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542)
00542 Pre-season – 커플편 =========================================================================
그날 이후 그를 대하는 정효주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여고생에서, 내 남자를 대하는 처녀의 태도로 변한 것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세밀한 부분에서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뽀뽀.”
“어우, 야. 사람들 다 보잖아.”
“얼른!”
“들어가서, 들어가서. 응?”
키스를 요구해도 마냥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기만 했던 것도 사라졌다. 부끄러워하는 건 맞는데 이제 제 할 말은 한다. 신혼집 문턱을 넘어서면 해준다나? 심지어 사람 하나 없는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도 안 된다고 한다.
“아무도 안 보는데 뭐 어때?”
“저기 저거.”
그러면서 CCTV를 가리키는 데는 그도 할 말이 없었다.
신혼집에 들어선 유지웅은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문으로 밀어붙이고는 거칠게 안았다. 그녀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는 듯 두 팔로 단단히 껴안고는 입술을 얽었다. 조금은 반항하는 듯하던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 순순히 키스를 받아들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얽힌다. 바닷물을 들이킨 듯이 끊임없는 갈증이 났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 거칠게 키스에 몰입하지만 그럴수록 목만 더 마르다.
순진한 처녀 여고생은 키스 하나에도 온몸이 경직돼서 눈을 꼭 감은 채 집중하지만, 음흉한 늑대 유부남은 키스에 집중하면서도 일일이 반응을 살필 정도로 여유를 부린다.
‘될까?’
팔 하나를 슬쩍 뺐다. 될까 말까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가 키스에 완전히 빠진 듯하자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풍성하게 부풀어 있는 가슴 위로 손을 살짝 얹는 순간…….
“꺅!”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떠밀었다. 싫고 말고가 아닌, 그야말로 유전자에 배여 있는 반사 본능이었다. 유지웅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무슨 여자애 힘이 이렇게 세?
‘진짜 벌써 탱커로 각성한 거 아냐?’
가슴팍이 얼얼하다. 탱커로 각성한 거야, 아니면 놀라서 힘이 3배로 쎄진 거야?
“괘, 괜찮아? 어, 어떡해!”
자기가 밀어놓고는 자기가 더 놀라서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유지웅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벽에 부딪쳐 얼얼한 등만 두드렸다.
“……많이 아파?”
“아파서 죽겠다.”
“……그러게 왜 만지려고 해.”
그녀는 검지를 틱틱 부딪치며 눈치를 살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좋은데 유지웅은 슬슬 조급해졌다.
‘아, 못 참겠는데 진짜.’
효주와의 섹스는 일상이요, 생활의 일부였다. 그냥 눈 뜨면, 눈 마주치면, 손잡으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무언의 대화였다. 그런데 한창 욕구 왕성한 청소년기로 돌아와서는 감질나게 입술만 맛보고 있으니, 아주 그냥 죽을 것만 같다.
이미 쌀도 익었겠다, 조금 거칠게 밀어붙여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관두었다. 그녀가 너무 놀라기라도 하면 자기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다. 역시 천천히 공을 들여 무장 해제를 해나가는 방법 밖에 없나?
“배고프다. 밥 먹자.”
“기다려 봐. 내가 금방 해줄게.”
또 가슴 만지려고 덤비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눈치만 보던 그녀는 신이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유지웅은 이제는 제법 가구가 갖춰진 1층 거실로 들어섰다. 최상위층 펜트하우스에 1층이라는 말이 조금 우스운데, 복층식 구조다 보니 편의상 하층을 1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100인치 급 초고화질 디지털 TV였지만 200평급 펜트하우스의 위용에는 턱없이 모자란 느낌이다. 더 큰 TV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국내에서는 이 모델 밖에 찾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 집에 있는 거 가져오고 싶네.’
흑석동에는 160인치 급 TV가 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 녀석이 그립다.
