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00
100
동이 터올 무렵, 양측의 군대는 작은 도랑이 가로지르는 벌판에서 조우했다.
이곳 너머엔 500호 규모의 필젠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 필젠은 크뤼거의 가신이 보유한 봉토였고, 이곳마저 제국백에게 넘겨줬다간 나머지 가신들이 투항할 수도 있다.
여기서 제국백의 진군을 막아야만 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안개가 자욱한데.’
짙게 깔린 연기 너머, 말뚝을 세우느라 분주한 병사들의 신형이 흐릿하게 아른거린다.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제국백 측에서 전령을 보내왔다.
“나는 루이스 폰 포이덴베르거 각하의 전언을 전하러 왔소! 그분은 고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봉하신 베벨부르크의 제국백이시자 제국 의회의 일원이시며, 제국 동부 대교구의 후원자 자격을 갖추신 분이오!”
전령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고압적인 투로 크뤼거를 비롯한 가신단을 향해 고했다.
“자비롭게도 각하께선 투항하는 조건으로 서자 크뤼거를 비롯하여 휘하 봉신들의 봉기를 묵인하기로 하셨소.”
서자라는 어휘 사용에 크뤼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병사들의 무장은 해제되어야 할 것이며, 그대 수중에 거느린 사령술사 토드 하워드의 신병을 우리에게 인도하고, 그가 거느린 불경한 피조물들은 마땅히 지상의 순리대로 파괴되어야 할 것이오.”
크뤼거가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투항한다면, 그대들 또한 점거한 마을들을 반환하고 평화롭게 에베르호펜에서 철수할 텐가?”
“그럴 순 없소. 당신은 부정한 방법으로 상속 절차를 왜곡했기에, 에베르호펜은 베벨부르크 제국백 각하와 모이텐슈하임 방백의 협조하에 할양될 것이오.”
“아버지께선 내게 작위와 봉토의 상속을 약속하셨다. 마땅히 집안에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 결정된 정당한 절차였거늘, 어째서 켄젤슐리텐 일가와 관련 없는 부외자가 그 정당함을 논한단 말인가!”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한층 험악해졌음에도, 전령의 목은 여전히 빳빳했다.
“당초에 카셀미어 주교후께선 쾨흘링 분쟁 도중에 급사한 하인리히 폰 켄젤슐리텐 성백의 죽음을 석연찮게 여기셨소. 또한 변경백이 교구의 대주교께 일언반구 없이 후계자를 지정한 것도 정당한 절차라곤 볼 수 없소. 주교후께선 당신이 사령술사와 결탁하여 상속권을 강탈한 게 아니냐는···”
여기서 토드가 끼어들었다.
“저는 상속자 지정 과정에 개입한 바가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하인리히를 치운 건 맞지만, 크뤼거를 상속자로 결정한 건 전적으로 슈테판 변경백의 의지였다.
“제국백을 비롯하여 카셀미어 주교후께선 지나친 억측으로 이 명분도 없는 전쟁을 일으키신 게 아닌지요.”
전령이 표정을 구겼다.
“지금 네깟 불경한 마법사 따위가 주교후님의 권위를 무시하려 드는 건가! 하물며 요사스러운 마술로 이 땅의 순리를 더럽히는 사도가!”
“저는 켄젤슐리텐 변경백 각하께 고용되어 이리공의 공세를 물리쳤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다른 세속 제후의 침공으로부터 그의 재산과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토드를 마주한 말이 연신 투레질을 친다. 요동치는 안장 위에서 고삐를 쥔 전령이 대꾸했다.
“가증스러운 입을 다물라!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마법사여! 제국백 각하께서 이끄는 병사 중에 네놈의 악행을 모르는 놈이 없다! 죽은 자를 되살려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짓은 경전에 서 엄히 금지하는 일! 여기 있는 모두가 네 죄의 증인이다!”
이 악무는 걸 보니 3주 동안 벨 누르고 튄 게 어지간히 거슬렸던 모양이군. 토드를 바라보는 전령의 눈에 독기가 맺혀 있었다. 가만 보니 조금 충혈된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후계자는 나다. 어떠한 이의도 받지 않겠다. 또한 토드 하워드는 엄연히 나와 계약한 야전 마법사이므로, 그의 신병은 넘길 수 없다.”
격분한 전령은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그렇다면 너와 네 보잘 것 없는 졸개들에겐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와 결탁한 사생아여!”
표정을 찡그린 크뤼거가 중얼거렸다.
“이거 원, 전령인지, 도발을 하러 온 놈인지 모르겠군.”
