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02)
00402 스파이는 팜므파탈? =========================================================================
“그 시뮬레이션이 그렇게 중요해?”
나미는 덤덤하게 반문했다. 비스듬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레지나는 팔짱을 낀 채 끄덕였다.
“최윤은 그 시뮬레이션 검토를 위해 일 년이 넘도록 RPX의 시스템 자원을 독점했어. 분명히 보통 프로젝트는 아닐 거야.”
대중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윤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결정체 연구의 실력자다. 수없이 많은 인재들이 그와 함께, 혹은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대학원생, 박사, 유명 대학 교수 등 다양하다.
그런 인물이 세계 최고의 수퍼 컴퓨터를 일 년 넘게 독점으로 돌린 시뮬레이션이라면 보통의 연구는 아닐 것이다.
“최윤은 결정체 과학자야. 어떤 시뮬레이션인지는 모르지만 기존 결정체학의 근간을 뒤흔들 엄청난 연구일 거야. 우리에게는 그게 필요해.”
“내 몸에 일어난 현상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까?”
“물론이지. 너야말로 순수한 결정체 에너지로 움직이는 생명체니까.”
나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레지나의 힘을 빌려 신분을 완벽하게 위장했다. 덕분에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제니스에 잠입할 수 있었다. 현재 그녀의 신분은 피즈 전담의 통제관이자 제니스 공격대원이다.
그녀의 목적은 피즈를 데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복수는 이미 마음에서 지웠다. 죽은 줄 알았던 새끼를 찾은 이상 모든 원한을 잊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후 힘을 사용하는데 강력한 제약이 생겼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피즈를 데리고 무사히 바다로 탈출하기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녀는 정체를 숨기고 지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어. 아니, 생각도 안 했지.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인간을 약간 배웠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나는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제니스 연구단지에 들어올 수 있었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제는 알아.”
나미는 한 올의 웃음기조차 없는 레지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렇지?”
인간 사회에 섞여 살수록 세상의 이치를 알아간다. 레지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미는 이제 안다.
“맞았어. 그래서?”
“…….”
“나를 후원하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어. 너의 비밀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어. 너는 그저, 나와 맺은 약속만 지키면 돼.”
“네 원수를 죽여 달라는 거?”
“그래.”
나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말없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모습은 치명적일 만큼 아름답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고, 맹렬히 원할 수밖에 없는 뇌쇄적인 미모다. 마치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건가 싶을 만큼.
“널 후원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있어?”
“아니. 그럴 리가.”
조용히 바라보던 나미는 살며시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겠어.”
“꽤 인간다워졌는 걸.”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그렇게 익숙해지다가 아예 여기에 남는 건 아니겠지?”
레지나가 말하는 ‘여기’는 제니스, 혹은 한국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 그 자체를 말한다.
나미는 그 말에 웃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웃는 모습이, 인간이 아닌 그녀의 분위기를 인간처럼 보이게 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내 힘만 되찾으면, 피즈를 데리고 바다로 돌아갈 거야. 다신 돌아오지 않겠어.”
잠시 말없이 빤히 바라보던 레지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나를 도와줘야겠지?”
“최윤이 가진 그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필요해?”
“응. 보통 인간은 함부로 침투할 수 없어.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거야.”
나미는 힘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단지 물이 없는 땅에서는 제대로 힘을 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얼마 안 되는 힘조차도 일반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알겠어.”
* * *
한 번 아버지의 위엄을 보여준 이후로 아이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무슨 아버지를 신처럼 떠받들어보고 존경의 눈초리를 보낸다. 아직 만 22개월 밖에 안 된 녀석이 그러니까 조금 웃기기도 하는데, 그래도 아빠 된 입장에서야 마냥 좋기만 하다.
“진짜야?”
“그렇다니까. 우리 아이, 천재 아닐까?”
“세상에. 누굴 닮아서 저리 똑똑하지?”
만으로 두 살도 안 된 아이가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유지웅 커플은 난리가 났다. 정효주는 아이 정서 교육을 위한 동화책을 바리바리 주문해서 아예 서재를 차렸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과소평가하겠느냐만, 정효주는 특히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최고의 아이로 키울 거라며 교육열에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주 호들갑은 또 아닌 게, 만 두 살도 안 된 아이가 벌써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이들에 비하면 굉장한 속도다.
아무튼 나중에 큰일을 할 인물이 될 거라며 정효주는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최윤 사장이 방문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한가하게 오전을 보내고 있는데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최 사장님.”
“아침 일찍부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른 시간도 아닌데요, 뭐.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최윤은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평소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유지웅이 대뜸 물었다.
“뭔가 꺼내기 어려운 부탁이 있으신가 봐요?”
