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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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에 접어든 지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은 시점.
불어과 42기들은 통대 2년 과정의 마지막 중간고사를 치렀다.
1학년 때만 해도 시험 기간만 되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좀비가 되는 인원이 속출했지만.
이제는 마지막 학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절반쯤은 포기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법 익숙한 태도로 시험을 치렀고.
“···어?”
임주희 교수가 담당하는 수업.
채점을 마친 중간고사 시험지를 돌려받은 김수용은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만점이라고?’
그뿐이 아니었다.
시험지 한쪽 위에는 ‘손볼 곳이 전혀 없으며, 졸업 후가 기대된다’라는 임 교수의 코멘트가 적혀 있었으니까.
기쁨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김수용은 제 눈을 못 믿겠는 심정으로 몇 번이나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이런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싶다가도, 몹시 뿌듯한 마음에 자꾸만 ‘Parfait(완벽해요)’라는 글자를 몇 번이고 보게 되는 것 아닌가.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
감회가 새로운 기분으로 그는 어린 시절 제 별명들을 떠올렸다.
느림보, 거북이, 굼벵이···.
남들보다 배우는 데 굼뜬 탓에 붙은 이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김수용은 언제나 목표를 완수했다.
···잠자던 토끼를 지나쳐 골인지점에 이르렀던 거북이처럼.
그렇게 남들 보기엔 답답할 정도로 묵묵히 해서 국내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고.
이곳 통대에서도 시작은 몹시 느렸지만, 언젠가 담당 지도 교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수용 씨는 성적이 우상향이네요.’
‘···네?’
‘꾸준히 오르고 있단 의미예요. 수용 씨, 정말 잘하고 있어요.’
그 말에 김수용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나온 성적에 김수용을 어깨가 저절로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상담은··· 김수용 씨 맞죠?”
“네.”
수업이 끝난 뒤.
김수용은 임주희 교수의 교수실로 향했다.
4학기가 끝나기 전, 모든 학생들은 진로 결정을 위해 반드시 한 번 이상의 상담을 받을 의무가 있었는데.
그는 본인의 강점 분야인 기술번역의 전문가인 임주희 교수에게 상담을 신청한 터였다.
“다름이 아니고, 교수님께 진로 상담을 드리고 싶어서···.”
다른 교수들보다 훨씬 유한 성격에, 학생들이 의기소침해지지 않도록 늘 기운을 북돋아주는 그녀의 앞이기 때문인지.
김수용은 평소에 비해 덜 긴장한 채로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만큼, 가급적 졸업 후에도 이쪽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데요···.”
그가 준비해온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는 가운데, 임주희 교수는 섣불리 끼어들지 않으며 그의 말을 온전히 경청했다.
···마치 그가 제 입으로 말하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려주듯.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졸업 직후에는 법무팀 인하우스 통번역사가 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고,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는 중에도 다양한 분야의 의뢰를 받아가며 경력과 경험을 쌓을 생각입니다.”
전에 정화영 교수에게 상담할 때만 해도 어렴풋했던 미래의 청사진이, 이제는 제법 구체적인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이 제 졸업 후 계획인데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 말에 임주희 교수가 활짝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요? 수용 씨가 이미 해답을 다 찾아왔네요.”
“그렇긴 한데··· 여전히 불안하기는 합니다.”
잠시 머뭇거린 김수용이 이내 말을 이었다.
“제가 워낙 부족한 탓도 있지만, 내게 맞지 않은 길을 억지로 가는 게 아닐까.”
그의 솔직한 말에 임주희 교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혹은 소질이 있는 길이 맞을까. 그런 불안이 사라지질 않네요.”
“···.”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부모가 원하는 대로 법학과에 진학해 학교를 다녔던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노력하는 범재는, 노력하는 천재를 이길 수 없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이기 마련.
“수용 씨, 그 불안한 마음은 잘 알아요.”
마침내 들려온 임주희 교수의 목소리에 김수용은 고개를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통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불안감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을 거예요. 나도 그랬고.”
“임 교수님이요?”
“그럼요. 난 통대에 입학하고서 졸업할 때까지 늘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든요. 뭐 하나 뛰어난 분야도 없었고.”