토드는 넌지시 속삭였다.
“놈을 죽입시다.”
“아무리 그래도 전령을 돌려보내지 않는 건 위신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사령술사가 히죽 웃었다.
“아, 돌려보내긴 할 겁니다.”
그가 손짓하자 돌연 전령이 타고 가던 말이 고꾸라졌다. 대기하고 있던 망자들이 그를 끌어냈다.
“살아서 돌아가진 못하겠지만요.”
“아, 안 돼! 아악!!”
돼지 멱을 따듯, 단검이 전령의 목을 그었다.
영 찝찝한 표정을 지은 크뤼거가 말했다.
“전장의 법도라는 건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평판을 고려하여 암묵적으로 준수하는 거라네.”
“이미 저를 고용한 시점에서 더 나빠질 평판이 있겠습니까.”
망자들이 축 늘어진 전령의 시신과 급격히 쪼그라든 군마를 끌고 왔다.
“악명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네. 자네는 불필요한 살생을 남발하지 않는 것 같던데, 왜 그런 건가?”
자세를 숙인 토드는 전령에 대고 향로를 흔들었다.
“안개가 너무 짙습니다. 상대방의 진형을 파악할 필요가 있지요.”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전령의 눈에 녹색 섬광이 맺힌다. 말과 그 주인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전황에 가릴 겨를이 있겠습니까.”
토드는 비스듬하게 선 전령을 가리켰다.
“어차피 저들도 당신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을 겁니다. 형식상으로 전령을 보내긴 했다만, 아마 다른 속셈이 있었겠죠.”
크뤼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 쪽 동태를 살필 작정이었겠지.”
“우리도 고스란히 갚아주면 됩니다.”
비척비척 죽은 말 위에 올라타는 전령을 지켜보며 토드가 미소 지었다.
“겸사겸사 지휘관 숫자도 줄일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전령은 다시 제 주인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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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이 돌아옵니다!”
한창 야외에서 제국백의 참모들이 공격 계획을 두고 논의를 벌이던 와중이었다.
“그나마 희소식이군.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생각했는데.”
“보고를 들은 후에 기병대 배치를 논해도 늦지 않겠소.”
사방에 깔린 안개 탓에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일렁이는 잔영 너머 말에서 내린 전령이 탁자로 다가왔다.
제국백이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저들의 배치가 어떻던가?”
“······.”
그런데 투구를 눌러쓴 전령은 고개를 떨군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곧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가, 각하··· 적들은. 적은. 도랑 너머에.】
다소 어눌하게 말까지 더듬는 모습에 가신이 혀를 찼다.
“가서 술이라도 얻어먹고 왔나? 놈들이 그렇게까지 환대를 베풀 것 같진 않은데.”
【도랑 너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군막으로 가면서 중앙에 배치된 병력은 어떤지, 포대의 위치나 병사들의 상태를 자세히 고하란 말이야.”
【···도랑 너머에.】
전령은 자꾸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 모습에서 일부는 위화감을 느꼈다. 제국백 역시 미간을 좁힌 채 뒷걸음질 쳤다.
참다못한 가신 하나가 전령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봐. 가서 뭘 보고 왔기에 이러는 건가? 시간이 없다. 곧 전투가 임박했는데, 각하 앞에서 이게 무슨···”
손이 흠뻑 젖었다. 자세히 보니 전령의 목에서 핏물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런.”
망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안개에 녹아내리며 산란했다. 그의 눈동자 너머, 육신을 부리는 자가 속삭였다.
【반갑습니다. 베벨부르크 제국백.】
망자의 속삭임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를 응시하던 제국백이 중얼거렸다.
“사령술사로군.”
【제국백께서 전령을 보내시어 이처럼 가슴이 따뜻해지는 덕담을 전해주셨으니, 저 또한 그에게 제 전언을 담아 화답하고자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던 시체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뻣뻣해진 안면 근육이 뒤틀린 채 짓는 표정은 기괴했다.
【시체···】
그가 입을 뗀 순간, 전령의 육신이 팽창한다.
곧장 제국백이 소리쳤다.
“목을 쳐라!”
황급히 가신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폭발.】
몸뚱이를 향해 칼날이 치달았으나,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
콰앙!!
사방에 핏물과 뼛조각이 튀겼다. 대번에 회의하던 탁자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급히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제국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투명한 막이 자신을 비롯한 탁자의 절반을 휘감고 있다.
정작 그 주문을 펼친 장본인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만끽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과 비교하면 위력은 떨어지지만, 수법이 더 교묘하도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방어막이 흐트러졌다.
