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274)
00274 회장의 일상 =========================================================================
미 대통령이 방한했다.
중국의 혼란이 한창인 민감한 시기에 이뤄진 방문에 한국 여론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 대통령 전용기가 공항에 착륙하고(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음), 환영식을 받으며 미 대통령 부부가 내렸다. 정중한 영접을 받으며 빌클런 대통령 부부는 방탄차에 탑승해서 이동했다.
청와대에 준비된 환영식을 마치고 저녁에는 국내 경제인들을 초대해서 만찬을 가졌다. 국내에서 힘 좀 쓴다 하는 경제인들은 앞을 다투어 참가했다.
웃음 띤 얼굴로 만찬을 즐기면서 빌클런의 눈은 시종일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최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니스 회장이 안 보이는군요. 당연히 초대했을 줄 알았습니다만.”
“초대장은 물론 발송했습니다. 하지만 안 올 것 같습니다.”
“바쁜 일이 있나 보군요?”
조금, 아니 많이 서운했지만 빌클런은 그렇게 넌지시 돌려서 물었다. 최 대통령이 민망한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구단주라서 대회장에 가봐야 한다고 거절했다 들었습니다.”
“대회요?”
말도 안 된다. 에버튼의 경기 일정은 미리 체크했다. 현재 중요한 경기 일정 따위는 잡혀 있지 않았다. 그 정도도 체크하지 않고 방한 일정을 잡았을까?
“전설대전인가 하는 온라인 대전 게임이라고 합니다. 오늘 결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제야 기억났다. 제니스 회장이 무슨 온라인 게임에 한창 빠져 있다는 것을. 프리미어 리그에 비하면 워낙 자그마한 게임이고 해서 대충 흘려 넘겼는데, 하필 그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원하던 사람이 안 오는 만찬회 따위가 즐거울 리가 없다. 하지만 빌클런은 미소를 머금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다음날 비서진을 통해 연락을 잡으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선약이 있다는 것이다. 방한 사흘째 되는 날에야 빌클런은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비서실장이 정말 만나기 힘들다고 가볍게 투덜거릴 정도였으니, 스케줄 잡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정말 말 다했다.
“이번 방문에 체결해야 할 일이 몇 개였지?”
“먼저 주요 대도시 안전지대 설치 체결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에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가 확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방어장비 수입입니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일이군.”
“현 한국 정부가 방어장비를 전략 물자로 지정하고 있어서 수출 확답을 얻어내기 매우 어렵습니다만, 반드시 따내야 합니다. 방어장비를 수입할 수 있으면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좋은 실적이 될 겁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여러 모로 미국의 입장이 아쉬웠다. 멀지않은 대선, 이번에도 민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참 우습지 않나?”
“대선 말씀이십니까?”
“맞네. 미합중국의 대선이 이 조그만 나라에 사는 한 개인의 뜻에 좌지우지 될 수도 있다니…….”
“신이 제니스 회장에게 축복이라도 내린 모양입니다.”
“축복, 그렇지. 그게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지.”
더 놀라운 것은 보호막 능력이 아직도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그 끝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안전지대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을까?
“조지 의원은 벌써 다녀갔다고 했지?”
“네. 며칠 전 어렵게 교섭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얼굴색이 별로 어둡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공화당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지?”
“여기 목록 정리가 있습니다.”
빌클런은 비서실장이 건넨 서류를 받고 심각하게 훑어보았다. 안전지대 설치를 조건으로 공화당이 현재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집권 이후 줄 수 있는 목록이 후보로 정리돼 있었다. 민주당이 줄 수 없는 선물은 특히 붉게 강조돼 있었다.
“쉽지는 않겠군.”
“우리가 준비한 선물도 작은 것은 아닙니다만, 공화당이 워낙 작심을 한 터라 만만치 않습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 더 힘든 것 같군. 뭐를 주면 좋을지 선정하기도 어려우니.”
