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65)
*
그렇게 뱅상 교수의 특강이 시작된 지 5일째.
첫 주는 그야말로 스파르타 중의 스파르타였다.
「전달력은 정확한 발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Peur(쀄흐, 공포)와 pour(뿌흐, ~을 위하여), douxieme(두지엠, 12번째)과 deuxième(드지엠, 2번째)의 발음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연음(liaison)은 안 해도 무방하지만, 정확히 해줘야 상대방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수업 첫날, 마흔 명에 이르는 통대생들은 전부 다 줄을 서서 차례로 발성과 발음 점검을 받았다.
각자 부족한 점을 파악한 뒤에는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고치는 연습을 해왔고.
‘두 번째 날부터는 뱅상 교수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통번역의 기본기를 다시 갈고 닦는 과정이었지.’
그중에서도 그가 AB통역과 BA통역의 차이를 강조하던 것이 기억에 유난히 남았다.
– 전문적이고 정확한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BA통역과는 달리, AB통역은 ‘단순하고도 실용적인 통역’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 제일 중요한 것은 청자에게 ‘효과적이고도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 효과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연사가 했던 말 중)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곁가지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우리 42기생들이 한동안 잊고 있던 사항들이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지.’
이중 모국어 사용자인 레아 신이나, 현지 생활을 오래 한 덕분에 프랑스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하는 추처럼.
나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어휘의 한불통역을 하겠다는 일념에 언젠가부터 사로잡혀 있었던 듯하다.
‘오히려 학기 초에는 명확하고 실용적인 통역을 목표로 했던 것 같은데.’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나도 모르게 우쭐했던 걸까, 겉멋이 든 걸까.
그런 내 머릿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뱅상 교수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더 수준 높은 AB 통역’을 지향하며 프랑스어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근사하고 세련된 표현에 집착하다 본래의 논리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니까요.」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통역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원문의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것.
‘그 말에 내심 얼마나 뜨끔하던지.’
뼈를 때리는 말들은 물론이고, 그의 수업을 듣고 나올 때마다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게 된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렇게 5일차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그 뭐야, 무공 고수 같은 느낌 아니냐?”
추가 저 복도 앞쪽으로 멀어지는 뱅상 교수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공 고수. 표현 한 번 적절하네.”
“그치? 나 요즘 있잖냐, 수업 들을 때마다 완전 환골탈태하는 기분이야.”
추는 잔뜩 신이 난 기색이었다.
···저 녀석이 수업 듣고 나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인걸.
“아니, 솔직히 말하면 크게 기대 안 했거든? 달라 봤자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 했는데···.”
애초 한명외대 통대는 ESIT에서 수학한 교수님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곳.
그런 만큼 본토 ESIT와 큰 차이가 없는, 세분화된 통번역 커리큘럼으로 정평이 난 곳인 만큼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캬, 근데 네임드는 다르긴 다르더라. 나, 수업하면서 한 번도 딴짓 안 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거 알아?”
“그 처음이란 게 통대 들어와서 처음이란 거야, 태어나서 처음이란 거야?”
“당연히 후자이지.”
···저런 추를 집중하게 한 뱅상 뒤부아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교수법 자체도 뛰어났지만 열정도 보통이 아니지.’
기존에 ESIT에서 하던 강의안이 아닌, 프랑스어 통번역을 공부하는 ‘외국인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리큘럼을 새로 짜온 것 같았으니까.
“프랑스에서 지낼 때도 못 고쳤던 습관, 이번에 다 고쳤음. 완전 대박이지 않냐.”
원어민 수준의 발음과 억양을 자랑하는 추이지만, 그에게도 고질적인 나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뱅상 교수가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고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것.
“아주 물 만난 고기 같네. 간만에 열심히 하는 거 보니 좋아 보인다.”
“크, 내가 또 할 땐 한다니까. 넌 로익 형 만나러 가는 거?”
“어.”
언어교환도 할 겸,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단다.
“그래. 안부 전해줘라. 요즘 그 형들이랑 논 지도 꽤 됐네.”
“작작 놀아라.”
“야, 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이래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역사가 없거든?”
그래 그래.
신이 난 추를 떠나 보낸 뒤, 부지런히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동안 형에게서 문자가 하나 왔는데.
[니가 검토한 책, 저작권 계약 완료됐어.]번역 계약서 바로 기숙사로 보낼 테니 번역 시작하라는 형의 메시지.
수아의 생일선물로 봐둔 그 책 얘기였다.
···잘됐네.
나는 씩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자 로익한테서 금방 답이 왔다.
[그럼 온 김에 합주실 구경하고 갈래? 끝나고 같이 나가자.]로익이 속한 인디밴드 ‘아카드’가 모여 연습 중이라는 합주실로 찾아가자.
“오, 왔어?”
로익은 물론이고, 미리 얘기를 해뒀는지 다른 멤버들도 나를 반겼다.
“반가워요.”
“이제 두 곡만 더 하면 끝나니까 좀만 기다려요.”
나는 합주실 구석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아 그들의 연주를 구경했다.
보컬에 기타 두 명, 베이스, 드럼, 키보드로 이뤄진 6인조 밴드.
브릿팝 느낌이 나는 감성적인 자작곡이 제법 나쁘지 않았다.
‘로익은 본인 연주 실력이 별로라더니 잘하기만 하네.’
그렇게 합주는 어느새 다음 곡으로 넘어갔고.
로익네 밴드는 영국 밴드 스타세일러(Starsailor)의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스타세일러도 한때 많이 들었는데.’
곧 다가올 공연에서 연주할 커버곡이라는 모양.
보면 볼수록 이 형,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것 같다.
이윽고 화려한 스트링으로 전주가 시작되었고.
