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9
099
병사들은 쾨흘링 땅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막연히 소문으로만 치부했었다.
이따금 원한이 서린 터나 저주를 받은 땅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건 흔친 않아도 종종 목격되는 일이었으니.
누구도 죽은 자들이 창칼을 들고 체계적으로 산 자를 공격했다는 건 쉬이 믿기 어려웠다.
이젠 제국백의 군영에 있는 모든 이가 안다.
자신들이 사자(死者)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음을.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예의 유령말을 탄 기사를요.”
비단 흔들리는 건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벌써 죽은 자들의 습격이 2주째 이어지고 있소. 그런데 아직도 놈들을 잡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오?”
“키텔 경이 추격에 나섰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일부 추격대만 붙일 것이 아니라, 병력을 대거 투입해서 잡아들여야 할 게 아닌가. 제아무리 검은 기사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순 없을걸!”
“섣불리 그를 쫓아서는 안 됩니다. 벌써 그자에게 당한 기사만 벌써 넷이고, 일부 병사 중에는 간밤에 전사한 자가 기병대의 일원이 되어 나타난 걸 봤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지휘관들의 논쟁에 제국백이 읊조렸다.
“적의 기습이 빈번한 것치곤 상대적으로 피해는 경미하네. 얕은 수작에 지나지 않아.”
“허나 각하.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습니까. 잠도 못 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소.”
가신의 시선이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지금 우리의 방비는 이도 저도 아니오. 확실하게 경계 인력을 확충하고, 아예 마법사도 사전에 배치해서 적의 별동대를 완전히 격멸하는 게 응당한 처사요.”
눈을 감고 있던 루데신트가 나직이 답했다.
“그래서 나더러 또 날밤이나 새우라고? 내 개인 시간을 그리 허비할 수는 없겠소.”
“이봐. 여긴 전쟁터요. 여유롭게 개인 시간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가신이 으르렁거리자 루데신트는 이국적인 잔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이미 상대방은 우리 동태를 파악하고 있소이다. 내가 마력을 끌어올리면 적의 기병대는 오지 않을 거요.”
“그럼 상시 마력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면 되는 거 아뇨?”
마법사가 코웃음을 흘렸다.
“어리석긴. 마력이 어디 샘물에서 퍼 나를 수 있는 물처럼 생각하시는가? 나도 주문을 사용하려면 적절히 마력을 안배하고, 집중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오.”
“당신은 야전 마법사 아니오. 그럼 응당 그에 맞는 의무를 다하는 게 맞지 않소? 왜 그 잘난 탑에서 마법까지 배워놓고 기사를 쫓아가지 못하는 거요?”
“하! 주문으로 팬텀 스티드를 쫓아가라니. 그쪽은 마차를 몰고 비행하는 용을 따라잡을 수 있나?”
“이중에 가장 많은 돈을 타가는 인간은 당신이오. 그만한 실력도 없으면서 무슨 염치로 온갖 편의를 누리려는 건가?”
가신의 빈정거림에 마법사도 맞받아쳤다.
“그렇다고 내 봉급을 네가 지불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가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요술쟁이.’
“둘 다 그만하게.”
제국백의 제지에 잔을 들이킨 루데신트가 입을 열었다.
“망자들은 지치지 않지만, 그들을 통솔하는 사령술사는 지칠 수밖에 없소. 수십 기의 사역마를 통솔하는 건 막대한 정신력을 소모하지.”
“그자가 언제 지칠 거라고 보나?”
“길어도 이번 주 안에 습격은 끝날 거요. 이 이상 무리했다간 그자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마력이 고갈되어 나서지 못하게 될 테니.”
마법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국백이 부관을 향해 물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에 있나?”
“에싱호프가 이틀 거리에 있고, 아벨링엔이라는 곳이 그 옆에 있습니다.”
지도를 살펴보던 제국백이 중얼거렸다.
“아벨링엔은 강의 지류를 끼고 있군.”
“예. 잘리어 강입니다. 폭이 얕고, 물살이 빠르진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싱호프를 우회하여, 아벨링엔을 우선적으로 확보한다.”
그의 손끝이 아벨링엔을 짚었다.
“이곳에 보급선을 구축하고, 장차 에베르호펜을 장악해갈 것이다.”
“각하. 사령술사는요?”
“어차피 변경백령으로의 진출로가 확보되면, 주교후께서 약속하신 성전사단이 도착할 걸세. 그동안 루데신트가 지금처럼 그들을 견제할 테니, 과한 행동을 나서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제국백은 척후대를 이끄는 가신을 향해 물었다.
“여전히 크뤼거의 동향은 파악되지 않았나?”
“예. 그자가 퇴각한 뒤로 병력들의 행방도 오리무중입니다.”
‘최대한 병력 손실을 아끼면서, 사령술사의 수족들로 하여금 우리를 괴롭힐 작정인가.’
