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56)
56화 – 에코십을 개발하라 (5)
“실장님!”
또 회사에 지진이 났다. 김진수 차장에게는 헬로키티 그려진 푹신한 실내화 하나 사줘야겠어. 저 육중한 몸엔 헬로키티가 딱이지.
“무슨 일입니까? 방앗간에 참새라도 다녀갔습니까?”
“스파이더탱커스에서 LR탱커 2척 발주하겠다고 의향서 보내왔습니다.”
“스파이더에서요? 아이고, 성질도 참 급하네요.”
“네? 뭐 잘못된 겁니까?”
“아닙니다.”
전생의 기억보다 무려 2년 빠른 움직임에 살짝 당황하긴 했다. 수주가 많아지면 좋은 일이지만, 전생과 달라지는 현생에 불안감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렴이면 어때? 어차피 내가 원하는 그림은 전생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될 텐데 말이야. 대범하게 생각하고 대국적으로 살자고.
“그쪽에서 원하는 스펙이 어떻게 됩니까?”
“기존선에 비해 연비 30% 향상된 선박이어야 한답니다. 구체적인 협의는 아테네 지사에서 담당하기로 했는데요, 30%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원한다면 맞춰 줘야지요. 이미 선형은 나왔을 테니까 기본설계팀이랑 잘 협의해서 견적 보내세요. 선가는 헉소리날 정도로 하시구요.”
“역시 실장님은 타고난 도박꾼이십니다. 하하.”
김 차장이 칭찬을 날리고는 거구의 몸을 이끌고 나갔다. 칭찬 맞겠지? 아직 더 큰 도박판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놀라면 안 되는데…….
망상에 잠길 새도 없이 바로 스파이더그룹의 에마누엘레 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미스터 유!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걸지 그랬냐. 국제전화 비싼데 말이야.
“LR탱커가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응?”
-하하. 우리는 배가 급한 것이 아닙니다. 미스터 유가 얘기한 그 에코십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2010년 납기니까 시간은 충분하지요?
“도박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하하. 잘 보셨습니다. 우리에겐 큰 도박입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연비 30%가 향상된 배가 맞는지 확인해야지 않겠습니까? 실제 그만한 성능이 안 나온다면……. 오! 테러블! 상상도 하기 싫군요.
전화인데도 과한 몸짓과 표정으로 얘기하는 모습이 생생히 보일 정도다. 스파이더그룹이 기꺼이 우리 개발품에 대한 테스트베드 역할을 해주겠다고 하니, 나로서는 땡큐 베리마치다.
이 바닥이 얼마나 보수적이냐면, 조선쪽에서 백날 신기술을 개발해도 검증 안 됐다는 이유로 마다하는 것이 일상이다. 신입사원 채용하는데 동종업계 경력 5년 이상 조건을 건다고 할까?
그래서 말 잘 들어주는 친한 선주가 얼마나 많은지가 조선바닥에서 무병장수하는 지름길이 된다. 스파이더그룹은 오로지 내 말만 믿고 1억4000만 달러짜리 어음을 발행했다.
고마운 녀석. 호구가 되지 않도록 해 주겠어.
“당신 형제가 즐거운 상상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직 발주 확정한 것 아닙니다. 하하. 아무쪼록 좋은 소식 있기를 서로 기도하죠.
“아멘.”
***
이 기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으면 안 되지. 바로 정한호 상무한테 달려갔다.
“상무님!”
어라? 상무실엔 주인 없이 담배 찌든내만 가득했다. 이 양반 어딜 간 거야? 그나저나 환기 좀 하고 살지. 내 폐가 다 건강해지는 느낌이네.
“상무님, 어디 계십니까?”
-어디긴. 연구소에 있지. 아예 여기다 책상 갖다놓을까 봐. 아니다. 그래도 내 방이 최고지. 그래서 뭐 담배 한 대 피우러 온 거야?
“뭐 겸사겸사죠.”
-이를 어쩌나.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 움직일 수가 없는데. 뭐 잘 됐네. 자네도 여기 와서 구경이나 하라고.
연구소에 불이라도 났나?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기에 그러나.
후다닥.
연구소는 이 바닥 꾼들에게 놀이터나 다름없다.
피규어 같은 배 모형 만들어서 대형 수조에 띄우기도 하고, 태풍 만들어서 배 빠개지는지 연구도 해 보고, 돌덩이도 떨어트려보고. 온갖 놀이가 가득한 곳이다.
테마파크에 진입하자마자 기름진 열기가 확 느껴졌다. 몇 달 동안 중국요리 배달해 먹으면서 연구에 매진한 결과로구나. 어휴, 이 군만두 냄새.
