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 고추로 만든 귀한 가루
“뭐? 뭐라고?”
“뭘 두 번이나 되물어. 대흥중공업 먹을 거라고.”
“대흥중공업 최 사장 만나고 왔다더니, 거기서 뭐 쥐약이라고 먹고 왔어? 삼촌, 이놈 미친 거죠?”
대흥중공업 최진석 사장이 사준 저녁이 시원찮아서 바로 동명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맛있는 거 얻어먹겠다고 왔는데, 욕이나 얻어먹고 있다. 그나마 옆에서 박한철 회장이 동조해주지 않아서 배가 부르지는 않다.
“하하. 연성이 너의 기나긴 여정은 대흥중공업 인수로 마무리되는 것이냐?”
“역시 삼촌은 저를 알아주시네요. 저는 동명이를 볼 때마다 정녕 삼촌의 조카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라니까요.”
“하하. 동명이 이놈이 좀 고지식한 데가 있지.”
박 회장은 동명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명아.”
“네, 삼촌.”
“네가 봤을 때 연성이 이놈이 유일조선 키우고, 순양중공업 인수하고. 그걸로 끝낼 것 같더냐?”
“그건 아니지만, 대흥중공업 인수하겠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에요. 전에도 그런 얘기를 하긴 했는데, 그걸 누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고 믿겠어요?”
“진심일 수도 있겠지.”
“재벌 인수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가지고 있는 지분이라고 해봐야 10%도 안 되는데, 일단 그거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습니까? 근데 아예 인수를 한다? 일단 돈이 없고, 그다음으로 그게 가능하지도 않아요.”
“하하.”
누구의 웃음소리라고 할 것도 없이 나와 박 회장이 동시에 웃었다.
박 회장과 같이 전국팔도를 돌아다닌 지 어언 10년. 이젠 박 회장도 우리 회사 아재들 못지않게 내 신통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됐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무조건 이뤄진다는 강한 믿음 말이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자 내가 입을 열었다.
“동명아, 돈도 있고, 가능한 일이기도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대흥중공업 인수하려면 못해도 몇 조가 있어야 해. 네가 돈 좀 있다고 한들 조 단위 돈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한들, 살 수도 없잖아.”
“이미 24%나 확보했는데? 지금 오너 일가 지분이랑 우호지분 합치면 35% 정도니까 비벼볼 만하지 않겠어?”
“24%? 어휴, 저 미친놈. 언제 그렇게 야금야금 긁어모았냐. 근데 이쪽에서 떠안은 거 다 합쳐봐야 11%밖에 안 나오는데?”
아직도 믿음이 없는 동명이는 질문의 연속이다. 아무래도 이놈을 영구 귀국시켜서 내 옆에 묶어놔야 할 것 같다. 믿음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게.
“자, 유일조선이랑 이스턴캐피탈이 가진 게 5.98%, 그리고 순양중공업 인수하면서 순양그룹한테서 산 게 5%. 그렇게 하면 11%야.”
“그러니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냐 이거지.”
“대수조선이 7.99% 가지고 있습니다요.”
“아, 맞다! 그걸 생각 못 했네. 그리고 또?”
“국제그룹이 4%를 가지고 있어. 사 온 건 아니지만, 내 것이나 마찬가지야. 정원희가 나한테 붙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삼촌이랑 네가 사 모으고 있는 거, 우리 회사 직원들이 내 말 믿고 투자한 걸 합치면 2% 못 되게 있을 거야.”
“우와. 장난 아니네.”
“그럼. 장난 아니지.”
“근데 그게 맥시멈 아니야? 그러니까 너 말은 힘 대 힘으로 표대결하겠다는 건데, 무슨 수로 35%를 이길 것이냐고?”
믿음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자, 박 회장님 말씀해 보시죠.
“스튜어드십 코드?”
“빙고!”
주식시장 큰손이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아재들이야 명동 사채업자 운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식 맛 좀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국민연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주식시장의 큰손이라고.
우리나라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1500조 정도인데, 국민연금이 10% 정도를 움켜쥐고 있으니 큰손이 확실하다. 공교롭게도 대흥중공업 지분도 11%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민연금 설득해서 우리 편에 붙게 하겠다?”
