜯고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내용을 읽어 내려간 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그러자 오른쪽에 앉은 박영식 장군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그러시옵니까?”
시선을 든 도현은 잠시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다가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친왕이 군대를 출병시켰다는군.”
“……!”
순간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모여 있던 장수들 사이에서 한숨과 탄식이 하나둘 작게 새어 나왔다.
“허어.”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청군과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잠시나마 꿈꿨던 짧은 평화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도현은 굳은 얼굴을 풀고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잖아. 질질 시간을 끌며 전쟁이 길어지는 것보단 빨리 승부를 보는 게 낫지.”
그러자 장수들도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주먹을 움켜쥐며 전의를 다졌다.
“맞습니다. 까짓것, 얼마든지 오라고 하지요.”
“이제 곧 겨울이니 먼 길을 행군해 와서 공성전까지 벌여야 되는 적보다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백만 대군을 끌고 왔다가 요동성을 넘지 못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던 수양제처럼 만들어 주지요.”
“바로 그거야. 앞으로 조선의 이름을 후대에까지 오랫동안 찬란하게 빛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심양성을 끝까지 지켜 내야 될 것이야.”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결연한 얼굴을 하고는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다음 날부터 비상령이 내려지자 소강상태 동안 약간 풀어져 있던 병사들은 다시 긴장의 끈의 바짝 조이고는 곧 있을 전투에 대비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얼마 동안이나 성이 고립될지 몰랐기에, 비변사에서 후방 지원을 맡고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은 제물포를 출발해 심양성 바로 앞 혼하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보급 물자를 수송했다.
북경을 떠나 동진한 청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시월 말쯤 드디어 심양 북서쪽에 위치한 요하遼河 지류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스무 날이 넘게 걸린 것이었는데, 아무리 대군이 움직인다고 해도 보름이 넘지 않는 거리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느린 속도였다.
팔기군처럼 전원 기병이 아니라 공성전을 위해 상당수의 보병이 포함됐고 옮겨야 될 보급 물자도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하 일대가 질퍽한 진창으로 변하는 바람에 행군이 계속 더뎌지고 있었다.
끼릭끼릭, 덜컹!
“뭐야?”
“젠장, 또 진창에 빠졌어.”
“미치겠네.”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 한 대가 진창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자 병사들은 불평을 터트리며 좌우에 붙어 앞으로 밀었다.
“읏차!”
“힘을 줘!”
“하나, 둘.”
여러 명이 달라붙어 겨우 짐마차를 꺼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또 진창에 빠지고 말았다.
짐마차뿐만 아니라 말과 사람들도 발을 한번 내딛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는 진창을 헤치고 가느라 금방 지쳐 버렸다.
“이렇게 늦어져서야…….”
예친왕을 따라 종군하게 된 왕태봉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며칠 전부터 쉬지 않고 내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심양성에 도착해 있어야 했지만, 행군 속도는 갈수록 늦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때아닌 초겨울 장마에 요하가 범람하면서 길까지 막혀 버렸다.
상류로 우회해서 겨우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이것 때문에 또 천금 같은 시간을 이틀이나 허비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땅도 안 좋은데 비가 내려 더 질척해지고 날씨까지 쌀쌀해, 상당수 병사들이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까지 했다.
밤에 숙영을 할 때면 막사마다 기침 소리가 들렸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낙오된 인원만 해도 벌써 오백이 넘었다.
아직 조선군과 맞닥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 정도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독한 날씨와 지형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하는 한족 출신 병사들과 달리 원래 이곳이 고향인 팔기군은 멀쩡하게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팔기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도 안 됐고 또 공성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보병인 한족 병사들이 필요했기에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자 왕태봉은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예친왕한테 출병 연기를 심각하게 건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나약하고 끈기가 없다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넘어야 될 산이 많은데 벌써 이렇게 힘을 빼서 무슨 수로 심양성을 탈환할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결국 이날도 삼십여 리밖에 이동하지 못한 청군은 그나마 땅이 덜 질척거리는 곳을 찾아 천막을 치고 숙영지를 세웠다.
저녁이 되자 비가 조금 잦아들었지만 그치지는 않았고 오히려 바람이 더 세게 불어 가만히 있으면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경계를 세웠지만 낮 동안 피곤에 절어서 그런지 대부분 꾸벅꾸벅 졸며 제대로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었을 때쯤, 이런 청군 숙영지로 몰래 접근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철벅철벅.
근위대 마군 대장인 흑치영은 새까만 숯으로 얼굴을 칠한 채 타고 있는 말에 재갈을 물린 상태로 조심스럽게 진창을 헤치며 움직였다.
주위에는 근위대 소속 기병들이 똑같이 위장을 하고는 그를 따랐다.
진창에 말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시끄럽게 울리는 철벅거리는 소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빗소리에 묻혀 아직까지는 적이 눈치채지 못했다.
기름을 먹인 유삼油衫을 갑옷 위에 껴입었지만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곧 벌어질 전투에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달까지 없는 밤이라 칠흑같이 어두운 데다가 비까지 내려 시야가 정말 안 좋았지만,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잔뜩 피워 놓은 모닥불 때문에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적진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된 행군에 지친 청군은 설마 조선군이 성을 나와 먼저 기습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모두 곯아떨어져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도현은 일부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을 대규모로 내보내 지금처럼 야습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상당히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청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성공이라 할 만했다.
오십 보 앞에 도착하자 흑치영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부하들을 멈춰 세웠다.
말이 달려 속도를 올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더 접근하면 자칫 상대가 야습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기에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흑치영은 품속에서 이제 기병들의 필수 무기가 되어 버린 웅오식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손에서 전해지는,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쇠뭉치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미리 여섯 발의 총알을 꽉 채워 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부하들도 모두 권총을 꺼냈다.
아무리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지만 숫자가 훨씬 많은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했기에, 다들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흑치영은 정면에 위치한 청군 숙영지를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돌격!”
“우와아아!”
두두두두!
흑치영의 우렁찬 목소리와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어둡고 축축한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이럇!”
“하!”
질척거리는 진창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간 기병들은 이제 익숙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경계를 서던 적병 네댓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흑치영과 부하들은 바람처럼 그 옆을 지나 숙영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부터는 멈추면 죽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총알 여섯 발을 모두 써 버린 흑치영은 허리께에서 장검을 빼 들고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천막 밖으로 나오던 적병의 목을 지나가면서 베어 버렸다.
슈각.
“컥.”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날아온 일격에 적병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옆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뒤따르던 부하들도 닥치는 대로 적병을 베어 넘기며 청군 숙영지를 마구 휘저었다.
“커헉.”
“끄윽.”
땡땡땡!
“적이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적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심상치 않은 소음에 갑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침상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온 예친왕은 온통 아수라장이 된 숙영지를 둘러보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일단의 병사들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야골타가 황급히 예친왕에게 다가와서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군이 야습을 해 왔습니다.”
“뭐야? 감히 이것들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예친왕은 어느새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 장수들을 보며 호통을 쳤다.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섰기에 야습을 당하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당장 놈들을 막아! 아니, 팔기군을 출동시켜 다 잡아 죽여 버려!”
화가 단단히 난 예친왕의 불호령에 야골타는 상체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야골타는 즉시 팔기군 병사들을 끌어모았다.
양쪽이 뒤엉켜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 숙영지 외곽과는 달리, 예친왕을 포함한 주요 지휘관과 팔기군 병사들이 있던 안쪽은 아직 조선군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신속하게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라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숙영지 외곽과 그 사이로 들리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기랄.”
“죽어!”
서걱.
“끄아악.”
흑치영이 내려친 장검에 앞을 막고 섰던 적병의 가슴이 길게 잘려 나가면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즉사한 적병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흑치영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는 있지만 점점 적병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아쉬웠지만 이제는 빠져나가야 할 시점이었는데, 자칫 미련 때문에 머뭇거렸다가는 이대로 적군에게 포위되어 야습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모두 집결지로 빠져나가라!”
크게 소리를 친 흑치영은 품속에서 긴 막대기 모양의 신호용 폭죽을 꺼내 들고는 한쪽에 달린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팍!
그러자 길게 꼬리를 남기며 솟구친 불꽃이 공중에서 폭음과 함께 터져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퍼엉!
서로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데다가 어둡고 비까지 내려 명령 하달이 어려운 상태에서는 폭죽만큼 확실한 퇴각 신호도 없었다.
폭죽이 터지자 용감하게 적과 싸우던 기병들은 미련 없이 상대를 떨쳐 내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그냥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와중에 눈여겨봐 두었던 보급 물자 수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 막아!”
기병들이 잔뜩 몰려오자 보급품을 지키고 있던 적병들은 기겁을 했다.
창을 앞으로 내밀며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흑치영과 기병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채챙! 챙! 챙!
“컥.”
“아악.”
이히히힝.
사방에서 비명과 말의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금방 적을 제압한 기병들은 타고 있는 말안장에 매달아 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짐 수레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퍽! 퍽!
날아간 가죽 주머니는 짐수레에 부딪치자 터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뿌렸다.
짐수레와 보급 물자는 순식간에 정체 모를 액체에 흠뻑 젖었고, 흑치영은 말을 타고 가며 근처 막사에 피워 놓은 횃불을 낚아챈 후 바로 그 액체 위에 던져 넣었다.
화르르륵!
기병들이 뿌린 건 바로 동물 기름이었는데, 횃불이 떨어지자 곧장 화르륵 하고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야!”
“이런, 빨리 꺼!”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번져 가는 불길에 적병들은 기겁을 하며 황급히 달라붙어 불을 껐다.
“가자!”
목적을 충분히 다 이룬 흑치영과 부하들은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퇴로가 막히기 전에 서둘러 청군 숙영지를 빠져나갔다.
“잡아라!”
“도망치지 못하게 해!”
때마침 야골타가 이끄는 팔기군이 도착해 달아나는 조선군을 뒤쫓아 가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커다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콰쾅!
보급 물자 사이에 섞여 있던 화약이 화재에 유폭해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얼마나 위력이 큰지 사방 백 보 안에 있는 모든 물체와 사람들을 날려 버렸다.
엄청난 굉음에 말들이 흥분해서 날뛰었고 병사들도 버섯 모양의 거대한 연기와 불기둥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달아나던 흑치영과 기병들까지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볼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다.
“어떻게 된 거지?”
“보급 물자와 함께 화약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옆으로 다가온 부관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치영은 이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더 잘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화약은 군량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물자였는데 특히나 이번처럼 공성전을 벌여야 할 때에는 꼭 필요했다.
뜻밖의 소득에 기뻐하며 흑치영과 부하들은 빠르게 숙영지를 빠져나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를 쫓아가던 팔기군은 화약 폭발에 추격을 포기하고 보병들과 함께 황급히 불길에 휩싸인 보급 물자를 건져 내는 데 달라붙었다.
“젠장, 군량부터 끄집어내!”
“으악, 뜨거워!”
꽈꽝!
“헉!”
“크윽.”
“히익!”
허둥지둥 불을 끄며 아직 타지 않은 보급품을 옮기던 적병들은 불길 속에 남아 있던 화약 상자가 또다시 터지자 기겁을 하며 바닥에 엎드리거나 뒤로 물러섰다.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화약이 계속 유폭을 일으키자, 뒤에서 장수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닦달을 했지만 병사들은 감히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야습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여기까지 낑낑거리며 힘들게 가져온 보급 물자가 절반 이상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렸고 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천막마다 부상을 입은 채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있는 병사들이 가득했고 한쪽에서는 숙영지 곳곳에 널린 시신을 거둬 화장을 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비석까지는 못 세워 줘도 땅에 가매장을 해 주었겠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밥을 먹고 떠들던 동료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쌓여 불에 태워지는 모습에 더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가운데 아침이 되자 얄궂게도 며칠간 내내 괴롭히던 비가 거짓말처럼 싹 그치고, 시리도록 추운 날씨가 펼쳐졌다.
“현재까지 집계된 바에 따르면 전사 육백오십 명에 중상 사백삼십 명으로 모두 일천팔십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보급 물자를 실은 짐마차에 불이 붙는 바람에 군량 삼천 석을 포함한 상당수의 물품이 타 버렸습니다.”
“화약은 얼마나 건졌나?”
예친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피해 보고를 하던 장수는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듬대며 대답했다.
“그, 그게, 가지고 온 이천 근 모두가 소실됐습니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예친왕은 욕설을 내뱉으며 탁자 위에 있던 술잔을 집어 장수한테 던졌다.
퍼석.
“윽.”
술잔이 이마에 맞고 깨지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장수는 아픈 표시도 내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보급 물자를 한곳에 놔둔 놈이 누구야!”
노호성에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장수들이 자라목처럼 어깨를 움츠리는 가운데, 한 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전하.”
양 눈썹을 치켜 올린 예친왕은 엎드린 장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세전, 네놈이었나!”
“이렇게 될지 정말 몰랐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리 큰 피해를 입혀 놓고 고작 그딴 말만 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가뜩이나 행군이 계속 늦어져 짜증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야습까지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예친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이세전한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천막 안에 있던 장수들이 말릴 틈도 없이 예친왕은 손에 든 장검을 내려쳐 이세전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잘못한 건 네놈도 인정했으니 목숨으로 그 죄를 씻어라!”
“살려 주십…… 컥!”
“저, 전하!”
목에 장검이 박힌 이세전은 눈을 부릅뜬 채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피가 튀어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졌지만 예친왕은 상관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든 또 이딴 멍청한 짓을 벌이면 똑같이 처벌할 테니 알아서 해!”
“…….”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품계가 상당히 높은 장수를 예친왕이 단칼에 죽여 버리는 걸 본 장수들은 자신도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색을 하며 온몸이 얼어붙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예친왕은 의자에 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숨을 고른 그는 눈치 없는 호위들에게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뭘 하고 섰어? 얼른 저걸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지 않고!”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호위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다가 서둘러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세전의 시신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양팔을 한쪽씩 잡힌 채 짐짝처럼 끌려 나가는 이세전의 시신 뒤로 끈적한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천막 안의 공기는 미칠 듯이 답답했다. 아직도 귓가에는 이세전이 지른 단말마의 비명이 생생히 울리고 있어, 장수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바닥만 응시하며 예친왕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후……!”
질식할 것 같은 긴 침묵 끝에 예친왕은 돌연 술병을 덥석 집어 들고선 병째로 독한 화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턱과 수염에 묻은 술을 난폭하게 소매 끝으로 스윽 닦아 내고, 입 없는 장승처럼 서 있는 장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시진 뒤에 심양으로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해.”