“…….”
“혹시 돈 문제인가요? 연구 자금이 부족해요?”
과연 예상이 맞았는지 움찔거린다. 사실 그가 꺼낼 어려운 이야기가 그것 말고 더 있나.
“연구 자금이 필요합니다.”
“얼마나요?”
“좀 많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하신지 모르지만 제가 설마 그것도 못 대주겠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적어도 7조 원 이상…….”
말을 하다 말고 최윤은 뒤를 흐리며 유지웅의 눈치를 살폈다. 유지웅은 살짝 놀랐다. 7조 원이라는 액수에 놀란 건 아니다. 일반인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이지만, 자신에게는 크게 부담되는 액수가 아니었으니까.
그가 놀란 건 최윤이 대체 왜 그리 많은 돈이 추가로 필요한가 해서였다. 자신에게야 부담 없는 돈이지만 그게 어디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가.
“용도를 알 수 있을까요?”
“설명이 꽤 길어질 거 같습니다.”
“편하게 설명하세요. 아, 잠시만요.”
유지웅은 얼른 일어나서 유세현과 정원을 산책 중인 안슐을 불러왔다.
“무슨 일인가?”
“최윤 사장님이 추가 연구 자금이 필요하다면서 설명을 하신대요. 근데 저만 들어서는 잘 모르니까, 안슐도 같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듣고 조언 좀 해줘요.”
“자네에게는 이미 훌륭한 자문단이 있는데, 비전문가인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큰 그림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말에 안슐은 기분이 좋은지 호쾌하게 웃었다. 최윤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우려를 떨쳐냈다. 안슐은 유지웅이 가장 믿는 인물 아닌가.
“RPX의 시스템 자원을 제가 일 년 넘게 사용하신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RPX가 뭐죠?”
“……재작년에 구입해주신 수퍼 컴퓨터입니다. 현존하는 모델 중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녀석이죠.”
“아, 그거요? 기억나요.”
수퍼 컴퓨터 이름이 뭔지 어떻게 아나? 그냥 그런 거 사달라고 해서 사라고 돈을 내준 것만 기억이 난다. 당시 효웅산업이 세계 제일의 수퍼 컴퓨터를 매입했다고 한국 언론이 한동안 떠들썩하기도 했었다. 국내의 유명 공과 대학에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없는지 문의가 빗발치며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다.
“제가 지난 일 년 간 RPX로 어떤 시뮬레이션 모델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결정 에너지의 메커니즘에 관한 알고리즘을 분석 및 구축하는 모델이었죠. 결정 에너지의 입자화 현상을 규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비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입자화 현상의 물리원리를 정리했습니다.”
“…….”
분명히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까 단어 뜻이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라, 최윤이 ‘구체적으로 뭘’ 했다는 건지 감이 안 왔다.
“음, 그러니까 컴퓨터를 일 년 넘게 돌리면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말씀이신가요?”
“결정 에너지의 응집에 관한 방정식을 정리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실제 검증이로군.”
안슐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최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예. 도면은 완성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도면대로 건물을 짓는 겁니다. 시험 건설이죠.”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신 돈이 이제 시험적으로 지을 건물의 건설비용이라는 거군요.”
겨우 7조 원? 유지웅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최윤 한 명에게 밀어주기에는 꽤 큰돈이지만, 결정체 연구단지에 쏟아 부은 돈이 이미 수십 조 원이 넘는다. 그런 내게 고작 7조 원을 달라고 하면서 그렇게 죄지은 것처럼 굴어야 해?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내 지갑을 뭐로 알고?
“아닙니다. 7조 원은 입자 가속 장치를 짓는데 소요될 금액입니다.”
“입자 가속 장치요?”
“응집화되지 않은 결정 에너지를 검출하는데 사용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도면으로 지을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건설 도구쯤 됩니다. 짓고자 하는 건물이 아파트 단지라면, 이 장치는 아파트 단지를 짓는데 사용할 덤프 트럭 정도쯤…….”
최윤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지금 아파트 단지를 지으려는데, 거기에 사용될 덤프 트럭을 만드는 비용이 7조 원쯤 될 거라는 소리. 물론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한 것이지만 아파트 단지 총 건설비용이 무지막지해지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안슐은 표정의 변화 없이 박수를 짝짝 쳤다.
“축하하네.”
“네? 뭐가요?”
“의미 있는 일에 쓰게 큰돈을 달라는 부하가 있지 않나. 부럽기 그지없네.”
정말 그랬다. 안슐에게는 그런 부하가 없었다. 사람들은 거부가 얼마나 돈을 쓰고 싶어하는지 도대체 알아주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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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번 회장님의 지갑을 쓰러뜨려보겠습니다!
(최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