대흥중공업 인수프로젝트의 서막을 들은 동명이가 화들짝 놀란 티를 내며 질문 삼매경에 빠졌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풍성하게 차려진 안주가 침 세례를 받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었다. 닝기리. 그 분노를 담아 대답하리다.
“국민연금 지분이 의결권 없는 자사주도 아니고, 당연히 주주의 이익에 우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돈도 아니고 우리 노후를 책임질 돈인데 말이야.”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국민연금 지분을 활용하는 건 약간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다른 차원이라니?”
“말이 좋아 국민연금이지, 사실상 정권의 꿀단지 노릇하고 있는 거잖아. 너 같으면 국민연금이 누구 편을 들어주겠어?”
“내 편?”
“에이, 아니지. 당연히 재벌 편을 들어주겠지. 국민연금 기금이 진짜 독립적으로 운용된다면 모를까, 그럴 일이 없잖아.”
묵묵히 듣고 있던 박 회장이 술잔을 비우고는 자신이 말할 차례임을 드러냈다.
“내가 봤을 땐 동명이 말이 맞긴 해. 그런데 연성이가 밑도 끝도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을 녀석이 아닌 것도 맞아. 물론, 국민연금을 설득할 일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 전에 왜 우리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지 얘기 한번 들어보자고.”
솔직히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 맞긴 하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다.
“삼촌. 순양그룹도 승계작업 들어간 거 알고 계시죠?”
“뭐, 거기야 십 년 전부터 계속 그러고 있지.”
“예전에야 박 부사장 종잣돈 마련해주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순양전자 지배하게 해주는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순양그룹을 꺼낸 건지 흥미진진하구나.”
“박윤식 그 사람이 순양전자를 지배해야 승계작업이 끝나는 건데, 그러기엔 순양전자 지분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순양전자 지분을 가진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할 것이란 말이죠.”
“흐음. 그렇다면 순양상사 지분을 늘려야겠네? 거기가 아마 7% 정도 가지고 있지?”
“그렇죠. 그런데 순양상사 주가는 높고, 박윤식이 가진 지분은 없죠. 그래서 박윤식이 대주주인 계열사랑 합병을 해버릴 겁니다.”
“오호라. 합병으로 순양상사가 가진 순양전자 지분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어디 보자……. 그럼 순양상사를 순양의류에 붙여 버리겠네?”
“그렇죠!”
“흐음. 그러기엔 모양새가 너무 안 좋은데…….”
나와 박 회장의 대화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동명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아, 진짜. 삼촌!”
“어? 왜?”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말이 안 되잖아요. 승계작업이 급하다고 옷 만드는 회사에 종합상사를 합병시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연성이가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 내가 하는 말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니 진짜 딸이었다든가……. 뭐, 아무튼 믿어야 한다 이 말이지.
“자,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습니다. 순양그룹 계열사 중에서 순양전자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곳이 순양보험이죠. 그런데 순양보험은 금산분리 문제 때문에 패스해야죠. 있는 지분도 팔아야 할지 모르니까.”
“그다음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 순양상사이지.”
“맞습니다, 삼촌. 그래서 순양전자를 지배하려면 순양상사를 먹어야 하는데, 박윤식이가 대주주로 있는 계열사는 순양의류뿐이에요. 자, 여기서 순양의류가 순양상사를 먹어버리면, 박윤식이 순양의류를 지배하고, 순양의류가 순양전자를 지배하는 구도가 나온다 이거죠.”
“동명이 이놈은 그게 말이 되느냐고 묻고 있잖아.”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데,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겠습니까? 명분이야 순양그룹에 있는 머리 좋은 놈들이 만들어내겠죠.”
“그건 그래. 난 일리 있다고 봐.”
박 회장의 끄덕거림에 동명이가 다시 눈을 부라리며 말대꾸 채비를 마쳤다. 전생에 있었던 사실을 얘기하는데 말대꾸라니.
“삼촌, 무슨 일리가 있어요! 의류회사에 종합상사를 합쳐버리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순양의류가 해외사업부를 물적분할한 다음에 순양상사랑 붙이면 모를까…….”
“회사 이름이야 그렇지만 온갖 것을 다 하잖아. 순양의류가 리조트사업을 하고, 순양상사가 아파트 짓는 건 말이 되고?”
