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06
4화. 리하르트의 동료들
결전 이후.
천국에서 쫓겨난 호르의 군단을 맞이한 건, 상처투성이 대륙이었다.
쑥대밭이 된 수많은 마을과 반파된 성벽.
눈 닿는 곳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자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호르의 군단은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말했다.
“더 이상 재앙은 없다. 악을 징벌하신 호르께선 모두를 위해 천국을 창조하셨다.”
당장 저들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데, 그 입으로는 영광된 승리를 외쳐 댔다.
피라도 토할 듯 고통스러운 속내를 숨기고.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절규를 씹어 삼키며.
리하르트의 동료들은 천국을 통치할 다섯 호르의 위대함을 널리 알렸다.
“위대한 신께선 세상을 어지럽힌 극악무도한 괴물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르시길, 너희 중에 죄를 짓는 자가 있다면 그 괴물과 다를 바 없는 벌을 내리겠노라 하였다!”
뾰족한 칼날을 주워 삼키면 이러할까.
가슴속에 불덩이가 타오르면 이러할까.
원수를 찬양하고, 소중한 이를 악의 수괴라 칭하는 건 정말이지 괴롭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혀를 깨물어 가면서 눈물을 참아 냈다.
소중한 존재를 잃은 건 비단 호르의 군단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젖은 채였다.
그런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게 군단이 해야 할 마지막 의무였다.
“……눈물 참아. 저들 앞에선 웃으라고.”
모리츠가 흐린 음성으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리하르트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평화다.
남겨진 자들이 울고 있어서야 그 평화가 제대로 빛날 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과 호르교의 노력 덕분일까.
대륙은 지난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죽음과 흉터가 만연하던 곳곳에 호르교의 깃이 휘날렸다.
기댈 곳이 필요한 이들은 천국에 있는 다섯 호르를 독실한 마음으로 섬겼다.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나마, 대륙엔 호르교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그 이후, 호르의 군단은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가장 먼저 군단을 떠난 이는 다름 아닌 앨런이었다.
그는 리하르트가 호르였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고, 끝내 제멋대로 지옥에 가 버린 신에게 분개했다.
다만 증오는 아니었으니, 그건 신을 잃어 방황하는 어린양의 모습이었다.
그 뒤를 이어 라플라스의 국왕, 알리사와 마법사들이 떠났다.
전우간에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 따윈 열리지 않았다.
대륙은 착실히 상처를 추슬러 나갔지만, 군단의 속은 썩어 문드러질 듯 곪아 갔다.
그 상처만큼은 그들이 스스로 이겨 내야만 했다.
◈ ◈ ◈
“이제 속이 좀 후련하십니까?”
아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차라리 넋두리에 가까운 음성에 비탄이 묻어나왔다.
“리하르트라는 이름은 세간에 영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동료들에게만큼은 여전한 망나니입니다.”
하지 못했던 말이 많았다.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회조차 없었다.
확, 지옥에나 가 버릴까.
문득 떠오른 위험한 생각을 아론은 애써 지워 냈다.
– 죄 짓고 살지 마라. 내 손으로 너희를 벌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일 테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힘겹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를 그들은 똑똑히 들었다.
그래.
소중한 자에게 그런 끔찍한 경험을 안겨다 줄 순 없었다.
“저희는 당신과 다르게 망나니가 아니니까요. 동료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그런 못된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신도 알고 있겠죠.”
그래서 혼자 지옥으로 훌쩍 가 버린 것이겠죠.
아득-
이를 간 아론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전쟁이 끝난지 딱 일 년째 되는 날의 오후였다.
세상은 제법 평화로워졌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은 남아 있었으나, 호르교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북대륙을 대표한 바텐베르크와 남대륙을 대표한 라플라스 왕국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
사실상 협정 그 이상의 무언가, 대륙을 반으로 갈랐던 보이지 않는 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계기였다.
기사가 있는 곳에 마법사가 있고, 마법사가 있는 곳에 기사가 있었다.
“…….”
언제였던가.
아론은 리하르트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고.
아니, 그것을 넘어 대륙의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그 모두를 하나로 이어 줄 연결 고리가 바로 신, ‘호르’라고 하였다.
