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92
492화
【에필로그 3. 반드레 가정법, 너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산탈라 임시행정부.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별거 없다. 그저 산탈라라는 쓰레기 섬에 사는 거지새끼들을 이끄는 쓰레기 마을에 행정 순화용어를 차용한 것뿐이다.
임시행정부를 이끄는 이는 보라 이코반. 산탈라 왕정의 정통 후손, 이코반 가문의 3대손이다.
이코반 가문에 대해 설명하자면,100년도 더전, 혜성처럼 등장한 불세출의 천재검사가 산탈라를 이루는 여러 개의 섬을 하나로 통일하고 국가를 세웠다.
산탈라를 통일한 검사의 이름은 반드레 이코반. 그는 한 명의 양자를 들여 이코반 가문의 그리고 산탈라 왕가의 시작을 이루었다.
양자의 이름은 알트레. 알트레 이코반.
알트레의 혈통은 모르지만, 초대 왕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인생 역전 한 번 제대로 했다. 그런만큼 아주 행복하게 살았겠지?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전혀 아니다.
이코반 가문의 시초인 반드레 이코반이 산탈라를 수월하게 통일한 이유는 그 시대가 성곽시대였기 때문이다.
고수 한 명이 귀한 시대에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절대고수가 너희들을 지켜주겠다고 날뛰니 누가 마다할까? 그러나 한 명의 고수에 의해 너무나 빠르게 이루어진 제도 통일은 장점만 가져다주지 않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받으니 뒷정리할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곽시대가 끝나자마자 투쟁의 시대까지 오면서 일거리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때문에 알트레 이코반은 성곽시대와 투쟁의 시대를 거치며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개고생을 하다가 환갑도 못 살고 죽어버렸다. 반드레 이코반보다 일찍.
알트레 이코반이 늘그막에 얻은 자식도 험난한 삶을 살기는 매한가지였다. 알트레의 자식은 세계대전에 휩쓸려 아버지보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 즈음에 전성기가 지난 반드레 이코반은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알트레 이코반의 손자, 보라 이코반에게 그가 가진 모든 기운과 검술, 검법을 물려주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대전이 끝났다. 드디어 왕으로 두 발 쭉 뻗고 자겠다고 안심하던 보라 이코반.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천족강림과 함께 세상을 강타한 평등 열풍!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아친 쓰레기 산의 습격이었다. 이코반 왕정은 대륙 평등 정책에 의해 힘을 잃었고, 국가는 쓰레기에 뒤덮여 무너졌다.
이코반 가문에게 덮친,3대에 이은 활액! 보라 이코반은 이즈음에서 포기하고 산탈라를 떠나려고 했지만, 이를 악물고 제자리를 지켰다.
그는 왕정의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쓰레기 산에 남아 죽지 못해 쓰레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지키며 삶을, 젊음을 바쳤다.
***
나는 그 보라 이코반이 머무르는 임시행정부로 들어갔다. 임시행정부는 과거에 여관으로 쓰던 넓은 건물이었다.
저벅저벅.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넓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라의 업무실 문을 벌컥! 연다.
말하지 않았나. 말이 왕이고 왕족이라고. 더군다나 평등 열풍 따위가 없어도 산탈라는 왕이니 뭐니 거드름을 피울 만큼 거창한 동네가 아니다.
그냥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거고, 기분 나쁘게 하면 죽으면 된다. 그게 산탈라의 사정이었다.
물론 나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겁먹지 않고 업무실 문을 열어 보라 이코반을 마주했다.
“음? 아! 이게 누구야! 산탈라의 신동. 킨 아니신가?”
허름한 천막에서 구겨진 서류를 지친 얼굴로 바라보던 보라가 대뜸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반겼다. 보라와 함께 있는 이들은 두 명. 에렌이라는 마법사와 성자 험클리다.
“신동이라는 말 좀 그만해. 사람 무안하게.”
“하하! 무안은 무슨! 다섯 살도 안 되는 놈이 마나를 느끼고, 열 살도 안 됐는데 마나 유저 하급에 들어섰으면 신동이지!”
보라가 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숙숙! 비빈다. 이 빡대가리에 몸치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신동이라고 칭찬하는지. 진짜 쪽팔려 죽겠네.
내가 가만히 보라의 머리 쓰다듬을 버티는 시점. 험클리 성자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킨이구나.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니?”
“아, 험클리 성자님도 안녕.”
성자 험클리. 그렇다. 웨일의 소울 브라더이자
실험체로 동고동락했던 그 녀석이 맞다. 연구소를 탈출한 후, 에레스발다로 편입되어 잘먹고 잘살던 녀석.
그 녀석이 왜 60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서 산탈라에 온 걸까? 그것에는 에레스발다라는 종족이 지닌 배경에 있었다.
에레스발다 인은 어인과 인어의 혼혈, 즉 바다에서 사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바다가 쓰레기로 더럽혀지는 걸 유일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종족이 에레스발다다.
때문에 에레스발다인이자 성자인 험클리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에 경종을 울렸고, 그러다가 산탈라에 왔다.
험클리는 산탈라의 사정을 널리 알려 세계인에게 경고할 겸. 겸사겸사 산탈라에게 여러 인적, 물적 지원을 해줄 겸 다국적 지원군으로 체류하기로 했다.
참고로 인적, 물적 지원을 해준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죽지 않을 정도의 지원’에 불과하다.
추가로 성력으로 병 걸려 죽어가는 인간들을 치료해준다거나, 기초적인 마나 운용술을 알려주는 등의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소문을 들은 산탈라 쓰레기 산 거주민들이 임시행정부로 몰려오는 바람에 공급보다 수요가 지나치게 많아서 늘 자원이 모자라다.
괜히 키더루프가 허약한 몸임에도 쉬지도 못하고 쓰레기 산을 뒤져 돈 될만한 것을 찾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키더루프. 어른들 일하는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상대적으로 나를 우대하는 보라와 험클리와 다르게 내게 엄하게 말을 건네는 중년 사내. 마법사인 에렌. 그가 척적!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는 문으로 끌었다.
“혼은 내일 낼 테니. 어서 들어가서 자거라.”
아직 잘 때가 아니다. 나는 에렌의 손길에서 빠져나와 보라에게 다가갔다. 몇 장의 지저분한 종이를 꺼내 보라 이코반에게 건넸다.
부스럭!
“보라, 이거 받아.”
보라가 나를 혼내려는 에렌을 말리고는, 활기찬 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받았다.
“이건 또 뭐야?보아하니 마법 수식 같은데? 우리 신동님께서 매일같이 쓰레기 산을 뒤지다가 새로운 마법책이라도 발견하셨나?”
보라가 능글맞게 웃으며 종이를 살핀다. 어차피 너 마법 안 배워서 봐도 모르잖아. 나는 무식한 보라를 대신해서 마법 회로의 기능을 설명해주었다.