승전을 확신하고 이 땅에 들어왔다. 휘하에 거느린 병사만 4천이다. 적들도 정면 회전으론 상대하기 어려운 걸 알고 있으니, 현재로선 싸움을 피하고 같잖은 수작이나 부리고 있는 거다.
“당분간 아벨링엔에 도착할 때까진 지금의 행군 속도를 유지하겠네. 단, 아벨링엔의 거점이 구축된 뒤에는 야간에도 행군을 지속할 수 있도록 부대별로 지휘관들이 각별히 단속해놓게.”
조급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상대가 순순히 전장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면, 끌어낼 작정이었다.
///
“서자 크뤼거는 흑마술사와 결탁하여 부당하게 상속권을 갈취했다!”
“베벨부르크 제국백께선 이런 불의를 용납지 않고, 친히 거병하여 변경백령의 백성들을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오셨나니···”
병사들을 지켜보던 토드가 속삭였다.
“재밌는 짓을 벌이는군요.”
【말을 번지르르하게 늘여놓는데, 속셈이 뭔진 모르겠군.】
“저와 얽힌 크뤼거를 깎아내리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이겠죠. 제국백은 에베르호펜을 자신의 권역에 흡수할 생각으로 분쟁을 일으켰으니까요.”
【하! 우리를 향한 중상모략을 떠벌인다 하더라도, 이 땅의 신실한 민초들은 놈들의 비열한 속셈을 뻔히 알고 있을 걸세.】
“글쎄요. 민심이라는 게, 그리 뿌리가 깊진 않습니다. 갈대처럼 바람 부는 방향대로 기울어지곤 합니다.”
【크흠. 그래도 저들 중에 일말의 충정을 가진 이들이 있지 않겠나.】
마을의 주민들을 불러모은 하사관이 외쳤다.
“이에 따라 마을의 곳간에 비축해둔 곡물과 각 집의 물자에 대해 징발령을 선언하는 바이다! 자비롭게도 제국백 각하께선 수거한 물자에 대하여 정당한 값을 지불하실 것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파멸의 기사가 그를 향해 삿대질했다.
【저것 보게! 결국엔 민중들의 주머니를 털어가겠다는 걸 혓바닥으로 고상하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네.】
“하지만 이스라. 오히려 저런 상대가 더 까다로운 법입니다.”
이스라가 의아해했다.
【어째서인가?】
“저 정도면 상당히 온건한 방식이지요. 강제로 수탈해가는 것도 아니고, 마을을 통째로 불 싸지르지도 않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이리공은 지나치게 상식 밖이었고, 이제 좀 상식의 범주 안에 있는 적을 상대하고 있는 거다.
“상대는 에베르호펜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데, 도리어 크뤼거는 잃고 있죠. 영악한 움직임입니다.”
【으음··· 확실히 듣고 보니 성가시군. 이리공 때였다면 불탄 마을에서 시체라도 건져갔을 텐데.】
이스라는 허리춤의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화끈하게 한 번 붙는 게 어떤가? 혼비백산한 놈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에야 재밌었지, 제대로 결착을 짓지 못하고 매번 줄행랑치는 것도 맥이 빠져서 말이네.】
“아직은 안됩니다. 제국백의 병력은 여전히 많아요.”
그녀는 안광을 이글거리며 중얼거렸다.
【본인이라면 저기 뛰어들어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네만.】
“이스라. 제 마력이 떨어지면 당신의 검기도 꺼집니다.”
【크흠.】
“당신이라면 검기 없이 힘만으로도 갑옷을 으스러트릴 수 있겠지만, 병사 하나를 잡는 데만 한세월이 걸릴 겁니다. 그랬다간 곧바로 적들에게 에워싸여 두들겨 맞을 테고요.”
파멸의 기사는 탄식했다.
【그래선 안 되지. 쯧. 차라리 덩치 큰 한 놈을 잡는 거면 모를까, 잡졸들만 쓸데없이 바글거리니 더 성가시구만.】
이마가 지끈거리길래 토드는 마력 물약을 꺼내 냉큼 비웠다. 문득 마을을 거니는 병사들을 본 이스라가 낄낄거렸다.
【그래도 저놈들의 안색이 볼 만하군! 하나 같이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몰골이네.】
“말도 부쩍 야윈 것 같군요.”
【말은 생각 외로 예민한 동물이라네. 밤마다 시끌벅적하게 소동을 피우니, 그 녀석들도 얼마나 고달프겠나.】
히죽 웃은 파멸의 기사는 영마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그에 비하면 블루레이는 지치지도 않지. 이미 죽은 몸이니 말이네. 그야말로 완벽한 군마의 표상일세! 하, 하! 하.】
영마는 오히려 덩치가 커진 편이었다. 그도 그럴게, 영마는 생명체가 느끼는 절망이나 공포 따위의 감정을 섭식한다.
