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26)
00426 진격의 불곰 =========================================================================
「해피 뉴 이어!」
새벽을 울리는 맑은 타종 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밝은 얼굴로 신년을 알렸다. 종로는 보신각 타종 행사로 모인 시민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유지웅 커플도 TV 앞에 나란히 앉아 타종 행사를 시청했다.
“아, 재작년만 해도 우리도 저기 갔었는데.”
“가면 되잖아?”
“겨우 저런 거 가려고 일일이 분장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
이제 스물다섯이 되었다. 속된 말로 꺾인 나이. 하지만 실감이 안 난다. 마음은 아직도 스무 살에 머물러 있는데.
“아, 실감 안 나. 벌써 결혼 4년차네.”
“왜, 권태기 오니?”
“아니.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그런 게 안 오지?”
정효주가 피식 웃자 유지웅은 아이처럼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뺨에 닿는 허벅지의 촉감은 그저 부드럽다. 내 마누라지만 가끔은 세상 남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지곤 한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글쎄. 이제 육아나 하지, 뭐. 둘째랑 셋째도 낳아야 되고.”
정효주는 현재 쌍둥이를 임신 중이다. 몇 달 안 돼서 그런지 아직 티는 안 났다.
대학 4년을 마친 그녀는 올해 2월에 졸업식을 올린다. 유지웅은 아직 1년이 더 남았다.
“너 없는데 학교 다니려니 재미없을 거 같아. 그냥 대학원 가는 건 어때?”
“졸업했다고 학교 가지 말란 법 있니? 데이트 한다고 생각하고 가면 되지.”
“그러고 보니 졸업이 다음 달이네. 졸업 선물 뭐 해줄까?”
“한 번 맞춰 봐. 내가 뭐 갖고 싶은지.”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는 모습이 퍽 예뻐 보인다.
누가 그랬던가? 마누라가 얼굴이 예쁘면 3년이 즐겁고, 요리를 잘하면 10년이 즐거우며, 심성이 고우면 평생이 즐겁다고. 그리고 예쁘고 요리 잘하고 심성이 고운 여자랑 결혼을 해보니 매 순간순간이 즐겁다.
“이번에도 또 아들만 나오면 어떡하지?”
“어머, 아들만 줄줄이는 싫어. 기왕이면 딸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어.”
“그럼 딸 나올 때까지 계속 낳으면 되지.”
유럽에서는 CERC 처분 문제를 놓고 살이 떨리는 긴장감이 돌고 있지만, 흑석동 저택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지웅이야말로 유럽에 들이닥친 긴장감의 직접적인 원인인데 말이다.
유럽이 사라진 과학자 송환을 놓고 목에 핏대를 세울 때, 두 달 뒤에 있을 졸업식 선물을 궁리한다. 유럽이 약탈당한 연구 자료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때, 올해 태어날 쌍둥이 이름을 뭐로 지을지를 고민한다. 그야말로 여유롭다.
러시아가 투항한 포로의 반환을 요구하자 유럽에서도 이에 맞서 과학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유럽의 요구에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포로의 반환만을 요구할 뿐이다.
유럽 입장에서는 벽보다 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한국, 아니 유지웅이 끼어들기 전에 러시아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한편 유지웅은 러시아가 CERC에서 가져온 연구 자료 및 물품과 주요 과학자들을 손에 쥐고 있으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오죽하면 ‘그냥 세상에 백신 공개해버리고 CERC는 잊어버릴까?’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게 알아서 굴러들어오니 ‘내가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지?’하고 귀찮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너, 교복 아직 갖고 있지?”
“교복? 그거 버린 지가 언젠데? 갑자기 교복은 왜?”
“아니, 그냥. 오늘 한 번 그거 입혀서 해보려고 그러지.”
“사올까?”
그렇게 유럽 전황도 잊고 아내와 노닥거리며 오랜만에 연애 시절의 풋풋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 최윤입니다.」
착 가라앉은 음성에 유지웅은 몸을 일으켰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레지나 박사가 대용 백신을 완성했습니다.」
신랑의 얼굴색이 변하자 정효주도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폈다.
“완성됐대?”
“응.”