“아니. 마법 무구분해식.’’
“마법… 뭐?”
“마법 회로를 이루는 촉매제, 스무 종류의 금속, 무기물, 유액 등을 분리하게 해주는 마법진. 이게 있으면 쓰레기 산도 지금보다 몇 백 배는 빠르게 분해할 수 있을 거야.”
보라가 내 말을 듣고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가 내 말의 진의를 분석하 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한참 나를 노려보던 보라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에렌에게 종이를 건넸다.
에렌은 이종족 연합지역 기준으로 4결 마법사. 그 정도면 한 가닥 하는 실력자지만, 이걸 즉석에서 보고 분석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경지다.
에렌이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그렇게 의심해서 어쩌려고. 네가 모르건 말건 관계없거든? 나는 에렌의 손에서 종이를 뺏어와 험클리에게 건넸다.
험클리도 봐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이종족 연합지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무시무시한 세력, 에레스발다가 있었다.
에레스발다로 가져가서 머리 좋은 놈들한테 분석하라고 맡기면 내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금방 밝혀지겄!지. 험클리도 내 뜻을 알고는 종이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키더루프가 애새끼라 할지라도 4결 마법사도 모르는 복잡한 마법 회로도를 가져왔으니, 일단 에레스발다에 분석 의뢰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끝내면 섭하지. 나는 험클리에게 말했다.
“험클리. 에레스발다가 나를 대신해서 분해식의 권리를 팔아줘.”
“파, 판다? 판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킨?”
“뭘 모르는 적 꿀꺽 하려고 해. 다 알거든? 독점적 저작권 있잖아.”
인권이고 뭐고 없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드디어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돈을 물처럼 써서 개발한 마법 회로와 마법 공학을 다른 놈들이 고스란히 빼앗아 가는 게 배가 아파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마법이 저작권 발달의 씨앗이 된 만큼 새로운 마법의 저작권법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진다. 어느 기업이든, 국가든 간에 등록된 마법 이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면 소정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마법 이론을 등록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에서 사용료를 수거하고, 세금을 내고, 저작권을 유지하고…이 복잡한 일을 거지 고아 키더루프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해서 나는 분해식의 권리를 험클리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에레스발다에게 팔 계획을 세웠다.
산탈라와 마찬가지로 쓰레기에 골머리를 쌓는 에레스발다가 분해식을 널리 퍼뜨리고, 위의 복잡한 일도 도맡는 대신 분해식의 권한을 대부분 가진다.
돈도 대부분 에레스발다가, 나는 사용료의 극히 일부만을 받는다. 뭐, 일부만이라도 분해식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삼대, 아니 삼십 대는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내게 들어오리라는 건 분명했다.
“할 수 있겠어?”
나는 위의 계획을 험클리에게 설명했다.
“..끄음!”
험클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그가 한쪽 눈을 떠서 에렌에게 받은 분해식을 살펴보며 내게 물었다.
“너, 너는… 그 돈을 받아서 뭐를 하려고?”
“산탈라 임시행정부하고 다국적 지원군한테 투자할게.”
“투자?! 투자라고? 네가 지금 투자가 무슨 소리인지……”
보라가 어이없어 하며 끼어들지만 그의 말을 끊고 험클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거침없이 이어 말했다.
“에레스발다는 보답으로 더 많은 지원을 산탈라에 해 줘. 여기 애새끼들한테 마법 가르쳐 줘서 자체적으로 분해식을 쓸 수 있게 할 정도로.”
“어……”
“다국적 지원군은 식량하고 치안 유지군, 건설이나 농사를 도와줄 일꾼들 위주로. 임시행정부는… 뭐, 보라가 알아서 해.”
“아, 참. 이것도 애들한테 가르쳐줘.”
또 몇 장의 종이 뭉치를 건넨다. 보라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받았다.
“마나 운용술이군. 이건… 회복? 아니, 육체 변형?’’
마나 운용술이라는 말에 험클리도 관심을 가지고 종이를 살민다. 익스퍼트 상급에 들어선 그의 경지가 종이에 복잡하게 그려진 마나 운용술의 기능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의도적으로’ 정상’이라는 기능을 마나 흐름을 통해 육체에 박아 넣는 수법이군. 실로 고등하고 감탄이 나을 만한 수련법이지만…누가 굳이 이런 마나 호흡법을?”
“누가 익히긴. 여기 장애인 놈들 있잖아. 개네들한테 이거 익히라고 해. 그러면 뭐라도 나아지겠지.”
정상인 몸이 망가져서 정상으로 되돌아오거나 정상인 몸을 더 뛰어 나게 하는 건 어느 마나 호흡법에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이들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없었다.
그건 나도 불가능하다. 아니, 과거의 나라면 육체변화 초능력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한테도 육체 강화 초능력도 못 거는 놈이 무슨 수로 고등한 육체 변화 초능력을 나도 아닌 타인에게 걸어주나?
그러니 나도 장애인은 못 고친다.
“킨 너…….이걸 어디서 얻어온 거냐.”
내가못하는 걸 어디서 얻었겠냐. 답은 하나밖에 없지. 솔리아하고 라온에게 얻은 거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다. 적당하게 변명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년간의 전생 경험으로, 나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을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법을 배웠다.
“주웠어.”
“……뭐?”
“뭐라고?”
“ 주웠어.’’
다들 미친 사람 보듯이 나를 보다. 이 시선 오랜만이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러면 내가 이거 흔자서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거다. 나는 모른다. 모르는데 주웠다. 그게 말이 되냐고?
그러면 열 살짜리 꼬맹이가수십 년간 마법사들이 머리를 쥐어짜도 못 이룬 물질 분해식과 육체 개변을 이루어주는 마나 운용술을 개발한 건 말이 되고?
이거만큼 완벽한 변명이 없었다. 꼬우면 당장 품 안에 있는 마법 회로하고 마나 운용술 도해서를 찢어버리거나 아니면 나를 죽여서 묻던가.
하지만 보라나 에렌은 둘째 치고 험클리는 그럴 만한 위인이 아니다. 험클리가 있는 이상, 내 말이 거짓이라고 밝혀지기 전까지 내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었다.
“…키더루프.”
험클리가 몸을 수그렸다. 그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시선을 마주쳤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내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이 깊고 찬란하게 반짝였다.
눈동자가 내게 물었다.
“진심이니?”
“진심이야. 험클리,너도 나한테 투자해.”
“내가 이걸 가지고… 도망치면 어쩌려고?”
“나는 성자를 믿어. 백공 웨일의 형제를 믿고 험클리를 믿어.”
사실 안 믿는다. 내가 건네준 분해식은 전반부 만이다. 물질을 변형하고, 이동시키는 핵심 회로도는 안 건네줬다. 마나 운용술 도해서도 마찬가지로 반쪽짜리였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면 전반부만 보고도 내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잠시만 기다리거라.”