장수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방금 눈앞에서 제대로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한 명이 죽어 나가는 걸 봤기에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직 정리도 다 안 끝났고, 야습을 막느라 병사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오늘 하루 이곳에서 더 머물렀다가 행군을 재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탕!
왼손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진창과 비 때문에 벌써 한참이나 늦어졌는데 또 시간을 보내라고? 이러다가 심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첫눈이 내리면 자네가 책임질 거야?”
흠칫한 왕태봉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보급품도 부족한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재정비를 하며 후속해서 따라오는 치중부대를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해서 드린 말입니다.”
“됐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강경한 태도에 왕태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
그때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하급 군관 한 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안 좋은 소식인지 군관이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예친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어젯밤 우리뿐만 아니라 좌우군도 야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병력이 이십만이나 됐기 때문에 청군은 세 개로 나눠 움직였는데, 도현은 예친왕이 있는 중군만 노린 것이 아니라 거란족 출신까지 보유한 기병을 총동원해 한꺼번에 야습을 가했던 것이다.
고개를 번쩍 쳐든 예친왕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소식을 가져온 하급 군관을 보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예. 특히 후속해 오던 치중부대의 피해가 커서 많은 양의 군량이 못 쓰게 됐다고 합니다.”
아직 피해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하는 말로 봐서는 심각한 것이 분명했기에, 모여 있던 장수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 청군은 바로 행군을 재개하지 못하고 상황을 수습할 때까지 현 위치에서 며칠 동안 멈춰 있어야 했다.
이번 야습으로 조선군은 먼저 기선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과 화약 같은 보급 물자를 없애는 실질적인 타격도 입혔다.
군량은 아직 보유 물량이 상당히 남아 있어 당장 병사들이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화약은 예친왕이 지휘하는 중군에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진창에 빠져 가며 힘겹게 끌고 온 서른 문의 홍이포가 졸지에 몽땅 쓸모없는 고철덩이가 되어 버렸다.
야습을 당해 제대로 체면을 구긴 예친왕은 바짝 독이 오른 채 다시 심양성으로 향했다.
그때쯤 심양성에 있는 조선군은 전쟁 준비를 모두 끝내 놓고 있었다.
그동안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청군 잔당을 소탕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만주족들을 새로 설정한 국경선 밖으로 밀어낸 병력이 모두 복귀하고, 새로 보충병까지 도착하자 심양성에 주둔하는 조선군은 십일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전쟁이 터진 이후로 쉬지 않고 밤낮으로 가동 중인 병기창에서 새로 제작한 각종 화포 오십 문과 신형 포탄이 보급되어 화력도 대폭 보강됐다.
그리고 군량과 기타 보급품도 충분히 비축해 외부의 지원이 다 끊기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도 일 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게 준비를 갖췄다.
“쏴!”
퍼엉!
구령과 함께 화포장이 심지에 불을 댕기자 포루에 설치된 황자총통이 커다란 폭음을 울리며 하얀 화약 연기를 내뿜었다.
슈우우웅.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포탄은 성 밖 벌판에 떨어졌다.
꽈앙!
그러자 망루에 서서 천리경으로 착탄 지점을 확인한 포병대 지휘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병사를 보며 말했다.
“좌측으로 조금 치우쳤으니 조준점을 우로 당기라고 해.”
“옛.”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병사는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제법 거리가 떨어진 포루로 뛰어갔다.
잠시 후 아까 포탄을 쏘았던 화포가 다시 불을 뿜었고, 이번에는 벌판에 세워 둔 표적지를 정확히 명중해 박살 냈다.
“명중입니다.”
“좋아, 수고들 했어.”
지휘관도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병대는 아침부터 계속 포를 쏘며 새로 배치된 화포 성능을 시험하는 한편, 전투가 벌어졌을 때 사격 지점이 겹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방위와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했다.
상당히 귀찮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이렇게 해 두면 실전에서 최소한의 화약과 포탄을 써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은 왼쪽 포루에 있는 화포를 점검할 차례지?”
“네.”
휘하에 있는 군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지휘관은 한 기의 기마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걸 발견하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뭐야?”
“글쎄요, 등에 깃발을 꽂고 있는 걸로 봐서 전령 같습니다.”
천리경으로 기마를 살펴본 지휘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군.”
“왜 그러십니까?”
“전령이 나타난 방향을 봐, 북서쪽이잖아.”
“그게 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한 군관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지휘관은 답답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저쪽에서 저리 급하게 달려와 알려야 될 일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잖아.”
“헉, 그럼!”
“드디어 예친왕이 군대를 끌고 나타난 거겠지.”
조만간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닥치자 긴장이 되는지, 군관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전령을 바라봤다.
“일이 급하게 된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는 두 문씩 같이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옛.”
그렇게 장졸들의 복잡한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전령은 성문을 지나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령이 가져온 급보는 바로 도현에게 전달되었고, 잠시 후 작전 회의가 소집되었다.
“방금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예친왕이 이끄는 청군이 반나절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이 군단장인 남두병 장군의 말에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눠 앉아 있던 장수들이 살짝 술렁였다.
하지만 다들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놀라움은 잠시였고 이내 담담한 얼굴로 대책을 논의했다.
“피해를 많이 줘서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요.”
“그래도 이제 곧 겨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예친왕의 대응이 상당히 늦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도현은 남두병 장군을 보며 물었다.
“청야 작업은 다 끝났지?”
“예. 가옥은 물론이고 적군이 말먹이로 쓸 수 있는 초지까지 모두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기병으로 구성된 팔기군 수만을 데려왔으니 아마 건초를 구하느라 아주 애를 먹을 겁니다.”
청야淸野 전술은 말 그대로 적이 쓰지 못하도록 농작물과 건물 등 모든 걸 없애 버리는 거였다.
일찍이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이 작전을 써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보급로가 길고 겨울이라 추운 날씨를 견뎌 내야 하는 청군에 그야말로 목줄을 조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초원밖에 없는데 무슨 청야 전술을 펼칠 것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심양과 요동 지역은 예전부터 여러 왕조가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황도였기에 경작지와 크고 작은 마을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말먹이로 쓰일 초지만 다 태워 버려도 길게 이어진 청군 보급선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
기병대를 동원한 야습도 이런 청야 전술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예친왕과 청군은 아직 몰랐지만 이것만 봐도 도현이 잘 짜인 작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병대는 어디에 있어?”
“계획대로 야습을 끝내고 모처로 이동해 다음 행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영식 장군의 대답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박경지 장군이 지휘를 하고 있지?”
“그렇사옵니다.”
박경지朴敬祉 장군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성심이 강하고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으며 지략이 뛰어난 무장으로, 실제 역사에서도 효종의 북벌 계획을 적극 찬성하면서 이완 등과 함께 깊은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때가 되면 맡은 임무대로 움직이라고 해.”
“그리 전하겠습니다.”
수성전을 벌이는 것도 좋았지만 상황이 예의치 않을 경우 예친왕이 기동력이 뛰어난 팔기군을 따로 떼어 내 한양을 바로 노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주력이 심양성에 묶여 있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방어 계획을 세워 뒀다고 해도 상당히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고, 최악의 경우 적에게 빈집 털이를 당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심양과 새로 차지한 영토를 지켜 낸다고 해도 본토와 한양이 완전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승리해도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 도현은 공성전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기병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 청군의 보급선을 끊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잠시 말없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장수들을 둘러본 도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야. 북벌이 성공하느냐 아니면 다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느냐는 모두 제장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으니,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겠네.”
“옛.”
그날 오후, 청군이 도착하기 전에 박경지 장군이 지휘하는 별동대로 마지막 전령을 보낸 조선군은 성문을 모두 굳게 걸어 잠그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함께, 드디어 청군이 성 앞에 나타났다.
2차 심양 전투 2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산처럼 혼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심양성을 보며 예친왕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웅장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심양성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자부심이었지만 지금은 성벽 곳곳에 조선군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예친왕은 조선 따위한테 져서 심양성을 빼앗긴 호타이에게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주제도 모르고 감히 청나라에 검을 들이댄 도현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거처가 다 세워졌으니 그리로 들어가시지요.”
옆에 있던 왕태봉의 말에 예친왕은 한창 병사들이 만들고 있는 숙영지를 힐끔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도 땅바닥이 온통 시커멓게 타 있군.”
“……그렇군요.”
심양성 주변뿐만 아니라 요하를 넘은 이후부터 보이는 땅은 모두 이렇게 불에 타 검게 변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예친왕은 따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바로 한 예친왕은 한쪽 볼을 실룩이더니 정면에 있는 심양성을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선 국왕이 날 맞이할 준비를 제법 독하게 한 모양인데,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어.”
그러고는 말 머리를 돌려 숙영지로 들어갔다.
청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도현은 직접 문루에 올라 상대를 확인했다.
아군 화포의 위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들판을 가득 메운 청군은 천 보 이상 떨어진 거리에 주둔지를 세우고 있었다.
“말이 이십만이지,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엄청나군요.”
남두병 장군의 말에 도현은 천리경을 눈에서 떼며 이야기했다.
“숫자는 많을지 몰라도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며칠이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왔으니 진이 다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뒤를 돌아 모여 있는 장수들의 얼굴을 둘러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든든한 성벽까지 있는데 지쳐서 거지꼴로 나타난 청군을 못 이긴다면 쪽팔리는 일 아니겠어?”
그러자 엄청난 병력 규모를 보고 조금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수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트리면서 긴장을 풀었다.
“하하하! 맞사옵니다.”
“까짓것,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하지요.”
“저런 놈들은 이십만이 아니라 그 배가 쳐들어와도 다 막아 낼 자신이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꼴을 보니 오늘은 공격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계 병력을 확실히 세우도록 해.”
“예.”
다시 천리경을 든 도현은 그 뒤로 한참을 더 적진을 살펴보다가 예전 황궁에 설치한 지휘소로 돌아갔다.
긴장 속에 하룻밤이 지나갔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군은 숙영지를 나와 심양성 앞에 전투대형을 갖추고 늘어섰다.
선두 열에는 커다란 사각 방패를 가진 방패수와 궁병 그리고 후위에는 보병을 배치하고 예친왕이 직접 지휘하는 팔기군은 제일 뒤에 선 상태였다.
기병인 팔기군은 공성전에서 크게 효용성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소모전이 될 전투에 정예를 투입하기보다는 한족으로 구성된 보병을 앞세우려는 의도로 이런 대형을 짠 듯했다.
갑옷을 갖춰 입고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올라선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적진을 살폈다.
“홍이포가 보이지 않는군.”
“야습에서 적이 가지고 있던 화약을 없앴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잘됐어.”
아군 포병대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홍이포였기에 가장 꺼림칙했는데 그걸 사용하지 못한다니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이제 움직이려는 모양이옵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자 박영식 장군의 말대로 청군이 전투대형을 갖춰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현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입을 열었다.
“전투준비. 절대 각자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고 이르라!”
“옛.”
장수들이 상체를 숙이며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초요기招搖旗가 문루에 높이 세워졌다.
포격에 대비해서 청군은 하나로 뭉치지 않고 각 백인대로 나눠 서로 간격을 유지한 채 전진해 왔다.
이 군단과 근위군단 연합 포병대 지휘관으로 군호 벼슬을 가진 최진석은 다가오는 적군과의 거리를 잠시 가늠해 보고 옆에 있는 신호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 포, 방포하라!”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좌우로 크게 흔들자 장전을 다 끝내고 대기하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뻐버버벙! 꽝! 꽝! 꽝!
포루와 성벽 위 포대에 배치된 여러 구경의 화포들이 일제히 육중한 포성을 울리면서 포탄을 발사했다.
쉬우우웅!
미리 사격 고각을 다 측정해 뒀기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적군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쿠쿵! 쿵! 쿵!
폭음과 함께 적군 대열 사이에 불기둥이 수십 개나 연거푸 치솟았다.
“으악!”
“컥.”
포탄이 터진 곳에 있던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거나 파편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흐익.”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동료를 본 적병들이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자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가던 군관이 검을 빼 들고는 전투를 독려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돌격해라!”
코앞에 검을 들이대며 윽박지르자 적병들은 용기를 내 함성을 지르면서 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와아아!”
“공격!”
그런 청군을 향해 아군 화포들도 쉴 새 없이 포탄을 날렸다.
씨우우웅! 씨우웅!
폭음이 울릴 때마다 수십 명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지만 청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전진했다.
그런 적병을 따라 화포 각도를 조종하며 조선군 포수들은 기계적으로 화약과 포탄을 밀어 넣고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꽝!
우렁찬 포성이 터지며 흰 화약 연기가 사방이 막힌 포루 안을 가득 채웠다.
벽에 나 있는 포 구멍을 통해 탄착 지점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내민 화포장은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기겁해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어이쿠.”
그 모습에 포탄을 장전하던 포수들이 눈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키득거렸다.
“엉덩이 괜찮으십니까?”
“큭큭큭.”
부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화포장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 괜히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장전이나 빨리 끝내!”
“예.”
덕분에 긴장이 풀린 포수들은 아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장전과 발사를 반복하며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격렬한 포격을 뚫고 청군이 이백 보 앞까지 접근하자, 성가퀴에 한쪽 손을 올리고 정면을 내려다보던 최진석이 뒤를 돌아 도현을 보며 말했다.
“적이 조총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만약을 위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들고 양옆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김덕술과 박태철 사이로 몸을 내밀어 적군을 살폈다.
명중률을 높이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가까이 끌어들이는 게 좋았지만 이대로 놔두면 금방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화약 무기의 특성상 근접전을 벌여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쯤에서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지를 해야 했다.
높다란 문루 좌우 성벽 위에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둘러본 도현은 지휘봉을 위로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줘라. 전군 방포!”
총구만 앞으로 내밀고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은 도현의 사격 명령에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타탕! 탕! 탕!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한 총성과 함께 하얀 화약 연기가 성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성을 향해 달려들던 적병들이 볏짚 베듯이 우수수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들 사이에 죽지 않고 부상만 입은 적병들이 미친 듯 비명을 질러 대며 허우적거렸다.
“아악, 살려 줘!”
“내 다리!”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총성이 울렸고 머리와 가슴에 탄환을 맞은 적병들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딱히 몸을 엄폐할 곳도 없는 데다가 재장전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청군의 피해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제기랄! 우리 편 궁수들은 뭘 하는 거야?”
