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90)
“맛있다니까 좋네요.”
크크, 웃으며 대꾸하자 레아의 얼굴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저런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라는 생각이 문득 든 순간.
“그, 사실은··· 지난번 엠티 다녀오고 나서 되게 부끄럽더라고요.”
“왜요?”
딱히 동기들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이불킥을 잔뜩 했다는 것.
“제가··· 몰랐는데 얼굴이 엄청 빨개져가지고 헛소리를 했잖아요.”
“아.”
“다같이 찍은 동영상을 나중에 은새가 보여줬는데, 진짜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더라고요.”
···귀엽기만 하던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렇게 마시면 안 되겠다, 뒤늦게 다짐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아의 지금 얼굴도 조금 붉어진 터였다.
민망해서인지, 아니면 짬뽕라면이 은근 매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부가 원래 얇아서 그런가, 그 안의 핏줄까지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듯하다.
“마시고 나서 속은 괜찮았어요?”
“다행히 숙취는 없었는데.”
“그럼 뭐 가끔은 풀어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럴까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 맞다, 통역은 어땠어요?”
“아.”
레아는 지난주에 사흘간 통역을 하고 돌아온 터.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사실은 그거, 학과게시판에 공지 올라왔던 건데.”
한국대에서 진행되는 세계경제포럼.
그 포럼에서 발표하는 석학들의 수행통역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어차피 첫 주는 OT라는 생각에 곧바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잘했네요.”
“원래는 그런 거 봐도 잘 지원 안 했는데, 관심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찬영 씨 생각이 문득 나더라고요.”
“···내가요?”
내 말에 레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영 씨라면 미리 걱정하는 법 없이 무조건 달려들고 보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그런 코뿔소 같은 이미지였나요?”
‘코뿔소’라는 말에 레아가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되게 듣기 좋았다.
“덕분에 용기가 났다, 그 말이에요.”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통역하는 건 어땠냐고 묻자, 레아는 어렵지는 않았지만 수행통역 자체가 본인 성격에 안 맞는 것 같단다.
“제가 경영학을 전공했거든요. 원래도 숫자나 계산이 들어가는 건 좋아해서 통역의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았는데···.”
본인이 담당하는 VIP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오히려 더 마음이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와, 그래도 숫자에 강한 건 부럽네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전형적인 문과 스타일인 나는 숫자에 늘 약한 편이었으니까.
“지금도 숫자 통역 연습은 매일 하거든요. 며칠이라도 안 하면 금방 퍼포먼스가 떨어져서.”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전 찬영 씨가 원래 모든 분야에 능숙한 줄로만.”
모든 분야에 능숙하긴.
문학이나 인문은 좀 나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분야는 전부 수박 겉핥기 수준이라고 대꾸했더니, 레아는 이렇게 말했다.
“인문 예술 분야에 강점이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저는 사실 그런 쪽에 굉장히 약해서.”
그렇게 듣고 보니 그녀와 나의 장단점이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인문학 전반에 강하지만 숫자에 약한 천상 문과생인 나.
경영학을 전공해 숫자에 능하고 계산이 빠른 레아.
“우리가 나중에 동시통역 파트너가 되면 꽤 잘 맞겠는데요?”
내가 무심코 꺼낸 말에 레아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한 박자 후에야 미소 띤 얼굴로 내 말을 받았다.
“···그러네요. 서로의 장점이 다른 만큼 보완해줄 수 있는.”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뒤 뒷정리를 하려고 하자 레아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건 제가 정리할 테니까 먼저 올라가요.”
“어, 그래도.”
“요리해주셨잖아요. 그것도 엄청 맛있게.”
나는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
다음 날 오전, 불어과 42기들은 다같이 빈 강의실에 모인 터였다.
이유는 단 하나.
올리비에 교수의 수업에서 진행되는 ‘2인 1조 주제별 발표’의 파트너를 정하기 위함이었으니.
“자, 제비 하나씩 뽑아가세요.”
우리는 손수 만든 제비를 가지고 제비뽑기를 진행했다.