험클리가 마나 운용술 도해서마저 받고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천공기가 떠오르고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나와 보라 이코반, 에렌은 밤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천공기를 창문을 통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보라가 툭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진짜로, 저거 어디서 얻어온 거야?”
“주웠다니까.”
“뭔 헛소리를.”
보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험클리가 에레스발다로 떠난 이상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성자는 성자였고, 그의 보증이 있으면 마법 회로의 저작권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내 예상은 맞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수십 대의 선박과 수천 명이 넘는 에레스발다인이 산탈라로 지원을 왔다.
험클리의 말을 빌리자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일처리’ 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거고, 좋은 건 좋은 거니 좋게 넘어가자는 심정으로 에레스발다의 지원을 받았다.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쓰레기 산을 뒤지지 않아도 되었다.
나와 형제들의 숙소는 허름한 천막이 아닌 깔끔한 벽돌집으로 바뀌었고, 우리가 먹는 밥은 쉰내가 풍기는 오염된 어육이 아닌 새하얀 빵으로 바뀌었다.
“으히히히!”
내 동생, 직사가 낄낄대며 흰 빵을 죽죽-! 찢어서 스프에 찍어 먹는 걸 시작으로, 산탈라에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내 나이 열다섯.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고, 애들한테 마법과 검술을 가르치고, 쓰레기를 분해해서 되팔고, 보라의 비서로 일하며 산탈라 거주민들몰 다룬 지 몇 년.
한밤중에 보라 이코반이 나를 불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장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대강당으로 쓰이는 장소.
“왔느냐?”
그곳에서 말쑥한 운동복을 입고, 진검과 목검을 장비한 보라 이코반이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일단 받아라.”
평소와 다른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보라 이코반이 내게 목검을 던졌다. 이거 어째 심상치 않다. 받자마자 공격할 것 같은데?
누가 쉽게 당해줄 줄 알고? 목검을 받고 중단세 방어 자세를 취한다. 내 방어를 바라본 보라 이코반이 동공에 미미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토록 완벽한자세라니. 역시, 킨. 아무리 네가 괜찮다 해도 너만 한 인재를 이곳에서 썩히는 건 너무나도 아깝구나.”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지면상 다 실을 수 없지만, 몇 개월 전. 내가 산탈라에서 썩는 걸 아쉬워한 험클리가 에슐란타라는 고등 교육원의 입학 추천서를 건네준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추천서를 거부했다. 이 나이 먹고 학원 청춘물을 찍는 게 부끄러워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에슐란타 고등 교육원은 중앙 연방, 구 오대 강국 시절의 교육기관이야.’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에슐란타 고등 교육원은 빛의 수호자 표면세계의 인재처라는 말과도 같다. 그 탓에 세계대전 이후 쫄딱 망했지.
그러다가 연방으로 재탄생하며 권력을 잡은 노인네들이 옛날 향수에 젖어서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에슐란타를 복구했다.
새로 문을 연 에슐란타는 이듬해 신입생을 받기 위해 추천서를 어마어마하게 뿌렸고, 그중 한 장이 험클리를 거쳐서 내게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전생의 자기는 세계대전 때 무수한 상급 지휘관을 암살한 전적이 있다. 중앙 대륙 오대 강국의 지휘관급 인재. 에슐란타 출신을 어마어마하게 말이지.
아무리 내가 양심이 없어도 내가 죽인 졸업생의 피로 범벅이 된 교육기관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몰 들을 정도로 신경이 굵지 못하다.
때문에 나는 적당한 이유를 들어 에슐란타 입학을 거절했고, 여느 때와 같이 산탈라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느 때와도 같은 건 내 입장에서만 그런 거고, 보라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는 나라는 걸출한 인재가 고향에 집착하느라 중요한 시기를 허비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독학으로 열다섯에 마나 유저 상급은 명가에서 엘리트 교육을 혹독하게 받은 후예도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야. 나도 한 사람의 검사로서 네가 귀중한 시간을 행정 따위에 낭비하는 걸 못 봐주겠다.”
사실 익스퍼트 하급이다. 괜히 눈에 띄는 성취를 보였다가 쉘리 반데스한테 걸릴까 봐 숨어 지내는 거지. 그 노인네, 나 약해진 거 알면 실험체로 쓸 것 같아서 불안하단 말이야.
나는 인간 쉘리 반데스는 믿어도 마법사 웰리 반데스는 죽어도 못 믿는다. 예전의 무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내 실력을 숨길 예정이었다.
어쨌든, 후으-! 하고 심호흠을 한 보라 이코반이 크게 결심했다는 듯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말해주었다.
“해서, 내 가전 검술을 네게 알려주겠다.”
“가전검술? 풋!”
분위기 진지한 거 알고 안 웃으려고 했는데, 절로 웃음이 튀어나오네. 나는 큭큭대며 보라를 놀렸다.
“보라. 해피 황제의 천재검 전반부도 알테어로 가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게 요즘 세상인 거 알아?”
“……시끄러!”
보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투덜대며 가전 검술의 연원을 설명했다.
“내가 익힌 검술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왕가의 비전검술. 알테어의 것보다 못할지라도 어디 가서 끝리진 않아. 더군다나 알테어의 검술과 다르게 너를 ‘직접’ 지도할 수 있으니까.”
나는 보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지도자 없이 홀로 경지를 개척할 수 있는 천재는 드물다. 아무리 고급의 검법이라도 스승이 없으면 말짱 황인 법. 그런 면에서, 스승 없는 알테어의 검술보다 스승이 있는 보라의 검술이 지금의 내게는 더 나은 선택지였다.
우음!
보라가 검에서 자주빛 오러를 일으켰다.
익스퍼트 중급에 들어선 절정 검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탄탄하게 자리잡힌 영역이 그를 감쌌다.
“잘 봐라, 일단 오늘은 진체(眞體)를 알려주겠다. 그리고 내일부터 동작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지도해주마.”
“알겠어. 한번 해 봐.”
“ 흥! 내일도 그렇게 여유가 넘치는지 보자. 검법을 배우다가 힘들다고 질질 짜도 안 봐줄 테니 그렇게 알아.”
별 걸 다 걱정하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 로 물러났다. 곧이어 보라가 검법을 시연했다. 나는 자주빚 오러가 넓은 대강당을 환하게 수놓는 장면을 보며 보라의 검 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잘난 척할 가치는 있네.’
예전만큼의 감각은 없지만, 그래도 경험이라는 게 있다. 내가 익힌 수십 종류의 검법과 비교해 보아도 이코반 가문의 가전 검술은 뛰어났다.
부드럽고, 날카로우며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검풍 속에 천 년 묵은 거목조차 으스러뜨릴 무거움이 담긴 검격. 수십 개의 다양한 검결을 표현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검결이 톱니바퀴처럼…….잠깐만. 내가 지금 뭐라고 묘사했지? 톱니바퀴?
