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60)
*
처음에는 이 이상 쉬울 수 없었다.
간단한 인삿말.
한국에 두 번째로 방문하는 소회.
그리고 내가 익히 아는, ‘아기 가수 조르디’로 활동할 시절의 이야기.
조르디 본인이 얘기했던 대로 이해하기 쉽고, 평이한 일상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문제는-
‘이야기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스피치가 시작된 지 어느덧 3분째.
「En fait, j’aurai pu faire n’importe quoi, mais···.」
그의 옆얼굴을 흘긋거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조르디는 몹시 긴장한 나머지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런.’
뒤늦게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는 어째서 당연하게 노트 없이 통역에 임하려 했던 걸까.
「Alors, vous pouvez deviner ce que j’ai fait?」
뒤늦게 안주머니의 노트와 펜을 꺼내볼까 고민했지만···.
‘이제 와 뒤늦게 노트와 펜을 주섬주섬 꺼내는 것은 자살골 시도나 마찬가지이지.’
그 과정에서 정보의 상당 부분을 빠뜨리게 되는 것은 물론, 결국은 전체 맥락까지 놓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잠식하려는 부담감을 몰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위기를 잘만 이겨낸다면,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방금 전과는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오늘의 연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하여 새로이 내린 결론은···.
‘통으로 다 외우는 것.’
키페티 교수의 강연 때도 그랬지만.
나는 이보다 훨씬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최대 10분까지 메모리를 늘리는 연습을 해온 터였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이 같은 ‘경험담’은 논리 구조가 명확한 텍스트에 비해 외우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
‘논리적인 텍스트는 머릿속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주장과 논거로 짜여진 수형도를 그리는 식으로 외우면 훨씬 효과적이지만.’
이런 내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심정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Je me suis rendu compte que···.」
그렇게.
조르디의 이야기를 힘겹게 머릿속에 욱여넣던 중.
‘잠깐만.’
문득 최근에 쿠엘벡의 책 를 검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400페이지를 훌쩍 뛰어넘는 분량의 책을 쭉 읽으며 큰 그림을 머릿속에 넣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가.
‘그 머릿속의 기억을 토대로, 세세한 줄거리를 작성했고 말이야.’
지금 여기서 조르디 라부안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의 삶을 다룬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Bien que mes parents aient fait une erreur···.」
하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인간의 이야기(histoire)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역사(Histoire)나 다름없으니까(* 프랑스어 단어 histoire에는 ‘이야기’와 ‘역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완벽한 평정심을 되찾았고.
조르디의 이야기, 아니 이라는 소설이 내 귀에서 낭독되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집어넣고.
이를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낸 뒤, 그것을 다시금 나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패러프레이징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나는.
한동안 노트테이킹에 천착하느라 통역의 기본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안이나 강박이 아닌, 기대감으로.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경청하려니, 어느새 이야기는 결말에 가까워졌다.
「Au contraire, cela m’a donné une nouvelle opportunité.」
마침내.
드디어.
「···et merci de votre attention.」
장장 10분에 다다르는 그의 이야기가 끝났다.
짝짝짝.
프랑스인 게스트들은 물론,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게스트들 역시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Oh mon dieu(이런, 세상에).」
뒤늦게 나를 돌아본 조르디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Oh désolé, j’ai oublié de(미안해요, 내가 까맣게 잊고-)」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C’est pas grave. Je commence tout de suite(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떨거나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통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10분간 프랑스어로 라부안 씨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프랑스 게스트분들께 잠시만 양해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게스트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게스트분들께도 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꼭 들려드리고 싶은 바, 지금부터 정성을 다해 우리말로 통역, 시작하겠습니다.”
통역부스 안에서 지금쯤 부리나케 내 말을 동시 통역하고 있을 터.
“저는 올해로 스물한 살입니다. 아직 창창한 나이이죠, 아, 한국에서도 이렇게 얘기하나요?”
리시버를 낀 게스트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게 있다면, 제 인생의 전성기는 사실 아주 오래전, 4살 무렵이었다는 걸 여전히 실감하곤 합니다.”
그 말에 장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해진 가운데.
“그때의 저는 정확히 몰랐지만, 당시 제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기 가수 조르디’에 관련된 팩트를 하나 하나씩 읊었다.
어머니가 작곡하고 그가 부른 .
하나의 센세이션이 된 그 노래는 유럽 전역에서 1위를 차지했고, 프랑스에서는 연속 15주 내내 1위를 달성했으며.
그의 싱글앨범은 프랑스에서만 75만 장이 팔렸으며, 이후 내놓은 두 장의 앨범도 역시나 어마어마한 성공을 경험했다고.
“조르디 라부안이라는 이름은 기네스북에 ‘최연소 가수’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글로벌 투어도 했는데, 어릴 때 한국에 왔던 기억이 아주 어렴풋이 나네요.”
적절한 속도와 발화량, 음량까지.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1994년에는 해외에서만 6만 장의 앨범이 팔리면서 약 1천만 유로의 매출을 달성했으나.”
이야기는 점차 중반부로 접어들었고.
어느덧 절정에 이르렀다.
“그 어마어마한 수익 중 제 앞으로 남겨진 것은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조르디’의 이름과 얼굴을 앞세워 얻은 수익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운용되었으며, ‘조르디 농장’이라는 테마파크 설립에 대부분 쓰였으나.