빗발치는 탄환에 부하 수십 명이 피 칠갑을 하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본 청군 군관이 욕설을 내뱉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포격에 이어서 조총 사격까지, 이 상태로는 도저히 성을 공략할 수 없었다.
그때 뒤따라온 궁수들이 성벽 위에 있는 조선군 총병을 향해 화살을 쐈다.
슈슈슉! 슈슉! 슉!
성가퀴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조총을 쏘던 조선군 총병들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온 화살들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헉.”
“크윽.”
운이 없는 총병 몇몇은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부상병들을 들것에 실어 성 안쪽에 마련된 치료소로 급히 데려갔다.
“금방 의원한테 데려다 줄 테니 조금만 견뎌!”
“으으…….”
빈자리는 곧장 다른 병사들이 들어와서 메꾸며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 갔다.
도현이 있는 문루도 화살 공격의 예외가 아니었다.
투투툭!
두 위사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화살이 날아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히자 옆에 있던 박영식 장군이 다급히 말했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전하.”
하지만 도현은 화살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병사들도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짐이 어찌 먼저 피하겠나?”
“하오나…….”
“됐으니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병사들과 함께할 것이야.”
단호한 태도에 박영식은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로 피하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하겠다는 도현의 말에 강한 신뢰와 믿음이 들었다.
“전고戰鼓를 더 크게 울려라!”
둥둥둥!
이런 가운데 전투는 한층 더 격렬해져,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전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랐기에 화약을 아껴야 하는 조선군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총병을 뒤로 빼고 궁수와 창병이 앞으로 나와 청군을 상대했다.
“조선군의 저항이 상당히 거센 것 같습니다.”
왕태봉은 예친왕이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돌려 이야기를 했지만, 예상보다 더 견고하고 강한 조선군의 전력에 청군 장수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부터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예친왕 역시 시간이 갈수록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포격과 총탄 세례를 맨몸으로 받아 내야 했던 선두 열은 거의 괴멸 상태에 놓였고 뒤따라간 병력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벽만 넘어가면 끝나는 거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예친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장수들은 입을 꽉 다물며 머리를 숙였다.
“예.”
청군 진영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독전고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적병들은 개미 떼처럼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성벽을 점령해라!”
“우와아아!”
턱.
힘겹게 성벽 아래에 도착한 적병들은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는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막아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친 유혁연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막 성벽 위로 올라서는 적병을 쐈다.
탕!
“끄악.”
어깨에 총탄을 맞은 적은 피를 튀기며 뒤로 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창으로 찌르거나 끝이 ‘Y’ 자로 갈라진 장대를 써서 공성용 사다리를 밀었다.
“개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올라오는 거야!”
공성용 사다리가 뒤로 쓰러지자, 거기에 매달려 줄을 지어 올라오던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어……!”
“커헉.”
채챙! 챙! 챙!
“으으윽.”
악착같이 덤벼드는 적군 때문에 조선군의 피해가 조금씩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온갖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성벽 아래는 시신이 쌓여 산을 이뤘고 피가 흘러 강이 됐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 늦은 오후가 됐지만 성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청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화약을 아끼기 위해 조총 사격을 멈추자 한숨 돌리던 청군은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는 조선군 궁수들의 화살 세례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도 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궁수들은 성가퀴 뒤에 숨어 능숙한 동작으로 화살을 날렸다.
“맛 좀 봐라!”
쉬익.
화살을 먹인 궁수 하나가 시위를 퉁기자 검을 흔들며 적병들을 독려하던 청군 군관이 가슴을 부여잡고 꼬꾸라졌다.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궁수는 등 뒤에 맨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더 꺼내 다음 먹잇감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궁수들 사이에서도 편전을 쓰는 병사들이 상대편 군관만 골라 저격을 해 대자 겁을 먹은 지휘관들이 몸을 사렸고, 자연스럽게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우왕좌왕하면서 공격이 무뎌지자 그동안 뒤로 빠져 쉬고 있던 총병들이 다시 나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탕! 타탕! 탕!
“꾸엑.”
“큭.”
“으악!”
연달아 총성이 울리자 성벽 아래에 있던 적병들은 속절없이 무더기로 피를 뿌리며 생명을 잃었다.
청군은 이만 명이 공격에 나섰지만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해 벌써 병력의 사분지 일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이대로 놔두면 나머지 병력도 오래지 않아 시신이 되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왕태봉이 예친왕 앞으로 가서 간곡하게 말했다.
“전하, 조선군의 방어가 너무 견고합니다. 이 상태로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어려우니 잠시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으시지요.”
애써 에둘러 이야기했지만 결국 후퇴시키자는 말에 예친왕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첫 공격에 성을 함락시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조선군의 강함만 확인하고 청군 병사들은 사기가 왕창 꺾였으니 분통이 안 터질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병력을 더 밀어 넣어서 이대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서지만 꼭 성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말겠어. 퇴각 신호를 울리게.”
“네.”
잠시 뒤 청군 진영에서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웅! 뿌우웅!
퇴각 신호에 성벽을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던 적병들은 반색을 하며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퇴각한다, 퇴각!”
“후우, 이제 살았어.”
하지만 그냥 곱게 보내 주지는 않겠다는 듯 조선군은 끝까지 화살을 날려 댔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에 한 무더기의 적병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널브러졌다.
“끄악!”
“윽.”
“나, 나도 데려가!”
“제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부상병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자 보다 못한 청군 병사들이 그들을 들쳐 업었다.
하지만 다시 날아든 화살에 부축해 주던 이들까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자 질겁한 병사들은 부상병을 그냥 방치한 채 달아나 버렸다.
“이 자식들, 질서를 갖춰서 천천히 물러서지 못해!”
지휘관과 군관 들이 노성을 터트렸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청군 병사들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들도 썰물처럼 후퇴하는 청군 병사들 사이에 휩쓸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성벽 위에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적군을 내려다보며 조선군 병사들은 각자 가진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이겼다!”
“꼴좋다, 이것들아!”
승리감에 취한 병사 하나가 성가퀴 위에 올라가 아랫도리를 내리고는 엉덩이를 흔들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낄낄낄, 잘한다.”
그렇게 첫날 전투는 청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성벽 아래에 남겨 두고 물러나면서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저녁노을과 함께 기나긴 하루가 저물고, 다음 날까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을 때 심양성 안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정신없이 바삐 돌아갔다.
“제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자는 이쪽으로!”
“어이, 빨리 들것을 가져와.”
“설 수 있겠나? 좀 더 기운을 내 보게. 여기서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사방에서 다급한 고함과 채근하는 목소리,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음이 한데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커다란 공터에 천막을 세우고 걷지 못하는 부상자들이나 심하게 다친 사람을 의원들이 돌보긴 했지만, 일손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다소 경미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입구에서 차례대로 순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으악!”
“참으시오, 혀를 깨물면 안 돼!”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을 의원이 뽑아내려고 하자 병사가 몸부림을 치며 상체를 들썩였다.
주위 사람들 몇몇이 그 소리를 듣고 병사의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억누르는 사이에 의원은 급한 대로 헝겊 뭉치를 입에 쑤셔 넣고 하나, 둘, 셋을 외쳤다.
“끄으으으……!”
“이제 다 끝났소.”
의원은 괜찮다며 병사를 다독거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지혈을 한 후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둘둘 감았다.
그뿐만 아니라 천막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비명과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올 때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런 와중에 도현이 장수들과 함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천막에 나타났다.
뒤늦게 그를 알아챈 의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도현은 손을 내저어 말렸다.
“지금은 예를 따질 때가 아니니 나보다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게.”
“예, 전하.”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기에, 의원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돌아섰다.
한 사람이 먼저 행동을 보이자 우물쭈물하고 있던 다른 의원들 역시 제각기 흩어져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내가 여기에 더 있어 봤자 방해만 될 것 같으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군.”
마치 또 다른 전쟁터와도 같은 치료소 안 광경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도현은 일단 밖으로 나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머리에 짐을 이고 오는 아낙네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들은?”
“노예로 잡혀 있다 풀려난 조선인들 같습니다만…….”
도현의 물음에 대답한 장수도 아낙네들이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이유를 모르는 눈치였다.
“자,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이거라도 드시고 힘내세요.”
“배가 든든해야 상처도 빨리 낫는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과 함께 아낙네들이 둥글게 만든 주먹밥을 병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고맙소.”
“아유, 무슨 말씀을요. 여러분과 주상 전하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훤한 대낮에 자유로이 다니지도 못했을 텐데.”
“그럼요. 작게나마 은혜를 갚는 것이니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아낙네들이 나타나 재잘대며 주위를 밝게 하니 낯빛이 어두웠던 병사들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저이들의 행동이 참으로 대단하고 기특하군.”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도현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자 장수들도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남정네들이 성벽 보강 작업을 돕더니, 이번엔 여자들이 나서서 부엌일을 돕는 모양입니다.”
“병사들이 먹을 음식을 차리는 것도 큰일인데 아낙들이 있어서 다행이군요.”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광경이라, 도현은 방금 전보다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일단 응급처치가 끝난 중상자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냉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의무병들이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단순히 화살이 몸에 박히거나 칼날이 스친 부상은 지혈만 제대로 해 주면 일단 움직일 수는 있었기에, 처치가 끝나면 바로 의원의 손을 떠나 천막에서 내보내졌다.
그리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전투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자들은 옆에 있는 별도의 천막으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되었다.
태반은 적군에 의해서든 의원의 판단에 따라서든 팔다리 중 어느 한쪽을 쓸 수 없게 된 자들이었고, 화살에 의해 눈 한쪽을 잃은 사람, 고열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좌절감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저, 전하.”
“이런 황공할 데가…….”
입구 가까운 곳에 누워 있던 몇몇 병사들이 도현을 알아채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됐으니 그냥 누워 있어라.”
도현은 직접 손을 뻗어 병사들을 말린 다음 찬찬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도현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고열로 괴로워하고 있는 젊은 병사의 머리 수건을 손수 갈아 주기도 하고, 양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병사의 손을 꼭 잡아 주기도 하며 그들의 고통과 시련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전하…….”
“흑흑,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얼른 이 몸뚱이가 나아서 또 전장에 나가야 할 텐데, 참으로 원통합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도현의 이런 행동에 병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에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며 깊은 충성심을 드러냈다.
곧 완전히 해가 져 어두워질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리는 군관의 말에 도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고 천막을 나섰다.
본격적으로 밤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려던 도현은 부상자들이 가득한 천막에서 막 나오는 의원을 불러 세웠다.
“자네는 아까 나와 이야기했던 의원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그는 천막에서 도현을 알아보고 예를 차렸다가,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돌아서서 환자들을 돌보러 떠난 의원이었다.
외관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이는 벌써 칠순을 가볍게 넘긴 듯했지만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고 이마의 주름에선 관록이 가득 풍겨 나왔으며, 천막 안에서 부상자들을 가볍게 다루며 다른 의원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청년 못지않게 힘이 넘쳤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천막에 들렀을 때 노인을 유심히 살펴봤던 도현은 그가 의원들의 우두머리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렸었다.
“부상자들은 좀 어떠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남은 건 젊은이들의 체력과 정신력에 맡겨야지요.”
“필요한 물자는 가능한 한 지원해 줄 테니 최선을 다해 주게. 살릴 수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목숨을 붙여 놓아야 해.”
“당연하지요. 그것이 의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음.”
도현은 쉬는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의원을 놓아주었다.
“어쩐지 오늘 밤은 편하게 잠을 못 잘 것 같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도현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곁에 있던 장수 하나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사상자 수가 적은 편입니다. 의원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에, 못해도 팔 할 이상은 내일 전투에 다시 나설 수 있을 듯합니다.”
확실히 머릿수가 엄청나게 차이 나는 청군을 상대로 이 정도 피해라면, 승리라고까진 말 못 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현은 고개를 가로젓고 엄격한 말투로 쐐기를 박았다.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난 것뿐이야. 앞으로도 길고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네, 전하.”
도현의 대꾸에 머쓱해진 장수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오늘 밤은 병사들이 먹는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사람은 먹어야 기운이 나는 법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측은한 시선으로 부상병들이 누워 있는 천막을 한 번 더 돌아본 도현은 이내 장수들과 함께 지휘소로 돌아갔다.
한편 청군 숙영지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힘들었지만 곧 심양을 함락시키고 조선까지 밀고 들어갈 거라 의심치 않았는데 왕창 깨져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가 완전히 꺾여 어깨가 축 쳐진 병사들은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피곤에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숙영지 한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지휘 천막에서는 아까부터 잔뜩 화가 난 예친왕의 노호성이 계속 터져 나왔다.
꽝!
“사상자가 얼마라고?”
앞에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친 예친왕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묻자, 오늘 공성전을 지휘했던 한족 출신 무장인 주은천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오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졸전을 벌여 망신을 당한 것도 부족해서, 뭐? 오천이나 잃었다고?”
예친왕의 호통에 주은천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워낙 조선군의 방비가 단단해서…….”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주은천이 변명을 늘어놓자 눈썹을 위로 추켜올린 예친왕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닥쳐라!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기는커녕 멀찌감치 떨어져 주둥이만 나불거려 놓고 어디서 그딴 말을 내뱉는 거야!”
“헉. 저, 전하.”
“꼴도 보기 싫으니 저놈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라!”
“옛.”
또 즉결 처분을 해 버릴까 봐 가슴을 졸이던 장수들 중 한 명이 얼른 주은천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는 예친왕을 보며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와 조총의 위력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것 같습니다.”
“으음.”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성벽 아래까지 다가가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을 직접 눈으로 봤기에 예친왕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급하고 상대를 잘 깔보는 단점을 가진 야골타마저 오늘 본 조선군의 화력이 충격적이었는지 심각한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적하고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포격과 조총 사격을 받아 대형이 다 흐트러져 버렸으니 정말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특히 뭘 어떻게 했는지, 커다란 쇠공이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폭발해 파편을 사방으로 뿌리는 바람에 병사들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화포를 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없을까?”
예친왕의 물음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화살로 견제를 하려 해도 우선 사거리가 짧아 닿질 않는 데다가, 대부분의 화포가 포루 안에 들어가 있어 거의 효과가 없을 겁니다.”
“오히려 공격을 하려다 궁수대가 먼저 박살 나 버리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거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장수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내젓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예친왕은 정색을 했다.