“톱니바퀴?!”
나는 화들짝 놀라 비명처럼 외쳤다. 내 외침을 들은 보라가 검무를 멈추었다. 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내게 으스대었다.
“흐흐……! 어떠냐. 이놈아. 대단하지?”
“어… 어?”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대단한 정도가 아니다.
수많은 검결이 하나의 법칙으로 승화하는 궁극적인 합결(合結)을 이루는 검법. 나는 보라의 검법을 처음 보지만, 위의 예시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검법을 하나 알고 있다.
‘이, 이건…….천재검이다.’
천재검! 션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검술황제 알테어의 진신절학!
천재검은 총 세 종류가 있다. 진짜 천재검. 가짜 천재검, 다른 말로는 천재검도해서. 그리고 함정 천재검.
나는 이 중에서 천재검도해서와 함정 천재검을 익혔다. 두 개의 복제 검법을 익힌 내 감식 안으로 보라의 검무를 재분석해 보건데, 진짜 천재검이 맞았다. 내 전생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천재검이 여기서? 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래. 놀라야지. 이것아. 이게 바로 검법이라는 거다. 네가 익힌 검술과는 결을 달리하는, 진짜 마나의 비의를 담은 기술이지.”
아니. 지금 그게 궁금한 게 아닌데.
나는 어리등절한 얼굴로 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는 보라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돌연 정색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 봐라. 이런 게 의미 없는 세상이라지만, 나름 가문의 검술을 배우는 거니. 너에게 만이라도 이코반 가문의 진실을 알려주마.”
그러고는 그의 가문과 관련된 비밀을 털어놓았다.
“내 선조는 어느 멸망한 왕가의 후손이었다. 산탈라가 아닌, 다른 왕국의 왕가였지. 이름은 나도 몰라.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더군.”
속사정을 들어보니. 산탈라 제도를 통일한 반드레 이로반의 양자인 알트레 이코반은 산탈라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왕국의 정식 후손이라 했다.
반드레 이코반은 왕가를 섬기던 기사였고. 그러나 성곽시대가 오고 왕국이 쫄딱 망하자 반드레 이코반은 홀로 살아남은 왕손을 데리고 머나먼 타국으로 도망쳤다.
수년에 걸친 도주의 세월 끝에 당도한 곳이 산탈라.
“원래는 잠시 몸만 피할 생각으로 왔다고 하더구나. 타지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반드레 이코반 시조님이 확인 차 고향을 방문했지만… 선조님의 자리는 없어졌지.”
도망친 왕가의 자손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거겠지… 라며 보라가쓰게 웃었다.
“해서, 괜히 돌아가 봤자 분란만 일으킬 것 같으니 산탈라에 적을 두기로 했다고 한다.”
“그… 그 시조의 이름이 뭐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너도 알지 않냐? 반드레 이코반이 라고.”
“그, 반… 반드레 이코반이. 보라가 익히는 검술, 아니, 검법을……알려준거야?”
“아마도 그럴걸?그때 당시 선조님은 검법을 배울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시조, 반드레 이코반 님이 검법을 익히곤 선조님에게 전수했을 거다.”
반드레 이코반! 그다! 그가 천재검을 익혔다!
반드레 이코반이 어째서 천재검을? 그가 알테어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알테어의 천재검은 수백 년 동안 세상을 암중에서 다스린 빛의 수호자도 모를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반드레 이코반이라는 인물이 원본 천재검을…….
‘ 가명인가?’
가명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반드레 이코반. 이 이름의 어느 부분에 본명이 들어간 거지? 아예 본명을 안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있지. 아이 씨. 그러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나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반드레 이코반의 철자를 분해했다.
“반, 드, 레, 이, 코, 반. 반드, 레이, 코반. 반드, 레이코반. 반드레이, 코반…”
“아!”
불현듯,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반드레이 코반.
반 드레이 코반.
‘드레이!’
션의 인연! 특수기사단장이자 최후의 최후까지 천재검을 노리는 찬탈자를 처단한 복수자!
“반, 드레이, 코반.”
“아니. 반드레. 이코반.”
보라 이코반이 내 발음을 지적하지만, 내 기억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종횡했다.
‘반드레가 알테어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중앙 대륙으로 떠나 에일을 만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알테어 복구만으로도 허리가 휘는데 어째서 알테어를 버리고 중앙 대륙까지 복수를 하러 떠났는가! 나는 그게 자기일 시절까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가정을 넣는다면 다 이해가 된다. 드레이는 알테어의 마지막 핏줄을 데리고 대륙 반대편으로 도주했다… 라는 가정.
그 과정에서 중앙 대륙에서 알테어에 사고를 친 흑마법사의 흔적을 발견하고 복수를 위해 끼어들었다고 한다면?
에일을 션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알테어로 북상하다가 소드 마스터와 만나 큰 상처를 입고 이탈. 상처를 회복했을 땐, 모든 사건이 끝나있었고 알테어의 권력도 해피와 피오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사정을 모두 파악한 드레이는 산탈라로 돌아와 반드레 이코반으로 개명하고…….
“허!”
자기의 기억이 떠오른다. 특사 자격으로 알테어에 방문했을 때, 중앙대역사박물관에서 보았던 그것.
드레이(행방불명)이라는 짤막한 한 줄의 글귀.
“아하! 하하하하!”
이제 다 이해가 된다. 나는 속이 뻥 뚫린 느낌과 함께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보라가 히죽 웃었다.
“뭐야. 검법 배우는 게 그렇게 기쁘냐? 이놈이. 그러면 미리 말이라도 하지.”
월 오해하고 있네. 하지만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없다. 나는 보라의 앞에 예의 바르게 정좌를 하고 앉았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그에게 공손하게 절을 했다.
“큼! 이제 이 검법의 가치를 알겠구나.”
보라가 멋쩍어하며 절을 받았다. 절을 끝낸 나는 보라에게 물었다.
“사부. 검법의 이름이 뭐야?”
“천지합심검(天地合心劍)“
“좋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좋은 검법이야. 아마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첫번째는 원데 그러냐?”
“몰라서 물어? 당연히 알테어의 천재검(天災劍)이지.”
“이 씨불 놈의 새끼가 눈만 거지같이 높아서.”
눈이 높다니. 당연한 걸 가지고 당연하다 말하는데 욕을 왜 먹어야 하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라의 욕설을 홀렸고 보라는 역정을 내며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부터 정말 호되게 가르칠 거라는 경고와 함께.
보라 이코반이 떠나고, 적 막함만이 감도는 강당. 나는 홀로 정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다스렸다. 몸을 바르르… 떨며, 흥분을 토해내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제 시작이다.”
션 때부터 100년이 넘게 바라오던, 그리고 끝끝내 내 손에 들어오지 않던 천재검이 드디어 내게 왔다.
