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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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원은 주한미군기지에 사흘째 머무르는 중이었다.
웰체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그가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출발하길 원했지만, 그는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미국에 망명하기로 한 결정을 새삼 이제 와서 뒤집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평생을 살아왔던 터전을 영원히 떠난다는 것에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미국 측도 그런 심경을 이해했기에 크게 재촉하거나 설득하지 않은 채,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렸다.
―내가 앞으로 걸을 길은 수라의 길입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들일 순 없습니다.
―갑부들이나 살 만한 대저택과 호화 요트, 개인 전용기, 마르지 않는 돈,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가세요. 그리고 여기서 찾지 못한 행복을 쥐십시오.
윤기원은 사흘 내내 최형식와 만났던 기억을 곱씹었다. 그의 목소리, 눈빛, 그 모든 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복수를 결행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바라보던 남자.
윤기원은 사흘 내내 최형식의 행보만 살폈다. 세간에서 쏟아지는 그에 대한 평을 닥치는 대로 주워서 읽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을 때부터 오로지 복수만을 추구하고 상상했으며, 기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발언과 행보에서 그런 철저한 준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우그룹 오너 일가를 살해한 것도, 여당 의원들 대부분을 살해해서 사실상 당을 해체해버린 것도, 살해 도구로 반드시 죽창을 사용한 것도, 우발적인 보복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일탈로 보지 마라…….”
윤기원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을 제일 처음 한 인물이 유지웅이라는 점에 왠지 모를 감회가 들었다.
처음 탱커로서의 힘을 얻었을 때, 자신은 무작정 유지웅의 방송 채널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해준 그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결심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런 유지웅이 자신과 최형식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에서, 묘한 감동을 느껴야 했다.
―이거 전부 니들이 싼 건데, 이걸 개인의 일탈로 보면 아무것도 해결 안 돼.
―장관님,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판검사가 사익을 위해 법률적 양심을 배반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작 구축했어야 할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아서 윤기원 씨 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 겁니다.
―시그널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믿어 달라.
―하지만 전 알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할 거잖아요. 그렇죠?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속 시원한 언행들뿐이었다.
윤기원은 유지웅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족한 것 없는 이가 자신을 지지해준다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최형식을 지지하고 있다.’
최형식의 존재는 단순한 연쇄살인마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꽤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를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가 낳은 ‘항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병원체가 침투하면 몸이 그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항체를 만들어내듯이, 우리 사회가 병든 적폐를 몰아내기 위해 최형식 같은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이들이 최형식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윤기원은 가슴이 끓었다.
그는 미군기지에 상주 중인 CIA 요원을 찾았다.
요구사항을 들은 요원은 난처함부터 표했다.
“유지웅 의장님을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예.”
“그건 좀 곤란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유지웅 의장님은 이번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상황입니다. 괜히 여론의 공격을 받게 되면 우리 미국도 그분 앞에서 체면을 차리기 어렵게 됩니다.”
“유지웅 씨는 제가 미국에 망명한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
요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기원 앞에서 끝까지 숨겨야 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서 조용히 만나고 오겠습니다. 적당한 타이밍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일단 상부에 전달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심경의 변화가 생기신 것은…….”
“마지막으로 그분께 듣고 싶은 대답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귀화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윤기원은 멋쩍은 미소까지 곁들인 채 덧붙였다.
“호화 대저택과 요트, 개인 전용기까지 누릴 수 있는 삶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전 한국에서는 얼굴을 내놓고 살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요원은 안심해서 자리를 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상부에서 허가했습니다. 유지웅 의장님을 만나기 적당한 때와 장소를 골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그분을 만나더라도…….”
“미국 이야기는 안 꺼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기원은 미국 측 요원들과 동행한 채 곧바로 전남 제니스 타운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광주였다.
요원들은 광주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제니스 타운에 출입하는 것만으로도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윤기원은 무선 통신기를 들고 혼자 제니스 타운에 잠입하기로 했다.
남들의 이목을 피해 도시로 잠입한 그는 이윽고 호화로운 저택을 볼 수 있었다. 활주로와 격납고가 딸린, 저택보다는 궁이라고 해야 할 초호화 거주시설이었다.
저게 얼마 전에 준공된 제니스 팰리스였던가.
윤기원은 그 호화로움에 잠시 넋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지금 잠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북쪽 5층에 불이 켜진 방을 훑어보면 유지웅 의장님이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윤기원은 재빨리 이동했다.