곧 막이 걷히자 사방에서 비명과 앓는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왜 방어막을 넓게 펼치지 않았나.”
제국백의 물음에 루데신트는 부유하고 있던 창을 집어 들었다.
“마력을 안배해둬야 하지 않겠소. 사령술사가 어떤 주문을 구가할지 모를 일이니.”
주문에 휘말린 자치고 무사한 이들은 없었다. 갑옷을 입고 있었더라도 작게 조각난 뼛조각이 틈새에 파고들거나, 피를 뒤집어쓴 부위가 통째로 부식되었다.
“그래도 당신 쪽에 가까울수록, 중요한 지휘관들 아니겠소? 적어도 이들을 살렸다면 그만 아니오.”
태연한 루데신트의 발언에 제국백은 입을 다물었다.
‘이게 마법사들의 사고방식인가.’
전령을 시체로 되살려 보낸 것이나,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음에도 마력을 아끼기 위해 반절의 주문을 시전한 것이나.
은연중에 제국백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부상자는 신속히 수습하고, 공격을 준비하도록.”
확인해보니 사망자 중에 연대급 지휘관은 없다. 그걸 알곤 잠시 안도했다는 사실에 제국백은 목에 걸린 광륜표를 어루만졌다.
‘저를 용서하소서.’
태양이 떠올랐지만, 안개는 장막처럼 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렇다면 신께서도 이 광경을 보지 못하신 건 아닐까.
피조물로선 알 길이 없다.
부우-!
돌격 나팔과 동시에 견고한 대형을 갖춘 보병대가 치고 나갔다. 곧 기수들이 치켜든 깃발은 연무 너머로 모습을 감췄지만, 북 두드리는 소리를 통해 대강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둥, 두둥, 둥, 두둥··· 두웅···.
차츰 북소리가 희미해지다가, 고요에 잠긴다.
이 넓은 벌판에 내려앉은 적막이라니. 제국백은 침을 삼켰다.
“각하, 안개 때문에 명령 체계가 원활치 않아, 전황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좌익만 내보내고 추이를 살펴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국백은 참모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초에 약속된 계획을 따르게. 괜히 지시에 혼선이 생기면 병사들이 동요할걸세. 게다가 병력을 축차 투입해봤자, 그건 사령술사에게 병력을 던져주는 꼴이지 않은가.”
각개격파를 당하느니, 우익과 중앙에 배치한 사수와 정예병들로 전선을 단숨에 밀어낼 작정이었다.
어차피 크뤼거의 병력은 수나 질에 있어서 명백한 열세에 처해 있다.
사령술사가 이끄는 망자들 역시 그 수가 많지 않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예의 검은 기사와 방백이 목격했다던 거인의 존재였다.
‘사령술사. 검은 기사. 시체로 쌓은 거인.’
그 셋에 적절히 대응하면 전투가 생각 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다.
그때, 안개 너머에서 척후병이 말을 끌고 달려왔다. 그를 목격한 제국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저거. 아군인가?”
“깃발이 아군의 것은 맞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제국백은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
“낙마시켜라.”
그의 명령에 사수들은 지체 없이 기수를 향해 사격했다. 곧 바닥을 뒹군 시신을 확인한 병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은 질린 듯 보였다.
“···시체입니다. 이미 쏘기 전에 죽어있었습니다.”
제국백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뒤이어 또 다른 척후병이 나타났다. 제국백의 눈빛을 읽은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군 진영으로 돌아오는 기수들은 모조리 낙마를···”
총성과 동시에 비명이 울려퍼진다.
“아아악!!”
“······!”
제국백의 표정이 굳었다. 바닥을 뒹군 기수는 짐승처럼 헐떡이다가 침묵했다.
“시,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나직이 제국백은 탄식을 흘렸다.
차츰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확보되고 있긴 하지만, 멀리서 급히 달려오는 자의 몰골을 일일이 살피긴 어렵다.
이미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의 거리면 충분히 주문의 반경 안이었다.
그 뒤로도 줄줄이 도착한 척후병들은 가차 없이 사살되었다. 그중 시체는 둘, 인간은 넷이었다.
상시 평온함을 유지하던 제국백이 이를 갈았다.
“지독한 놈···.”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싸움 방식이다.
머리가 아득해지던 와중, 저 멀리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워어――!!】
발밑의 땅이 울리고, 흉포한 메아리 속 희미한 단말마가 짤막짤막 끊기듯 꼬리를 남기고 흩어진다.
전투는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제국백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의 안색은 누구보다도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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