그러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장수들은 괜히 헛기침만 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고, 예친왕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또다시 호통을 치려고 할 때 왕태봉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이야기했다.
“전하, 제가 비록 병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조선군의 화포를 상대하려면 저희도 똑같이 홍이포를 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홍이포를 쓰고 싶어도 화약이 없어 고철 덩어리 신세잖아!”
새삼 요하 인근에서 당한 야습이 뼈아프게 다가온 예친왕은 미간을 좁히고는 한쪽 볼을 실룩거렸다.
그런 예친왕을 보며 왕태봉은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화약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끄으응.”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를 내던 예친왕은 이내 눈을 매섭게 번득이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북경에 연락해서 화약을 최대한 빨리 보내라고 해! 그리고 내일부터 심양성이 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몰아붙일 테니, 다들 그렇게 알고 각오 단단히 하도록.”
포격 지원 없이 공성전을 벌이면 엄청난 피해가 속출할 것이 뻔했지만, 어차피 예친왕에게 한족 병사들은 쓰다가 죽으면 언제든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
만주족 출신 장수들도 예친왕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고, 왕태봉을 비롯한 이신들은 한족 병사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에 경악하면서도 행여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화약 보급을 재촉하는 전령이 북경으로 떠났고, 예친왕의 명령대로 한족 출신으로 구성된 청군 보병들은 빗발치는 포격과 총탄 세례를 뚫고 심양성을 향해 돌격했다.
북경, 자금성.
뭔가 급한 일이 있는지 다급한 얼굴로 거의 뛰듯이 걸어간 통정사 이제갑은 언제 봐도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번쩍한 금색 장식과 하늘하늘한 붉은 비단 천으로 꾸며 놓은 태후전 문을 두드렸다.
궁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강한 향내가 온통 주위에 가득했다.
“태후 마마, 신 이제갑이옵니다.”
“어서 오게.”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던 태후는 상아와 비취로 세공한 긴 손톱 장식을 우아하게 흔들며 이제갑을 맞이했다.
“마침 향을 즐기고 있던 참인데 잘 왔네.”
태후는 손을 한번 휘저어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음, 역시 서역 상인이 들여오는 것은 이국의 독특한 정취가 있단 말이야. 통정사는 어찌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태후의 물음에 이제갑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향에 대해 무지한지라 잘 모르겠사옵니다만, 태후 마마의 고견을 듣고 보니 어쩐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호호, 고견이라니 당치도 않소.”
태후는 기분 좋은 듯 깔깔 소리 내어 웃고는 궁녀에게 향로를 치우라 일렀다.
“옛날부터 향이란 건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물건이었으니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오. 한데 어쩐 일로 내 처소를 찾으셨소이까?”
“실은 방금 섭정께서 보낸 전령이 도착하였습니다.”
섭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태후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고, 웃는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찰나의 변화였기에 일순 착각인가 싶었지만, 태후와 예친왕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익히 알고 있는 이제갑은 주변 공기가 살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것을 느꼈다.
“흐응, 섭정이 전령을 보낸 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 뭐라고 하더이까?”
태후는 짐짓 관심 없는 척 매끈하게 다듬은 손톱 장식의 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그 나른한 동작은 곧 얼른 본론을 꺼내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사소하게 지나가듯 던지는 말 하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몸짓 하나에도 수많은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황궁에 사는 사람들의 태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아둔한 행동을 일삼다가 눈 밖에 나 내쳐진 자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름 황궁에서 오래 버티며 닳고 닳은 이제갑은 금방 태후의 의도를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섭정께서 북경 군영에 보관 중인 화약 재고를 몽땅 다 끌어모아 전장으로 보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화약을?”
“그렇습니다, 마마.”
태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화약이라면 이미 출정할 때 충분히 들고 가지 않았나? 아무리 전투가 격렬하다 해도 그 많은 양을 벌써 다 써 버렸을 리가 없는데.”
“실은 심양으로 이동 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가지고 갔던 화약 대부분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뭐?”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래서 섭정이 급히 전령을 보낸 게로군. 하긴 화약이 없으면 아무리 수십만 대군이 있어도 철옹성 같은 심양을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태후는 어떻게 할까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손톱 장식 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조선군이 예친왕의 대군에 맞서 예상외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기회를 이용해 이이제이의 술책을 쓸지, 아니면 체면은 살려 주는 방향으로 몰고 나갈지 참으로 즐거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사옵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태후 마마께 소식을 전해 드리러 달려온 것입니다.”
“잘했소.”
태후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섭정의 요구는 들어주되, 화약을 반만 보내 주도록 하시오.”
“네?”
“내가 꼭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태후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이제갑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하면 섭정께서…….”
“잘 생각해 보게. 섭정이 화약이란 화약은 모두 다 갖고 가 버렸다가 자칫 지난번 반란과 같은 다급한 일이 터졌을 때, 북경은 무슨 수로 지킨단 말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절반의 화약을 보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애초에 갖고 간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되는 일 아닌가?”
“…….”
태후는 이미 모든 결정을 내렸다는 듯, 흥미를 잃은 얼굴로 옆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화약을 잃어 불리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예친왕이 전쟁에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헤쳐 나온 그의 지략과 무력을 따져 보면,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는 건 어린애를 제압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막강한 예친왕의 위세가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예친왕이 승승장구하면 반대편에 선 자신한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태후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를 조금 괴롭혀 줄 작정이었다.
그간 그의 오만방자한 행실을 참아 줬으니 이 정도 장난쯤은 당연히 쳐도 되지 않은가.
그녀에겐 그런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더불어 가능성은 낮았지만, 조선군이 예친왕을 이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그와 측근들의 기세를 꺾어 줬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이런 태후의 생각을 눈치챈 이제갑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하오나 그렇게 하면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섭정의 측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흥! 그놈들도 다 황상의 신하들인데, 황명이 떨어지면 거기에 따라야지 어쩌겠소.”
“그렇긴 하옵니다만…….”
“돈을 쓰든지 아니면 벼슬을 가지고 회유를 하든지,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섭정에게 화약이 다 가지 않도록 막으시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태후와 한배를 탄 이상 예친왕 세력이 득세하면 자신에게도 불리했기에 이제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태후 마마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공만 믿겠소.”
이제갑이 물러간 뒤, 태후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셨다가 뱉어 버렸다.
“차가 맛이 없구나. 항상 따뜻하게 데워 놓으라 하지 않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이야기 중이셔서 그만…….”
끼어들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는 궁녀를 향해 태후는 그 입 닫으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벌로 뺨 석 대를 치고 오늘 점심과 저녁밥은 굶기도록 해라.”
“네, 태후 마마.”
노련한 상궁이 아직도 억울하다는 표정의 궁녀를 억지로 일으켜 데리고 나갔다.
그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더 벙긋했으면 훨씬 심한 벌을 받았으리라.
태후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다음,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신의 미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태후 마마, 식사하실 시간이옵니다.”
상을 차릴까요 하고 묻는 상궁의 말에 태후는 창밖으로 비치는 푸른 하늘에 잠깐 시선을 두고는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서 먹고 싶구나. 더 추워지면 눈이 내려 산책하기도 힘들 테니, 모처럼 햇살이 따뜻할 때 즐겨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께도 연락해서 바쁘지 않으면 함께 드시자고 여쭤 보아라.”
태후는 드물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외출복을 몸에 걸쳤다.
이십만 대군이 먹고 자며 적과 싸우려면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기에, 짐마차 수백 대로 이루어진 보급대가 수시로 북경에서 심양까지 긴 거리를 오갔다.
머릿수가 많은 만큼 하루에 소모하는 물량이 어마어마해 보급대 운용에만 삼만 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야 할 정도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조금 여유가 있었겠지만, 본대가 가지고 가던 보급품 태반을 야습으로 망실亡失하는 바람에 전쟁 초반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조선군의 청야 전술로 황량하게 변한 들판을 말과 황소가 끄는 백여 대의 짐마차가 길게 줄을 지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심양에서 한창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본대에 물자를 가져다주러 수천 리나 되는 길을 이동해 온 청군 보급대였다.
오랜 이동에 지친 데다가 이제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안도감에 다들 약간은 긴장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짐마차 양옆에 병장기를 들고 터벅터벅 따라 걸어가는 병사들만 없다면 초원을 오가는 대상隊商 행렬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평화롭게(?) 지나가는 청군 보급 행렬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급 행렬을 살피던 박경지 장군은 천리경을 눈에서 떼며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 백 대라…… 첫 전과치고는 나쁘지 않군.”
“호위 병력도 오백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공격할까요?”
옆에 함께 있던 부관의 물음에 박경지 장군은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짧게 대답한 박경지 장군은 다시 한 번 멀리 보이는 청군 보급대를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언덕 아래에는 얼핏 봐도 오륙천은 넘을 것 같은 기병들이 말에서 내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종의 임무를 받고 전투 시작 전에 심양성을 나왔던 혼성 기병대로, 이 군단과 근위군단은 물론이고 복속된 거란족 출신까지 섞여 있었다.
중구난방衆口難防처럼 상당히 복잡하고 정신없어 보였지만, 이미 한차례 야습을 벌이며 실전에서 손을 맞췄고 그동안 함께 지냈기에 함께 작전을 치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오자 부하들을 살피고 있던 지휘관급 장수들이 자연스럽게 박경지 장군 앞으로 모여들었다.
“병사들 상태는 어때?”
“다들 너무 쉬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답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흑치영이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경지 장군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몸을 풀어 줘야지. 호위 병력은 얼마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포위를 하고 공격한다.”
“예.”
대답을 하는 장수들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듬직하다는 눈빛으로 부하 장수들을 훑어보던 박경지 장군은 왼쪽 끝에서 시선을 멈추며 말했다.
“무트차한.”
“옛!”
건장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무트차한은 타고난 무술 실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판관 벼슬을 제수받고 현재 거란 출신 기병들을 이끌고 있는 자였다.
“이번 전투는 자네가 선봉에 서도록 해.”
다른 조선인 장수들을 다 제쳐 두고 손쉽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무트차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그를 보며 약간 서툰 조선말로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어때, 자신 있나?”
“맡겨만 주십시오. 단번에 다 제압해 버리겠습니다.”
“좋아. 주상 전하께서 자네를 비롯한 거란 출신 기병들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니, 이번에 실력을 확실히 보여 주게.”
“네.”
박경지 장군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자 무트차한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군례를 취했다.
“승마하라!”
잠시 뒤 장수들의 외침에 휴식을 취하던 기병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각자 군마에 올라탔다.
푸르릉.
“워, 워.”
기병들이 준비를 다 끝내자 박경지 장군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고는 큰 소리를 명령을 내렸다.
“거검.”
차차차촹.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기병들이 소지한 검을 뽑아 들었고, 기수들은 깃발을 수직으로 곧추세워 안장 앞에 고정했다.
“적 보급대를 친다. 가자!”
“우와아아!”
우렁찬 함성을 내뱉은 기병들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빠르게 은신해 있던 언덕을 돌아나갔다.
두두두두!
한가롭게 짐마차 옆에 서서 걸음을 옮기던 청군 병사들은 갑자기 뿌연 먼지 구름을 피워 올리며 나타난 조선군 기병대를 발견하고 너무 놀라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저거…….”
“적이다!”
“헉!”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높이 치켜든 깃발을 보고 조선군임을 알아차린 청군은 기겁을 했다.
말을 타고 있던 지휘관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어서 방어 대형을 갖춰라!”
우왕좌왕하던 적병들은 지휘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대형을 갖췄지만, 겨우 창 하나로 무섭게 달려드는 기병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조선군 기병대는 언덕을 나오자마자 세 방향으로 갈라졌는데, 좌우는 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위를 크게 포위했고 무트차한이 이끄는 나머지 병력은 곧장 보급 행렬을 노렸다.
조선군이 나타난 언덕과는 칠백여 보 정도가 떨어져 있었지만 말을 탄 기병은 1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상대가 미처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거센 파도처럼 조선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다 쓸어버려라!”
선두에 선 무트차한이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말 옆구리를 걷어차 속도를 올리자, 뒤에 있던 거란 출신 기병들도 행여나 쳐질세라 박차를 가하며 바짝 붙어 따라갔다.
“창을 단단히 세우고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려라!”
청군 지휘관이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미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병사들은 호응해 주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용기를 내 맞서 싸워 보려고 해도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나는 데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지축을 울리며 크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공포심을 더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 우린 이제 죽을 거야.”
“어머니…….”
어느새 백 보 거리까지 접근한 조선군 기병대는 안장 옆에서 뭔가를 꺼내 쐈다.
슈슈슉! 쉬이익, 슈슉!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온 건 바로 화살이었다.
타고난 기병답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능숙한 동작으로 시위를 당긴 거란 출신 병사들이 쏜 화살은 상대편 머리 위에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퍼퍽!
“으악!”
“컥.”
“끄윽…….”
몸에 화살이 박힌 적병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연달아 화살을 세 발씩 쏜 거란 출신 기병들은 상대가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덮쳤다.
“죽어라!”
제일 먼저 적들 사이에 뛰어든 무트차한은 달려오는 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앞에 서 있던 적병의 목을 베어 버렸다.
슈각.
“아아악!”
적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고, 무트차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상대를 찾아 검을 마구 휘둘렀다.
뒤따라 도착한 거란 출신 기병들도 무자비하게 적을 학살했다.
보병인 청군은 높은 말 위에 앉아 검을 내려치는 거란 출신 기병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몇몇이 방패와 창을 높이 쳐들며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을 질러 대며 양쪽이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전장은 한편의 지옥도가 그려졌다.
채챙! 챙! 챙!
“히익, 도, 도망쳐!”
공포에 질린 적병 일부가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얼마 못 가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조선군 기병대에 죽임을 당했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전투에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적들은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바닥에 던지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항복합니다.”
한 명이 손을 들자 눈치를 보던 다른 적병들도 금방 뒤따라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트차한과 거란 출신 기병들은 더 이상 살인을 자제하고 항복한 적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각(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전투 시간 동안 살아남은 적병은 백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에 비해 거란 출신 기병들의 피해는 서른 명이 다였다.
전투가 끝나자 부관과 함께 다가온 박경지 장군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여기저기 상대편이 흘린 피를 묻히고 있는 무트차한을 칭찬했다.
“잘 싸웠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걸로도 충분해. 왜 거란족 전사들이 뛰어난 기병이라 불리는지 오늘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네. 특히 마상에서 달리며 활을 쏘는 건 압권이었어.”
