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 아무리 봐도 넌 미친 게 분명해
도박과 사랑의 힘으로 건조 중인 LNG선 8척.
명목상 주인은 건조자금 상당 부분을 투자한 마일드금융투자이다. 그러나 이 바닥 플레이어들은 그 배가 우리 회사의 자가발주인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회사로 찾아와 이리 귀찮게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귀찮게 한 러쉬쉬핑. 회장까지 직접 찾아와 위세를 과시하며, LNG선 4척을 사가시겠단다. LNG선 2척을 추가로 더 발주하겠다는 달콤한 선물까지.
꽤 유혹적인 제안이지만, 내가 그 정도에 흔들릴 지조 없는 남자는 아니다. 튕길 때는 튕겨줘야 제 맛이다.
“LNG선 2척을 추가 발주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진행하는 협상은 신조선 건조협상이 되겠군요. 맞습니까?”
“뭐, 그렇게 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죠. 형식에 구애 받지 말고 편하게 얘기합시다.”
“이 자리의 성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2박 3일 일정으로 가능한 지를 물어보는 겁니다. 말로는 LNG선 2척도 더 발주하고, LNG추진 컨테이너선도 발주하겠다고 하겠지만, 이 바닥은 문서로 얘기해야 합니다.”
“유일조선이 LNG선 팔겠다는 확답만 해 주시면 바로 실무팀 보내겠습니다. 발주는 확정했으니까, 스펙이니 설계니 그놈들끼리 지지고 볶으라고 하죠 뭐.”
러쉬쉬핑의 신조선사업본부 닐 퍼트 이사는 이 정도 튕김 따위는 예상했다는 듯이,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고민이다. 총 8척이니까 8곳이랑 쇼부 좀 치려고 했다. 우리 LNG선 사겠다고 달려든 곳이 한둘이 아니라서 최대한 많이 뽑아먹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첫 타자부터 LNG선 4척에 4억 달러짜리 선물을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달려드니, 바로 팔아버리고 싶다. 아, 이 나약한 인간이란.
고작 이거 먹겠다고 도박판을 벌인 것이 아니다. 나약해지지 말자. 더 뽑아먹어야 해. 그러니 더 튕기자.
“아시겠지만, 지금 LNG선 수요가 폭발할 지경이라 우리 LNG선을 탐내는 곳이 아주 많습니다.”
“물론이죠. 그래도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얼리버드에 대한 인센티브는 챙겨주는 것이 이 바닥 예의죠.”
“유혹하러 왔으면 우리가 솔깃할 정도로 유혹을 하셔야지요. 고작 LNG선 2척 더 발주하겠다는 걸로 유혹이 되겠습니까?”
“하하. 이래봬도 제가 캐나다의 카사노바로 불립니다.”
“그렇게 안 생기셨는데요…….”
“제 얘기를 마저 들어보시죠. 우리가 컨테이너선 확충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뭐든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회사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법이지요.”
“최고경영자과정에서나 나올 얘기는 그만 하시고, 우리를 유혹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더 많은 배를 발주하겠다?”
“하하. 한국 사람들은 참 성질이 급해요. 자, 들어보세요. 그래서 우리가 확정한 계획에 따르면, LNG추진 컨테이너선을! 그것도 2만TEU급으로! 그것도 20척을!”
“20척을?”
“아무리 늦어도 내년이 가기 전엔 발주할 생각입니다. 대략 40억 달러는 넘을 것 같습니다만……. 뭐, 우리 계획이 이렇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젠 좀 솔깃합니까?”
하아, 개새끼. 잘 꼬시네. 확정된 건 하나도 없고 말뿐이지만, 금방 사랑에 빠질 것 같단 말이지.
내 난처한 눈빛을 읽었는지 김태우 본부장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그래, 사랑에 빠진 난 이미 글렀으니 백전노장께서 마무리 좀 지어주세요.
“우리나라 사람만 성질이 급한 줄 알았는데, 캐나다 사람도 만만치 않군요. 허허.”
“유전자를 뒤지다 보면 한국인 핏줄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하. 자, 우리 할 얘기가 많으니, 어서 대답을 해 주시죠.”
“그래서 우리에게 발주하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작성할 의사가 있습니까?”
“일단 우리가 원하는 건 LNG선 매입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나서 나머지 얘기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허허. 협상은 마라톤처럼! 만나면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해야지, 만나자마자 결혼하겠다고 덤비면 되겠습니까? 시간 넉넉하니 찬찬히 얘기해 보죠. 우리도 야드 투어 한번 하고 올까요?”
