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91)
*
그주 주말.
과제도 많고, 새로 통역 일도 맡게 된 탓에 기숙사에 남아 있던 중 송하늬에게서 문자가 왔다.
[촨용. 메일 보낸 거 확인하시오.]안 그래도 주말까지 발표용 PPT를 만들어서 보내겠다더니, 칼 같이 마감을 지켜서 보냈다.
‘송하늬의 PPT 실력은 어떠려나.’
어차피 이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발표의 퍼포먼스와 내용의 퀄리티이니, 기본만 해도 상관없겠지.
그런 생각으로 큰 기대 없이 첨부파일을 열어본 순간.
말 그대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박.”
화면을 4:6으로 분할해가며 분위기 있으면서도 깔끔하게 연출한 것은 물론.
‘파티스리’와 ‘불랑제리’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진 자료를 아주 감각적으로 배치해놓았다.
‘마인드맵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 기본이고, 매출 관련 자료까지 그래프로 만들어놨네.’
솔직히 이 정도의 퀄리티를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폭풍 간지, 라는 표현이 딱인 PPT라고 해야 할까.
이전에 잠깐 조모임 비슷한 시간을 가졌을 때 송하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회사에서 PPT 장인이라고 불렸거든.’
그냥 하는 말인가 했더니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덧. 하는 김에 PPT 말고 발표용 자료도 같이 정리했으니 적당히 손봐서 쓰든가.]이 PPT와 함께 첨부된 DOC파일 역시 깔끔함과 꼼꼼함의 극치를 자랑했다.
굳이 내 선에서 뭔가를 더 손볼 필요도 없이 그냥 현장에 투입하면 되는 수준의 자료.
‘사회생활 해본 짬이 다르긴 다르네.’
하긴 그 빡세다는 종합상사에서 몇 년을 버텼으니, 실전 감각이 상당하겠지.
어쩐지 멍한 기분으로 PPT를 다시 한 번 조목조목 살펴보는데, 문득 회귀 전 근무했던 어느 회사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음, 박 대리는 뭐랄까. 다른 건 다 두루두루 잘하는 편인데 딱 한 가지.’
···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편인 것 같다.
그것이 내 첫 발표용 PPT를 마주한 직속 상사의 솔직한 의견이었다.
‘아니, 내용은 다 좋은데 말이야. 디자인도 그렇고 뭐랄까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촌스럽지 않아?’
40대 후반의 팀장에게 그런 평가를 들었다는 것이 뭔가 충격적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게 미적 감각이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옷도 못 입는 편이라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소리도 종종 들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이거지.’
···최대한 무난하게 입는 것.
그다지 거창한 목표를 세울 것도 없다. 중요한 건 시간여행자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니까.
‘시간여행자라는 게 무슨 말이냐면.’
2010년대에 저 혼자 2005년대 사람처럼 입고 있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1990년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과거의 내가 그랬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무던하고도 깔끔하게 입으려고 꽤 노력한 덕분에, 어디 가서도 딱히 옷 못 입는다는 소리는 안 듣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감각적이고 눈에 쏙 들어오는 PPT를 만드는 데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던 터.
‘근데 이렇게 근사하게 만들어주다니.’
나는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그녀에게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완전 대박인데? 너 진짜 잘 만든다.]짧게 감상을 보내자, 금방 답문이 날아왔다.
[오오오오오오 진짜로? 나 지금 촨용 팍한테 칭찬받은 거야?]···뭔가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인걸.
[디자인도 보기 좋고, 깔끔하게 요약이 잘 돼 있네. 정리해준 발표 자료도 굉장히 좋고.]그뿐이 아니다.
나도 나름대로 통역 준비를 하면서 조사한 사항들을 정리하긴 했지만, 송하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빵과 디저트에 해박한 듯했으니.
[내가 말했잖아. 한때 별명이 빵순이였다고.]저 PPT를 맨입으로 꿀꺽하기는 뭐한데 싶어 잠시 고민하던 그때.
LK글로벌 담당자가 보냈던 메일 내용이 기억났다.
‘원하시면 디저트류를 좋아하는 친구 한 분 정도 데려오셔도 됩니다.’
그와 동시에, 매운 낙지볶음도 엄청나게 잘 먹던 송하늬의 모습도 떠올랐으니.