헛웃음이 난다. 아쉬울 게 없는 미 대통령이 겨우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면접생처럼 초조함을 느껴야 하다니.
원래 유지웅은 자기 집에서 만나고 싶어 했다. 빌클런도 그것을 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빌클런 몰래 다른 이유를 들어 유지웅을 말렸다. 그렇게 되면 남들의 눈에 너무 띈다는 것이다.
“별로 상관없는데요?”
유지웅은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효주가 만류하는 바람에 미국 대사관으로 그를 초청하는 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왔다. 빌클런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비서실장이 손수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가 유지웅을 안내해 왔다. 검은 양복을 반듯하게 입은 그는 네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문단 소속 교수들입니다. 그 분야에서는 뛰어난 젊은 전문가들이죠. 제니스 회장의 자문단 중에서도 핵심 두뇌입니다.”
수행비서의 속삭임에 빌클런은 끄덕였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빌클런입니다.”
“제니스 공격대장 유지웅입니다.”
악수를 나누고 플래시가 터졌다. 백악관 비서실장에서 홍보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유지웅은 사진 찍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시느라 많이 불편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 자가용을 타고 와서 편했습니다.”
자가용이라면 아마도 V-23을 말하는 것이리라. 한국에서는 국내 어디를 가더라도 빠르고 편한 이동편이었다. 가격과 유지비가 너무 비싸서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둘은 가죽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유지웅이 데려온 자문단도 주변에 편하게 앉아 대화를 경청했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빌클런은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해서, 우리는 3대 도시 외 다른 주요 대도시들에도 조속히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100대 대도시만큼은 빠른 시일 안에 설치를 마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좀 바빠서…….”
별로 바쁘지 않다는 것쯤 빌클런도 이미 조사를 다 끝낸 상태였다. 저건 일이 많아서 바쁜 게 아니라 놀 게 많아서 바쁜 거다. 그제 만찬회에 참석 안 한 것도 게임 경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쁘신 줄은 알지만 시간을 조금 내주셨으면 하군요. 물론 그에 합당한 사례는 할 겁니다.”
“음…….”
“방위비용에 갈음한 대가 지급 외에 따로 요구사항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유지웅은 슬쩍 자문단을 쳐다봤다. 대미 외교 전문가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끄덕였다. 말을 하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화당 상원의원 한 명이 얼마 전에 방문해서 안전지대에 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갔어요.”
“조지 켄부스 의원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 그런 이름이었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요. 아무튼 공화당 의원이랬어요.”
대통령은 물론이고 백악관 비서실 일동은 차마 표정에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불쌍한 조지, 나름대로 미국에서는 파워 있는 정치가이자 유력 대선 주자인데, 이 먼 한국까지 날아와서 이름조차 각인을 못 시키다니.
“거기서도 안전지대를 설치해달라고 했는데 오늘 또 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대외 창구가 통일돼 있지 않나 봐요?”
가볍게 지나가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예사로운 게 아니다. 미국의 양당 대립을 넌지시 지적하며 약점을 상기시키는 행위다. 모르고 해냈다면 운이 좋은 거고 알고 해냈다면 정치적 감각이 좋은 것이다. 아마 자문단의 작품이리라.
그러나 빌클런도 닳고 닳은 정치인. 사람을 집어삼킨다는 미국 정치판에서 최정상까지 치고 올라와 7년 넘게 그 권좌를 유지해온 인물이다. 유지웅 같은 인물은 정치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거법에 의해, 어떡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지 쯤은 알고 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니스 회장님이 우리 민주당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유지웅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스쳤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상대방이 스스로 인정하고 들어온 것이다.
“네?”
“어차피 안전지대를 미국에 주어야 한다면, 우리 민주당을 통해서 성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년 간 우리 민주당은 회장님을 대할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또 성의를 보였다 생각합니다. 공화당이 우리보다 더 잘하진 않을 거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미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비교적 오만한 편입니다.”