“저번에 방문했을 때 구석구석 다 돌아보고 왔습니다.”
“허허. 새로 개장한 야드는 안 보셨지 않습니까? 그게 수리조선소로 쓰려고 만든 건데, 워낙 신조선 수요가 많아서 지금은 병행해서 돌리고 있습니다. 거기도 최신 설비로 가득하니, 일단 거기 구경이나 하고 오시죠. 맛있는 저녁도 먹고.”
“하하. 밀당이 장난이 아니십니다. 뭐, 그럽시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역시 김 본부장의 노련미. 난 아직 멀었어. 찾아오겠다고 대기하고 있는 해운사들이 잔뜩인데, 그깟 저질 멘트에 혹해서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렇게 첫날을 무사히 넘기고, 둘째 날부터 말 그대로 마라톤협상에 들어갔다. 휴우, 진 빠져.
***
“만족하십니까?”
“뭐 목마른 자가 우물 찾는다고. 우리가 목말라 죽겠는데, 그렇게 해야죠 뭐.”
“그럼 진하게 악수 한 번 합시다.”
러쉬쉬핑과 마라톤 한 번 제대로 했다. 우리 LNG선을 4척이나 사겠다는 걸 말리고 말리느라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곳에 4척이나 파는 건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왜냐? 2척만 팔고도 충분히 뜯어낼 수 있고, 내가 챙겨야 할 곳이 러쉬쉬핑 뿐이 아니니까.
“자, 그럼 정리해 봅시다. 올해 10월까지 LNG선 2척을 인도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4척이 아니라 아쉽겠지만, 대신 러쉬쉬핑이 원하는 대로 싸게 넘겨 드렸으니까 그걸로 만족하시죠. 그리고 어차피 투기성 발주 아닙니까? 4척이나 들고 다니다가 용선처 못 구하면 아주 큰 망신이죠. 그걸 생각하면 2척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생색 한 번 오지게 내십니다요.”
닐 퍼트는 악수를 하면서도 개운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 있어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 그 LNG선을 2억1500만 달러에 넘기는데, 무슨 표정이 그래?
“생색은 오히려 그쪽이 더 낸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가 단단히 호구 잡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는데요.”
“아이고, 호구라니요. 누가 들으면 억지로 발주한 줄 알겠습니다. 어차피 발주할 생각이었으면서, 우리한테 뜯긴 것처럼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 봐야 안 달래줍니다.”
“하하. 눈치 채고 있었습니까?”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으로 눈치 과목을 배웁니다. 우리 앞에서 어설프게 연기할 생각 마시죠.”
“생색 오지게 내면서 서로 얻어갈 건 다 얻어간 협상이었다고 평가하겠습니다.”
“그렇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요. 그나저나 신조선 건조 협상은 언제 들어갑니까? 하루라도 빨리 진행했으면 하는데요.”
“귀국하는 대로 바로 팀 꾸려서 보내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러쉬쉬핑이 호구 잡힌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럴 때 쓰라고, 윈-윈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주세요.”
그렇다. 러쉬쉬핑은 우리의 뻗대기 전략에 걸려 결국 호구가 잡혔다.
반년 뒤에 LNG선 2척을 받는 대가로 2013년 1분기 납기로 LNG선 3척을 발주하기로 했다.
그걸로 끝이면 대단히 섭섭했을 것이다. 진짜배기는 LNG선 따위가 아니었다.
러쉬쉬핑은 2014년 하반기까지 넘겨주는 조건으로 2만1000TEU급 LNG추진 컨테이너선 20척을 발주하기로 했다. 척당 2억2200만 달러! 44억4000만 달러짜리!
여기에 LNG선 3척을 더하면 무려 50억7000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이다. 아니지, LNG선 2척 사가는 것까지 합하면 55억 달러! 아유, 캐나다 메이플시럽 달달하네.
법적 구속력이 없는 MOU니까 안심할 수 없다고? 파기하는 순간 우리의 인연도 끝이야. 그러니 돈 부지런히 마련해놓으라고.
“뭐가 됐건 이번 계약으로 우리 러쉬쉬핑이 유일조선과 인연을 맺게 됐으니,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선박 제대로 만들어서 제때 인도해 주기 바랍니다.”