“그거야 걔네가 그 사업을 하는 계열사를 흡수했으니까 그런 거죠.”
“말 잘 했다. 그러니 순양의류랑 순양상사가 합병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럴싸하게 들리네요?”
“그럼.”
끄덕끄덕.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대화가 약이다. 그런데 약발이 덜 먹혔나? 또 질문이네.
“그런데……. 국민연금이 누구 편을 들어주느냐 가지고 얘기하고 있었잖아? 거기서 왜 갑자기 순양그룹 얘기로 넘어간 거지?”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얘기가 많은데, 네가 자꾸 태클을 거니까 진도가 안 나가잖아. 그러니까 이해가 안 돼도 묵묵히 듣고 있으라고. 오케이?”
“알았어. 그러니까 알아먹게 좀 얘기해 봐.”
“자, 그래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요. 박윤식이 순양전자 지배하려고 순양의류에 순양상사를 붙이려고 한다 이거야. 순양상사의 건설 부문이 우리나라 아파트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곳인데, 올해부터 이상하게 아파트를 안 지어. 왜 그럴까?”
믿음이 있는 박 회장이 테이블을 치면서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액션을 선보였다.
“아! 그래!”
“뭐 감이 오십니까?”
“순양의류 대주주가 박윤식이니까! 그놈한테 유리하게 가려면 순양상사를 죽이고, 순양의류를 살리는 쪽으로 합병이 이뤄지겠지!”
“맞습니다, 맞습니다. 순양의류한테 합병비율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순양상사가 의도적으로 사업을 어영부영하고 있는 거죠. 순양의류가 순양상사를 먹는 방식이어야, 박윤식이 순양전자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요.”
“순양상사를 의도적으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순양상사 주주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가만가만……. 거기 대주주가 국민연금 아니야?”
“이번에도 맞습니다. 국민연금이 순양상사 대주주죠. 평상시에야 국민연금 지분이 자사주나 똑같지만, 합병 같은 중대사안일 때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해야 하거든요.”
“합병을 주총 안건으로 올리면 국민연금이 찬반을 선택해야 한다 이거군.”
“표 싸움이야 뚜껑이 열려야겠지만,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표 던지면 나가리 날 수도 있다는 거죠. 과연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질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 재벌 중의 재벌인 순양한테 반기를 들 놈들이 아니니까.”
“순양상사가 무조건 손해 보는 조건인데, 국민연금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찬성표를 던진다고 보십니까?”
“재벌이 달리 재벌이 아니니까.”
박 회장은 족집게 강사처럼 정답을 잘도 얘기한다. 얘기가 아주 술술 잘 풀려……라고 생각했건만.
동명이가 술잔을 비워 입을 게워내며 자신이 말할 차례가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히 불안해지네.
“아! 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정말이지?”
“그러니까 순양의류랑 순양상사가 합병하는 걸 큰 이슈 거리로 만들어서 국민연금한테 엄청난 부담 거리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잖아?”
“그래서?”
“국민연금이야 재벌 편을 들 테니까 손해가 나든 말든 당연히 찬성하겠지. 넌 그걸 이용하겠다는 것이고.”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는 기분이다야.”
“자, 봐봐. 국민연금이 손해 감수하고 순양그룹 편들다가 욕을 엄청나게 먹었어. 그러면 다음에 비슷한 일이 있을 때도 거수기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그 비슷한 일이 대흥중공업 관련이라면?”
그렇지! 가끔씩 말귀 못 알아먹고 답답한 소리를 하는 놈이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머리가 번뜩거릴 때도 있단 말이지. 역시 개똥도 약으로 쓰이긴 해.
“자, 결론 들어가겠습니다. 대흥중공업이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국민연금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죠.”
“그래서 국민연금이 대흥중공업 편을 못 들어주게 만들자?”
“빙고! 그걸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순양그룹 승계과정에 고추로 만든 가루를 거하게 뿌려주면 된다 이거죠.”
“고춧가루라…….”
고춧가루가 될 두 박 씨의 눈들이 호기심으로 가득해졌다. 부연설명을 바라는 저 눈빛들을 어찌 외면하리오.
늦게까지 술 퍼마시지 말고 일찍 자라고 어명을 내린 이유선의 목소리를 기억에서 애써 지웠다. 오늘은 내가 할 얘기가 좀 많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