“난 3번.”
“나도!”
“난 7번 나왔는데···?”
“유정 언니 저랑 짝이네요.”
그렇게 하나둘씩 파트너를 찾아가는 가운데, 나 역시 뽑은 제비를 펼쳐보았다.
“9번?”
누가 또 9번을 뽑았나 싶어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내 앞에 와 섰다.
“잘 부탁해, 파트너.”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은 키에 마른 체구, 귀엽고 동글동글한 얼굴 탓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안 외모의 소유자.
송하늬가 생긋 웃으며 9번이 적힌 제비를 들어 보였다.
“···너였어?”
“너였어라니, 반응이 왜 그래?”
“내가 뭘.”
말을 흐리자 송하늬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이래 봬도 내가 보기보다 꽤 꼼꼼하거든.”
“그래, 그래.”
“목소리에 진실성이 요만큼도 없어 보인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우리는 따로 자리를 옮겨 발표 주제를 정하기로 했다.
“자, 마셔.”
휴게실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두자와 캔을 건넸다.
송하늬는 치익, 하며 캔을 따더니 거침없이 밀크티를 들이켰다.
“캬, 역시 두자와가 최고.”
다른 건 몰라도, 두자와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입안에 부드럽게 퍼지는 달콤씁쓸한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녀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 주는 본가에 안 내려가나 봐?”
“어,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안 나네.”
2학기에 적응하는 데 좀 걸릴 것 같다는 내 말에, 하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전체 난이도가 하드에서 크레이지로 올라간 기분이야.”
“이 정도를 가지고 크레이지라고 하면 곤란하지.”
1학년 2학기면 아직은 노멀 수준이다, 라고 하자 울상을 짓는 그녀.
“으흑흑, 이 정도가 노멀인 줄 알았으면 이 게임 아예 손도 안 대는 건데···.”
···저럴 때 보면 진짜 여자 추 같다니까.
나는 고개를 저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발표 주제는 뭘로 할지 고민해봤어?”
“고민할 게 뭐 있어, 너 이번에 파티셰 수행통역 맡았다며.”
“응?”
하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차피 그쪽 분야고 용어고 다 공부해야 하는데, 발표 주제랑 겹치게 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
“어, 그렇긴 한데··· 진짜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냐니 뭐가?”
하늬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너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음.”
그녀는 그런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은 듯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뭐 그래도 해놓으면 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전에 호성 선배한테 듣기로는 요즘 국내 들어오는 베이커리 브랜드가 늘어나면서 요식업 분야 통역 수요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고.”
그 말은 맞다.
이른바 ‘파인 다이닝’이라 불리는 미식 문화에 대한 국내 수요가 차츰 늘어가면서, 해외의 유명 셰프들이 국내에도 분점 등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영향이 통번역 시장에도 피부로 전해져오고 있지.’
씩 웃으며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딴 것보다도, 난 빵이랑 디저트라면 다 좋아해서 말이지.”
“···.”
“이 누님이 또 빵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생각만 해도 신난다며 킥킥거리는 송하늬.
어쩌면 저쪽이 본심이 아니었을까 싶기는 한데.
“내가 좋아하는 걸로 공부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겠어? 두근두근하면서 자료 조사할 수 있을 듯.”
그렇게.
우리 조의 발표 주제는 일사천리로 결정되었고.
‘촨용은 통역 맡은 디저트, 그러니까 파티스리 위주로 하고. 나는 불랑제리 위주로 하자고. 콜?’
파티스리가 주로 간식 혹은 후식용 디저트(제과)라면, 불랑제리는 주식에 가까운 빵들(제빵)을 다루는 분야를 가리킨다.
다음 수요일까지 자료 조사를 마쳐서 보내주면, 자신이 그주 주말까지 PPT를 만들어오겠다는 송하늬.
‘솔직히 말하면 좀 걱정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의욕적인 데다 성실한 모습에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만큼 이 통대에서 꾸준히 열심히 하는 사람도 없긴 하다.