내가 하종우 스타일의 먹방에 가깝다면 송하늬는 약간···.
‘10년 뒤 너튜브에서 유행할, 귀여운 여자 BJ들의 먹방 같은 느낌이지.’
그녀라면 해외 빵 브랜드 런칭 파티에도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문자를 보낸 지 몇 초 후.
부우웅- 진동음과 함께 바로 전화가 왔다.
– 촨용! 촨용! 진짜야? 클레르 미샬락 런칭 파티 VIP 초대권이라고?
어찌나 흥분했는지, 핸드폰 너머로 듣는데도 콧김이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빵순이가 진짜 맞긴 하네.
송하늬 말로는 이 표를 구하려고 빵 매니아들 사이에서 한때 난리였다는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인데, 갈 수 있어?”
– 완전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래! 묻고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지! 감사합니다 박찬영 선생님!
눈앞에 있었으면 큰절이라도 했을 그녀의 기세에, 어쩐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러, 그로부터 일주일 뒤.
어느덧 런칭 파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
9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
‘클레르 미샬락’ 대한민국 1호점이 자리하게 된 타워팰리스의 어느 VIP 대기실에서 유창한 영어로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Korean customers are very excited about launching of your brand(···한국 고객들은 클레르 미샬락의 런칭을 굉장히 기대하는 중이에요).」
브랜드 현지화에 관한 설명은 물론, 그날 저녁에 예정된 런칭 파티에 관한 대화가 약 30분간 이어진 후.
「···Everything is ready now(이제 준비는 다 되었어요).」
LK글로벌 담당자 남지연 팀장의 말에, 클레르 미샬락의 개인 비서 브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행사를 담당할 프랑스어 통역사는 언제쯤 도착할까요?」
남지연 팀장은 곧바로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행사 시작 3시간 전까지 와달라 요청했으니 30분 뒤면 이곳으로 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더 궁금한 사항이 있냐는 질문에 클레르 미샬락은 고개를 저었고.
「그럼 잠시만 여기서 대기하세요.」
남지연 팀장은 생긋 웃으며 대기실을 나갔다.
널찍하고 쾌적한 대기실에 단둘이 남자, 브뤼노가 자신의 상사인 클레르 미샬락을 돌아보았다.
30대 초반임에도 여전히 소녀 같은 분위기를 자랑하는, 물결치는 갈색 머리에 유난히 파란 눈이 아름다운‘미모의 파티셰’.
라뒤레에서 수석 파티셰로 근무할 당시, 오랜 전통의 마카롱 브랜드에 혁신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그녀는 승승장구를 거듭했고, 클레르 미샬락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최고의 파티셰’ 명단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지만.
「보스,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요?」
한국에 도착한 것이 바로 이틀 전의 일.
평소에도 편두통을 앓곤 하는 그녀는, 이번에는 유독 더 시차 적응에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되셨다든가···.」
그의 조심스러운 말에 클레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몸은 괜찮아.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비서 브뤼노는 그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방 눈치챘다.
클레르 미샬락.
프랑스의 젊은 천재 파티셰라 불리는 그녀는 약 6개월 전부터 슬럼프를 호소해왔던 터였으니까.
「브뤼노, 있잖아. 이런 걸 번아웃이라고 하는 걸까?」
분명 쉼없이 달려오기는 했다.
파리와 도쿄를 시작으로 전 세계 약 40개 곳에 분점을 냈고, 현역으로 뛰는 동시에 각종 TV 프로에 전문가로 출연했으며.
이제는 무려 한국 매장의 오픈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분명 누가 봐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만한 일인데, 가슴이 왜 이렇게 허한지 모르겠어.」
그러나 그녀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브뤼노를 비롯한 주변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그··· 맛이 안 느껴지는 증상은, 여전하신 거죠?」
브뤼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클레르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번아웃과 함께 나타난 증상이었다.
자신이 만든 신작을 시험 차 한 입 먹어보았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파티셰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증상이지.’
그렇기에 곧바로 병원에 가보았지만, 미각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환자 분 같은 경우는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심리적 압박에 따른 증상.
매번 성공해야 한다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뿌리 깊은 강박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마음에 여유를 갖는 걸 최우선으로 하세요. 아시겠죠?’