“과찬이십니다.”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박경지 장군이 자신과 부하들을 인정해 주자 무트차한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활약을 기대하겠네.”
“뭐든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듬직해서 좋구먼.”
말에 탄 채로 살짝 고개를 숙인 무트차한에게 박경지 장군은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럼 귀찮은 것들이 달라붙기 전에 여길 뜨도록 하세.”
“옛.”
잠시 뒤 조선군 기병대는 곡식이 가득 실린 짐마차와 바닥에 떨어진 병장기를 모두 노획해 가져갔다.
그리고 포로가 된 적병들은 부상이 심하지 않거나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만 골라 포승줄에 굴비 엮듯이 묶어서 끌고 갔다.
중상을 입었거나 걷지 못하는 자들은 그냥 방치했는데, 조금 잔인한 것처럼 보여도 후방에서 빠르게 이동하며 보급로 차단 작전을 벌여야 하는 조선군 기병대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사실 그냥 다 죽여 버리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나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포로들을 끌고 가는 거였다.
남겨 둔 자들도 운이 좋아 늦지 않게 청군에 발견된다면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걸 시작으로 박경지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 혼성 기병대는 요하 일대와 더 멀리는 만리장성 근처까지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족족 청군 보급대를 습격해 물자를 약탈하거나 몽땅 불태워 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예친왕은 시간이 지나도 보급대가 도착하지 않자 정찰병을 주위에 보내고 나서야 상황을 알게 됐다.
“보급대가 습격을 받았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친왕이 노성을 터트리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앞에 있던 군관이 얼른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급로 주변에 전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도 발견됐습니다.”
“보급대가 전부 당했다는 거야?”
눈을 무섭게 치켜뜬 예친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
엉뚱하게 화를 다 뒤집어쓴 군관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예친왕은 앞에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파삭!
“헉.”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떨어진 술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자 깜짝 놀란 군관은 헛바람을 삼켰다.
“이것들을 그냥!”
“전하, 고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겁니다.”
천막 안에 있던 측근 장수들이 나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예친왕은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됐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화를 내신다고 빼앗긴 보급품들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왕태봉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다가 이내 낮게 침음을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젠장!”
일단 화가 좀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왕태봉은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군관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나가 보게.”
“예.”
그러자 군관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얼른 일어나 군례를 취하고는 서둘러 지휘 막사를 나갔다.
고개를 든 예친왕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단단히 포위를 하고 있으니 심양성에서 나온 건 아닐 테고,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혹시 조선에서 추가로 병력이 더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으음.”
야골타의 짐작에 왕태봉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조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력이 뻔한데 심양에 있는 군대 외에 또다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언제부터 예친왕의 측근이었다고 한족 주제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왕태봉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며 야골타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선 국왕이 직접 친정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이기려고 발악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적대적인 시선에 왕태봉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보다는 공성전에 그다지 필요가 없는 기병을 우리가 오기 전에 내보냈다는 것이 더 가능성이 클 겁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증거라도 있나?”
비아냥거리듯 야골타가 묻자 왕태봉은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증거는 없지만 후방을 휘젓고 다니며 보급선을 끊으려면 기동력을 갖춘 기병이어야 하는데, 조선군에게 심양에 주력을 두고 또 상당한 규모의 별동대를 운용할 만큼의 기병 전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핵심을 찌르는 왕태봉의 이야기에 예친왕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 모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고 야골타도 앓는 소리를 내며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끄으응.”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친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심양성에서 나왔든 조선에서 왔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대로 활개를 치게 놔둘 수는 없어!”
예친왕의 말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골타.”
“예.”
부름을 받은 야골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자네한테 백기단의 지휘를 맡길 테니, 후방으로 가서 보급대를 습격한 놈들을 찾아내 몽땅 없애고 돌아오게!”
예친왕은 탁자에 손을 얹고 준엄한 말투로 명령했다.
백기단은 팔기군에 속한 부대 중 하나로 예친왕이 특히 아끼는 정예였다.
“맡겨 주십시오. 감히 우리를 우습게 본 걸 죽어서까지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기세등등한 야골타의 호언장담을 들은 예친왕은 다른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호위를 지금보다 두 배 더 늘려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장군들의 우렁찬 대답이 천막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다음 날.
예친왕이 명령한 대로 야골타가 이끄는 백기단이 숙영지를 떠났다.
두두두두!
희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수천 기의 말과 병사들이 하나가 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특히 선두에 선 야골타 장군은 깃발을 높이 올리고 가슴을 당당하게 편 자세로 위용을 뽐내고 있어, 멀리서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혼성 기병대가 일을 제대로 처리한 모양이군.”
문루 위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도현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박영식 장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청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어 외부 소식을 알 길이 없는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러자 도현은 손끝으로 백기단을 가리켰다.
“저걸 보게. 혼성 기병대가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고서야 저리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후방인 요하 쪽으로 움직일 이유가 없지 않나?”
그 말에 박영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이 가리킨 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 짧은 시간에 백기단은 이미 들판을 가로질러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확실히 도현의 말대로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팔기군이 저런 행동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과연 그렇사옵니다.”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한 도현의 혜안에 박영식 장군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너무 치켜세우지 말게.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니 말이야.”
도현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박영식에겐 그런 작은 몸짓마저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그 옛날 누가 말했던가.
옛 성현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다며 박영식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도현을 본받아 작은 공을 세워 놓고 오만해지거나 자만심을 가지는 일 없이 겸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코끝에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이크.”
“무슨 일인가?”
“아뇨, 갑자기 얼굴에 뭐가…….”
박영식은 손을 들어 코끝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냈다.
“비라도 오려나.”
마른하늘에 물이 떨어질 리 없으니, 소나기라도 오는가 싶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째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지금은 온통 먹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한바탕 쏟아질 것 같사옵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행여 비라도 맞을까 싶어 박영식이 그리 말하는데, 도현은 오히려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네?”
“비가 아니란 말이야.”
도현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박영식의 눈앞에 흰 물체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듯 가볍게 휙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건?”
“그래, 눈일세.”
도현은 손을 길게 앞으로 뻗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눈은 손바닥에 닿자마자 금방 체온에 녹아 차가운 물방울이 되었다.
“하늘이 우리 편을 들어 주기로 했나 보군.”
그렇게 말하며 도현은 눈송이로 젖은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꽉 주먹을 쥐고, 정면에 보이는 청군 숙영지로 시선을 돌렸다.
“보급로가 끊기고 눈까지 내리니 예친왕의 속이 바짝 타겠군.”
도현이 문루에 서서 첫눈을 맞고 있을 때 예친왕 또한 이야기를 듣고 황급히 천막 밖으로 나와 하늘을 봤다.
“이런!”
양쪽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는데, 하얀 눈을 보며 기뻐하는 도현과 달리 예친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따뜻한 성안에 있는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바람 피할 곳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달랑 천막 하나만 의지한 채 추위를 고스란히 다 견뎌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가뜩이나 후방에서 날뛰는 혼성 기병대 때문에 상황이 안 좋은데 눈까지 쌓이면 보급이 더 어려워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청군에 불리한 것밖에 없으니 첫눈을 바라보며 예친왕이 똥 씹은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고개를 돌린 예친왕은 벌써 달포 가까이 하루도 쉬지 않고 공격을 하는데도 끄떡하지 않고 있는 심양성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미치겠군.”
철군
첫눈이 내린 이후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더니 이제 밖에 나와서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졌다.
예친왕과 지휘관급 장수들은 머무는 천막에 땅을 파고 숯불을 피우는 화로를 만들어 어느 정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도현이 쓴 청야 전술로 인해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그냥 천막 안에 들어가 가지고 있는 옷가지를 다 덮어쓰고는 오들오들 떨며 견뎌야 했다.
물론 주위에 장작으로 쓸 나무가 없다고 해도 말 배설물을 땔감 대용으로 쓸 수 있었지만, 그건 지휘관들이나 군마를 타고 다니는 팔기군에 우선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한족 병사들한테까지 줄 것이 없었다.
가끔씩 배급되는 것도 양이 너무 부족해 기온이 더 내려가는 밤에만 잠깐 아껴서 불을 피워야 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 대부분이 감기에 걸렸고 동상 환자까지 발생하는 등 청군의 전투력이 급속하게 저하되어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급대를 습격해 전멸시킨 조선군 혼성 기병대를 아직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야골타가 이끌고 간 백기단이 요하 인근을 수색하고 다니면서 끊어졌던 보급로가 다시 이어져 군량과 물자 공급이 다시 재개됐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보급마저 중단되었다면 청군 병사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처럼 힘들게 지내는 청군과 달리 조선군은 모두 미리 보급해 준 두툼한 솜옷을 갑옷 위에 껴입고 투구 밑에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까지 써서 체온을 유지했고, 숙소는 물론이고 경계를 서는 성벽 곳곳에 화톳불을 피워 따뜻하게 몸을 녹였다.
남바위는 속에 털이 붙은 가죽을 대고 겉은 비단 같은 천으로 만들어 이마와 귀 그리고 목까지 덮을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방한모였다.
여기다 손에는 장갑까지 꼈는데, 동작이 불편한 벙어리장갑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게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도현의 지시에 의해 제작되고 보급한 것이었다.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호조와 신료들이 반대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에게 아까울 것이 뭐가 있냐며 그가 강력히 밀어붙여 이루어졌다.
결론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현재 전장에서 대치 중인 양쪽 병사들의 상태로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마음이 초조해진 예친왕과 청군 지휘부는 더욱 병사들을 몰아붙여 심양성을 공략했지만 번번이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벌써 성이 포위되고 공성전을 벌인 지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하, 남두병 장군이 왔사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내관의 말에 도현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문이 열리자 갑옷 차림의 남두병 장군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서는 오른쪽 주먹을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대며 정중한 자세로 군례를 취했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일단 이리 와서 앉게.”
“예.”
남두병 장군은 도현이 권하는 대로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밖에 있느라 추웠을 테니 따뜻한 녹차로 몸을 좀 녹이게.”
“망극하옵니다.”
도현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화로 위에 올려 둔 주전자를 가져와 찻잔에 녹차를 따라 주었다.
“들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남두병 장군이 찻잔을 내려놓자 도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이야기를 했다.
“아직 비상북 소리가 울리지 않는 걸 보니 청군이 잠잠한 모양이군.”
“그렇사옵니다. 숙영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쥐 죽은 듯 틀어 박혀 있는 걸로 봐서 오늘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사옵니다.”
“흐음, 그래…….”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격을 해 대다가 갑자기 사흘이나 꼼짝 않고 있다니, 아무래도 뭔가 찝찝하군.”
“눈도 내리고, 이제 한계가 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예친왕은 고작 이 정도에 기가 꺾일 사내가 아니야.”
“…….”
비록 적이었지만 청 태조인 누르하치도 하지 못한 북경 함락에 성공한 예친왕을 도현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 같아.”
도현의 말에 남두병 장군은 정색을 했다.
“사실 소신도 조금 불안하기는 했사옵니다.”
“며칠 전부터 짐마차를 잔뜩 끌고 온 보급대가 연이어 도착했으니, 이번에는 아마 그동안 쓰지 못했던 홍이포를 앞세우고 오겠지.”
“그럼 큰일이지 않사옵니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될 일이니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면 되는 거야.”
“하지만…….”
“철벽보다 단단한 성벽이 있고 용맹한 병사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쳐들어오면 막아 낸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현재로서 이것만큼 분명한 명제가 없었기에, 남두병 장군은 걱정 가득했던 표정을 씻어 내며 고개를 끄떡였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적이 아주 단단히 마음먹고 공격해 오는 만큼 어려운 전투가 될 테니 우리도 대비는 해 둬야겠지. 각 포대에 충분한 양의 화약과 포탄을 옮겨 놓고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해 체력을 회복시키도록 하게.”
도현의 지시에 남두병 장군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지휘부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병사들은 성안에 위치한 막사에 모여 꿀처럼 감미로운 휴식 시간을 가졌다.
“후우~!”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병사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뜨끈하게 불을 지펴 놓은 구들장 덕분에 온몸이 노곤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았다.
“거참, 방 안에서 그렇게 뻐끔뻐끔 피워 대면 어찌하오?”
맞은편에 앉은 다른 사내가 투덜거리자 병사는 킬킬 웃으며 일부러 얼굴에 대고 후 연기를 불었다.
“어허! 왜 이래?”
사내가 질겁한 표정으로 마구 손사래를 쳐서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정 못 참겠으면 밖에 나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맑은 공기나 쐬고 오시게, 나는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것이니.”
“아무튼 성깔도 지랄 맞아서는.”
“흥.”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콧방귀만 뀌고 말 그대로 방바닥에 딱 붙어 뒹굴거렸다.
“거, 영락없는 한량이로구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중년 사내가 웃으면서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멋들어진 턱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는 병사들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이 막사에 머무는 백인대를 지휘하는 하급 군관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연배인 다른 사내에겐 막말을 하면서 놀아도 그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아무렴, 한량이지요. 배부르지, 등 따시지, 우리 고을에서 가장 부자라고 하던 최 진사 댁 나리도 이렇게 팔자가 좋지는 못했을 거요.”
병사는 방금 전 먹어 치운 밥그릇을 들어 보였다.
도현의 지시로 병사들에겐 매일 적어도 한 끼씩은 고기반찬이 배급되었는데, 오늘은 사골을 푹 고아 만든 고깃국이었다.
“내 생일 때도 이렇게 좋은 밥은 못 얻어먹어 봤는데,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단 말이오?”
“그게 다 목숨값 아닌가. 당장 오늘이라도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 목을 걸고 싸워야 하는데, 자네는 전혀 무섭지 않나 보군.”
“무섭지요. 저번 전투에서 바로 옆에서 웃고 이야기하던 동료의 눈알에 화살이 박혀 지랄 발광을 하던 꼬락서니를 본 사람이 난데, 어찌 안 무섭겠소.”
“그거야 다들 그렇지.”
여기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공성전에서 살아남은 백전노장들이었다.
처음 동료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땐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다들 잊고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래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건 분명했다.
“한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이리 마음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소.”
“사정이 다르긴? 성벽 위에 올라가면 아직도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하지만 그냥 거기 있을 뿐, 쳐들어오진 않잖소.”
“우리가 방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너무 조용하니까 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놈들과 싸웠던 게 벌써 사흘 전이오.”
