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 막걸리가 맞네
순양그룹 전략기획실의 분위기, 썩 좋지 않았다. 회사에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
“끌끌. 아, 아야.”
전략기획실 이상면 실장은 습관적으로 혀를 끌끌 차다 쓸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어찌나 혀를 찼는지 혀가 닳아질 지경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혀를 차는 일이 많아졌다.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제 구체적인 실행에 나설 때였지만, 난관에 부딪혔다는 느낌에 답답함이 커져갔기 때문이었다.
난관에 부딪힌 프로젝트는 계열사 구조조정으로 순양그룹의 체질을 바꿔보겠다는 취지였다. 명분은 그럴싸했다.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포부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그 구조조정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해도.
1차 과제는 중화학 계열사들의 매각이었다. 70~8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시기엔 순양그룹의 부흥을 이끌었던 효자였지만, 이젠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화학, 방산, 중공업 관련 계열사 매각 작업은 그렇게 진행됐다.
다른 곳도 아닌 순양그룹이 계열사를 매각하겠다고 나서니 인수후보로 선정된 기업들이 반색하는 것은 당연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바로 유일조선이었다.
“이 차장!”
이 실장은 이상혁 차장을 찾았다. 유일조선에 순양중공업을 매각하는 과업을 담당하는 자이기에 압박을 가할 생각이었다.
“네, 실장님.”
“자네 명성에 금이 가게 생겼어. 무슨 뜻인지 알지?”
“순양중공업 말씀이십니까?”
“그거 아니면, 내가 자네한테 뭐라 할 이유가 없지.”
“매각을 신속하게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자네가 고작 유일조선 따위한테 휘둘릴 사람이 아니잖아?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현재 매각협상이 진행 중인 건들은 매우 순조로웠다. 석유화학 계열사를 인수하겠다는 한 그룹은 예상을 넘어서는 가격을 부르며 순양그룹을 흡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조선은 순양중공업을 사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면서도 협상을 질질 끌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2015년까지 1차 과업을 끝내겠다는 전략기획실의 플랜에 차질을 빚을 상황이다.
“인수가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업가치가 떨어질 텐데, 굳이 지금 인수할 이유가 있느냐고 대놓고 말할 정도이니…….”
“나 참. 그놈들은 뭘 믿고 순양중공업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그리 확신하는 거야? 확신이야? 아니면 뻥카인 거야?”
“처음엔 뻥카인 줄 알았는데, 일관되게 얘기하는 걸 보면 확신범인 것도 같습니다.”
“허허. 날고 기는 기업들도 우리 제안에 환장하면서 달려드는데, 유일조선이 대체 뭐라고……. 끌끌.”
“올해 말부터 협상을 재개하자고 하는데, 계속 압박을 가할 생각입니다. 올해 말에 협상 재개가 아니라, 타결을 목표로.”
“왜 하필이면 올해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도 모르는 순양중공업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점을 딱 못 박을 리가 없습니다.”
“허허. 거참. 일단 알겠네.”
이 실장은 이 차장을 돌려보내고 나서 바로 순양중공업 한경록 사장을 급히 호출했다.
거제에 내려가 있던 한 사장은 호출한 지 1시간이 지나서 전략기획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제에 있더라도 전략기획실이 부르면 10분 내로 달려와야 했다. 그것이 순양그룹 전략기획실의 파워였다.
“네, 실장님.”
“오호라. 1시간밖에 안 걸렸네?”
“긴급한 호출이라 헬기를 이용했습니다.”
“허허. 잘했어. 내려갈 때는 차를 이용하도록.”
이 실장은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다. 유일조선이 계속 뻗대고 있는 이유가 시장의 소문과 관련이 있는지 말이다.
소문. 빅3가 해양플랜트 건조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해양플랜트는 건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상선보다 많은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사람이 어찌나 부족했는지, 전국에 ‘해양플랜트 인력 모집, 월 300 보장’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릴 정도였다. 그 때문에 건설시장에서는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업은 숙련도가 중요한 산업이다. 투입인력이 대폭 늘어났지만, 대부분은 단순 일용직에 불과했다.
숙련공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이라 작업효율은 뚝뚝 떨어지고, 관리비용은 크게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당연히 공정이 지연되기 시작했고, 지연된 날짜만큼 돈이 빠져나갔다.
이 모든 건 해양플랜트를 수주한 빅3가 정작 설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설계를 못하니 기자재나 후속공정에 대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소문에 소문이 더해지면서 빅3가 휘청거리는 상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실장은 그걸 확인해야 했다.
“한 사장. 요새 소문이 흉흉해. 우진조선이 해양플랜트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또 그걸 감추려고 장부에 손대고 있다는 소리도 있고. 알다시피 그게 우진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저도 그런 소문을 접하긴 했는데, 사실로 확인된 건 없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정말이야? 대흥중공업도, 우리 순양중공업도 손실충당금 쌓는다고 적자로 돌아섰는데, 우진조선만 독야청청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우진조선이 수주한 해양플랜트는 용가리 통뼈라도 되나 보지?”
“글쎄요. 남의 회사 사정까지는…….”
“뭐, 됐고. 거긴 어떻게 되는 거야?”
“거기라니요?”
“순양중공업 말이야!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끌끌.”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소리는 아주 술술 나오나 봐? 적자로 체면을 구겼으니 이젠 명예 회복해야지?”
“예상되는 손실금을 사전에 다 반영했기 때문에 이제 실적이 좋아질 일만 남았습니다.”