솔리아와 라온과 해어진 이후 비로소 나의 인생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나는 내일이 기다려졌다. 아주, 많이.
애필로그 4. 너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대 인기 장편 영화! 웨일 슈타드의 모험 시리즈!
웨일슈타드의 모험. 제1편. 해저왕국의 마수룡!
스토리는 대강 이러하다. 연원이 불분명한 헨섬한 모험가 웨일 슈타드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대 시대의 오파츠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다!
고고학적 발견을 위한 여행 끝에, 그는 이종족 연합지역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만난, 바다속에 문명을 일군 신비로운 이종족, 에레스발다. 그들과 함께 숨겨진 역사를 밝혀 나가는 모험!
그리고 종장에 이르러선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바다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는 유적지를 발견! 유적지로 다가간 그는 유적지의 파수꾼 마수룡을 깨우고 만다!
웨일슈타드는 에레스발다 히로인과 유쾌한 동료와 함께 눈을 뜬 마수룡을 처치한다! 역사적인 유적지를 통째로 무너드리는 업적은 덤, 유적지에 남아있는 오파츠를 허락도 없이 챙기는 건 서비스!
대모험 끝에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 벗긴 웨일슈타드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난다!
신비로운 이종족의 생활사와 철저하게 르암인 중심주의가 묻어나오는 스토리. 그리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액션으로 ‘영화라는 장르를 세상에 선보인 명작! 후속편은 예약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몇 년 후에 나온 웨일슈타드의 모험 . 제2편. 고대의 암훅제국.
1편에서 얻은 오파츠를 단서삼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잊혀진 땅에 도착한 웨일슈타드! 하지만 그곳은 흑마법사가 지배하는 사악한 땅이었다!
숨어서 암흑제국의 부활을 노리는 악랄한 흑마법사들! 웨일슈타드는 (잊혀진 땅이라는 설정인데 어째서인지) 근처 마을로 도망을 친다! 지인을 경계하여 웨일슈타드를 배척하는 폐쇄적인 마을!
그곳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잠입과 전투, 우정과 배신 끝에 흑마법사를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뿔싸! 악독한 흑마법사 녀석들은 죽음조차 불사르고 마경(魔境)을 불러일으키니!
웨일슈타드는 동료들과 그리고 (작중 시간상으로는 하루 전만 해도 그를 잡아 죽이려 했던)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훅마법사의 음모를 분쇄하는 데 성공한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웨일슈타드는 훅마법사의 유산을 회수하곤 또 다시 여행을 떠난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흥행의 물결! 수없이 많은 펜들의 염원을 담아 등장한, 웨일슈타드의 모험. 제3편. 시원의 성배.
이번의 무대는 사막이다. 분명히 전편에서는 흑마법사의 유산을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사막으로 향한 웨일슈타드!
그곳에서 여러 부족을 만나며 사막의 전설,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시원의 성배를 찾아 떠나는 그!
여행! 부족 간의 갈등! 오해가 불러온 전투와 도주! 땡볕의 사막을 횡단하는 대모험! 그리고 사막인데 어째서인지 모르게 윗도리를 벗고 정글에서 자라는 목재로 만든 대형 활과 화살을 장비한 부족 전사들의 추적!
살라한이라는 부족 마법사 여캐릭터의 등장과 히로인 다툼! 때마침 타이밍 좋게 발동하는 시원의 성배! 성배의 기운을 느끼고 모여드는 몬스터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웨일슈타드를 못 잡아먹었던 부족민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고는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협력을 약속하는 감동적인 화해!
그리고 몬스터와 문화 차별주의적 시각이 잔뜩 묻어나오는 장비를 한 부족 전사들과의 대규모 전투씬! 유적지 안에서 온갖 함정을 피하고 발동 직전의 성배를 잡은 웨일슈타드.
성배를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웨일슈타드! 왜인지 모르지만 유적지 안까지 상처 없이 따라 들어온 새로운 히로인 살라한! 갑자기 시작되는 밑도 끝도 없는 키스씬!
빛이 둘을 감싸고… 그리고 성배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었습니다! 와 함께 시작된 에필로그! 눈물 휼리는 살라한을 멀리하고 낙타를 타고 사막을 떠나는 웨일슈타드! 아! 그의 등짐에는 힘을 잃은 성배가 담겨있다!
불어오는 모래바람. 뜨거운 빛을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 그리고 노랄고 황량한 사막!
카메라는 점점 배경을 넓게 잡으며, 그 배경 끝에서 사막을 거니는 웨일슈타드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3편이 끝나고, 제작사를 납치할 기세로 웨일슈타드 시리즈에 열광하는 사람들!
팬들에게 뭇매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제작사는 4편의 제작을 약속했고, 펜들은 기 뻐 날뛰 며 후속작이 나올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년 후. 드디어 웨일슈타드 시리즈 4편이 상영되었다.
***
우르르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밖으로 나선다. 점점 옛 모습을 되찾아가는 산탈라에 낸 기념비적인 1호 영화관.
한 편 상영할 때마다 권장 인원석의 몇 배를 초과해서 수백 명이 꽉꽉 들어 찼지만,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직도 수천 명이 넘었다.
특히나 웨일슈타드 시리즈 최종편인 4편이 수입되자 영화관은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미어터졌다.
나는, 그리고 나와 보라 이코반, 험클리 등의 산탈라 임시행정부 실세는 권력의 힘으로 웨일슈타드 시리즈 제4편, 설원의 종장을 그 누구보다 빨리 관람하고는 인파에 밀려 영화관 밖으로 떠밀리듯이 나왔다.
“이거……”
나는 설원을 종장을 보고 나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원의 종장. 여태까지 등장한 소소한 떡밥을 하나로 모아 설하의 땅에서 얼음 속에 갇힌 몬스터 대군을 불러일으키려는 훅마법사 조직과 싸우는 이야기.
그곳에서도 웨일슈타드는 혹마법사가 가동한 고대의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 전쟁터로 용감하게 발을 디뎠고, 여러 병사, 장군, 그리고 또 새로운 히로인과 함께 모험을 펼치며…….
“이건…”
여하튼, 상세한 스토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이건 그거다. 어떤 시러배 잡놈이 웨일의 일대기를 괴상하게 각색해서 영화에 써먹었다.
1편은 히드라 크라켄을 사냥한 일. 2편은 아마…확실하진 않지만, 훅마법사가 제노이라는 소국에 마경을 열은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제노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지?’
아마 수십 만은 우습게 죽은 걸로 기억한다. 100년도 안 된 누군가의 비극이 영화 소재거리로나 소비된다니. 세상이 이렇게나 막장이다.
3편은 흑마법사 죽이겠다고 사막으로 떠났을 시절의 일이겠군. 성배는 무슨. 그리고 히로인 살라한은 살저 하라한을 성전환시킨 캐릭터가 분명하다.