그러면서 병사는 입술 끝으로 까딱거리던 곰방대의 재를 탁 털었다.
“그러고 보니…….”
“간만에 맞는 소리도 하는군.”
“지금까지 그렇게 지독하게 덤볐으니 이제 지칠 만도 하지.”
“맞아.”
다들 휴식을 취하느라 조용하던 막사 안에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꽤 컸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동의했다.
“이러다가 그냥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야?”
“그럼 좋지.”
“누가 아니래?”
어느새 병사들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르구먼, 물러.”
그때 턱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무릎을 탁 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청군이 과연 그렇게 우리 입맛대로 움직여 줄 것 같은가? 놈들이 조선 땅에 쳐들어와 저지른 행패를 떠올려 보게. 아마 더 칼을 갈면 갈았지 절대 가만히 놓아주진 않을걸.”
전투 경험은 물론이고 그래도 하급 군관이라 훨씬 보고 듣는 것이 많았기에 병사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느긋한 표정으로 풀어져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어느새 다시 가벼운 긴장감이 떠올랐다.
중년 사내는 좋은 분위기를 깨서 미안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괜한 기대감을 품고 긴장이 풀어지면 안 됐기에 일부러 악역을 자처했다.
“그럼 놈들이 곧 다시 쳐들어올 거라는 말입니까?”
“그래. 저 많은 대군을 일으켜 놓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그때 가서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 말을 끝으로 중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으음.”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막사 안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고 병사들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다음 날, 그동안 조용하던 청군이 숙영지를 나와 성 앞에 도열하면서 짧았던 평화가 깨지고 전장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붉은색 망토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예친왕이 말을 타고 나와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그리고 도현이 예상한 대로 지금까지 화약이 없어 고철 신세였던 마흔 문의 홍이포를 끌고 나와 보란 듯이 전투대형 앞에 방열했다.
홍이포의 등장에 조선군 병사들은 바짝 긴장했고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서 있던 도현도 낮게 침음을 흘렸다.
“마흔 문이라…… 꽤 많군.”
“전하의 말씀대로 예친왕이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입니다. 저길 보십시오,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팔기군까지 나왔습니다.”
얼굴을 살짝 굳힌 남두병 장군이 한쪽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한족 보병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복색의 팔기군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대형 뒤편에 모여 있었다.
기병인 팔기군까지 공성전에 투입한다는 건 심양을 함락시키겠다는 예친왕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음을 의미했다.
주위를 둘러본 도현은 장수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자 일부러 더 과장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 봤자 성벽을 넘지 못하고 모두 차가운 눈밭에 드러눕게 될 거야. 오죽 급했으면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 해 공성전에 투입하다니, 예친왕이 측은하군. 안 그런가들?”
“하하하! 맞사옵니다.”
“이십만이 아니라 백만 대군을 끌고 와도 심양성은 함락시키지 못할 겁니다.”
“압록강에서 싸워 보니 팔기군도 별것 아니더군요.”
박영식을 시작으로 장수들 모두 한마디씩 하며 긴장을 풀고 전의를 다졌다.
“청군이 이처럼 발악을 하는 걸 보면 이번 전쟁도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에 영광스러운 승리의 깃발을 올리는 건 우리가 될 테니, 다들 최선을 다해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옛.”
우렁찬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린 도현은 정면에 있는 청군 진영을 바라보면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다른 장수에게 보급로 확보 임무를 맡기고 급히 복귀한 야골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예친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버티고 선 심양성을 잠시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예.”
전투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전장 가득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방열을 끝내 놓고 대기하던 청군 홍이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둥둥둥!
“발사!”
지휘관이 사격 명령을 내리자 길게 늘어서 있던 홍이포들이 차례차례 포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우렁찬 포성이 귀를 때리면서 천지가 진동했고 매캐한 화약 연기가 앞을 가렸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은 심양성 곳곳에 떨어졌다.
쉬우우웅!
콰꽝! 쿠쿵! 쿵!
“와아!”
빗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쏜 포탄이 성벽을 때리자 그동안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퍼부어 대는 포격에 고생했던 청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예친왕도 잘하면 오늘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무된 표정을 지으며 돌격 지시를 내렸다.
“오늘에야말로 심양을 탈환하자. 공격하라!”
돌격 깃발이 오르자 제일 앞에 서 있던 한족 보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가자!”
홍이포의 포격 지원을 받고 며칠 동안 쉬며 재충전을 해서 그런지 병사들도 그 어느 때보다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쿠쿵!
후두두둑.
상대가 쏜 포탄이 명중했는지 육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그러자 포루 안에 있던 포수들이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겁먹지 마라. 놈들이 아무리 포탄을 쏴도 포루 안에 있는 이상은 우릴 상하게 하지 못한다. 무시하고 반격해라!”
최진석이 큰 소리로 독려하자 그제야 포수들은 정신을 차리고 각자 맡은 화포에 달라붙어 사격 각도를 잡았다.
얼마 있지 않아 두 번째 포탄이 포루에 명중했지만 아까와 달리 포수들은 멈칫거리지 않고 묵묵히 포구에 화약과 둥근 포탄을 밀어 넣었다.
“장전 끝!”
“좋아, 쏴!”
최진석의 구령에 포신을 밖으로 내밀고 있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퍼퍼퍼펑!
사방이 꽉 막힌 실내라서 더 크게 들리는 폭음과 함께 바퀴가 달린 포가에 얹힌 화포가 발사 충격으로 인해 뒤로 밀려났다.
“적이 포격을 하지 못하도록 홍이포부터 먼저 없애라!”
악을 쓰며 외치는 최진석의 말에 화포장들은 포구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착탄 지점을 확인하고 고각을 다시 조정한 뒤 곧 이 탄을 발사했다.
숙련된 포수들답게 금방 재장전을 끝내자 화포장은 심지에 불을 붙였다.
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불이 타들어 가더니 이내 우렁찬 포성이 울렸다.
전투 시작 전에 각 화포마다 연속해서 열 발을 쏠 수 있는 양의 포탄과 화약을 놔두었지만 초반부터 양쪽의 포격전이 격렬해지면서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다.
“화약 더 가져와!”
“뭘 꾸물거리고 있어!”
화포장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치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창고에서 포탄과 화약이 든 나무상자를 낑낑거리면서 가져다주었다.
이쪽이 쏘는 만큼 포루에 명중하는 포탄도 점점 늘어났지만, 커다란 돌을 잘라 튼튼하게 쌓아 올리고 아름드리 통나무로 지지대까지 군데군데 세운 덕분에 끄덕하지 않고 잘 버텨 줬다.
그러자 포수들은 든든하게 포탄을 막아 주는 포루를 믿고 침착한 모습으로 포격을 이어 갔다.
조선군과 달리 완전히 노출된 채 방포를 하고 있던 청군 포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터지는 포탄에 크게 동요했고 갈수록 포를 쏘는 것이 늦어졌다.
쉬우우우웅! 꽈아앙!
“흐익.”
앞으로 사십 보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자 청군 포수들은 기겁을 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본 청군 장수는 눈을 치켜뜨고 손에 든 장검을 엎드려 있는 포수의 목에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겁쟁이 같은 놈, 어서 일어나 화약을 재지 못하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포수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다른 포수들도 겁먹은 얼굴로 허둥지둥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화약통과 포탄을 주워 들었다.
“빨리 움직여라!”
“예.”
날카로운 호통에 포수들은 서둘러 장전을 끝내고 심지에 횃불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든 청군 장수는 시커먼 포탄이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헉!”
그대로 몸이 얼어붙은 청군 장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그저 헛바람만 삼켰다.
그리고 얼마 후 밝은 섬광이 눈을 멀게 하는 동시에 요란한 폭음이 그의 고막을 강하게 때렸다.
정신을 잃은 청군 장수는 뒤이어 휘몰아친 충격파에 장난감처럼 몸이 날아갔고, 포탄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튄 불꽃은 홍이포 옆에 잔뜩 쌓아 둔 화약 상자에 옮겨붙으며 유폭을 일으켜 엄청난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콰콰쾅!
커다란 화염과 폭음에 일부 병사들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말들도 앞발을 들어 올리며 날뛰었다.
예친왕이 탄 군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흥분해서 거칠게 두레질을 하는 걸 겨우 달래서 진정시켰다.
이히히힝.
“워, 워.”
고개를 돌려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본 예친왕은 포격을 받은 홍이포뿐 아니라 유폭이 일어나며 삼십 보 간격으로 나란히 붙은 화포 서 문이 한꺼번에 다 박살 난 데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까지 휩쓸려 죽은 것을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젠장! 빨리 조선군 화포부터 무력화시키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애를 쓰고 있지만 단단한 포루 안에 들어가 있어서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왕태봉의 말에 예친왕은 앞에 보이는 높다란 포루를 노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래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었어도 계속해서 두드리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어. 포루를 집중 공격하라고 해!”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는 원거리에서 포탄을 날려 대는 화포부터 제압해야 된다는 것에 이의가 없었기에 왕태봉은 군말 없이 머리를 숙였다.
“옛.”
예친왕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청군 포병대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화력을 포루에 집중시켰고, 이건 조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쉬우우웅!
꽈꽝! 꽝!
격렬한 포격이 오가는 가운데, 화포 숫자도 많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한 포루에 보호를 받는 조선군이 조금씩 우세를 잡으며 청군 홍이포를 하나씩 침묵시켜 갔다.
이처럼 서로 상대를 먼저 제압하기 위한 포병대의 피 말리는 포격전이 계속되는 한편, 성벽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양측 보병들 간의 싸움도 이에 못지않게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채채챙! 챙! 챙!
“으악!”
“큭.”
그사이 운제雲梯 같은 공성병기를 수십 대나 만들어 낸 청군은 말과 인력을 써서 성벽 아래까지 끌고 간 뒤 긴 사다리를 펼쳐 성을 공략했다.
“방포하라!”
타타탕! 탕! 탕!
이에 맞서 조선군이 신형 조총과 화살을 쏴 상대를 공격했지만 청군은 그동안 당한 걸 교훈삼아 두꺼운 나무에 철판을 덧댄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를 들고 전진해 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이 난무했고, 높다란 성벽은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도현이 있는 문루 앞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적이 성벽 위로 한 발자국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화살이 문루 위까지 날아오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든 장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다.
그런 도현의 등 뒤로 국왕을 상징하는 커다란 봉황기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힘차게 나부꼈다.
한편 말을 탄 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예친왕은 홍이포까지 투입해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조선군의 방어가 좀처럼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야골타.”
“예, 섭정 전하.”
“자네가 팔기군을 끌고 가서 성문 위에 황룡기를 꽂도록 하게.”
황룡기는 청나라를 상징하는 깃발로 금색 바탕에 한 마리의 용이 그려진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눈을 번득이며 짧게 대답한 야골타는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팔기군 병사들 앞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러고는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섭정께서 심양성을 되찾아 오길 원하신다.”
지금까지 계속 전투를 벌이느라 지친 한족 병사와 달리 전력을 유지하며 휴식을 취했던 팔기군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며 호응했다.
“우오!”
비록 공성전을 위해 말에서 내렸지만 정예들답게 전의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성을 함락시켜 버릴 듯한 기세였다.
“돌격! 조선 놈들한테 팔기군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와아아!”
야골타가 장검을 앞으로 쭉 뻗으며 돌격 명령을 내리자 삼만에 달하는 팔기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팔기군의 가담은 전장 분위기를 급격히 요동치게 만들었다.
“전하, 팔기군이 움직였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든 도현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팔기군의 모습에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예친왕이 승부수를 띄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그래 봤자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야.”
“맞사옵니다.”
팔기군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신경이 쓰이는지 도현은 손에 든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그사이 성벽 아래에 도착한 팔기군은 제일 취약한 성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성문을 부숴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온 팔기군 병사들은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서서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쿵! 쿵! 쿵!
“읏차! 읏차!”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힘껏 내려칠 때마다 나무 조각이 사방을 튀며 성문에 흠집이 푹푹 파였다.
“이런, 적이 성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라!”
도현이 소리치자 총병과 궁수들이 아래에 몰려와 있는 팔기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탕! 타탕!
슈슈슉! 슉!
총탄과 화살이 마구 쏟아졌지만 팔기군 병사들은 이런 경우에 대비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간혹 총탄이 방패를 뚫거나 틈새로 들어온 화살에 몇몇 팔기군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성문을 부수어 나갔다.
얇은 철판을 겉에 덧대 단단히 보강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일각도 못 버티고 성문이 뚫릴 것 같았다.
“저런!”
아래를 내려다본 도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남두병 장군을 불렀다.
“남 장군.”
“말씀하옵소서.”
“성문이 뚫려서는 절대 안 되오. 당장 비격진천뢰를 써서 밑에 있는 적을 모두 날려 버리도록 하시오!”
“옛.”
짧게 대답한 남두병 장군은 뒤로 몸을 돌려 근처에 있던 군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압록강 전투에서 많이 써 버려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언제 성문이 깨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아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 병사들이 검은색에 커다란 쇠공 모양의 비격진천뢰 두 발을 가지고 올라왔다.
“심지를 조정하고 어서 밑으로 집어 던져라.”
“네.”
유혁연의 말에 병사들은 목곡에 감긴 화약선을 최대한 짧게 조정해서 내부에 다시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삐죽 튀어나온 심지에 불을 붙이고는 지체 없이 성문 아래로 집어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휘이익.
거무튀튀한 비격진천뢰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자 적병들은 돌덩이인 줄 알고 분분이 옆으로 피했다.
퍽.
묵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박힌 비격진천뢰를 본 적들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글쎄.”
겉보기에는 포탄처럼 생겼는데 터지지도 않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집어 던졌으니, 비격진천뢰를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적들은 요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라 호기심을 풀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내 관심을 끄고 성문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뭔지는 몰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바로 골로 가겠군.”
“그러게.”
“뭣들 하는 거야! 불발탄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전투에 집중해!”
그 순간 내부에 넣어 둔 시한장치가 다 타들어 간 비격진천뢰가,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폭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꽈아아앙!
환한 섬광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진 파편에 아무것도 모르고 반경 사십 보 안에 있던 적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다.
“으아악!”
“큭.”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간 뒤 드러난 광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인을 잃은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고, 파편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적병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벌레처럼 흙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걸 본 팔기군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슬퍼할 여유도 없이 다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허둥지둥 방패를 들어 올려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적병들은 피칠갑이 된 채 꼬꾸라졌다.
