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90)
*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선욱재 교수의 수업이 끝날 무렵이 되었다.
“···이번 시간은 이렇게 마치고, 다음 주에는···.”
문득 내 얼굴을 돌아본 선 교수의 입가가 씰룩였지만.
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을 마쳤다.
“전에 얘기했던 대로 명품 및 패션 업계를 주제로 다뤄보도록 하죠. 수업은 이상입니다.”
교수가 나가자마자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동기들이 바쁘게 강의실을 나가는 가운데, 나는 내 곁에 다가온 레아를 돌아보았다.
“그럼 스터디하러 갈까?”
“응.”
오늘은 그녀와 특별히 순차 스터디를 하기로 했는데.
평소와 달리 스터디실이 꽉 차 있던 탓에, 우리는 동시통역 수업용 강의실에 들어왔다.
‘오늘처럼 스터디실이 꽉 차 있는 경우, 강의실을 개방해주니까.’
동시통역 스터디를 원하는 학생들은 부스실을 쓰고, 순차통역 스터디를 하려는 학생들은 안쪽의 수업 공간을 쓰는 셈.
지금도 안쪽 부스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듯했는데, 어차피 방음이 철저하게 되다 보니 애초 서로 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아까 동시통역 부스실에 대부분 1학년들이 들어가 있는 듯했는데···.
‘1학년들이 왜 동시통역 스터디를 하려고 난리이지.’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금세 해답이 떠올랐다.
지금쯤 1학년들은 동시통역 입문 수업을 듣고 한창 충격을 받았을 시기라는 것.
그리고 결국, 해결책은 동시통역 부스 스터디를 최대한 자주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거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할까.”
“···응.”
사실, 아까는 레아와 수업 직전에 마주친 터라 별 얘기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얘기도 나누지 못했는데···.
‘별 반응이··· 없네?’
여기 자리잡은 후에도 레아는 그저 펜과 노트를 꺼내들었을 뿐.
내 외적 변화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으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는데.
‘···.’
내가 준비해온 텍스트를 설명해주는 가운데, 내 얼굴을 이따금 흘깃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으니까.
···그렇게 이상한가 싶어 살짝 기운이 빠지려 했지만, 뭐 반응이 안 좋으면 그냥 밀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용어는 이 정도. 그럼 내가 읽을 테니 노트테이킹 준비해.”
레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수업에서와 비슷한 속도로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Certaines personnes naissent royales. D’autres deviennent des reines par leurs propres moyens : c’est par ces mots que Donatella Versace a présenté vendredi soir ses collections femmes automne-hiver.」
다음 주 한불통역 주제도 그렇고, 내 통역 준비도 할 겸 패션 및 명품 분야 텍스트를 다뤄보기로 한 터였다.
「Ses femmes ne sont pas donc pas déterminées par la naissance, mais construisent leur identité à travers passion et style.」
적당한 속도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데, 어쩐지 레아가 정신이 딴 데 팔린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아가 그럴 리가 없지.’
「Tout est impeccable, rigoureux et élégant, pour ce voyageur en partance pour des destinations et des rêves nouveaux···.」
그렇게.
낭독을 마친 후에도 그녀는 어딘가 멍해 보였는데.
“레아?”
“···어?”
“통역 시작해야지.”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아, 하며 통역을 시작했다.
“아··· 음,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자사의 여성복 하반기 시즌을 이런 문장과 함께 선보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왕인 채로 태어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수단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고 말입니다.”
사각사각.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나 음, 어를 연발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며 나는 크리틱할 점들을 메모했다.
“···이상입니다.”
레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나는 곧바로 크리틱을 시작했다.
“음, 평소답지 않게 불필요한 음, 아, 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게 눈에 띄었고. ···여성복 하반기 시즌보다는 F/W 시즌이라고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여왕이 된다고 했으니, 앞 문장의 royal은 왕이라기보단 왕가의 핏줄이나 태생으로 옮겨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왕가의 피가 흐르는 채로 태어나나,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 말에 레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크리틱까지 끝내고 스터디를 마친 뒤, 나는 두자와 한 캔을 건네며 물었다.