운영상의 허점과 경험 부족으로 테마파크는 3년 뒤 문을 닫았으며.
이 시기에 그의 부모는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실을 저는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내 아버지가 나를 속이고 배신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한동안 현실을 부정했죠.”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를 정신적으로 조종했고, 필요할 때만 접근해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어느 언론사와 한 인터뷰 내용을 보고 나서야, 조르디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 아버지에게 저는, ‘노래를 하는 가수’가 아니라, 그저 ‘샘플링 음원’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그 말과 함께, 장내가 숙연해졌다.
이 어린 뮤지션이 겪었을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공감하기라도 하듯.
“어쩌면 그 순간, 모든 걸 놔버리고 삐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버지가 제게 한 짓을 여전히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그의 슬픔, 고뇌, 실망, 부모에 대한 배신감.
“누군가는 제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네 삶의 전성기는 한참 전에 지났으며, 앞으로는 과거의 인기를 추억할 뿐이라고.”
“···.”
“또 누군가는 제게 ‘불쌍한 아이’ ‘부모에게 착취당한 인생’이라며 동정의 눈길을 보냅니다만···.”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온-
“그 두 가지 모두, 틀렸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좌절하지 않았고, 제 손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법을 터득했으니까요.”
···깨달음.
중요한 부분이니만큼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고, 속도를 느리게 한다.
“물론 너무 이른 나이에 의도치 않은 성공을 맛보고, 그로 인해 받은 상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더불어 ‘천재 아기’의 굴레를 벗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요.”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변사처럼, 강약을 조절하는 것.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지금 제게 거름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 상투적으로 들릴까요?”
그 후로 조르디는 수많은 투쟁을 해왔다.
그의 수입을 부당하게 착취해온 아버지에게서 권리를 되찾아왔고, 저작권 수입을 부당 지급한 음반사와의 소송에서 승리했다.
“이제 저는 제 인생의 2막을, 제 손으로 써나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이 분야를 제 업으로 삼으며 정진하고 있고요.”
그는 백방으로 활약하는 중이다.
예능에서 입담을 뽐내고,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한편.
유서 깊은 음악전문학교 ISTS에서 음향 엔지니어 과정을 전공하고 있다.
“그것이 전부 성공으로 점철되지 않더라도, 혹은 자잘한 실패와 실망으로 가득한 길이 되더라도.”
이제 이 어느덧 결말에 다다른 가운데.
“저의 선택이자 노력의 산물인 만큼, 그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며 끝맺음하는 것만이 남았다.
“지금 손에 넣은 이 귀중한 일상과, 땀 흘리는 노력의 가치를 잊지 않으며 한 발 한 발, 걸어가겠습니다.”
어느새 ‘통역사 박찬영’이 아닌, 프랑스의 청년 ‘조르디 라부안’에 반쯤 빙의한 채.
나는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을 보내는 청중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말을 맺었다.
“지금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들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통역을 그렇게 마친 순간.
잠시 장내가 조용해졌다.
‘무언가 실수한 건가?’
뒤늦게 불안감이 고개를 든 순간, 곧바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잔잔하게 시작된 박수는 점점 커져갔고.
이윽고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되어 장내 전체를 뒤덮었다.
“···.”
짝, 짝, 짝.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쪽을 돌아보니, 조르디가 내게 박수를 보내는 중이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어요. ···찬이 엄청 잘 통역해줬다는 것.」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Merci de mon coeur(진심으로 고마워요.)」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깊게 숨을 내쉬고 나자, 손바닥에 땀이 축축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나의 한계를 극복해냈음을 깨달았다.
*
그때 그 시각.
“와, 미쳤다 미쳤어.”
“···완전 소름.”
진행요원 전용 좌석에 앉아 있던 불어과 학생들 사이에서 소리 죽인 탄성이 쏟아졌다.
“지금 저 긴 내용을 다 외워서 통역한 거야?”
“그냥 길기만 하면 다게, 나 순간 헛것이 보였다니까?”
저 건장한 체구의 박찬영에게서 곱상한 외모의 조르디가 겹쳐졌다는 송하늬의 말에, 동기들 몇 명이 웃음을 터뜨린 가운데.
“이 정도면 그냥 신내림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통역 신.”
김수용은 지금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신내림.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진행요원이 아닌, 통역사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서이준 또한 그에 동감이었다.
‘저건 정말 타고나야 하는 영역이이니까.’
재능과 노력.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어찌 보면 무의미한 논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러한 논쟁이 거론되는 것은.
방금 전 박찬영처럼, 그 모든 것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사람을 드물지만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상황에 처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서이준은 방금 전 박찬영의 케이스에 자신을 대입하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고.
···당연히 멘붕에 빠지고 말았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외부에서 보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자신이 통역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생전 처음 보는 인물과 붙어다니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까.
얼굴을 맞댈 일이 없는 동시통역을 희망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나···.
‘저런 괴물을 마주하게 되면, 마지막 남은 전의마저 사라져버린단 말이지.’
그가 보기에 박찬영은 타고난 통역사 체질이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시선을 받으면 오히려 더 펄펄 날아다니고.
거기에 사회성까지 좋지 않던가.
물론 박찬영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더더욱 독기를 품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거야말로 언젠가 추성원이 말했던 것처럼 사기캐가 아닌가, 하고 서이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싱숭생숭해지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