“어이! 유 실장. 어서 와.”
담배 대신 군만두를 입에 문 정 상무가 기름진 표정으로 반겼다.
“무슨 진귀한 테스트라도 하시는 겁니까?”
“그럼그럼. 새로운 선형 나왔으니까 굴려봐야지. 워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일단 이 선형이 괜찮은지 테스트해 보는 거야.”
“아, 네네.”
“엔진부터 해서 의장에 도장에 아직 건드릴 것 태산이야.”
“그래도 뭐 성과가 있으니까 테스트해 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허허. 하여간 눈치는 빨라요.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그래도 이번 건 배 좀 부를 것 같아. 하하. 기대해도 좋네. 자자! 다 됐으면 테스트 시작하자고!”
정 상무 외침에 선박 모형이 물놀이에 들어갔다.
가장 많은 배가 다니는 구주항로를 따라 수조 속 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타이완해협을 지나 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를 지나 아덴만에 들어가 홍해 넘어 수에즈운하까지. 지중해에 진입한 배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서유럽에 도착했다.
“좋아. 다음은 북해로!”
넘실넘실. 출렁출렁.
그 험하다는 북해의 거친 파도가 재현됐다. 파도를 헤치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군만두 브라더스들의 작품이 기특해 보인다.
해야 할 일이 잔뜩인데, 넋 놓고 구경하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자, 이 정도면 됐지?”
정 상무의 완료 선언에 물소리가 잦아들고, 프린트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상무님. 여기 데이터입니다.”
“어, 그래. 어디 보자.”
아따, 궁금하게시리. 같이 좀 봅시다요.
“유 실장, 어때?”
“숫자 밖에 안 보이는데요.”
“허허. 이것 봐. 이게 지금 MR탱커가 13.5노트로 운항했다고 가정한 거야. 일반적으로 MR탱커가 하루에 연료로 25톤에서 30톤 정도를 쓰는데, 우리가 새로 설계한 건 20톤까지로 낮출 수 있다 이거지. 어때? 장난 아니지?”
“추정인가요, 아니면 확신인가요?”
“확신이지!”
“하하하.”
해냈다. 우리가 해냈다고. 만두귀 아재와 군만두 브라더스들이 결국 해냈다고!
경쟁사보다 2~3년 빨리 에코십 개발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남들이 보든지 말든지 정 상무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남사스럽게 왜 이러는 거야? 저리 가. 허허.”
“상무님!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리 가라면서도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계산기 부지런히 두들겨서 나온 숫자가 실제로 딱 맞아떨어지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지. 나는 잘 모르지만, 엔지니어들이 그렇다고 하더라고. 내가 뭘 아나, 쩝.
“고생은 뭘. 아직 갈 길이 멀다니까. 선종별로 죄다 테스트해 봐야지.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엔진도 나와 줘야 하고, 샤프트니 프로펠러니 할 것 태산이야.”
“첫 술에 배불렀으니 다음 숟가락도 고봉으로 담지 않겠습니까?”
“유 실장이 그렇다고 하면 그러겠지. 허허. 그것보다 걱정이 있는데 말이야.”
“이 좋은 결과를 놓고 무슨 걱정입니까? 제가 걱정인형해 드리겠습니다. 말만 하십쇼.”
“우리가 13.5노트로 시험을 했지 않았나? 지금 20노트 전후로 운항하는데 과연 선사들이 그 속도로 운항할까? 기껏 개발했는데, 속도 안 나온다고 외면 받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그건 제가 장담합니다. 머지않아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 유 실장 또 용한 무당 노릇하는 거야? 허허.”
이제 1년도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셔. 깜짝 놀랄 테니까요.
기쁨 표출은 환호성 외치고 정 상무 껴안았으면 됐다. 할 일 많은데, 바로 다음 수순 밟아야지. 내가 꾹꾹 참고 있다가 우리 회사 세계 1위되면 그때 맘 놓고 기쁨 표출하리라.
“엔진 개발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이고, 여지 없구만. 이 사람은 숨 돌릴 틈도 안 줘요. 허허. 늦어도 내년 말까지는 내놓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엔진만 잘 나와 주면 뭐 게임 끝이지.”
“다른 기자재도 많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기자재업체들 닦달해야지. 난 그거까진 못 해. 지금도 죽기 직전이야.”
“우리 상무님 돌아가시게 하면 안 되죠. 오늘은 중국집 배달시키지 말고 단백질 섭취 좀 하시죠?”
“안 그래도 오리집 예약해 놨네. 하하. 진흙구이는 미리 말해놔야 한다고 하더라고.”