아무리 이종족이라 젊어 보인다 해도, 그때 당시만 해도 200살이 넘은 노인네를 히로인으로 만들다니. 심지어 키스?! 우웩! 이 새끼들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름은 또 왜 웨일이 아니라 웨일슈타드야?’
왜 이름이 웨일슈타드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슈타펜드에서 따온 것 같았다.
웨일은 연구소를 탈출한 뒤, 몇 개월 동안 항구도시 슈타팬드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자문 역할을 하며 기사 작위를 받고, 슈타펜드라는 성까지 받았다.
웨일 슈타펜드. 또는 슈타펜드의 웨일. 그때 당시, 아무런 성이 없던 슈타펜드 소속 기사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성이다.
그러니까. 웨일 슈타펜드-웨 일슈타펜드- 웨일슈타드. 순으로 이름을 간략화한 거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후우. 사람들이 이렇게나 몰리다니……”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인간 해일에 휩쓸려서 웃이 엉망으로 구겨진 험클리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다. 얼굴이 벌걸게 달아오른 게, 영화를 보고 보통 흥분한 게 아닌 듯 싶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웨일의 형제라서 저게 다 거짓말인 거 삔히 알 텐데. 뭐가 그리 즐겁다고 얼굴까지 벌겋게 해?
나는 험클리가 이해가 가지 않아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재미있어 보이네?”
“아아. 영화를보자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새록새록 떠오르기는 무슨. 이 미친 새끼가. 이놈도 나이 처먹더 니 치매가 왔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험클리를 흘겨보았다.
툭툭! 영화관으로 오는 사람들이 어깨를 마구마구 친다. 우리는 사람들을 밀며 영화관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인파 소리가 줄어들자 험클리를 추궁하듯이 묻는다.
“새록새록 떠오른다니? 웨일은 저런 외모가 아니었을텐데?”
영화에 나오는 웨일슈타드는 전형적인 호감형 용병의 외형을 하고 있다.
건장한 키에 근육질 몸매. 짧게 깎은 스포츠형 머리 카락에 호남형 인상을 한 호탕한 남자. 그러면서도 복장이나 말투, 직업은 지식인의 향기를 뽐낸다.
용병의 거친 외형과 지식인적인 면모가 자아내는 이중성이 매력인 캐릭터였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무인이 주력으로 배우는 검이 아닌 창을, 불살을 고집하는 목창(木槍)이 중요 장비인 것도 인기 요인이다.
‘뭐냐 그런 놈은……’
내가 아는 웨일과 같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 웨일은 호남형이 아니라 호랑이형이 더 어울리는 위협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지식인은 무슨. 필요한 게 있으면 일단 다 때려 부수고 남은 잔해를 뒤져 조사했지. 불살도 전혀 아니다. 웨일은 가는 곳마다 피를 몰고 다녔다.
피바다였나? 피보라였나? 피보라의 웨일이 사막에서 얻은 이명이었다. 불살의 흔적은 개미 포름산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명이었지.
영화에서 등장하는 소소한 흔적이나 설정을 보면 나름 웨일에 관해 조사를 꼼꼼히 했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웨일슈타드는 웨일과 백만 광년은 떨어진 전혀 다른 사람이다.
“…웨일에 대해 자세히 아는구나.”
“워낙 유명했어야지.”
특히나 이종족 연합지역에선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웨일이다. 이종족 연합지역과 가까운 산탈라에도 웨일의 위인전이 수입되었고, 꽤나 진지한 고찰이 들어간 역사책도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었다.
“본인이 쓰지도 않은, 친인들의 입을 빌려 긁어모은 자서전까지 읽었는데. 솔직히 말이 좋아 백공이지 아주 개차반이던데?”
내 반문에 험클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하하… 그래. 웨일은… 음…….성격이 조금…좀, 그랬지……”
뭐.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너, 입에서 내 욕 한마디 라도 나오기만 해봐. 옛날 형제라도 안 봐주고 아구창 후려갈길 줄 알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험클리의 입을 예의주시했다. 험클리는 내 감시를 받는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지 아련한 얼굴로 영화관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스락!
험클리가 땅에 떨어진 설원의 종장포스터를 집었다. 그곳에 그려진 인물, 머리카락, 피부색, 덩치. 눈동자 색마저 웨일과 다른 웨일슈타드를 보더니 그립다는 듯이 작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왜곡되어도, 이런 형태로나마 내 못난 형제를 기억해준다는 게 기쁘구나. 사고뭉치에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살던…그런 녀석이었어도 내 평생의 은인이니까.”
“잊혀진다는 건 슬픈 일이야.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조금은 왜곡되더라도 타인의 기억에 남아있는게 나는 더 낫다고 생각한단다.”
그렇게 말하며, 험클리가 조용한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해치고 사라졌다. 나는 애처롭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억한다.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험클리의 말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렇게 한참을 그 말을 음미하다가 급히 자리를 떴다.
그날 밤. 쓰레기를 지우고 서서히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는 어느 야산. 심은 지 10년도 안 되어서 얇은 나뭇가지 만이 빽빽하게 자라는 산의 정상에 올랐다.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낸다.
“이거의 용도를 이제야 알았다.”
전생을 했음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나를 따라 내 품에 자리 잡은 앙상한 나뭇가지. 연약한 꽃대 위에 달린 한 장의 꽃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두가 검은 우주로 들어갔을 때, 의문의 존재에게 받은 그 꽂. 다섯 장의 꽃잎은 한 장은 쉰둘에게, 두 장은 지구와 이세계로 오는 연결통로로, 한 장은 승천자에게 연락용으로 쓰이고 이제는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위의 설명을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
분명히 악신과 지구인과 관련된 사건은 다 마무리되었을 텐데 왜 한 장의 꽃잎이 남아있는 걸까?
키더루프는 몇 년째 마지막 한 장의 용도를 고민했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완전히 신경을 끄고 지냈다.
“서비스인가? 일 잘했으니까 한 장은 기념으로 내가 가져라…이런 의미로 남겨준 걸 수도.”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이런 바보 같은 가정이나 할까. 하지만 험클리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나는 여태까지 꽃잎의 원리를 ‘작동’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
승천자와의 통신 채널을 작동시켜준 일. 그리고 없던 지구와 이세계의 통로를 ‘열어준’ 일. 나는 위의 일에서 꽃잎의 기능을 열거나 작동시키는 걸로 오해했다.
“하지만 틀렸어. 기억이다. 내가 까먹은 것, 모르고 있던 것을 꽃잎이 일깨워 준 거야.”
꽃잎은 다두에게 검은 우주에서 고립된 부모, 형제를 알려주었다. 내가 잊고 지낸 쉰둘의 육체로 날아가 안착했으며, 몰랐던 지구와 이세계로 가는 통로를 알려주었다.