“왜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고, 실수를 하는 레아라니.
아무리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거다 싶어서 조심스레 묻자.
레아는 내게서 받은 두자와를 꼭 쥔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
자세히 보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데···.
“몸이 안 좋아? 열이 나나?”
“···아니 그게 아니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찬영 씨가··· 너무 멋있어서.”
“···.”
순간 아무 말도 못하는데, 레아의 말이 이어졌다.
“나, 몰랐는데 수염이 좋은가 봐.”
···이건 뜻밖의 취향 고백이긴 했지만.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못하며 대답했다.
“자기가 좋다면 계속 기를게. 아, 통역 일 나갈 때만 빼고.”
“···응, 잘 어울리고 멋있어.”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레아.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인데.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속삭이며 말했다.
“나도 자기 보여주려고 연습한 거 있는데.”
“···뭔데?”
그녀는 샐쭉 미소짓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말했다.
“자기 보고 싶었또.”
···크윽, 내 심장.
그야말로 심쿵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를 절실히 느끼며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았고.
“으으··· 우리 자기 넘 귀여워···.”
내 반응을 기다리는 레아에게 그렇게 말한 그때.
어디선가 깨액, 하고 목 졸린 소리가 났다.
‘···설마?’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자.
부스 안쪽에서 유리창 너머로 우리를 주시 중인 학생들이 보였다.
“···!”
그들을 보며 인상을 확 쓰자.
곧바로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부스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다.
···이정욱과 주민서, 그리고 이름을 모르겠는 1학년생 한 명.
“서, 서, 선배님! 그, 그게! 일부러 훔쳐보거나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당황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이정욱과 달리.
주민서는 침착한 기색으로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어?”
이내 깜짝 놀라는 레아.
“우리가 마이크를··· 켜놨었네?”
언제 눌린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테이블 위 동시통역 장치의 ON/OFF 등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 보였다.
‘원래는 시험 때 교수들이 이 장치를 통해 부스 안쪽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용도인데···.’
레아가 하얘진 얼굴로 버튼이 눌린 것도 모르고 있었나 봐, 하고 중얼거리는데.
주민서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두 분 대화가 들렸습니다.”
“···.”
“크게 신경쓰진 마시고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치겠다···.’
민망한 나머지 땅을 끝없이 파고들어가 저 지구 반대편으로 나가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얼굴이 빨개진 이정욱과 이름 모르는 1학년, 그리고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는 주민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레아는 빨개지다 못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내가 아까 한 말을··· 들었다는 거죠?”
“아니, 그건 귀여웠는데요.”
주민서가 곧바로 대꾸하더니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다만 저희는 찬영 선배님이 ‘자기’라는 말을 쓰시는 게 좀 충격이었어서.”
“···.”
설마, 레아가 민망해할까 봐 농담하는 거겠지 하며 옆을 돌아보자.
나머지 두 1학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아니,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어쩐지 조금 억울해지고 말았다.
*
디올 본사 꼭대기층.
통유리창 너머로 파리의 낭만적인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여인의 눈빛에선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를 이 자리로 안내해준 마고 토렐리의 비서는 몹시 긴장한 채였다.
‘TV로 봤을 때도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본 레아 데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시다는 말이 어울렸다.
길게 뻗은 팔다리는 사슴의 그것을 닮았고, 티 한 점 없는 피부는 진주빛으로 빛난다.
숱많은 금발을 높이 틀어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에 걸린 목걸이는 우아함과 고전미를 풍겼으니.
명품업계에 몸 담은 지 몇 년째로 여태껏 수없이 많은 톱모델과 연예인들을 봐온 비서의 눈에도, 그 아름다움은 충격을 넘어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괜스레 입안이 마르는 기분으로 비서는 그녀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Alors madame, je vous laisse un moment(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공손하게 말한 비서가 나선 후에야, 레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며 VIP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디올의 새로운 광고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
수석디자이너 마고 토렐리 측에서 잠깐의 티타임을 갖지 않겠냐고 제안하여 이뤄진 자리였다.