그때 아론은 무어라 답했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던 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아론은 사실 신을 싫어했다.
그런 게 정녕 존재한다 생각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원망받아 마땅한 존재라며 리하르트의 면전에 대고 말한 적이 있었다.
성기사가 되기 이전의 아론은 신을 방관자라 여겼으니까.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신을 믿었다면, 그것을 좋게 포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한창 포섭하려 할 적의 아론은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아론은 스스로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 정말, 신이란 것이 존재합니까?
– 그렇다면 신이란 존재는 어째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신을 믿지 않겠느냐 말하는 리하르트에게, 아론은 그리 답했었다.
정말로 신이 방관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론이 알고 있는 리하르트만큼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신이었다.
일찍이 대부분의 동료들이 알아챘지만 암묵적으로 모르는 척했던, 공공연한 진실.
“끝까지 말씀을 안 해 주시더군요. 저는 줄곧 사과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말이죠.”
아론이 울듯이 웃었다.
리하르트가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 꼭 제가 주제도 모르고 뱉었던 참람한 말들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리하르트와의 여정은 고달팠으나 그만큼 행복했다.
주군과 함께 세상을 구한다는 일념하에 삶의 이유를 찾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헌신 덕에 지금의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하지만 아론을 비롯한 리하르트의 측근들에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행복하질 않은데 그걸 어찌 평화라 부를 수 있을까.
애써 웃다가도,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며왔다.
자신들이 늙어 죽은 이후에도 억만 년을 홀로 지옥에서 보낼 리하르트를 생각하면 울음이 났다.
심마(心魔)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을 마음의 병이었다.
◈ ◈ ◈
모리츠는 자신을 비롯한 이들이 심마에 먹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마기가 마음에 낀 것 같았다.
닳고닳은 마음은 난폭하고 폭급해지게 마련.
이러다간 언젠가 누구 하나가 사달을 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쯧.”
겨우 일구어진 평화가 자신들의 손에 깨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그깟 심마 따윈 단숨에 불태워 버릴 만큼 크고 찬란한 사명에 불씨를 당기면 될 일이었다.
“아론.”
모리츠는 먼저 아론을 찾았다.
그를 설득하는 건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리하르트가, 진짜 호르가 잊혀지는 건 절대 두고 못 봐.”
요 일 년 새 흐릿했던 아론의 눈빛이 일순 반짝였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맹세를 하자.”
“……맹세?”
“죽어서도 이 세상을 지키자. 리하르트가 지옥에서 세상을 지킨다면, 우리는 천국에서라도 영원히 그 뜻에 함께하자.”
그건 모리츠가 찾은 새로운 사명이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신념을 밝게 불태웠던 그들이, 오늘에 이르러 잃어버린 불꽃이었다.
모리츠는 스스로 등불이 되어, 꺼진 홰에 불을 나누어 주었다.
불씨를 이어받은 아론이 맹세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드가 그 뒤를 따랐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렇게 근사한 일에 제가 빠져서야 쓰겠습니까.”
“왜 이제야 찾아오셨습니까! 그래서, 맹세는 혈서로 치르면 됩니까?”
모리츠와 기드, 아론은 호르의 군단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의사를 물었다.
그렇게 묻다 보니 어느샌가 군단 전원이 맹세를 하기로 약조하였다.
아론은 언뜻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질 심마였던가.”
그리도 괴롭던 가슴속 병이 고작 사명 하나 세운 걸로 씻은 듯이 지워졌다.
아니, 괴로움은 여전했으나 감내할 수 있게되었단 표현이 더 알맞으리라.
“리하르트가 지금 우리를 보면 뭐라 하려나.”
모두에게 약조를 받은 뒤 바텐베르크로 돌아왔을 때였다.
모리츠의 중얼거림이 아론의 귀를 파고들었다.
“음…….”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정말 뭐라고 말씀하실까.
천국에서 편히 쉬랬더니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역정을 내실지도 몰랐다.
음…… 아니,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이라면 분명 기꺼워하실 테지.
상념에 잠겨 있던 아론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동료 하나는 잘 두었다고 낄낄 웃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럴 것 같다.”
모리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