‘노력한 것에 비해 퍼포먼스가 잘 안 나와서 그렇지, 용어 조사 과제나 번역 과제도 늘 꼼꼼히 하는 스타일이니까.’
게다가 발표 주제에 해박하기까지 하니 이 이상 좋을 수 없지 않은가.
꽤 괜찮은 발표 파트너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
주말을 본가에 들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보냈다.
코앞으로 다가온 파티셰 통역 준비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송하늬와 함께하는 발표 과제의 자료도 찾아야 했을 뿐더러.
‘번역 과제 난이도가 확 올라갔네.’
불한번역은 ‘산업경제’, 한불번역은 ‘과학기술’로 분야가 특화된 만큼, 1학기에 비해 텍스트 난이도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 번역 과제를 마무리해서 보낸 뒤, 그다음 주 목요일.
“오늘 여러분과 같이 살펴볼 텍스트는 ‘기술 시방서’인데요.”
수업을 맡은 강소희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시방서는 건설 공사에 대한 표준규정을 설명해놓은 문서를 의미하는데.
우리 불어과는 주로 아프리카 건설 프로젝트에서 이런 유의 기술 문서 번역 건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분이 졸업 후 필드에 나가게 되면 꼭 한 번 이 번역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 만큼,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부하길 바랍니다.”
이번 과제 텍스트는 알제리 토목건설 프로젝트 중 하천정비공사에 관한 표준지침서였는데.
‘유수전환시설이 어떻고, 가물막이가 어떻고, 굴착토가 어떻고···.’
그야말로 온갖 기술용어의 총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업에 들어오기 전, 원래도 불한번역 수업이라면 절절 매는 추는 이렇게 말하며 학을 뗐으니.
‘지인짜 인간적으로 너무 어렵지 않았냐. 난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더라.’
분명 프랑스어로 써 있긴 한데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안 가더라는 것.
“절대 쉬운 과제는 아니었으니, 지난 한 주간 많이 고생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강소희 교수가 학생들에게 복사해온 프린트물을 배부했다.
내 앞에도 그것이 한 부 놓인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건··· 내 텍스트잖아?’
나름 잘해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교수가 보기엔 영 아니었던 걸까.
사실 나는 이전에 이런 건설 프로젝트 분야에서 몇 개월간 번역 일을 담당한 바 있다.
그래서 이번 과제를 꽤 자신 있게 진행했는데···.
긴장되는 마음에 침이 꼴깍 넘어가던 그때, 강소희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방금 나눠준 건 크리틱용 텍스트는 아니에요. 크리틱은 다른 학생 것으로 진행할 거고···.”
그러면···?
“이건 여러분이 꼭 봤으면 싶어서 말이죠. 말하자면 일종의 모범 답안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범 답안’이라는 그녀의 표현에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이거 누구 거야?”
“문체를 봐 가지고는···.”
그렇다는 건···.
아직 명확하게 상황 파악이 안 되던 그때, 강소희 교수가 나를 웃으며 돌아보았다.
“찬영 씨는 혹시 통대 들어오기 전에 기술번역 일을 해본 적이 있나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으나, 의외로 동기들은 그닥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특히나 추는 ‘촨용 팍이 촨용 팍 했네’라며 유난을 떨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음, 오래는 아니고 아르바이트처럼 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이쪽 용어에 상당히 해박하네요. 그리고 이 ‘비계’라는 단어 말인데, 업계 사람들이나 아는 용어잖아요.”
···나도 프로젝트 통번역사로 일하기 전까진 몰랐지만.
‘비계’란 프랑스어로는 échafaud라고 하는 것으로,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가설 발판 혹은 장비 적재를 위한 가시설물을 말한다.
왜 그 공사현장 보면 사다리, 혹은 정글짐처럼 생긴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비계’다.
“나, 학생들 과제에서 이 표현 나온 거 처음 본 거 있죠? 이런 용어는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강 교수가 미소 띤 얼굴로 던진 질문에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1회차 인생에서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