괜한 걱정을 했네. 알아서 좋은 거 잘 찾아서 먹으니, 내가 할 일은 회식비나 든든하게 지원해 주는 것이겠지.
기쁨도 잠시, 연구원들은 다음 시험에 바로 들어갔다.
데이터 나오면 설계 수정해서, 또 시험하고, 또 수정하고, 또 시험하고. 무한반복으로 하다보면 2010년, 세상을 놀라게 할 배가 척하고 나타나겠지.
“상무님, 그렇지요?”
“아, 말해 뭐 해. 그러려고 이 고생하는 건데. 그나저나 올해도 어지간히 더울 모양이야? 아이고야, 습하다 습해.”
정 상무와 기쁨의 흡연을 하러 연구소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도 기뻐하는지 덥고 습한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준다. 우리 작업자들에게는 죽음의 계절인 여름. 올해도 어김없네.
“얼마 전에 말이야. 동네 아는 동생이 티비에서 봤다면서 유럽은 조선소도 실내에 있어서 여름에 시원하게 작업한다고 그러는 거야.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 뙤약볕 밑에서 일한다고. 허허.”
“그 얘기 듣고 화 좀 나셨겠네요?”
“허리를 접어버릴라다가 참았지.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쥐똥만한 것들하고 비교를 해?”
“우리나라가 조선으로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죠. 뭐 언제는 알아줬습니까?”
두고두고 아쉬운 점이다.
우리나라가 짱이란 걸 알았다면, 대위기 상황에서 조선업 다 죽어야 한다고 악 쓰는 사람들이 나왔을까? 선진국 타령하면서 더럽고 힘든 산업은 버려도 된다는 소리를 지껄일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번개탄에 불을 붙일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이다.
“무슨 고민 있어? 잔칫날에 오만상을 쓰고 그래?”
“아, 아닙니다. 앞으로 할 일들 생각하느라요.”
“아이고야. 숨 좀 돌리면서 일해. 뭐 젊으니까 그렇게 일한다지만, 젊어서 못 놀면 나중에도 못 놀아요.”
“LNG화물창 쪽은 잘 진척되고 있습니까?”
“나 원 참.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허허. 아마 내년쯤엔 성과가 나올 걸세. GTT인증 따고 선급 인증 쭉쭉 따면…… 뭐 그때부터야 탄탄대로지.
“역시 잘 되고 있군요. 이왕 하는 김에 LNG화물창도 독자 개발해 버릴까요?”
“으흠. 난 못 들은 걸로 하겠네.”
할 것 많으니까 LNG화물창은 나중에 천천히 진행하자고. 10년 후에 LNG선 시장이 그리 불타오르는데, 핵심 중에 핵심인 화물창이 외국기술이라 로열티 얼마나 뺏기는지 원.
기술이 없어서 외국기술 쓰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있는데도 선주들이 채택을 안 해줘서 그러는 것이다. 이것도 내 미션 중 하나니까 꼭 해내리라. 정 상무요, 몇 년만 더 고생합시다.
“그건 그렇고. 엔진 개발이 관건인데, 메이커 참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 맞아. 안 그래도 맨디젤 쪽에서도 그 얘기를 하더라고. 결국엔 만들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생각해 두신 업체 있습니까?”
“나야 뻔하지. 대흥중공업이지 뭐. 자네는?”
“WBT엔진은 어떻습니까?”
정 상무가 능글맞은 웃음을 선보였다.
“세 업체가 다 비슷비슷한데, 자네가 WBT엔진을 꼭 집었다면…… 또 무슨 꿍꿍이인 거야?”
“상무님 앞에서는 연기를 못 하겠네요. 엔진회사 하나 자회사로 거느리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WBT엔진을 인수하겠다고? 그게 가능해?”
당연히 가능하지. 지금은 안 되겠지만, 5년 뒤엔 되고도 남지. 왜냐? 지금이야 아주 잘 나가는 WBT그룹이 나중엔 해체되니까. 알짜회사들은 미리미리 침 발라놔야지.
“인수까지는 아니고, 지분 투자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말 잘 듣는 엔진 제작사 하나 있으면 좋긴 한데…… 회장님 또 난리 나겠네. 난 못 들은 걸로 하겠네. 허허.”
***
역시나.
“뭐라고? WBT엔진 지분을 사자고? 넌 진짜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회장님. 흥분하지 마시고, 제 말을 일단 들어보세요.”
“말 하나마나야! 다 필요 없고, 돈 있는지만 얘기해 봐. 돈 있어?”
으, 분하다. 이놈의 돈은 언제까지 내 발목을 잡을 텐가! 이 망할 놈의 금융위기야, 빨리 좀 터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