어쩐지 믿기지 않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자, 임 교수가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정말로 그때뿐이거든요. 졸업 직후에 무슨 일을 맡느냐가 중요하다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자신은 졸업 직후에 한동안 변변찮은 의뢰만 맡다가, 몇 년 후에야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덧붙이는 임 교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기나긴 인생에서 나 자신이라는 라이벌을 얼마나 잘 상대하느냐 아닐까요.”
“···.”
최대의 라이벌은 같은 기수의 동기도, 졸업 직후에 마주하게 되는 동종업계 사람도 아니다.
···오로지 나 자신이 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말에, 김수용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천재는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근데,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추가하고 싶어요.”
임 교수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 즐기는 사람도, 묵묵히 꾸준히 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고.”
“···.”
“왜냐하면, 그저 즐기는 것만으로는 이 힘겨운 인생을 버티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듯 잠시 쓴웃음을 짓던 그녀는 이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선, 수용 씨처럼 늘 버텨온 사람이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요.”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거야말로 이 지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자질이라고 말이다.
“···.”
임 교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김수용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 받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 기분을 잠시 만끽하던 그는 문득 이와 비슷한 대화를 과거에도 나눴음을 기억해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언젠가 찬영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찬영 씨가요?”
김수용은 시지프스의 신화에 관해 찬영과 나눴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때 이 통대 생활에 지쳐 있을 무렵.
결국 사람의 삶이란 굴러 떨어진 돌을 언덕 위로 매일 같이 밀어올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라고 자신이 말했더니.
“찬영이는 그러더군요. 적어도 우리가 지금 하는 노력이, 시지프스가 밀어올리는 돌보다는 훨씬 의미가 있을 거라고.”
“···.”
“과거 실패했던 기억, 노력했던 기억이 단순한 헛수고가 아님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고 말이죠.”
그 말에 임주희 교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렇죠. 우리의 삶이란 게 그 무거운 돌을 수없이 끌어올리는,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의 반복처럼 보일지라도···.”
한 박자 뒤에야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 돌이 한 번 떨어질 때마다, 매번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로소 알게 되는 법이 아닐까요.”
김수용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변함 없어 보이는 하루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매일이 새로운 법.
“네, 교수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뭘요.”
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물러나려는데.
때마침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박찬영입니다. 불어과 관련 일로 보고드릴 게 있는데요.”
···찬영이 놈, 양반은 못 되네.
김수용은 피식 웃으며 임 교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교수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수용 씨. ···찬영 씨도 들어와요.”
그 말에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뒤편에서 박찬영이 들어섰다.
“···!”
오전보다 수염이 더 풍성해진 듯한 찬영의 모습에 임주희 교수의 눈이 커졌고.
김수용의 머릿속에서는 오전에 들었던 송하늬의 외침이 순간적으로 재생되었다.
‘임꺽정이네 임꺽정!’
그리고 어느새.
“···임꺽정···.”
그것을 제 입으로 중얼거리는 중임을 김수용은 뒤늦게 깨달았으며.
임주희 교수가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임꺽정··· 아, 어떡해, 찬영 씨 미안해요, 아 근데 넘 웃겨··· 아하하.”
“···.”
박찬영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저를 돌아보는 것을 느끼며 김수용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찬영아, 미안하다.’
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고는, 잽싸게 교수실을 나섰다.
*
대망의 주말이 되었다.
오늘은 디올 수석디자이너 마고 토렐리의 강연 및 대담이 있는 날.
그 사이 통대에서는 중간고사를 보았고 결과까지 나온 터였는데.
‘예상했던 대로 성적은 올 A+였으니.’
피드백이 하나 같이 좋았던 중간고사 결과를 떠올리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과목에서 트레비앙을 받았으니.
‘이제 찬영 씨는 완전히 감을 잡은 것 같네요?’
‘···.’
‘동시통역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자신만의 방법을 어느 정도 구축한 느낌이에요.’
그 같은 성주원 교수의 피드백은 덤이었고 말이다.
여하튼.
중간고사 시험 준비를 하는 한편으로 나는 이 마고 토렐리의 강연 통역 준비를 병행했다.
‘찾아본 바로는 철혈의 여인이자 냉철한 아마조네스라고 불리는 완벽주의적인 면모로 유명하다던데.’
