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ruid in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80)
제280화
제280편 백 개의 발, 만 개의 독 (30)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어 줘.”
-찌!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자그마한 아기 두더지는 전과 달리 힘 있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깨알만 한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손수건에 남은 지네 머리를 담은 뒤, 아기 두더지의 등에 가방처럼 매 주었다. 지상까지 굴을 파려면 에너지가 보통 드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아직 어리니까…….
“이건 비상식량이야.”
-찌?
“배가 고파지면 먹도록 해.”
나는 아기 두더지를 새벽 별나무 가지 위에 올려 두고, 안식처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이파리들을 조심스럽게 헤쳐 보았다. 밖에서는 아무리 단단한 검과 창이라도 안식처를 뚫을 수 없지만, 그 주인인 나의 손길이 닿자 이파리들은 아주 부드럽게 열렸다.
작은 돌조각들이 조금씩 떨어진다.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는 아기 두더지를 그 틈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
-찌.
아기 두더지가 이파리를 헤치고 나아가자마자, 이파리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단단하게 안식처를 감쌌다.
“…….”
이제 저 녀석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숲의 보호] 스킬의 효과가 다 떨어질 때까지 아기 두더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레기온의 힘으로 돌파하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지.
-사악, 사악, 사악…….
-낑, 낑…….
안식처 위에서는 아기 두더지가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흙을 파헤치고, 밀어내는 소리 말이다. 저 작은 생명체에게 베푼 친절이 이런 기적으로 돌아올 줄이야. 정말 고마운 일이다.
‘힘내라, 아기 두더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시계꽃의 꽃잎을 뒤로한 채,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아기 두더지는 촉촉한 흙의 냄새를 맡으며 힘차게 나아갔다. 흙을 파고, 밀고, 다지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씩, 공간이 만들어졌다.
-챡!
-챠챱!
-챡!
앞발로 흙을 모아 뒤로 보내고, 뒷발로 흙을 밟아 단단하게 다진다.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굴이 만들어졌다. 아기 두더지가 이전에 만들었던 굴들 역시 튼튼했지만, 이 정도로 튼튼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 오랫동안 굶주렸던 그 시기에는 배가 텅 비어 도무지 힘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아기 두더지의 몸에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동안 배부르게 먹고, 푹 쉰 덕분이다. 거기다 맛 좋고 영양가가 풍부한 지네 머리까지 수십, 아니 수백 개를 먹어 치웠으니 힘이 흘러넘치다 못해 아주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흙을 파헤치고 다져도 지치지 않을 정도였다.
‘잘 부탁한다.’
아기 두더지는 자신을 보살펴 준 인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기 두더지는 아직 어렸기에, 완전히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인간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는 있었다. 바로, ‘믿음’ 말이다.
-찌.
아기 두더지는 더욱 힘차게 흙을 파헤쳤다. 이따금 쉬고도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발톱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지면, 아기 두더지는 잠시 숨을 돌리며 인간이 마련해 준 새끼 앵귤라타의 머리를 하나씩 먹었다.
지네 머리는 평소에 먹던 벌레들과 다르게 하나만 먹어도 힘이 솟아올라서, 아기 두더지는 위로, 더 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킁킁.
축축한 흙더미 속에서 햇빛의 냄새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가끔은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야 하기도 했다. 아기 두더지에게도 이렇게나 깊은 굴을 파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찌이…….
아기 두더지는 또다시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윗덩이를 발톱으로 긁다가, 이내 다른 길을 찾아 움직였다.
-뽈뽈뽈뽈…….
깊고 어두운 땅속, 아기 두더지는 다정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지상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찌.
곧.
곧일 것이다.
* * *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나는 또 한 장 떨어져 나간 시계꽃 꽃잎을 주워 들며 생각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만 하루. 과연 그전까지 녀석이 지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새끼 앵귤라타의 머리를 여럿 챙겨주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다시금 일렁이며 올라오려는 걱정을 억지로 누르며 길게 심호흡했다.
안식처에서는 평소의 루틴을 유지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시간 개념이 모호해지는 이곳에서는 루틴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왜, 조난 영화에서도 일상을 가장 착실히 유지한 자들이 살아남지 않던가. 그것과 같은 이치다. 이곳에 갇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에서 손을 놔버리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니 최대한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챙겨가면서, 좁은 공간이지만 간간이 운동도 했다. 칼리스토의 경우에는 지금도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다. 독한 놈…….