그런 처방을 들은 것이 약 3개월 전의 일.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했음에도 ‘마음의 여유’라는 것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6개월 뒤까지 잡혀 있는 빡빡한 스케줄은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길러온 본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을 한순간에 바꾸기가 어려운 법이니까.
「오늘 런칭 파티에선 어차피 인사말만 하시면 되니까 상관없을 거예요. 너무 부담갖지 마시죠.」
비서의 따스한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브뤼노.」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브뤼노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통역사가 온 것 같은데요?」
들어오세요, 라는 그의 말에 문이 열렸고.
그 뒤편에서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들어서며 밝게 웃어 보였다.
「Bonsoir. Je m’appelle Park Chan-young, l’interprète d’aujourd’hui(안녕하십니까, 오늘 통역을 맡은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박찬영이 비서 브뤼노와 반갑게 악수하고 나자, 그녀 또한 악수를 청했다.
「Enchantée, appelez-moi Claire(반가워요, 클레르라고 부르세요).」
「Ravi de vous voir, Claire(클레르,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찬영이 반갑게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한 순간, 클레르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손힘은 제빵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러고 보니 외모도 통역사라기보단 제빵사에 어울리는걸.’
상당한 체력과 근력, 악력을 요하는 제과제빵업의 특징상, 제빵사들 가운데에는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가 많은 편이다.
눈앞에 선 박찬영을 보니 일명 ‘미샬락 사단’이라 불리는 그녀의 제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럼 바로 런칭 파티 장소로 내려갈까요?」
찬영의 말에 괜스레 친숙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타워팰리스 1층에 위치한 은 그 외관부터가 근사했다.
검은색 대리석 벽에 황금색 금속 골조로 이루어진 건물은 벨에포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초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고층빌딩 숲 사이에서 이색적으로 보이면서도 잘 녹아드는 게 신기하네.’
내부는 그 이상으로 고급스러웠다.
넓게 터놓은 창문으로 서울의 밤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대놓고 19세기 말을 표방하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도 인테리어였지만.
「와···.」
오늘의 런칭 파티를 위해 마련된 기다란 테이블.
그 위에 데코레이션된 형형색색의 디저트를 발견한 박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C’est ce que vous avez fait(이게 클레르 당신이 만든 디저트인가요)?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해지는데요.」
그 천진난만한 반응에 클레르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은 간단히 가게 안을 둘러본 뒤, 근처 의자에 앉아 오늘의 행사 내용을 체크했다.
베테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통역사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제과제빵이나 요식업 전문 통역사는 아닌 듯했지만.
‘이번 통역을 위해 차고 넘칠 만큼 준비해온 것 같은데.’
박찬영이 제과제빵 용어를 꽤 자연스럽고도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다든가.
행사 시작하기 전 몇 가지를 확인하고 싶다며 그녀에게 던진 질문만 봐도 그것은 명백했다.
클레르는 마음 한구석 남아 있던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찬. 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한 번 맛보지 않을래요?」
그녀는 이 든든한 아군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디저트 중 가장 자신작을 내놓았다.
이름하여 튈 오 쇼콜라(Tuiles au chocolat) 케이크.
녹인 초콜릿을 크리스피 와퍼처럼 구워내 치즈 케이크 위에 올린 것으로,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바삭 하며 부서지는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특징.
찬영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포크로 한 입 떠 입안에 넣더니···.
「울랄라.」
그야말로 눈이 띠용, 하는 느낌으로 탄성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 솔직한 반응에 클레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정말 맛있네요.」
찬영의 찬사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곧바로 포크를 바로잡더니 매처럼 눈을 빛내며 케이크에 본격적으로 달려들었으니까.
그래도 나름 여자 손바닥만 한 케이크를, 찬영은 절반으로 뚝 잘라서 한 입에 압 하고 집어넣었다.
“음···!”
황홀해하는 얼굴로 그 맛을 음미하며 탄성을 연발하더니 나머지 절반 또한 압, 하며 먹어버렸다.
‘저런 거 분명 너튜브에서 봤던 것 같은데, 그걸 뭐라고 하더라.’
케이크가 단 두 번 만에 입 속으로 사라지는 마법 같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클레르는, 뒤늦게 그 단어를 떠올렸다.
‘Mukbang!(먹방!)’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통역사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하나 더 먹어도 될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