원래는 강연이나 대담 요청을 웬만해선 잘 안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시즌이 끝난 뒤 한국에 휴식 차 장기 체류를 하러 온 터라, 타이밍 좋게 들어온 강연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들었다.
‘행사 주최 측에선 그다지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난이도가 높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1부의 강연 겸 대담에서는 마고 토렐리라는 개인의 지난 궤적을 돌아보는 것이고.
2부에 있을 QNA가 조금 까다로울 수는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유의 강연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오가는 이야기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결국 하나의 인생보다 더 중대하고 전문적인 주제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니.
패션디자인, 명품산업에 관련된 각종 전문용어를 익히고, 이 업계의 최신 동향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
마고의 또 다른 강연 영상들을 수차례 보며 말투나 제스처, 화법에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했으며.
QNA에서 그녀의 개인사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으니, 각종 기사나 자료는 물론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사생활에 관한 정보도 어느 정도는 숙지해두었다.
‘마고 토렐리가 패션계에선 이례적인 커리어의 소유자인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무엇보다 이 강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지를 생각해야 2부의 QNA에 대비할 수 있는 법.
패션업계에 아무런 기반도 두지 않은 채 맨손으로 출발하여, 그것도 아이를 둘이나 낳은 기혼 여성으로서 하나의 신화를 이뤄낸 인물.
그것이 바로 이 중현대학생들이 마고 토렐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점에 착안하여 예상 질문 리스트까지 뽑아서 연습해온 터였다.
“···돌이켜보면 굉장히 빡센 2주였네.”
후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몇 년을 보낸 덕에 적당히 익숙하고도 적당히 그리운 대학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가로수길을 거니는데, 초입에서부터 줄줄이 걸려 있는 플래카드들을 발견하고는 움찔하고 말았다.
“···!”
[중현대의 아들 박찬영! 환영한다! – 중현대 문과대학] [오이오이! 박찬영 자네 그럴 줄 알았다고! – 문과대학 밴드동아리 ] [또찬영 선배 밥 사줘요 – 불문과 일동]···
···이 사람들이?
그리고 잠시 후.
대강당 앞에 도달했다.
[중현대학교 대강당]익숙한 현판의 글씨.
전에는 그저 학점을 채우려고 명사 강연을 들었던 이 장소에서, 오늘은 내가 대담을 진행하게 되다니.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지.’
나는 대강당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 곧잘 쓰이는, 무려 몇백 명이 들어올 수 있는 거대한 공간.
이 드넓은 무대 위에서 마고 토렐리와 단둘이 앉아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다 생각하니 돌연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만큼 준비를 철저하게 해왔잖아?’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자기 세뇌를 마친 뒤, 나는 대기실에 들어섰다.
···그 안에는 사진으로 봤던 인물, 즉 마고 토렐리가 앉아 있었다.
「Bonjour. Je m’appelle Park Chan-young, l’interprète d’aujourd’hui(안녕하십니까, 오늘 통역을 맡은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어째선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인데.’
큰 키에 건강해 보이는 체격, 각 진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그대로이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아···.」
잔뜩 풀어진 얼굴로 나를 보며 문득 미소짓더니.
이내 찡그렸다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가, 여하튼 표정이 변화 무쌍했다.
‘재미있는 분이네.’
마고 토렐리가 꽉 잠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반가워요. 실물로 보니, 크흠.」
‘···크흠?’
연달아 헛기침을 하는 그녀를 보며 사래라도 들렸나 생각하던 그때.
그녀에게서 푸, 하고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고.
「푸후후후-」
「···.」
이내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신나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철혈의 여인’은 잠시 후에야 머쓱해하며 말했다.
「초면에 미안합니다. 근데··· 얼굴을 보니 자꾸만 기억이 되살아나서.」
「···기억이요?」
「아, 그게.」
그녀가 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잠자코 털어놓았다.
「···윙딩동 리믹스요? 어떻게 그걸 보셨-」
「알고리즘.」
「···.」
「너튜브 알고리즘이 날 인도해줬어요.」
나는 한 박자 후에야 대꾸했다.
「아, 그렇군요.」
···요즘 날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