‘처음만 해도 이런 자리에 오면 잔뜩 얼어 있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몇 번 경험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여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감회가 새로운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고 토렐리의 뮤즈라.’
50대 초반의 나이로 패션 디자인 업계의 정점에 오른 철혈의 여인.
그녀는 디올에 오기 전부터도 레아 데주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배우라고 종종 언급해왔으며.
이번에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하며 레아 데주를 디올의 새 얼굴로 적극 추천했다고 들었다.
‘고마운 일이네.’
토렐리가 디자인했으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뉴태슬백이 놓인 진열대가 눈에 띄던 그때.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열린 문 뒤로 들어온 것은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이 눈에 띄는, 강인한 인상의 마고 토렐리였다.
「오래 기다렸나요?」
그녀의 등장에 레아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방금 왔어요 마담 토렐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와 비주(볼인사)를 나눈 레아는 문득 긴장이 되었다.
···말이 편한 티타임이지, 본격적인 모델 캐스팅 이전의 전초 단계나 다름없으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데주 양. 이래 봬도 난 당신이 출연한 영화나 광고를 빠짐 없이 챙겨본 팬이거든요.」
마고 토렐리의 스스럼 없는 말에, 레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 들어도 감사하네요. 저도 마담 토렐리의 지난 시즌 제품들을 보며···.」
잠시 예의상의 대화가 오간 뒤 분위기가 제법 풀어지자 마고의 입에서 진심 어린 말이 나왔다.
「여기서 파리를 내려다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애초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던 문외한으로 시작해, 아무런 연줄도 없이 이 위태로운 세계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 아닌가.
레아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마고가 진열대 위에 올려진 뉴테슬백을 가라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날 ‘혁신의 아이콘’이니 뭐니 하며 추켜세우지만, 혁신이란 건 말 그대로 실패와 종이 한 장 차이인 셈이거든요.」
「···인상적인 해석인걸요.」
그녀의 말에 마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잖아요? 여기서 한 치만 삐끗해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비난받으니까요.」
「···.」
「물론,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건, 창작욕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라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마고의 노련한 눈동자가 레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건 레아 당신 같은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아닌가요.」
「···맞아요.」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비슷한 것을 보여주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평가를 듣기 마련.
「그런 면에서 우리는 둘 다 평행대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셈이네요.」
레아의 말에 마고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하하,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한결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이 자리에 온 목적마저 잊은 채 이야기하다가-
「아.」
마고는 스마트폰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고, 이에 레아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 당신의 친구라고 하던데 맞나요?」
「···맞아요, 찬. 대체 어떻게···?」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여전히 레아가 스마트폰 속 박찬영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마고가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진짜였군요. 신기하네.」
이내 그녀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레아가 되묻듯 대꾸했다.
「한국에서··· 강연을요?」
「네. 늘 한 시즌을 끝내고 나면 낯선 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며 영감을 얻거든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레아는 문득 서울에서 보냈던 작년 5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음마저 평온해지던 고즈넉한 전통 찻집.
그리고 ‘찬’과 함께 나눴던 대화들.
「···기분 좋은 추억인가 보죠?」
갑작스러운 말에 레아는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기분 좋은 추억, 이라기보다는 그리운 추억에 가깝겠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요. 좋은 친구란 어디 있든 간에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이죠.」
「동감이에요.」
「레아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찬과 만나는 게 조금 기대되네요.」
마고의 말에 레아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응?」
「저도 기대돼요.」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곧, 저도 한국에 갈 예정이거든요.」
작년 말에 촬영한 영화 이 평단과 대중 양쪽의 큰 호평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 10월 초에 있을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라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감독과 함께 직접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을 예정이었던 것.
「···찬을 보는 게 기대되네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