스트레스에 시달려 야위어가는 제국백의 군마들과 달리, 반대로 영마의 살을 찌우는 꼴이었다.
“지금 휘하에 있는 녀석들은 어떤 것 같습니까?”
토드의 질문에 주변을 돌아본 이스라는 퍽 만족스러운 빛이었다.
【비록 숫자가 줄어들긴 했어도, 그간 벼려내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네! 차라리 비실대는 녀석들은 덜어내고, 온통 튼튼한 놈들일세.】
처음에는 103기에 달했던 해골 기수들은 절반 가까이가 마법사나 적의 반격에 쓰러졌다.
그래도 습격을 거듭하면서 분을 못 참고 깊게 쫓아온 놈들을 죽이다 보니, 자연히 해골 기병대는 충원까지 이뤄졌다.
아쉽게도 죽음의 기사 정도로 삼을 만한 재목은 보이지 않았으나, 파멸의 기사에겐 하급 망자들을 강화해주는 「지휘관」 오라가 있다. 그 정도면 망자로 전락하면서 상실한 기량을 상쇄할 수 있다.
【비록 말 한마디 못하는 과묵한 녀석들이네만, 병사들의 덕목이야 명령을 수행하면 그만 아니겠나! 본인은 이제 눈빛만으로도 이들을 통솔할 수 있다네. 그렇지 않더냐!】
【······.】
해골 기수들은 변함없이 음산한 안광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후후, 그렇다고 하는군.】
토드는 단호히 답했다.
“일단 당분간은 기습을 지속합니다.”
대번에 이스라의 어깨가 처졌다.
【아아, 전투가 하고 싶구나. 수백 명이 동시에 격돌하고, 투사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며, 명예로운 싸움이!】
어림도 없지. 토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주일간 추가로 기습을 지속했다.
피로를 못 이긴 토드가 적당한 곳에 숨어 쪽잠을 청하면, 이스라가 그를 대신하여 망자들을 지휘했다.
오히려 해골 기병대의 숫자는 60기로 늘어났다.
그렇게 장장 3주 동안 악랄하게 시달리니, 비로소 제국백 측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행군 속도가 부쩍 빨라졌네.’
【흠. 이러다가 저들을 놓치겠네. 따라가야 하지 않겠나?】
병사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토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은 보내줍시다. 우리는 우회해서 크뤼거 측과 합류하죠.”
그러자 이스라의 안광이 번뜩였다.
【합류하겠다고? 그 말인즉슨···!】
전투 인력이 아닌 일꾼들까지 동원하여 경계를 세워봤지만, 제국백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파김치처럼 피로에 절여져 있었다.
‘어차피 이 이상 질질 끌기는 어렵겠어. 제국백이 꽤 깊이 들어왔다.’
한 번쯤은 저들의 전진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너무 많은 마을을 잃었다간, 크뤼거의 통치도 흔들린다.
“이제 회전으로 붙어볼 만한 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네.】
///
토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크뤼거가 곧장 그의 군막으로 찾아왔다.
“회전을 벌어야겠습니다. 제국백이 육로 상으로 닷새 거리에 있을 겁니다.”
토드의 몰골을 살핀 크뤼거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아나?”
“제 얼굴이요?”
“관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네. 그 상태로 출전했다간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것이야.”
“평소에도 낯이 창백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 편입니다만···.”
콧등을 타고 따뜻한 느낌의 액체가 흐른다.
물약의 약효가 떨어졌는지, 아찔한 기분도 드는 것 같다.
“무리하지 말게. 제국백에게도 마법사가 있지 않나. 자네의 상태론 그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네. 차라리 병력을 뒤로 물리지.”
“그랬다간 당신의 가신 중에 등 돌리는 이들이 나올 겁니다. 지금도 적지 않게 많은 권역을 제국백에게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크뤼거가 입술을 곱씹었다. 토드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려는 감사하지만, 어차피 전장에서 저 대신에 싸울 녀석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군막 구석에 놓인 관을 가리켰다. 크뤼거는 껄끄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에 누가 들어있는 건가?”
토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제가 오는 길에 매복해있던 놈들입니다. 이 녀석들이 저 대신, 제국백의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수습해둔 흑마법사들의 시체는 굳이 일으키지 않고, 방부 처리만 해둔 상태였다.
‘여기서 이 녀석들을 소모하고, 그 마법사를 잡아야겠어.’
워낙 흑마법사들은 업이 짙어서 그런지, 사자소생을 행하지 않아도 자꾸만 제멋대로 일어나려고 하는 골칫거리들이다.
모처럼 찾아온 청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과거 사령술사들 사이에는 골수까지 빼먹을 놈이라는 말이 모욕으로 통했다.
토드가 바로 그런 놈이었다.