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89)
그렇게 진지한 대화를 마치고 나자, 수용이 형은 민망한지 씩 웃었다.
“야, 가끔 보면 너 되게 형처럼 느껴질 때 있는 거 알지?”
“···외모가 형 같단 소리는 제발 하지 말고요.”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용이 형한테까지 그런 소릴 들을 순 없지.
“여튼 고맙다. 덕분에 맘이 한결 편해졌어.”
그렇게 형의 얼굴이 제법 밝아진 그때, 휴게실에 불쑥 나타난 추가 한마디했다.
“오, 찌끄레기 형 여깄었네.”
“···.”
수용이 형이 벌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수용이 형 왜 저래?”
“추야, 눈치 좀.”
“왜? 뭐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새 학기의 둘째 주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추가 비극의 한 대사를 읊듯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수업 또한 어김없이 돌아오는구나.”
“무슨 소리야, 이제 겨우 두 번째 수업인데.”
그럼.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우는 소리 하면 곤란하지.
“너 내가 지난번에 어떤 만두를 만들었는지 모르냐.”
“뭐··· 그런 만두도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겠지. 다만 그걸 먹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내 말에 추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야, 진짜로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 얼마 전만 해도 번역과에는 죽어도 가면 안 되겠다 싶었거든?”
“그런데?”
추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동시통역과도 가면 안 되겠다 싶단 말이지.”
“···.”
추는 나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본인이 번역은 몰라도 통역에는 꽤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처음 동시통역할 때는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설탕과 후추 다섯 숟가락을 넣고 밥솥에 쪄낸 만두라니.”
지난 수업 때의 악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 그를 보노라니, 회귀하기 전 한때 인터넷을 달구던 동시통역 실수가 떠올랐다.
‘언제였더라, 어느 월드컵 행사 때···.’
그때가 아마 브라질 월드컵이었던 것 같다.
브라질의 공식언어인 포르투갈어는 국내 통번역인력이 몹시 희귀한 만큼,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포르투갈어 동시통역사를 찾아헤맸다.
그리고 전문 통역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어느 한 방송사는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학부생에게 개막식의 동시통역을 맡기는 담 큰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결국.
화면에 2018 월드컵 공인구가 소개되는 동시에, 축구 황제 호나우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축구공 호나우두입니다!’
호나우두를 축구공으로 둔갑시켜버리는, 빵 터지는 재미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근데 그때는 다들 학부생이니 그럴 만하다고 용납하며 재미있어하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지.’
오히려 그 해프닝으로 해당 방송사의 방송이 화제가 되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전문 통번역사의 책임은 그보다는 훨씬 무거우니 말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도 아니고,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추 녀석이 걱정하는 것 또한, 그러한 차원의 문제인 듯했다.
통대에 도무지 안 맞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일 거라고 한탄하는 추성원.
그런 추에게, 나는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저 녀석은 졸업 후에 아예 다른 쪽에서 일했거든.’
통대 졸업 후 어느 회사에 인하우스 통역사로 들어가 2년을 일하다 도무지 못해먹겠다며 때려치우더니.
어느날 홀연히 북아프리카로 날아가 거기서 친해진 사업가와 동업을 시작했다.
‘나중에 그 회사가 꽤 커졌지, 아마.’
그러니 이번에도 추 저 자식은 알아서 승승장구하는 길을 찾아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염려마라.”
“응?”
그의 어깨에 턱, 손을 앉으며 말하자 추가 나를 돌아보았다.
“알 이즈 웰. 다 잘될 거다.”
“와, 진짜 영혼이 1그램도 없네.”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추는 불만을 소리내어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이미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애초 추성원은 그런 놈이다.
누가 구태여 위로해주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답을 찾고 금세 행동하는 유형의 인간.
‘그 무모하다시피한 행동력은 가끔 부러울 정도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의 추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고, 곧이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시역 훈련에 들어가보겠습니다.”
시역(sight translation).
눈앞에 있는 텍스트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다른 언어로 옮기는 훈련을 말한다.