그러니 마지막 한 장의 꽃잎 또한 내가 잊고 있는(무언가’를 일깨줄 때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아마 이게 정답이다. 이것이 답이 아니면 정말로 방법이 없다.
‘뭘까…’
내가 잊고 있는 게 뭘까. 꽃잎이 노리는 마지막 기억이 무엇일까.
나는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내 면으로 깊게 침장해 들어가 나의 전생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반추했다.
‘아! 이놈의 기억력!’
예전보다 기억력이 현저히 줄어들어 회상이 꼼꼼하지 못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첫 번째 삶에서부터 다두까지. 내가 만났던 인연을 하나하나 되새긴다.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별이 촘촘히 박힌 검은 장막이 푸르게 물들 때까지 자세를 풀지 않는다.
해가 중천에 떠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명상을 이어간다.
반짝!
시간이 훌쩍 틀렸다. 어느새 지평선에 걸린 태양이 내 시야 정면에 잡혔다.
해질녘의 시간. 붉게 물든 노을이 자연을 회복해가는 산탈라를 일색(一色)으로 칠하고,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활기차게 활동하던 생명도 하나둘 숨을 죽인다.
바람이 식고, 숨이 죽는다. 생명력이 사라진다. 해와 함께… 삶이 저물어간다.
그리고…….
‘저 해가 지면 내 목숨도 끝나겠지.’
번뜩 떠오른 상념.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세상에나!
“그래. 너를 까먹었구나. 이 멍청이! 다두가 그 설정을 썼으면서도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가 있지?”
내가잊은 인연, 드디어 기억이 났다. 나는 나뭇가지를 높게 쳐들었다. 망설임은 없다. 이게 아니면 아예 꽃잎을 버리리라 마음먹고는 한 가지 염원을 담는다.
십 초, 이십 초. 시간이 하염없이 흐른다. 저물어가는 해의 끝자락이 지평선에 걸리고, 서글프게 흩어지는 적색 광선이 연분홍빛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때.
팔랑
꽃잎이 드디어 떨어졌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꽃잎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위로 상승했다. 하지만 경로가 똑바르지 않다.
꼭 망설이는 것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만 두려움에 잠겨 최초의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어린아이처럼. 내 주위를 빙빙 멤돈다.
나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꽃잎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내 손끝에 안착했다. 나는 꽃잎을 설득했다.
“이제 슬슬 내려와야지. 이 좋은 세상이 왔는데 않 즐기고 뭐 해.”
흔들. 꽃잎이 혼들린다. 나는 입김을 후一불어 꽃잎을 날리며 이어 말했다.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양념을 팍팍 쳤으니까. 오기만 하면 다 네 세상이야. 그러니까 어서 내려와.”
내 말을 들었는지 꽃잎이 망설임을 지우고 위로 올라갔다. 구름보다도 높이, 내 시야로도 보이지 않는 높이까지 상승했음에도 만족하지 않고 더 위로!
어쩌면 행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도까지 상승한 꽃이… 행성을 멤도는 작은 영혼과 접촉했다.
반짝! 슈욱!
푸른빛이 하늘에서 반짝였다. 빛은 이윽고 유성이 되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말없이 유성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그날. 타인에 의해 휘둘리고 무너진 한 많은 아이의 영혼이 100년의 세월을 넘어 땅으로 귀환했다.
* * *
산탈라에 난리가 났다,
이유는 난데없이 산탈라 임시행정부 뒷산에 떨어진 유성 때문이었다. 유성이 내비지는 기운은 한없이 성력에 가까웠고, 고위 마법사도 분석 할 수 없는 고등한 방정식이 담겼다.
심지어 이 유성은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떨어진 자리에 어떠한 파괴 현상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 놀라운 소식에 세상 사람들이 산탈라로 모였다.
웅성웅성!
하지만 아무도 뒷산에 접근하지 못한다. 함부로 성력이 넘실거리는 곳에 와서 뭘 잘못 건드렸다가는 후환이 감당이 안 돼 멀찌감치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푸르게 빛나는 커다란 알을 홀로 지킬 수 있었다.
“아, 이제 슬슬 올라오는구나.”
하지만 접근하지 못하는 건 일반인뿐이고 권력, 금력, 무력 중 하나라도 자신이 있는 인간들은 눈을 뒤집고 산탈라 뒷산으로 모여들었다.
우웅-!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초고속 천공기를 타고 유력자, 고위 마법사가 집결한다. 수십 년 만에 발생한 전 대륙적인 이벤트에 마법 변태들이 슬금슬금,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그러나 유성 접근권을 선점한 건 몇 년 전부터 산탈라에 침을 발라두던 에레스발다였다. 에레스발다 고위 능력자들이 난리를 치는 마법사들을 말리곤, 조심스럽게 뒷산을 올라왔다.
나는 알을 감싸는 푸른 장막에 감싸여서 형체만 보고 위의 사정을 겨우 짐작했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에레스발다 인의 면면을 알지는 못했다.
잠시 보니 험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아, 도저히 모르겠군. 승천자의 감각이나 초능력 파동이 없는 게 이럴 때는 참 아쉽단 말이지.
어쨌든 험클리가 있으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진 않을 거다. 나는 암전히 에레스발디 능력자들이 올라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 푸른 장막 앞에 열 명이 넘는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개중 한 명이 툭툭! 하고 장막을 건드린다. 들어와도 되냐고 묻는 신호다.
“예! 들어오십쇼! 혹시 모르니까 살짝만 찢고, 한두 분만 빠르게 입장해주세요!”
험클리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손을 흔들며 무어라 바쁘게 말한다. 목소리로 보아 나인걸 알아채고는 사람들한테 설명하는 거겠지.
짧은 설명이 끝나고 죽-! 하고 장막이 세로로 그어졌다. 그어진 장막을 통해 한 명의 사람이 재빠르게 들어왔다.
“험클.. 으음?”
의외로 장막 안으로 들어온 인물은 험클리가 아니었다. 장창을 든 거대한 체구의 여성. 그녀가 덤덤한 속에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낯익은 여성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베노… 브란도?”
베노브란도. 웨일의 인연. 에레스발다를 지키는 세 개의 창 중 하나. 그녀가 험클리 대신 이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베노년란도가 내 등 뒤에 있는 알에 잠시 시선을 주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키더루프인가?”
아, 참. 키더루프는 베노브란도와 초면이지.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예. 맞습니다. 혹시 ‘유성처럼 빠르게 타들어 간 웨일.’에 나오는 에레스발다의 베노드라도 경이 맞으신지?”
“흐……!”
베노브란도가 희게 미소 짓는다. 이 건방진 꼬맹이가 알을 가리고 서서 그런 건가? 그건 걱정 없다. 설정도 미 리 다 잡아두었다.
나는 베노브란도에게 알에 관한 설정을 속사포처럼 을었다.