정말 미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커다란 정치적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폭탄 발언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야말로 오히려 먹힌다고 빌클런은 생각했다. 아쉬울 게 없고, 눈치 볼 것도 없는 스물 두 살의 거부 청년. 그에게는 정곡을 찌르는 화술이 진심을 움직일 수 있다.
예상대로 유지웅은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미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할 거라고는 몰랐겠지. 놀라움은 잠시, 그는 곧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외교적 수사나 우회적인 암시 따위가 전혀 없는, 진솔한 표현이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3대 도시 안전지대는 홍보를 위한 시제품이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이제 효과가 입증되었으니 그때와 같은 가격에 파실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무리한 대가를 받아낼 마음은 없어요. 저는 미국과 제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게 될 관계라 생각합니다. 신의만큼 긴 미래를 보증하는 것은 없지요. 한쪽이 지나치게 유리한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사실 미국이 지나치게 유리한 쪽으로 봐야 한다. 안전지대를 대체 어느 누가 설치해줄 수 있을까? 레드 몹 이하는 접근하지 않는 땅은 그 가치를 감히 측정할 수 없다.
“일단 설치지대에 소요되던 방위비용을 지급하셔야 합니다. 비용은 해가 갈수록 물가 상승에 따라 재책정해야 하고요.”
“물론입니다.”
“제니스 소속 일원에 대해서 면세 혜택, 외교관 면책 혜택, 미국 내 활동에 관해서 편의 보장도 요구합니다.”
“최고의 보장 기준을 정해놓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탈 시티의 모든 연구 실적을 제공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빌클런은 거기서 잠깐 멈칫 했다. 크리스탈 시티란 매사추세츠 시에 존재하는 거대 복합 연구단지를 말한다. 이른바 미국 최대의 결정체 연구단지다. 수많은 정부 기관, 민간 연구소가 모여 온갖 결정체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이론을 배출하는 곳이다.
이른바 미국 결정체 과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 그곳의 모든 연구 실적을 달라는 것은 그로서도 선뜻 약속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기관의 자료 제공도 문제지만, 민간 연구소의 자료를 주겠다고 쉽게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쉽게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가요?”
“크리스탈 시티는 정부 연구소보다는 민간 연구소가 더 밀집된 곳입니다. 민간의 재산을 정부 정책에 따라 함부로 제공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민간의 재산을 정부 뜻대로 제3자에게 제공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일견 그 입장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유지웅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저런 반응이 나올 것은 이미 자문단도 예상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저런, 아쉽네요. 다양한 연구 자료가 있으면 곧 완공될 제니스 연구단지 가동에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우리 미국도 최대한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겠습니다. 다만 크리스탈 시티의 모든 연구 재산이라는 항목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확답을 못 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어쩐다, 빨리 연구 작업을 궤도에 올리려면 기존에 연구된 자료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래야 시간을 절약하는데…….”
유지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통역관이 통역했다. 빌클런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혹시 제가 왜 제니스 연구단지를 설립했는지 아세요?”
“한국의 결정체 관련 기초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한 과감한 투자라고 들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바는 일단 그렇다. 미국도 일종의 부자의 여흥이자 명예를 위한 유희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돈을 들여서 유지웅이 연구단지를 설립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투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연구단지는 수익을 생각하고 운영하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된다.
“아뇨,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유지웅이 주머니에서 조그만 케이스를 꺼냈다. 반지 케이스처럼 생긴 검은 상자였다.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봤던 빌클런은 뚜껑이 열리자 숨이 멎는 듯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구슬이 담겨 있었다. 그 광채가 내뿜는 아름다움과, 뇌리를 치고 들어오는 그 존재감에 빌클런은 그만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건…… 설마……?”
“퍼플 결정체입니다.”
순간적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빌클런을 위해 유지웅은 친절하게 덧붙였다.
“연구단지는 바로 이 녀석을 위한 인프라입니다.”
============================ 작품 후기 ============================
이제 당당하게 세상에 보여도 될 만큼 힘을 쌓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