‘바깥과 연락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던전 내부의 마력 흐름은 불안정하기 그지없기에 통신 기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원활하게 바깥과 소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뭐, 대상이 칼리드 급의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려나? 하지만 우리 중 유일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로샤나크는 아직 풋내기 수준이니…….
“스승님. 저희, 나갈 수 있는 거죠?”
불안한 것일까, 엘이 눈을 굴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 녀석이 해낼 거야.”
“하지만 걘 정말 작은……. ‘두더지’일 뿐이잖아요.”
“네가 못 봐서 그래. 그 ‘작은 두더지’가 새끼 앵귤라타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말이야.”
“맨날 잠만 자던데…….”
“…….”
그건, 할 말이 없군. 정말 맨날 잠만 자긴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엘. 내가 말했잖아.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뭔데요?”
“레기온.”
“……!”
“이곳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레기온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 그렇겠네요!”
“하지만 이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야. 다치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레기온도 마찬가지고.”
“아…….”
“그러니까, 지금은 그 ‘작은 두더지’를 믿어보자.”
“……네, 스승님.”
엘은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러니저러니 해도 긍정적인 녀석이라 다행이라니까.
나는 빙그레 웃은 뒤 녀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하긴 했다만, 나도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
그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레기온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나는 새벽 별나무 열매의 빛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레기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이제까지 모은 시계꽃의 잎을 죽 늘어놓은 뒤, 시계꽃에 달려 있는 꽃잎의 수를 셌다. 세 장……. 즉, 우리에게는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소식도 없군요.”
인간보다 훨씬 귀가 밝은 엘프, 칼리스토에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칼리스토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초반에야 아기 두더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멀어진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기도,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녀석이 지상에 닿았을 수도, 중간에 모든 힘을 소진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사라락…….
나는 조심스럽게, 아기 두더지를 내보냈던 천장 쪽이 이파리를 걷어 보았다. 흙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돌이나 바위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새벽 별나무 열매를 따 바깥을 비춰 보았다. 새벽 별나무 열매가 뿜어내는 희미한 빛이, 둥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비춘다. 아기 두더지가 만들어 놓은 굴은 성인 남성이 기어갈 수 있는 정도의 너비로, 조금 빠듯하겠지만 로이드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이 제대로 굴을 파고 있던 것이다.
새벽 별나무 열매의 빛에 의존해 위를 바라보았으나, 일정 깊이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굴을 꼬불꼬불하게 파 놨기 때문이겠지.
“어떻습니까?”
칼리스토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에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저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칼리스토가 안식처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꽤 놀란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벽이 단단하군요. 무너질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 정도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잡고 올라갈 만한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나는 주머니에서 덩굴 씨앗을 꺼내 아기 두더지가 파헤친 굴의 벽에 박아 넣었다. 서너 개를 박아 넣고, [숲의 숨결]을 사용하자 싹이 튼 덩굴이 뿌리를 내리며 점점 위로, 위로, 굴의 곡선을 타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거면 충분해. 하지만 길이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때그때 내가 씨앗을 심으면서 이동해야 해. 견딜 수 있는 무게도 한계가 있으니 한 구간에 한 명씩 이동해야 하고.”
“알겠습니다.”
“일단, 내가 먼저 출발할게. 중간에 막힌 부분이 있으면 바로 신호를 보낼 테니 다시 안식처로 돌아가. 그땐 레기온과 함께 탈출해야 할 거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나눈 뒤, 주변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읏차.”
가장 먼저 내가 덩굴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덩굴이 없었다면 고생깨나 했겠지만, 촘촘하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은 덩굴을 붙잡고 올라가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덩굴의 한계까지 자라난 지점에 달하면, 나는 새로운 씨앗을 심어 [숲의 숨결]로 다시 덩굴을 자라게 한 뒤 아래쪽에 신호를 주고, 다음 구간으로 넘어갔다. 한 구간에 한 명씩. 그렇게 차근차근 굴을 올라가는 동안…….
“아, 이건…….”
다섯 번째 덩굴을 타고 올라가려는 순간, 나는 튀어나온 돌에 걸려 있는 얄팍한 갈색의 껍질을 보았다. 새끼 앵귤라타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다. 아마, 아기 두더지가 이곳에서 배를 채운 모양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덩굴을 붙잡고 힘차게 위로 올라갔다.
기특한, 나의 아기 두더지를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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