“Four to the floor, I was sure, Never seeing clear···.”
감성적인 톤의 보컬.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주에 심취했다.
그렇게 곡을 마치자, 로익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음, 다 괜찮은데··· 뭔가 좀 아쉽지 않아?”
코러스가 좀 더 두껍게 쌓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찬영아, 너 이 노래 알아?”
“···어? 알긴 아는데.”
“그럼 그냥 후렴구만 같이 좀 불러줄래? 화음은 내가 넣을 테니.”
어찌저찌 하다 보니 나는 로익 옆에 세워진 마이크 앞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Four to the floor···.”
후렴구 몇 마디만 같이 불렀다.
좀 민망하긴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옛날에 대학 다닐 때 밴드하던 생각도 나고.’
그렇게 곡이 끝나자.
“오, 로익 친구 분 목소리 좋으신데?”
“그러게. 힘 있는 중저음이 아주 좋네.”
“나중에 우리 공연할 때 게스트로 초청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자, 로익이 낄낄거렸다.
합주가 기분 좋게 끝난 뒤.
우리는 근처 한적한 카페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이번 언어 교환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프랑스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로익은 전에 과외할 때 만들었던 거라며 직접 작성한 자료까지 가져다주었다.
‘이거 너무 고마운데.’
와인도 갖다바치고 밥도 한두 번 사기는 했지만.
그걸로 퉁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로익과 함께하는 언어 교환은 과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근데 찬영이 너, 그새 또 프랑스어 실력이 늘은 것 같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달까?”
음, 뱅상 교수와 함께한 스파르타 수업 덕분이려나.
로익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도 발음과 억양이 상당히 훌륭해서 그런지 외국인이 하는 프랑스어 같은 느낌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
안 그래도 원어민에게 내 프랑스어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기는 했다.
로익의 한국어는 수준이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외국인 티가 물씬 나니까.
“1년밖에 안 살다 왔다는 말에 꽤 놀랐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가 프랑스에서 꽤 오랫동안 공부한 줄 알았단다.
“그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지금은···.”
잠시 표현을 고르던 로익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상대화는 아주 살짝 어색한 감이 있지만, 공적인 대화만 하면 외국인인지도 모를 것 같아. 프랑스인 앵커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
이런 과분한 칭찬은 기대 못 했는데.
어쩐지 고무적인 기분이 들던 순간,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그런 건 있어. 약간 젊은 사람이 하는 프랑스어보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느낌이랄까?”
잠시 말을 고르던 로익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꼬장꼬장한 노교수 같은 느낌!”
“···.”
“노교수, 라고 하는 거 맞나? 지난번에 새로 배운 단어인데.”
“···어, 맞아.”
하, 헛웃음을 짓던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발음과 억양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다름 아닌 교환학생 시절의 내 담당 교수님이었다고.
‘로익의 표현대로, 당시 은퇴할 때가 다 되어가던 노교수님이셨지.’
내 말에 로익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아. 원래 언어는 누구한테 배우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거든.”
그의 한국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에서 지낼 시절 처음 사귀었던 한국인 여자친구라고.
“그래서 내 말투가 좀 여성스럽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90년대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던 외국인들 중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던 경우가 종종 있지 않았던가.
알고 보면 아내나 애인이 그 지방 출신이라서 사투리로 한국어를 배웠어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투리야 한눈에 확 느껴지지만, 말투에서는 화자의 나이나 성별, 더 나아가서는 교육 수준이나 성향까지도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익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근데 찬영이 너 정도면 그래도 잘 어울리는 거야.”
“응?”
“아니, 내가 전에 과외해준 학생 같은 경우는···.”
통대 입시를 준비 중인 스물네 살의 여자 대학생.
그 친구가 얼굴은 되게 예쁘게 생겨 가지고 말투가 완전 할아버지 같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까 어학 연수를 가서 할아버지 선생님한테 배웠다는 거야, 웃기지?”
···할아버지 말투를 구사하는 여대생이라.
“아, 그리고 나 이번에 방송 출연한다?”
“방송 출연?”
“음, 다른 게 아니고.”
머리를 긁적이던 로익은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간 복지재단을 통해 친부모를 수소문해보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KBC1의 입양아 부모 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고.
“사실 결심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어. 아무래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있기도 하고, 이름과 얼굴을 노출하면서 나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결심했다는 로익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형.”
“그래. 아 그리고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왜 그 얘기가 안 나오나 했지.
로익에게 신세를 많이 진 만큼 웬만하면 오케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받았다.
“아, 혹시 예전에 얘기했던 스크립트 녹음 일이야? 형이 진행한다는 프랑스 라디오 뉴스.”
내 목소리가 녹음발이 잘 받을 것 같다며 지나가듯 로익이 얘기하던 것이 기억난 터.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이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뉴스이거든.’
KBC 월드 라디오 뉴스 프랑스어 버전.
국내외의 따끈따끈한 현안들에 관해 프랑스어 기사를 작성한 뒤, 그것을 녹음해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낸단다.
내 말에 로익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 라디오 방송 관련한 부탁이 맞긴 한데. 네게 부탁하려는 건 뉴스가 아니고 다른 쪽이야.”
“다른 쪽이라니?”
“라고, 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거든.”
자신과 어느 아나운서가 공동 진행하는 것으로, 프랑스어권 관련 이슈나 다양한 행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라 한다.
“프랑스 관련 인물이라든가, 이 분야에서 핫한 화제의 인물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게스트로 초대해서 토크도 하고 그러거든.”
“그렇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서 말인데, 찬영이 너 혹시···.”
그다음에 이어진 로익의 말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우리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해 줄 수 있어?”
“게스트 출연?”
···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건데, 라는 생각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