불곰, 아니 러시아는 유지웅을 뛰어넘는 과감함과 호전성으로 자칫 몇 달 이상이 걸릴 뻔한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그에 비해 유지웅은 모른 체 한 발짝 물러서서 아내 치마폭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만 더 지체되었으면, 방금 농담으로 중얼거렸던 ‘귀찮은데 그냥 다 잊어버려?’라는 마음이 진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턴이야.”
* * *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모든 곡물에는 바이러스 괴수를 이겨낼 수 있는 저항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양이 미미한 관계로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순 없어요. 꾸준히 오랫동안 복용한 사람만이 완전한 저항력을 갖출 수 있죠.”
레지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방법은 있습니다. 씨앗에 함유된 저항 성분만을 추출해서 고농도로 압축하면 돼요. 그럼 저항력을 키우는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녀는 흰 캡슐 알약을 들어보였다. 시범적으로 만들어진 ‘대용 백신’이었다.
“이 알약 하나를 만드는데 50kg의 곡물이 들어갔습니다. 50kg의 곡물에서 저항 성분만 추출해서 모은 거죠.”
“50kg에서 겨우 알약 하나라니…….”
“대신 50kg을 섭취할 기간을 한 번에 줄일 수 있죠. 이 알약 하나로 바이러스 괴수의 활동과 증식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두 개면 타인에게 감염시킬 능력을 상실합니다. 세 개면 현대 의학으로 바이러스 괴수를 검출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세 개면 완치된다는 건가요?”
“네, 그래요. 하지만 완전히 박멸되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어요. 세포핵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수년 이상 꾸준히 호남산 곡물을 섭취한다면 숨어 있는 바이러스 괴수까지 완전히 박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 역시 완벽하게 장담을 할 순 없어요.”
“수고하셨습니다.”
CERC를 제외한 다른 나라나 연구기관은 바이러스 괴수를 검출하는 것도 버거워한다. 하물며 백신 개발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제니스 연구단지는 레지나와 최윤, 손재진을 필두로 대용 백신 개발을 해냈다. 불과 두 달도 채 안 걸린 짧은 시간에 개발을 마친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호남산 곡물이라는 약재를 어떻게 정제하느냐가 개발 내용의 핵심이었으니까. 호남산 곡물이 가진 저항 능력을 규명하고, 그것을 추출할 수만 있다면 개발은 눈 감고도 쉽다.
이번에는 최윤이 발언했다.
“이 알약은 어디까지나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시제품입니다. 1톤의 곡물을 알약으로 정제하는데 며칠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험실 장비로는 대량 생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전 세계를 수요로 잡는다면, 적어도 180억 개의 알약을 정제해야 합니다.”
“그렇게나 많이요?”
유지웅은 크게 놀랐다. 아니, 180억 개를 정제하려면 대체 곡물이 얼마나 필요한 거야? 1개에 50kg이었으니까, 총 9억 톤?
“호남산 곡물을 섭취하지 않은 사람은 3개의 알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실상 완치 상태가 됩니다. 80억 인구 중 호남산 곡물을 섭취하지 않은 인구층은 약 60억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래서 180억 개가 필요합니다.”
“9억 톤의 곡물이 필요하지만 호남평야의 생산능력을 볼 때 단시간 안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제는 대량으로 정제할 설비가 없다는 거죠.”
“충분한 예산이 주어진다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유지웅은 생각했다. 최윤의 눈에는 내가 ATM기기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아무튼 이쪽도 무기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러시아에만 맡겨둘 이유는 사라졌다. 귀찮음을 떨치고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 * *
한국 정부는 CERC 점령 사태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발뺌을 했지만 그 말을 믿는 나라는 없었다. 덕분에 중재를 바라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은근히 요청이 들어왔다. 유지웅이 아예 귀를 닫아버리니 한국 정부로 다들 발길을 돌린 것이다.
“백신이라는 건 자료가 있다고 해서 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밤 바이러스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요. 한국 역시 피해가 적다 하나 밤 바이러스의 마수에서 비껴갈 수는 없습니다. 중재를 해주신다면 한국이 필요한 만큼 백신을 무료로 공급하겠습니다.”
“모든 연구 자료는 이미 러시아가 손에 넣었을 텐데요?”
“그것은 인정합니다만, 사본이 따로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백신을 만들어내려면 몇 년은 걸릴 겁니다. 그만큼 기술 격차가 크니까요.”