“물론 이 시역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텍스트를 보면서 통역하는 만큼 해당 텍스트의 표현에 얽매이게 되며, 그만큼 출발어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평소에 동시통역을 훈련하기에는 이 시역만한 것이 없으니, 시역 훈련을 매일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본격적인 시역 연습에 들어가보자며 성 교수가 학생들을 지목해가며 시역을 시켜보았다.
“권세미 씨?”
“한유정 씨가 해보죠.”
“다음은 김세아 씨가 해볼까요.”
다들 제법 괜찮게 했지만, 성주원 교수의 표정은 조금 애매했다.
“흐음···. 그렇군요.”
세 명의 시역을 지켜본 그녀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세 사람 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했다고 하기엔 애매하네요.”
냉정하기 그지없는 평가에 강의실은 어느새 조용해진 상황.
“일단 구사하는 표현이나 어휘 선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일 아쉬운 점이 있어요.”
안경 너머 성주원 교수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게 무엇일지 대답해볼 사람?”
“···.”
긴장된 분위기 속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발화량이 너무 적기 때문 아닐까요?”
내 맞은편에 앉은 서이준의 말에, 성 교수는 기다린 대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얘기해보세요.”
“한정된 동일한 시간 내에 발화량이 적다는 것은 곧 통역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의미하고.”
서이준의 청량하고도 지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통역 속도가 느리면, 동시통역의 필수 요소인 커버리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니 말입니다.”
그 말에 방금 전 시역을 했던 세 명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래요, 정확한 설명입니다. 그러니 시역을 할 때 의식적으로라도 말하는 속도를 높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건···.”
성 교수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통역해야 할 정보들 사이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곧바로 파악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
“여러 정보들 사이의 ‘우위’를 결정하는 습관을 기르는 겁니다.”
‘순차’로 진행하기 때문에 연사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도 굉장히 근사하고도 화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순차통역과 달리.
“내가 속도를 완전히 다 못 따라간다? 그럼 부차적인 정보는 버리세요. 특히나 수없이 열거되는 이름들, 이런 것들은 ‘기타 등등(etc.)’으로 표현하고 넘어가도 됩니다.”
동시통역은 한정된 시간 내에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활동이다.
‘일종의 시간제한 스포츠 같은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불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느라 다음에 이어지는 연사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경우도 없다는 것.
게다가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동시통역하는 경우는 한층 더 난이도가 올라가는데.
“예컨대 ‘알코올에 관련된 폭력’을 의미하는 ‘주폭(酒暴)’은 한국어로는 두 음절짜리 단어이지만, 이를 프랑스어로 통역하면 ‘violence liée à l’alcool’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한자어로 된 합성명사가 자주 쓰이는 데서 오는 애로사항이 상당하다는 것.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사의 말 속에 담긴 논리이자 핵심을 따라가는 거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길 바랍니다.”
그래.
분명 10년 전에도 이 내용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논리와 핵심.
···모든 통역의 기본이자 초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이 동시통역에서도 가장 중요한 셈이다.
“자, 이제 다음에 하는 사람들은 속도를 의식적으로 높이면서 시역을 해봅시다. 그러면···.”
이후 몇 명이 더 지목을 받아서 시역에 나섰고.
평가는 앞서 했던 세 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신레아 씨?”
그 말에 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네.”
“3번 텍스트의 맨 마지막 문단, 해보세요.”
성 교수가 가져온 3번 텍스트란 지자체 선거에 당선된 정치인이 시민들을 향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연설이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일전에 저는 성실과 정직으로 임하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약속을 이행하고자···]그중에서도 마지막 문단은, 오로지 공치사로만 이루어져 있어 매끄럽게 통역하기가 쉽지 않는 부분이었으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레아는 곧바로 제 앞에 놓인 텍스트로 시선을 가져가더니.
「Chers nos concitoyens, je vous avais promis sincérité et honnêteté···.」
정말로 거짓말 안 하고, 보자마자 곧바로 통역을 줄줄이 쏟아냈다.