처음에는 거의 텅 비어 있던 펜트하우스는 이제 제법 가구가 갖춰졌다. 시간이 나는 대로 같이 손잡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덕분이다. 처음에는 고교생 커플인 줄 알던 백화점 직원들도 매장을 나설 때면 어린 신혼부부로 본다.
얼마 후 정효주가 식사가 다 됐다고 알렸다. 안 그래도 맛있는 냄새에 허기가 돌던 참이다.
식탁을 놓고 서로 마주 앉았다. 가짓수가 많진 않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펄펄 끓는 해물 전골, 야채를 곁들인 소고기 볶음, 싱싱하게 데친 야채는 보기만 해도 식욕이 솟아났다.
전골 국물에서 펄펄 끓는 게 다리 하나를 집어 뜯어먹자 정효주가 바짝 긴장해서 살폈다.
“어때? 먹을 만해?”
“맛있다. 오늘밤 당장 나한테 시집와도 되겠어.”
“정말? 다행…….”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던 그녀는 순간 뭔가 미묘한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칭찬은 칭찬인데 뭔가 검은 색 욕심이 슬쩍 끼워져 있는 거 같은데?
“진짜 맛있다니까? 오늘밤 당장 시집올래?”
“무, 무슨 소리야! 얼른 밥이나 먹어!”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는 거칠게 수저질만 푹푹 해댔다. 유지웅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눈이 마주치면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왜 저래?
식사를 마치고, 같이 나란히 설거지를 했다. 양치를 하고,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았다.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그녀를 한 팔로 감싸고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킥킥거리던 그녀는 이내 그의 시선을 느끼고 웃음을 멈췄다. 눈이 마주칠까 봐 억지로 TV를 보는 척을 하지만 다 안다. 어깨가 벌써부터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야, 안 잡아먹는다니까?
“내가 무서워?”
“……뭐, 뭐가!”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먹으려는 건 줄 알겠다?”
“그, 그러니까 뭐가!”
“계속 시치미 뗄 거야?”
“마, 말을 해야 알지!”
어쭈? 좋아, 그렇게 나오신다?
“가슴 언제 만지게 해줄 건데?”
“……!”
“우리 곧 결혼할 건데 그것도 못 해줘? 가슴 언제 만지게 해줄 거야? 응?”
말해두지만 로맨틱한 포옹, 혹은 키스 밖에는 아직 남녀열애지사를 전혀 모르는 순진한 여고생이다. 그것도 한창 꿈 많고 감수성 풍부한 17세. 당연히 이런 능글맞은 유부남의 말도 안 되는 직격에 버텨낼 수 있는 면역력이 없다.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그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몰라 굳어 있었다. 노골적으로 노골적인 요구를 하는 걸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모, 몰라!”
결국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는 후다닥 이층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정조의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혼자 남은 유지웅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재밌다. 귀엽네.”
놀리는 짓도 중독될 것 같다.
* * *
효주 부모는 둘이 약혼반지까지 주고받은 걸 아직 몰랐다. 둘은 부모님 앞에서는 철저하게 연기를 했다.
지금 유지웅은 정효주 집을 나와서 펜트하우스에 혼자 살고 있었다. 정효주 부모님께는 대강 둘러댔다. 그래서 정효주는 평일에는 학교를 마치고 잠깐, 주말에는 아침 일찍 놀러 와서 저녁에 귀가를 한다.
유지웅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주말이니 재워서 보내고 싶은데 효주 부모님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정효주가 무장 해제가 덜 된 게 가장 컸다. 이제 겨우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수준인데 무슨.
‘그냥 서로 술 먹고 실수로 한 게 잘된 건가?’
문득 ‘현실’의 옛날이 생각났다. 스무 살 때, 둘은 서로 힘든 일을 겪었다. 유지웅은 첫 여자친구인 최현주와 헤어졌고 정효주는 공격대에서 잘렸다. 서로 신세타령을 하다가 술김에 그만 실수를 저질렀고, 그것을 정효주가 수습을 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래서 몰랐는데, 어쩌면 효주는 의외로 방어 본능이 엄청나게 뛰어난 것은 아닐까? 만약 실수가 아니었다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손도 대지 못했을지도?