이쯤 되면 물러갈 만도 했지만 야골타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부하들을 몰아붙였다.
“도망치는 놈들은 내가 직접 목을 베겠다. 쉬지 말고 공격해라!”
그냥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팔뚝에 빨간 띠를 맨 독전대를 뒤에 배치해서 적병들이 공격을 머뭇거리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러다 보니 계속해서 비격진천뢰를 다섯 발이나 더 터트려 상대편에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도끼질을 해 댄 팔기군은 결국 성문을 부수고 말았다.
우지끈.
꽈앙!
“됐다!”
부서진 성문으로 팔기군 병사들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청군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쌓아 둔 옹성 입구만 부서졌을 뿐, 본래 성문은 아직 건재하게 남아 있었기에 적군이 성안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적군의 기세로 볼 때 성문이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예친왕은 드디어 옹성 입구가 뚫리며 답답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성전을 타계할 기회를 포착하자 예비대까지 모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와아아!”
“봐라! 이제 조금만 더 두드리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남은 성문마저 깨부수고 안에 있는 조선군을 모조리 다 도륙해라!”
잔뜩 고무된 예친왕의 외침에 야골타는 팔기군 병사들을 성문 쪽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어느새 좁은 옹성 안이 팔기군 병사들로 가득 들어찬 가운데, 적들은 또다시 도끼로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성벽 아래와 성문 주위에는 이미 죽은 시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지만, 적군은 이제 지겹게 이어지던 공성전의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내며 성을 공략했다.
이대로 적군의 진입을 속수무책으로 허용하며 지금까지 잘 버텨 오던 조선군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팔기군이 금방이라도 성문을 깨 버릴 듯 거센 기세로 달려드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서 문루를 지키고 있던 도현은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크게 외쳤다.
“지금이다, 쏴라!”
그러자 문루와 옹성 성벽 위에서 대기하던 총병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서 아래에 몰려 있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탕! 탕!
귀청을 찢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문루와 옹성이 짙은 화약 연기에 뒤덮여 잠시나마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총탄이 발사됐다.
“재장전, 발사!”
군관의 지시를 들으며 재빨리 장전을 끝낸 총병들은 이 탄을 쐈고, 그 뒤로도 쉬지 않고 계속 동작을 반복하며 총탄을 날려 댔다.
화약 연기 때문에 밑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적병들이 웅성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딱히 조준할 필요도 없이 쏘면 맞게 되어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총성에 섞여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끄악.”
“컥!”
“사, 살려 줘.”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팔기군은 한 번에 수십 명씩 피를 뿌리며 시체로 변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디로 몸을 숨길 곳도 없는 데다가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몰려 있는 팔기군은 고스란히 총탄을 다 맞으며 살아 있는 표적이 됐다.
이렇게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야골타는 병사들을 다그쳐 웅성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무질서하게 좁은 웅성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온 팔기군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총탄에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완전히 개미지옥이 따로 없었는데, 겨우 안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청군 지휘관들이 돌입을 중단시켰을 때에는 이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옹성 내부가 죽은 팔기군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뛰어 들어갔던 천인대 하나가 고스란히 전멸당한 것이다.
청군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지금이 승부처라고 판단한 도현은 여태까지 쓰지 않고 아껴 둔 신기전을 쏴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적을 타격했다.
“발사!”
성안에 방열해 놓은 화차 마흔 대가 신기전을 일제히 쏘아 올리자 엄청난 화약 연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짙게 깔린 화약 연기 사이로 포수들은 한쪽에 세워 둔 수레에서 새 신기전을 가져와 발사가 끝난 화차에 재장전했다.
쉬이이익! 쉬쉭! 쉬이이익!
화포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섬뜩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신기전 수천 발은 포물선을 그리며 성벽을 넘어가 청군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퍼펑! 펑! 펑!
그러자 화살대 아래에 달려 있던 긴 원통에서 작은 쇠구슬 수천 수백 개가 쏟아져 나와 청군을 덮쳤다.
후두두둑.
“헉!”
“꾸엑.”
쓰러진 적병들 중 머리나 심장 같은 치명적인 곳에 파편이 박혀 즉사한 자들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면서 고통 속에 피를 흘리며 흙바닥을 기어 다녔다.
화차 부대는 연달아 세 번이나 발사해 무려 사천 발이나 되는 신기전을 청군에 퍼부었다.
이것만으로도 상대편의 기세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지만, 조선군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청나라 놈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 줘라. 방포!”
최진석의 명령에, 치열한 포격전 끝에 청군 홍이포를 모두 침묵시킨 조선군 화포들이 다시 불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포격을 받아 여기저기가 부서졌지만 그래도 아직 건재한 포루에서 발사된 수십 발의 포탄은 가뜩이나 신기전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청군을 마구 유린했다.
특히 조선군이 쓰는 포탄은 흙바닥에 박히는 단순한 쇠공이 아니라 내부에 화약을 잔뜩 채운 것이어서, 터지면 영향권 안에 있는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엄청난 진동과 충격이 청군을 엄습했고, 날카로운 파편은 사방으로 튀어 적병들을 찢어발겼다.
충격이 얼마나 큰지 마치 땅이 다 뒤집히는 것 같았다.
우르릉! 꽈아앙!
쿠쿵!
“으, 으아아악!”
“제발 살려 줘.”
“큭.”
적병들 사이에 포탄이 떨어져 터지자 어떤 이는 머리가 날아가고 다른 병사는 파편이 온몸에 박혀 즉사했다.
충격파에 허공으로 떠오른 적병들은 한참 멀리 튕겨 나가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동요하지 말고 계속 조선군과 싸워라!”
말 위에 탄 야골타가 손에 든 장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지만, 그보다 더 큰 폭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설사 야골타의 외침이 들렸다고 해도 이미 기세가 꺾인 적병들이 그의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적었다.
그 정도로 각종 화포와 신기전 그리고 총병들까지 총동원해 마치 보유한 화약을 다 써 버리기라도 할 듯 마구 뿜어 대는 조선군의 화력은 무시무시했고, 상대편에 큰 공포를 안겼다.
꽝하고 폭음이 나는 곳에 살아남은 생명은 아무도 없었다.
폭발은 적병들을 삼켰고 이내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도, 도망쳐야 돼!”
“흐익.”
두려움을 견디다 못한 청군 몇몇이 비명을 질러 대면서 뒤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 비겁한 놈들, 당장 멈추지 못할까!”
분노한 야골타가 당장 쫓아가 때려죽일 듯 노호성을 터트렸지만 도망병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포가 삽시간에 퍼져 나가, 후퇴 명령이 없었는데도 한족 병사는 물론이고 정예인 팔기군까지 너도나도 자기 진영으로 도망쳤다.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예친왕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도망치지 말고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러나 이미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한 전열을 수습하는 건 쏟은 물을 다시 주워 담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친왕의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자 그의 화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천하에 쓸모없는 버러지들 같으니……!”
그는 주위에 있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크게 손을 들어 명령했다.
“도망치는 병사는 모조리 베어 버려라!”
“하, 하오나.”
“저들 전부를 말씀입니까?”
“그래. 뭣들 하고 있나? 어차피 저런 겁쟁이들은 있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예친왕이 흥분해서 외치는 말에 장수들은 당황해서 그를 만류했다.
“앞서 도망치는 자들을 죽여 봤자 다른 사람이 뒤를 이을 뿐입니다. 지금은 일단 고정하시고 병사들을 추슬러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한둘도 아니고 공격에 나섰던 병사들 전부가 도망쳐 오고 있는데 그들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승기는 조선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닫고 있는 가운데, 예친왕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격한 분노를 가슴에 품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무슨 치욕인가!”
한낱 소국에 불과하다며 조선을 눈 아래에 두고 얕보던 예친왕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전쟁터에 나서면 항상 앞에 나가서 장군들을 진두지휘하며 싸웠고, 전략적 후퇴는 있었어도 결코 적에게 등을 보이는 꼴사나운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추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빠각!
너무 힘을 준 탓에 예친왕이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이 뚝 하는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는 바닥을 후려치듯이 지휘봉을 내던지고는 말고삐를 움켜쥐고 돌아섰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더 버티는 건 무의미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예친왕은 쉽사리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섭정 전하!”
“숙영지로 돌아간다!”
히이잉!
애마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위로 들어 올렸고, 예친왕은 그 한마디 말만 남긴 채 성난 몸짓으로 숙영지를 향해 내달렸다.
예친왕이 결단을 내리고 사라지자 다른 청군 장수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후퇴! 후퇴한다!”
사방에서 깃발이 마구 휘날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한편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도현은 지독하게 공격을 해 대던 청군이 무수히 많은 시신만을 남긴 채 썰물처럼 뒤로 물러서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늘도 성을 지켜 냈군.”
지금까지 공성전을 벌여 오면서 가장 격렬하면서도 힘든 전투였다.
중간중간 방어선이 무너질 뻔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병사들이 열심히 싸워 준 덕분에 모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공을 들여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자존심 강한 예친왕의 성격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마 지금쯤 화병이 나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오만함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예친왕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것을 직접 구경하고 싶었는데 사뭇 아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청군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함께 전투를 치른 장수들이 쾌재를 울리며 들뜬 목소리로 고했다.
“승리를 거두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이제 청군의 기세도 주춤하겠군요.”
“오늘의 승리는 모두 다 전하 덕분입니다!”
온갖 축하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두병 장군이 도현에게 말했다.
“이렇게 크게 당했으니 이제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낼 겁니다. 한동안은 다시 소강상태가 이어지겠군요. 차라리 포기하고 이대로 물러나 줬으면 제일 좋겠습니다만…….”
“과연 그럴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는 표정으로 도현이 답했다.
“청군이 어찌 나올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지. 예친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일세.”
그러면서 도현은 뒷짐을 진 자세를 풀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막 전투가 끝나 힘들겠지만,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부서진 방어 시설을 속히 다시 복구하도록 하게.”
“옛.”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무거운 얼굴로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을 둘러봤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성벽 아래는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신의 대부분이 성한 데 없이 갈가리 찢겨 있었고 피가 흘러 누런 흙바닥을 온통 붉게 만들었다.
조선군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피해가 컸는데 여기저기에 병사들이 부상을 입고 힘없이 성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방어 시설도 망가진 곳이 눈에 보였다.
특히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성문 옹성 안은 살아 있는 자보다 시신이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부상당한 동료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병사들은 부상병을 들것에 실거나 부축해 내성에 있는 치료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군 전사자들을 정성스럽게 수습해 성안 공터에다 임시로 가매장을 했고 적군 시신은 전염병이 도는 것을 막기 위해 한쪽에 모아 화장하며 전장을 수습했다.
이날 전투로 청군은 무려 사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홍이포는 물론이고 최정예인 팔기군까지 투입하고도 심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청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조선군 앞에서 병사들이 지휘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겁에 질려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후퇴해 버리는 추태까지 벌였기에 예친왕의 분노는 더 극에 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명령을 듣지 않은 병사를 전부 처형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대신 제일 먼저 등을 돌리고 도망친 병사 이백 명을 잡아낸 예친왕은 숙영지 한가운데 모든 병력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의 목을 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단했다.
그러고는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 바로 다음 날부터 공성전을 재개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치고 사기마저 바닥을 기는 청군은 처음처럼 예리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상태로 피해만 계속 늘어갔다.
명의 새로운 황도인 남경.
비운의 숭정제崇禎帝가 예친왕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에 쫓겨 도망친 끝에 안식처로 삼은 도시다.
주작단 소속으로 남경에서 활동 중인 김하방은 널찍한 비단옷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네모반듯한 포석 위를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현재 남경에서 그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는데, 본래대로라면 감히 황제를 알현하는 것을 청할 수도 없는 신분이지만 숭정제가 북경을 탈출할 때 그의 도주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남경에 정착하기까지 여러모로 손을 써 준 인연이 있었기에 자유롭게 황궁을 들락날락하며 소위 말하는 측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관직을 하사할 테니 출사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지만, 김하방은 상인이 그의 천직이라며 끝끝내 고사했다.
이렇게 갑자기 급부상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시기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으나 그건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김하방을 부러워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이런 배경을 이용해 그는 여러 가지 이권 사업에 뛰어들어 몇 년 만에 남경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태감 어른,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군가? 어서 오시게.”
새로운 황궁 바깥에 있는 태감의 저택을 찾은 김하방은 대문을 열어 준 하인에게 이름을 밝히자마자 곧장 안채로 안내되었다.
태감이 사는 저택은 크고 넓은 마당과 안채를 중심으로 양옆에 별채가 세워져 있는 형태였는데, 고관대작이나 남경 최고 부자의 저택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집이었다.
마침 안채에서 쉬고 있던 태감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나 김하방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앉게. 자네 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인 것 같네그려.”
“장사를 하느라 남경을 잠시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내 들은 기억이 나는군.”
태감은 잔주름이 진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엔 뭘 하고 왔나?”
“평소랑 비슷합니다. 광동성에 풍년이 들어 거기서 쌀을 매수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뭐 돈이 될 만한 것이 없나 살폈습지요.”
“하하하! 대륙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는 자네가 부럽네. 그런데 자네 얼굴을 보니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먼?”
황궁에서 오랫동안 황제를 모시며 보낸 세월은 헛것이 아니라는 듯, 태감이 예리한 눈길로 지적하자 김하방은 숨기는 것도 없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태감 어른은 못 속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하방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태감 어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태감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놀란 듯 기쁜 표정을 지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단단한 목합 안에 족히 어른 팔뚝만 한 굵은 인삼들이 열 개는 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너무나도 그윽해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이건 인삼이 아닌가?”
태감직에 있으면서 황궁에 진상되는 별의별 물건들을 다 보아 온 그는 한눈에 김하방이 들고 온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고 감탄하듯 말했다.
“게다가 다들 품질이 최상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이렇게 좋은 물건은 손에 넣기 힘들었을 텐데.”
“인삼 중에서도 제일 효능이 좋은 게 조선 삼이지요. 마침 아는 상인이 가지고 있다는 말에 태감 어른이 생각나 사들였습니다.”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나 모르겠군.”
“오래오래 장수 무강하시라고 드리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하, 내 그럼 고맙게 잘 받겠네.”
태감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인삼 보따리를 챙겼다.
안 그래도 나이가 많은 데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 심적으로 부담이 컸는지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김하방이 어찌 알고 눈치 빠르게 인삼을 갖다 주니 오늘 당장이라도 달여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래, 이번에 밖에 나가서 들은 이야기 중에 뭐 재밌는 소문 같은 건 없나?”