프랑스어 텍스트를 보고 읽는 듯한 속도는 기본이고, 정확도 높은 통역에 고급스러운 어휘 선택까지.
「···Et voila aujourd’hui que je tiens ma promesse.」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그리고 이에 감탄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와, 대박.”
“장난 아니다.”
“역시 AB는 레아를 따라올 사람이···.”
동기들 또한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성주원 교수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훌륭하네요.”
“···.”
좀처럼 후한 평가를 내리는 법이 없는 성 교수의 칭찬에 다들 눈이 커져 있는데.
“레아 씨는 뭐랄까, 기본적으로 동시통역에 맞는 뇌 구조를 타고난 느낌이네요.”
그러나 후한 평가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간혹 보면 그런 친구들이 있거든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하는 이 동시통역을, 남들보다 훨씬 더 쉽게 해내는 사람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이쪽 재능을 타고났다는 거예요.”
레아 신은 쏟아지는 칭찬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원래도 동시통역이란 건 소수의 통역사들, 그중에서도 극소수의 재능 있는 사람들만이 하기에 적합한 일이기도 하지만요.”
성 교수가 덧붙인 말에 강의실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았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
그 어마어마한 벽 앞에서, 저마다의 고민을 지닌 동기들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진 가운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수많은 훈련으로 얼마든 커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중해야 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에요.”
나만큼은, 끝없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성 교수의 뒷말에 집중한 채.
여전히 그 재능의 벽을 뛰어넘고 싶다는 호승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그날 저녁.
문장구역 연습과 디저트 통역 공부를 마친 뒤, 출출한 배를 채우고자 기숙사 식당으로 내려갔다가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레아 씨.”
“···아.”
야식이라도 먹으려 했던 걸까.
레아는 부스럭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라면봉지를 내려놓았다.
“라면 끓이려고요?”
“아, 네. 근데 사실은···.”
갑자기 짬뽕이 당기는 탓에 따로 시켜먹을지, 아니면 그냥 라면을 끓여먹을지 고민이었다는 것.
“···제가 은근히 선택 장애가 있어서.”
반짝이는 갈색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렇게 말하는 레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근데 또 배달시켜 먹긴 좀 부담스럽다 싶어서요.”
그런 걸로 민망해하는 모습이 그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히려 정감이 간다고 해야 하나.
야식 메뉴에 선택 장애가 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 암.
“다들 그렇죠 뭐. 어쨌든 짬뽕이 먹고 싶은 거죠?”
나는 찬장 안을 뒤적거리다 새로 나온 짬뽕라면을 꺼내 보였다.
“이걸로 끓여드릴게요.”
“아.”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기숙사 식당 냉장고에는 언제나 기본 이상의 재료가 구비돼 있는데.
‘여기 있네.’
돼지고기부터 대파와 마늘, 양파까지.
고기부터 볶은 뒤 야채를 볶아 향을 충분히 낸 뒤···.
‘물과 라면스프, 고춧가루, 간장을 넣고 끓이고.’
물이 팔팔 끓으면 그때 면과 건더기스프를 넣고 몇 분간 끓여준다.
“와, 냄새가···.”
식당 안 그윽히 퍼져나가는 짬뽕향에 레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잠시 후, 우리 둘은 각자 한 그릇씩을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맛이 괜찮으면 좋겠네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는 이 짬뽕라면이 맛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붉고도 영롱하게 빛나는 짬뽕 국물 속.
딱 알맞게 익어서 꼬들꼬들한 면을 한 젓가락 크게 감아올린 뒤···.
후루룩, 하며 한 입에 넣자, 알싸한 짬뽕향이 입안을 꽉 채우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음, 아주 좋군.’
이른바 면치기라고 하지 않는가.
그릇에 담긴 양이 제법 되었는데도, 면치기를 한 번 할 때마다 면이 훅훅 줄어들던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그릇에 코를 박은 채 열심히 먹던 레아가 후아, 하며 고개를 들며 외쳤다.
“와, 너무 맛있어요!”
둘만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녀는 조금 민망해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그러니까, 맛있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