유지웅은 펜을 돌리며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 쟤 누구야? 우리 반에 저런 애가 있었어?”
“그치? 은근히 멋있지 않니?”
“생긴 건 그냥저냥 평범한데 뭔가 분위기 있는데?”
“일진 애들도 쟤한테는 말 함부로 못 붙이더라. 공부를 엄청 잘하는 거 같진 않던데. 신기하지 않니?”
유지웅은 모르지만(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반에서 선망하는 무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특히 여자애들을 중심으로 그런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저 시계 봐. 완전 비싸 보여.”
“무슨 레플리카 아니야? 모방품 같은 거.”
“그거야 모르지.”
“나! 나 저번에 쟤 봤어! 마트에서 뭘 잔뜩 사서 배달을 시키는데 가격 보지도 않고 그냥 카드로 긁더라.”
“어머, 멋있다.”
……오백 원에도 부들부들 떠는 고교생 입장에서는, 뭐가 됐든 간에 가격 확인 없이 바로 긁어버리는 게 의외로 폼나 보이는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해두자.
“너희 그거 알아? 내가 학생 주소록 봤는데, 쟤 여의도 케즈닉에 산대! 그 있잖아, 오피스텔이랑 아파트랑 상가랑 같이 복합된 그 고층 빌딩!”
“어머, 그 비싼 곳에?”
“와, 대박! 거기 오피스텔 월세만 한 달에 150인가 그렇다던데?”
케즈닉은 유지웅이 살고 있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로, 5층부터는 건물이 두 개로 분리돼서 올라간다. A동은 아파트, B동은 오피스텔로 이뤄져 있다. 참고로 유지웅은 A동 최상위층 펜트하우스를 임대해서 살고 있었다.
“진짜 어디 재벌가 아들 아니야?”
“그런 애가 왜 우리 학교에 다니지?”
뭔가 자기를 놓고 수군거리는 거 같긴 한데, 별 관심이 없는 유지웅은 크게 신경을 안 썼다. 그의 머릿속은 오늘은 어떤 말로 효주를 놀려줄까 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효주를 놀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저어, 지웅아?”
낯선 여자애 목소리에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웬 여자애 셋이서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물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
다년 간 몸에 밴 도도함이다. 여자애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있잖아. 국사 선생님이 내주신 단합 과제…… 우리가 같은 조라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구…….”
“아, 그래? 벌써 조가 나왔어?”
“응!”
“조가 몇 명이었지? 여섯 명이었나?”
“어. 남자 셋, 여자 셋.”
왼쪽에 선, 흑발을 허리까지 길게 길러 하나로 묶은 여자애가 얼른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학교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과제하기로 했거든? 너 시간이 괜찮은가 해서.”
“안 괜찮아도 과제 하려면 시간 내야지. 장소는 정했어?”
“지금 이야기 중이야.”
“그냥 우리 집에서 할래? 어차피 나 혼자 살거든.”
“어, 정말 그래도 돼?”
“응. 근데 투룸이라서 좀 좁을 수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아! 괜찮아! 부모님 없이 우리끼리 모이는 게 더 편해! 더 재미있구!”
오른쪽에 선, 짧은 단발을 한 여자애가 또 얼른 나섰다.
“그럼 오늘부터 모이는 거다?”
“그래.”
여자애들은 꺅꺅거리며 자기들 자리로 돌아갔다. 자기들끼리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들었어? 들었어? 투룸에 혼자 산대. 어쩜, 너무 멋져.”
“근데 투룸이면 여섯이 모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뭐가 좁다는 거지?”
“뭐 어때. 이참에 케즈닉 투룸 구경이나 한 번 해보는 거지.”
“아, 기대된다. 나 그런 집은 첨 가 봐.”
참고로 그 빌딩에 투룸 따윈 없다. 오피스텔과 아파트만 있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거짓말은 안 했어요. 복층이니까 투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