“결국 CERC의 범행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상대가 불쾌한 어조로 반문했다.
“모든 것은 CERC의 연구 자료를 탐낸 러시아의 음해입니다. 지금 귀하의 발언이 얼마나 심각한 외교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한국에 허리를 굽히러 왔으면서 큰소리를 친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림도 없다.
하지만 지금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상대의 얼굴에는 ‘어디 감히 너 따위가 나랑 맞먹으려 들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남기철도 이해했다. 대통령, 적어도 외교부 장관과 독대를 기대하고 왔는데 일개 국장 따위가 협의를 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국장 따위가, 라는 마음을 품고 만만하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는데.’
남기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다. 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가?
“우리는 러시아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우리 또한 CERC가 백신 판매를 위해 밤 바이러스를 유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미 그 증거도 확보했고요.”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상대의 어조가 변했다. 남기철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귀하가 지금 무엇을 믿고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는지는 제가 알 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날이 선 공격적인 말투에 상대가 흠칫 했다.
“저는 CERC 해체에서 그 책임이 끝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 분은 타협을 모르는 분이십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은 반드시 끝까지 밀고 나가셔야 직성이 풀리죠. 그럴 힘도 충분히 갖추고 있고요.”
“……그 분? 설마……?”
“예. 제니스의 주인인 유지웅 회장님입니다. 과분하게도 그 분의 후원을 받고 있지요.”
상대를 일개 국장이라 깔보고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스피어트 EU이사회 의장은 그제야 뭔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의장님은 CERC 해체를 끝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CERC는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밤 바이러스에 관련된 모든 배후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책임의 한도는 없으며, 중도 타협 또한 결코 없습니다.”
언제 자신이 EU이사회 의장에게 감히 이런 공격적인 말을 해볼 수 있을까? 남기철은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유지웅의 말이 왜 항상 직설적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250년의 부를 유지했던 가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
스피어트 의장은 굳은 눈으로 남기철을 응시하다가 결국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일어서야만 했다. 그를 배웅하고 남기철은 보고를 위해 유지웅에게 연락했다.
“회장님. 스피어트 의장이 지금 돌아갔습니다.”
「아, 로스차일드쪽 사람이랬죠? 경고는 확실히 했나요?」
“네. 알아들은 눈치입니다. 그보다 대용 백신 발표는 언제쯤 하실 건가요?”
「내일 하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게 모양새나 신뢰도가 좋겠죠?」
“그럼 제가 대통령님께 말씀해두겠습니다. 참, 그 전에 먼저 러시아와 협의를 해야 합니다.”
「네? 무슨 협의요?」
“대용 백신이 개발된 걸 알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요. 브라우니도 빌렸겠다, 이제 거리낄 게 없으니 즉시 유럽에 쳐들어갈지도 모릅니다. 미리 진정을 시켜야 합니다.”
「에이, 설마……. 아하하…….」
웃음소리가 뭔가 이상하다? 남기철은 안색이 변했다.
“설마, 회장님?”
「사실 백신 개발했다고 키틴 대통령한테 벌써 말했어요. 설마 그거 하나 말했다고 별 일은 없겠죠?」
러시아는 이번 일의 중요한 협력자다. 백신 개발 사실을 말한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말하기 전에 ‘그래도 함부로 설치면 안 돼.’하고 다독여둘 필요가 있다는 것. 워낙 성정이 불같고 급하기 때문이다. 키틴을 직접 만나본 남기철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남기철은 급히 키틴에게 핫라인으로 연락을 했다. 키틴은 쾌활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오, 남 국장. 유지웅 회장님한테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자체 백신을 개발하셨다고요? 지금 축하 선물을 준비하는 중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축하 선물이요?”
선물이란 단어가 이리 불길하게 느껴질 날은 아마 오늘 말고 다신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러시아 특수부대가 프랑크프루트에서 ‘선물 작전’을 펼치는 중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작전이 종료될 겁니다.」
“프랑크푸르트? 설마…….”
「아, 지금 막 중간보고가 들어왔군요. 휴버튼 로스차일드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선물 하나가 일단 준비됐군요.」
남기철은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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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을 흥분하게 하지 마. 분명 후회할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