불이 켜진 창을 훑어본 그는 과연 유지웅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올라간 그는 창문 안쪽을 확인했다.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선 유지웅이 의자에 앉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젊은 백인 남성이었다.
‘저 사람도 CIA 요원?’
그렇다면 어째서 유지웅이 여기 있는 걸 알 수 있었는지 설명이 된다. 그를 몰래 감시한 게 아니라,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던 모양이다.
윤기원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약 30분이 흐르자 마침내 요원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서재를 나섰다.
유지웅이 혼자가 된 것을 확인한 윤기원은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다행히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그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목소리가 반문했다. 느닷없는 한밤의 침입자가 있다면 당황할 법도 한데도. 윤기원은 과연 유지웅이라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속으로 잠시 동안 고민했다. 유지웅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놓고.
곧 결심을 굳힌 그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지웅 씨. 저는 윤기원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 윤기원 씨?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평소 자주 쓰던 ‘지웅이 형님’이 아닌 ‘유지웅 씨’. 이는 그가 속에 품은 각오의 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했다.
“어떻게, 밥은 잘 먹고 다녀요? 사진으로 본 것보다 왠지 마른 거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꺼낸 그 말에, 윤기원은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붉게 물들 뻔했다.
최형식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자신을 염려해주는 그 말에서 진심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먹고 다닙니다.”
“그럼 다행이네. 난 또 기껏 복수까지 다 해놓고 어디 숨어서 몰래 자살하거나 한 건 아닌가 하고 염려했거든요.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유지웅 씨는…… 제가 혐오스럽지 않습니까?”
“왜 혐오스러워 해야 하는데요? 이유를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든 간에 저는 법을 어기고 사람을 열 명 넘게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 사람들이 먼저 윤기원 씨를 죽였죠. 그리고 나라는 아무도 윤기원 씨를 돕지 않았고, 윤기원 씨는 무방비한 채로 짓밟혀야 했고. 누가 윤기원 씨를 비난할 수 있나요?”
“…….”
“윤기원 씨는 정당방위를 행사한 겁니다. 윤기원 씨가 당한 불행을 방관한 국가의 불법성에 대해서 말이죠.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당방위.”
윤기원은 홀린 듯이 그 말을 중얼거렸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러니 윤기원 씨는 아무 자책하지 말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습니다. 기껏 시원하게 복수까지 완료해놓고 남은 인생을 찝찝함 속에서 살아갈 겁니까? 난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거야말로 하늘에서 지켜볼 윤기원 씨 아버님한테 불효 저지르는 거예요. 알았어요?”
윤기원은 또 한 번 울컥할 뻔했으나, 고개를 돌려 겨우 참아냈다. 왠지 그의 앞에서 약한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원한다면 내가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어요.”
“……미국으로 망명할 생각입니다. 미국 정부도 아마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윤기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물론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한 것처럼 에둘러 표현했다. 최대한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유지웅은 예상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요. 미국 입장에서야 윤기원 씨가 그리 위험인물은 아니고, 12명을 죽였다지만 충분히 ‘국가에 대한 정당방위’로 봐줄 수 있는 사안이고, 미국은 원체 포용력이 큰 나라라서 별 문제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유지웅이 그렇게 말을 해주자 윤기원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를 찾아온 것도, 그에게 미국 망명을 이야기한 것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지웅이 형님’ 밑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미묘한 타이밍에 변한 호칭,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마 그는 알아차리지 않을까.
과연 유지웅은 안색이 순간 변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속 시원히 복수하기는 어려웠겠죠. 난 미국 망명이 더 낫다고 봅니다. 그러니 미련 가지지 말아요.”
“유지웅 씨, 부탁이 있습니다.”
다시 변한 호칭. 그리고 목소리.
“뭐죠?”
“그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저는 유지웅 씨가 레이더로서의 힘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원거리 딜러로서의 능력 말고도 분명히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탱커로 각성해보니 더욱 그러합니다.”
유지웅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짓고 그를 주시했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부탁드립니다. 혹시 어느 정도 강하신지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습니까?”
유지웅은 대답 대신 천천히 걸어서 그를 지나쳤다. 열린 창문 앞에 잠시 선 그는 이내 서재 밖으로 뛰어내렸다.
윤기원도 얼른 그를 따라 뛰어내렸다.
유지웅은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드넓은 잔디밭으로 이동했고, 윤기원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 순간 멈춰선 유지웅이 뒤를 돌아보고는, 새끼손가락만 편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덤벼 봐. 마음껏.”
“……?”
“난 이거 하나로만 버틸 테니까.”
유지웅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