“그럼요. 품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흥컨선, 우진탱커, 유일품질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품질만큼은 우리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습니다.”
“대흥컨선, 우진탱커는 들어봤어도 유일품질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이고,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런데 컨테이너선은 무슨 배짱으로 20척이나 발주한 겁니까?”
“하하. 우리 형편까지 살펴볼 여유가 이제야 생겼습니까? 우리 빨아먹을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만.”
“러쉬쉬핑이 직접 운영할 리는 없고, 누군가한테 용선해 줄 것이 아닙니까?”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러쉬쉬핑은 선주사라 배를 빌려주는 역할만 한다. 그렇다면 2만1000TEU급 컨테이너선을 누군가한테 빌려주기로 했다는 건데……. 떠오르는 후보가 있다. 혹시 프랑스 CMM?
“하하. 차차 알게 될 것이라니까요. 건조대금 미납할 일은 없으니까 괜히 걱정하는 척하지 말고, 사진이나 찍으러 갑시다.”
“궁금해 죽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답이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사진 찍으러 가자니까요.”
“에라, 모르겠다. 그러죠.”
그렇게 러쉬쉬핑과 6조짜리 초대형 계약에 대한 의향서를 체결했다. 김해공항까지 리무진 버스로 안전히 모셔다 주는 최상의 서비스까지 제공했으니, 그야말로 윈-윈이다.
***
큰일이다. 아버지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거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네.
“허허허.”
“아버지, 좋으십니까?”
“허허허.”
“그러다 턱 빠질까 걱정됩니다.”
“허허허.”
“차라리 저를 혼내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저 오라고 해놓고 지금 계속 웃고만 계십니다.”
“허허허.”
아버지는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서야 비로소 말을 시작했다. 옹알이 시작한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네.
“너한테 미친놈이라고 한 건 사과하마. 허허. LNG선 팔아먹는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그걸로 6조 원어치나 더 뜯어먹다니……. 아니다. 사과는 취소하마.”
“네?”
“아무리 봐도 넌 미친 게 분명해. 허허허.”
“전 미친 겁니까, 안 미친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도시상선 건이나 잘 처리해. 안 그래도 계속 전화 온다. 튕기는 것도 적당히 해. 손 회장님 그러다 쓰러지실라.”
“러쉬쉬핑이랑 이제 막 얘기 끝났으니, 다음으로 도시상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시상선 손혁 회장이 아주 몸이 달아올랐다. 서울 가니까 갈치조림이나 먹자고 연락한 지가 보름이 넘어가는데, 내가 계속 뻗대고 있으니 간이 졸아들 때까지 졸아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6척은 도시상선에 넘기겠다는 것이 네 생각이냐?”
“제가 그럴 것 같습니까?”
“네가 그럴 놈이 아니지.”
“잘 보셨습니다. LNG선 팔겠다고 하면 고쟁이까지 벗어서 갖다 바칠 데가 한둘이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이 널 이리도 악랄하게 만들었구나. 허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습니다. 다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 명심해라. 우리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 평판을 잃을 수 있어.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이 바닥은 겸손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고작 2척 사면서도 우리한테 고맙다고 큰절 올리도록 만들겠습니다.”
“2척? 그럼 나머지 4척은 어찌할 셈이야?”
“머스트랑 스파이더가 번호표 뽑고 대기 중입니다.”
“허허. 거 참. 그놈들 등껍질을 얼마나 벗겨 먹어야 직성이 풀릴 셈이냐? 외화벌이 잘해서 좋긴하다만, 걔네들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우리한테 그렇게 뜯기는 거냐.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네.
“그래서 제 계획이 별로이십니까?”
“허허. 알아서 잘 해봐라.”
나도 나름 고민 많이 했다. 내년 초까지 시장에 나올 LNG선 8척을 어찌 팔아야 본전의 따블, 따따블까지 뽑아낼지 말이다.
결론은 두고두고 뽑아먹을 수 있는 4곳에 2척씩 나누는 것이다.
얼마나 뽑아먹을지는 오로지 내 능력에 달렸다. 러쉬쉬핑한테 거하게 뜯어낸 건 그냥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닐 퍼트 말대로 서로 생색 오지게 내면서 원하는 걸 얻어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까지 그렇게 뜯어낸다면 그건 결코 운이 아니다. 실력이다.
실력을 입증하러 서울 가자. 가서 갈치조림 가시까지 모조리 씹어먹어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