이 실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 사장의 말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사 중에서 가장 높은 영업이익률을 자랑했던 순양중공업은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 1분기까지 2분기 연속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조선업의 미래이자, 황금알을 낳은 거위라는 평가를 받았던 해양플랜트 건조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이 원인이었다.
“1분기에 공사손실충당금을 5,000억이나 쌓았지?”
“네, 맞습니다. 그에 대해서 제가 다시 설명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 됐고. 고작 해양플랜트 2건 때문에 5,000억이나 손실을 봤어. 그렇다면 다른 건들에서도 그만한 손실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겠어?”
“그건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공사 중인 것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또 검토했습니다.”
“허허. 이 답답한 양반아!”
“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것들 말고, 앞으로 진행할 것들 말이야! 그것도 손해 안 볼 자신이 있느냐 이거야.”
순양중공업은 해양플랜트로 이미 1조 원 넘는 손실을 봤다. 그나마 수익성 좋은 물량들로 희석이 됐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유연성 말대로 기업가치가 똥이 됐을지도 모른다.
해양플랜트로 큰 손실을 봤지만, 이 실장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신경 써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공사진행율이 20%밖에 안 되는 해양플랜트 2건에서 5,000억의 손실을 예상하고 충당금을 적립했다.
그렇다면 아직 공사가 진행조차 안 된 그 많은 계약들은? 이 실장이 우려한 것은 그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앞으로 착수할 공사에서는 손실이 안 나올 자신이 있느냐고.”
“죄송하지만 그건 확실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설계상으론 문제가 없다고 해도 실제 공사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걸 잡아내야지!”
“저, 그게……. 저희는 생산설계만 하는지라……. 사실 기본설계를 하지 않는 이상 정확한 비용을 계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막걸리가 맞네, 맞았어.”
“네?”
“1조, 2조짜리 물건을 만드는데 설계를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설계도 안 되는 걸 덜컥 받아와 놓고,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
이 실장은 한 사장의 억울해하는 표정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사장, 지금 내가 뭘 잘 모르고 얘기하는 것 같나?”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얼굴 보니까 억울함이 가득하구만. 그래, 내가 조선은 잘 몰라. 그래도! 설계가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 조선은 제조업이 아니야? 설계 대충해도 되는 산업이야?”
“…….”
제조업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이다. 안타깝게도 빅3 그 누구도 해양플랜트 설계의 핵심인 기본설계에 손조차 대지 못했다. 능력 부족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니, 설계가 안 되면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소리 아니야?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양플랜트 수주에 올인했으면 그만한 대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상세설계와 생산설계는 저희가 담당합니다. 이번 손실충담금은 기본설계 담당하는 곳에서 설계수정이 들어가는 바람에-”
“이 답답한 양반아! 잘못은 설계하는 놈들이 했는데, 왜 우리가 똥물을 뒤집어쓰나! 계약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길래 그따위냐고! 그리고! 상세랑 생산설계는 문제가 없어? 거기도 지금 일정 못 맞춘다고 난리 아니야!”
“…….”
한 사장이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그건 이 실장이 순양중공업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설계가 안 되는 프로젝트? 모래 위에 집을 짓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이제 장마가 시작됐으니 그 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순양중공업에는 착공에 들어갈 해양플랜트 프로젝트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이야 5,000억 손실로 끝나겠지만, 내년에는 조 단위 손실이 떡하니 찍힐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실장은 이걸 왜 장마가 찾아와서야 확인했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계열사 자율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내놓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꼼꼼하게 챙겨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순양그룹의 대표 쿨가이였다. 지나간 일은 빠르게 잊고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당장 당면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단 하나라고 판단했다. 순양중공업의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매각하는 것.
순양중공업의 문제가 심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유일조선 유연성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하. 유 상무님! 덴마크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 귀신같은 순양그룹 놈들. 내가 덴마크 간 건 어찌 알고, 그것도 귀국한 날에 맞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찾아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제가 오늘 귀국하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제가 우리 유 상무님 일거수일투족은 다 꿰차고 있지요. 허허.”
“아이고, 실장님 무서워서 방구도 몰래 못 끼겠습니다.”
“하하. 400명의 목숨을 구해낸 영웅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사생활엔 관심이 없습니다.”
순양그룹 이상면 전략기획실장을 만났다. 안 그래도 볼 생각이긴 했는데, 인천공항에서부터 납치당하는 기분은 썩 좋진 않다. 진짜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순양중공업을 그리도 팔고 싶은지…….
“실장님.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그 귀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비행기에서 이것저것 많이 주워 먹었더니 배가 묵직하네요.”
“이런. 영종도에 맛집이 많아서 같이 식사나 할까 했는데……. 그럼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나 한잔하시죠.”
“납치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오늘 이 만남의 목적이 뭔지는 알려주시죠?”
“허허. 우리가 만날 이유야 빤하지 않습니까? 우리 이 차장이 내려갔다 왔는데도 도통 진척되는 게 없으니, 제가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닐까 싶네요.”
“순양중공업 인수건 말씀이십니까?”
“떡밥도 충분히 뿌렸고, 입질도 왔는데 고기가 낚이지 않으니 초조해져서 그럽니다. 하하. 우리 진솔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역시나 만남의 목적은 순양중공업 매각 때문이었다. 내가 내년이나 돼야 생각해 보겠다고 그리 강조했건만, 쇠귀에 경 읽기네.
뭐, 잘 됐다. 안 그래도 입이 텁텁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