화제를 바꿀 요량으로 태감이 묻자, 김하방은 기다렸다는 듯 탁자에 바짝 다가앉았다.
“안 그래도 태감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조선이 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음,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는 걸 보면 조선이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더군.”
“태감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아무렴,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그 정도로 큰 소란을 어찌 모르겠는가? 특히 상대가 무엄하게도 오랑캐 주제에 북경을 차지하고 있는 청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지.”
태감이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당시 반란이 크게 일어나긴 했어도 섭정왕이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북경에서 그리 초라하게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라는 만인지상의 지위에 앉은 자가 목숨을 위협당하며 맨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게 만들다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괴로운 기억을 만들어 준 자가 바로 섭정왕이었으니 지금도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감께서 상황을 파악하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빠르죠.”
김하방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이 바로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섭정왕은 휘하의 거의 모든 병사들을 데리고 심양에서 조선군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무력을 자랑하는 장수들은 물론, 창이나 칼 같은 병장기와 화약도 전부 다 짊어지고 갔단 말이지요.”
그제야 태감은 김하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고 눈을 번뜩였다.
“자네, 설마.”
“그렇습니다.”
김하방은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태감을 마주 보았다.
“사냥개가 집을 비웠으니 북경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죠. 누구든지 먼저 치는 사람이 승기를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팔기군에 워낙 크게 당해서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는 태감을 김하방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빈집 털이를 하려면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망설이는 순간 진 거라고 생각하고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여서 섭정왕의 뒤통수를 쳐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동안의 치욕을 설욕하는 것은 물론, 명의 깃발을 다시 중원에 휘날리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처음엔 미심쩍은 얼굴로 김하방의 말을 듣고 있던 태감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그 역시 청의 뒤통수를 쳐서 지금까지 수세에 몰리기만 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걸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막강한 군세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항상 걸림돌이었기에 김하방의 말은 엄청난 유혹으로 다가왔다.
한참을 고심하던 태감은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 내일 입궁하는 대로 폐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 그리고…….”
말을 살짝 끌던 그는 상인다운 약삭빠른 표정을 드러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앞에 있는 태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황상께서 결단을 내려 군대가 출진한다면, 보급 물자를 공급할 군상軍商은 저에게 맡겨 주실 수 없겠습니까?”
“뭐? 하하! 이 사람, 이제 보니 이걸 노린 거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와 명을 위하는 충심에서 드린 이야기입니다. 다만 어차피 필요한 군상이라면 제가 맡아서 미력하나마 북경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천연덕스러운 김하방의 대꾸에 태감은 그제야 속이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김하방이 뭘 노리고 이런 제의를 하는지 의심스러웠는데, 그 속셈을 알고 나니 흐린 하늘에 잔뜩 끼었던 먹구름이 깨끗하게 걷히는 기분이었다.
“후후후, 뭐, 그렇다고 하세.”
“그럼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거야 황제 폐하의 뜻에 달려 있지 않겠나? 하나 폐하도 싫다고 하지는 않으실 걸세. 물론 그 전에 전쟁을 할지 안 할지부터 결정해야 되겠지.”
그러자 김하방은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제게 군상을 맡겨 주신다면 이익금의 오 할을 드리겠습니다.”
“흠.”
오 할이라면 결코 나쁜 제의는 아니었다.
아니,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엄청난 군비가 소모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떡고물 정도가 아니라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두드린 태감은 시원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내가 자네에게 목숨 값을 빚졌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인 김하방은 태감 모르게 살짝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어찌 됐든 명을 움직여 청나라가 조선과의 싸움에 전력을 다할 수 없도록 만들고 더불어 진짜 의도를 숨기기 위해 군상에 관심이 있는 척해 상당한 금전적 이득까지 챙기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한시도 청에 당한 치욕을 잊지 않고 오매불망 북경 자금성으로 돌아갈 날만을 벼르고 있던 숭정제는 태감의 이야기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일부 대신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했지만, 황제인 숭정제의 결심이 워낙 확고했고 화북 지역에 기반을 두고 피난을 온 대신들이 적극 찬성을 하면서 전쟁은 급물살을 탔다.
며칠 뒤, 청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양자강 근처에 나가 있던 하진 대장군에게 겨울이 지나면 북경으로 진군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떨어졌다.
머릿수만 많을 뿐이지 적군의 도강을 막아 내는 것도 벅찰 정도로 오합지졸인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가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명령이었기에 하진은 어쩔 수 없이 일단 준비를 하는 척이라도 했다.
그러자 이런 움직임은 얼마 안 돼 강 건너편에 있는 청군에 포착됐고 바로 북경에 파발이 보내졌다.
소식이 전해진 북경은 발칵 뒤집혔다.
정말 쳐들어올지 아니면 그냥 간만 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예친왕이 주력 병력을 대부분 빼내 간 데다 아직 작년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고 불씨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명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예친왕과 그를 따르는 군부 세력이 전공을 세우는 걸 바라지 않았던 태후는 곧바로 어린 황제의 이름으로 심양성을 공략하고 있는 군대에 철군 명령을 내렸다.
무릎까지 푹푹 들어갈 정도로 눈이 쌓인 가운데, 청군은 오늘도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격! 물러서지 말고 계속 밀어붙여라!”
“와아아!”
채챙! 챙! 챙! 챙!
뒤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장수들의 외침을 들으며 앞으로 달려 나간 적병들은 두 달 가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싸움에 피로 붉게 물든 성벽에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어딜 올라와!”
타탕! 탕! 탕!
“으아악!”
“큭.”
그런 적을 향해 성벽 위에 있던 조선군들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조총 방아쇠를 당기거나 활을 쐈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사다리를 올라오던 적병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고 화살에 맞아 비명을 내지르며 밑으로 떨어졌다.
“다 뒈져 버려!”
도현 역시 문루 위를 지키고 서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북을 울리고 적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뒤편에 있던 고수鼓手는 도현의 외침에 더욱 가열차게 북채로 대고를 두드렸다.
둥둥둥! 둥둥둥!
그러자 병사들은 전장 가득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힘을 내 적과 맞서 싸웠다.
청군은 끊임없이 성을 두드려 댔지만, 저번처럼 날카로운 예기는 보이지 않고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청군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성벽 아래 시신만 잔뜩 남긴 채 숙영지로 물러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현재 청군이 처한 상황을 알려 주듯 숙영지는 활력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꽝!
“벌써 며칠째야? 조선을 점령하는 건 고사하고 심양도 탈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창피냔 말이야!”
노발대발해서 예친왕이 고함을 지르자 지휘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그저 죄인처럼 머리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예친왕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내 이야기가 말 같지 않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아무 대답이 없어!”
잔뜩 가시가 돋쳐 있는 말에 장수들은 머뭇거리다가 하나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군의 방비가 너무 견고합니다.”
“계절도 우리 군에 도움이 안 돼서 눈과 강추위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병사들 대부분이 감기에 걸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 명이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 대던 장수들은 상석에 앉아 있는 예친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닫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색을 하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모여 있는 장수들을 쓸어본 예친왕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북경으로 철군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시선을 받은 장수가 변명을 하려 하자 예친왕은 말을 끊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휘관이라는 자들이 이따위 나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 아닌가! 겨울에 전쟁을 해서 힘든 건 조선군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애초에 이런 걸 다 감안하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변명에 불과해!”
단단히 화가 났는지 예친왕이 연신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자 장수들은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그도 여러 가지로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항상 발밑으로 여기던 조선군을 상대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장수들을 다그치는 거였는데,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을 때 갑자기 입구가 열리며 군관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방해를 받은 예친왕은 따가운 시선으로 군관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뭐야!”
그러자 군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북, 북경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칙사를 보내셨습니다.”
“칙사가 왔다고?”
뜻밖의 말에 예친왕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예.”
“으음.”
장수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술렁이는 가운데 왕태봉은 정색을 하고는 예친왕을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일로 칙사가 온 걸까요?”
“나도 모르지. 아무튼 황제께서 보낸 칙사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안으로 데려와.”
“예.”
군관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관복을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수행원들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섭정께서는 황제 폐하의 칙서를 받으시오!”
비단 두루마리가 올려진 나무 쟁반을 받쳐 든 칙사의 외침에 예친왕은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원래는 바닥에 머리를 세 번씩 박으며 절하는 걸 세 번 반복하는 삼배구고두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쪽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칙서를 받아야 했지만 예친왕은 살짝 허리를 숙였다가 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대역죄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예친왕은 거리낌이 없었고 주위에 서 있던 장수들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칙사마저 살짝 눈가를 찌푸릴 뿐,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는데 황제의 권위도 무시할 만큼 예친왕이 가진 힘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칙사는 두루마리가 놓인 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두루마리를 집어 든 예친왕은 봉인을 풀고 그 자리에서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내 얼굴을 와락 구긴 그는 앞에 서 있는 칙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정말 황상…… 아니, 태후의 뜻인가?”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예친왕이라지만 도를 넘어서는 말에 칙사는 짐짓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무엄하십니다. 섭정께서 황족이시고 사사로이 황상의 숙부가 되신다지만 너무 말씀이 심하신 것 같군요.”
그러자 예친왕은 한쪽 볼을 실룩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안하무인격의 행동에 칙사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대를 꾸짖을 용기는 없었기에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칙서에 옥쇄가 찍혀 있으니 당연히 황제 폐하의 뜻이지요.”
“그렇단 말이지.”
아직 어린 황제가 이따위 칙서를 보낼 리가 없으니 결국 태후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걸 예친왕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뿌드득!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동안 오냐오냐하며 숙여 줬더니 이제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군.”
예친왕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자 칙사는 얼굴을 굳혔다.
“폐하의 칙명을 거부한다면 반역이 됩니다.”
그러자 예친왕은 앞에 있는 칙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게.”
못 들은 척 대답을 회피하는 예친왕의 태도에 칙사는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모쪼록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칙사로 보내진 이상, 확실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었지만 여기서 당장 결정을 내리도록 예친왕을 몰아붙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했고 또 상대의 위치를 생각할 때 그럴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만약 이 이상 밀어붙였다간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예친왕의 분노를 사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목이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예친왕이 감히 황제가 보낸 칙사에게 손을 댈 리는 없겠지만, 군권을 쥔 그를 괜히 자극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칙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내 너른 지휘 천막 안에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전하, 칙서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야골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예친왕은 돌아서서 의자에 앉는 것과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황제의 칙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 북진해 올 조짐이 보이니 그만 전투를 끝내고 회군하라는군.”
“예에?”
“그럴 수가.”
충격적인 소식에 장수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는 크게 술렁였다.
한쪽에 서 있던 왕태봉도 정색을 하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예친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대로 심양을 탈환하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하다니,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그러면 황명을 거역하신 것이 됩니다.”
차마 반역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왕태봉이 돌려서 이야기를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장수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예친왕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장막 뒤의 실력자로 제국을 좌지우지 하는 것과 현 황제를 끌어내리고 직접 황좌에 앉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충분한 힘을 가졌고 잘 포장한다고 해도 반역을 일으키는 건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황제를 내세운 태후의 말을 따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자칫 그동안 공고히 쌓아 온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에 예친왕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런 예친왕의 눈치를 보며 왕태봉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칙서까지 보내온 걸 보면 명군의 준동이 심각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든 예친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왕태봉을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명군의 위협은 사실이고 솔직히 혹독한 겨울 추위와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더 이상 공성전을 지속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때맞춰 이렇게 칙서까지 내려왔으니 그냥 못 이기는 척 철군을 하시지요. 그리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준비도 철저히 해서 다시 조선군을 상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왕태봉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예친왕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한쪽 볼을 실룩이면서도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그걸 보고 예친왕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왕태봉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황명을 어기고 계속 심양을 공략하다가 정말로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와 북경으로 진격해 온다면 그 후폭풍은 엄청날 것입니다.”
순간 예친왕은 얼굴을 살짝 구겼다.
태후가 중심이 된 반대파의 탄핵이나 모함은 무섭지 않았지만, 그의 평생의 꿈이 중원을 통일하는 거였기에 애써 차지한 화북 지역이 흔들리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끄으응.”
“두 걸음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국을 크게 보시고 이번에는 잠시 숨을 고른다 생각하시어 칙명을 따르십시오.”
그러자 예친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야골타를 보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전 전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손가락으로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한참을 고심하던 예친왕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철군 준비를 하도록 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태봉뿐만 아니라 그가 내심 어떤 결정을 내릴지 마음을 졸이던 장수들 대부분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예친왕은 이유가 어찌 됐든 발아래로 보던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쓸쓸히 물러나야 한다는 것에 큰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며 참담한 얼굴을 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된 전투에 지쳐 있던 청군 병사들은 철군 명령에 크게 환호했다.
때마침 눈도 그치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며칠 뒤 청군은 숙영지를 걷고 북경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행군 대형으로 줄을 지어 이동하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말에 올라, 마치 철벽처럼 굳건히 서 있는 심양성과 높다란 문루 지붕에 바람을 맞아 나부끼는 조선군 깃발을 노려보던 예친왕은 평소의 냉철하던 그답지 않게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는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물러서지만, 다음에 다시 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을 탈환하고 말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 다짐을 한 예친왕은 말 머리를 돌려 행군 대열에 합류했다.
심양성을 사이에 두고 무려 두 달하고도 보름 동안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조선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십만 대군을 동원했던 청군은 절반이 넘는 십삼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최정예이자 예친왕의 권력 기반인 팔기군도 이만 명 가까이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홍이포 마흔 문을 포함해서 어마어마한 분량의 물자와 군자금을 허공에 날리고 말았다.
돈으로 따지면 백만 냥에 달하는,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오는 액수였다.
문제는 이 모든 걸 청 황실이나 조정이 아니라 예친왕 혼자서 다 부담했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섭정왕부에서는 강아지도 황금 수저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그동안 막대한 부富를 쌓았지만, 이번 한 번의 패배로 상당 부분을 까먹게 됐다.
돈뿐만 아니라 야심 차게 추진한 전쟁에 패배하며 군부 내 지지도 흔들리는 등 여러모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
도현이 지휘한 조선군도 이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기며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청군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었다.
조선 역시 인적, 물적 손실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예친왕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심양과 남만주 일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는데, 청나라가 존재하고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만주를 되찾으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심양은 양국 사이의 화약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