“베노브란도 경. 지금 이 알은 아마 승천자 다두가 할 일을 다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운명대로……”
“아니, 그건 상관없다.”
“아, 그렇겠죠. 하지만 다두의 위상을 보아…예?”
잠깐. 뭐라고? 이 알이 상관없다고? 그러면 여기를 왜 올라온 거야?
베노브란도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알이 아닌 내게 시선을 집중한다. 한참이나 내 눈을 잡아먹을 둣이 보던 그녀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키더루프. 산탈라에서의 삶은 즐거운가?”
“어…….예?”
갑자기 이게 원소리래? 나는 어리등절해했지만, 베노브란도는 진지 그 자체였다. 뭐지? 이 누나도 나이를 먹어 치매가 왔나?
옛날 인연이 다 치매가오다니. 이거 진짜 슬픈데? 나는 슬픔을 참으며 답했다.
“예.즐겁습니다… 만?”
흥! 하고, 내 답변을 들은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뭐가? 이 쓰레기장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꾼게? 분해식의 사용료를 받아 평생 놀고먹을 돈을 번 게? 아니면 키더……”
“아뇨. 아닙니다. 베노브란도경.”
더는 못 들어주겠다. 나는 베노브란도의 말을 끊었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그녀가 어째서 초면에 이다지도 무례하게 질문을 건네는지 궁금했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은 참아주지. 나는 베노브란도의 무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앞으로 더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답변이 되었으련지요.”
내 답을 들은 베노브란도가 우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꼬라보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나도 마주 베노브란도를 노려보았다.
콩! 갑자기, 그녀가 무거운 발을 옮겨 나에게 다가온다. 어, 잠깐. 혹시 내가 마주 노려봐서 화난 거예요? 누나? 누나 진정해. 누나 그런 사람 아니잖아.
“자, 잠시만…까악! 아?”
베노브란도가 양손을 크게 벌리더니… 나를 껴안았다.
확! 하고. 그 거대한 체구로 키더루프를 으스러뜨리려는 것처럼 강하게 껴안는다.
그러고는 제 자식을 칭찬하듯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저, 저기요?”
뭐야. 이거, 어색해 죽겠네, 나는 조심하게 몸을 움츠렸다. 베노브란도는 그런 나를 더욱 강하게 껴안고, 격하게 쓰다듬었다.
하염없이 나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울적한 어조로 내게 고백하듯이 말했다.
“고맙다. 키더루프.”
“……뭘 말씀하시는지.”
“그냥. 우리를… 아니, 이거를 지켜주어서.”
베노브란도가 말을 하다 말고 손가락을 들어 알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는 거다.
나는 기가 차서 대꾸했다.
“조금 전에는 알은 상관없으시다면서요?”
“…블러핑이다.”
“아니, 왜?!”
“신경 쓰지마라.”
베노브란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포옹을 풀었다. 팔짱을 끼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거짓말을 것처럼 알만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장난해? 진짜 치매야?’
“저….”
쩍! 쩌적!
더 따지고 싶 지 만, 타이 밍 나쁘게 알이 부화를 시작했다. 나는 베노브란도의 일을 뒤로 미루고 알에 관심을 집중했다.
부스럭! 바삭! 바삭!
알껍데기가 깨지고, 안에서 숨죽이며 탄생을 기다리던 생명이 밖으로 나왔다.
갓 열 살을 넘 겼을까? 수더분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마른 체구의 남자아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이가 입을 헤 벌리며 자신의 손을, 다리를, 배와 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저기… 저는 누구죠? 그리고 아저씨는……?”
“아저씨라니. 이 새끼야. 형이라고 해.”
나는 상의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 뒤에 있던 베노브란도도 가죽 재킷을 벗어 아이의 등에 걸쳤다. 베노브란도 입장에서야 재킷이지, 아이 기준에선 바바리코트나 마찬가지다.
나는 바바리 재킷을 입은 아이를 일으켰다.
“그리고 네가 누구냐니. 너는 누가 되고 싶은데?”
“어… 어? 예? 그, 글쎄요?”
아이가 잠시 당황하더니 재차 질문했다.
“그럼 제, 제 이름은요?”
“네가 원하는 걸로 정해. 뭐로 하고 싶어?”
이번 건 그리 당황스럽지 않나 보다.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 니 말했다.
“에일은 어떨까요?”
“저런,”
나는 안쓰럽다는 둣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일은 너무 무식해 보이는 이름이잖아. 기왕 새 삶을 얻은 거 폼 나는 이름으로 짓는 게 어때?”
“에일이 무식해요?”
“그래. 아주 무식해.”
내 단호한 말에 아이가 조금 더 고민했다.
“션이요!”
“아이고. 션은 훨씬 더 무식한걸?”
“예?! 거짓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진짜야. 꼭 술집에서 자기 욕한 용병을 기어코 찾아내서 반나절 동안 첨탑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녀석 같은 이름이야.”
“…은근히 예시가 구체적인데요?”
“어디까지나 예시야. 어쨌든, 잘 생각해 봐. 시간은 많으니까.”
내 답에 아이가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자신의 이름을 고민했다. 나는 중얼대는 아이를 지긋이 보다가, 베노브란도에게 말했다.
“치매 브란도경.”
“베노브란도다.”
“예. 베노브란도경. 이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는 걸 에레스발다에서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만? 키더루프. 너는 어쩔 거지?”
“그렇군요. 저한테도 불필요한 관심이 집중될 것 같은데… 저도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너무 양심 없는 부탁이라 생각해서 베노브란도의 눈치를 본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들어 가슴을 때렸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예전부터 그 일을 위해 긴 시간을 투자해왔으니.”
르데앙하고 헤어진 이후에 보모로 전직했나? 젤 포이만 밑에서 일한 거 아닌가? 그 이후의 직업을 보모로 바꾼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도와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베노브란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고민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자! 고민은 나중에 계속하고. 이제 나가자.”
“나가? …어디로요?”
“밖으로—”
“하지만… 저는 제 이름도 못 정했는데.”
“상관없어.”
불안해하는 얼굴. 밖의 세상은 고통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듯한 기색이 아이의 얼굴에 감돌았다. 나는 아이를 독바로 바라보며, 네 생각이 틀렸다고 머릿속에 박아넣듯이 말했다.
“너는 밖에서 뭐든지 할 수 있어. 네 이름도, 네가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고, 되고 싶은 건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정말이요?”
“그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그럼 다 네 거야.”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다두의 설정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안 해주면 내가 세상 자체를 뒤엎어서라도 달성시킬 거다.
아이가 찢어진 푸른 장벽을 본다. 나를 보고, 베노브란도를 보고, 다시 밖을 본다. 그리곤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이가 한 손은 베노브란도. 한 손을 나를 잡곤 용기를 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푸른 장벽을 넘어 세상 밖으로.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